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남편, 최고의 사업 파트너 김준면.
[08]
비가 내린다. 처음엔 토독토독 제 몸을 투신하기 시작하더니 이젠 새차게 땅에 곤두박질 치기 시작한다.
지난 밤 준면이 자신의 분노를 못 이겨 제 몸에 상처를 냈다는 사실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테이블 옆 바닥에 남은 혈흔과 깨진 유리잔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나의 외도를 목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날이 갈 수록 자정에서 멀어지는 나의 귀가 시간들이, 찬열의 체취를 없애기 위해 일부러 한 번 더 뿌리고 들어 왔던 독한 향수 냄새가,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왔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내 앞에서 수도 없이 당당하게 불륜 사실을 밝인 김준면, 내 남편은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나 언더락을 제 손으로 내리 쳐 깼으며, 귀하디 귀하신 그 몸에 상처를 냈단 말인가. 허탈함과 허망함에 실소가 비실비실 흘러 나왔다. 사탕발린 달콤한 말로 내 귀를 간질이고…, 나를 포근히 감싸 안고 사랑스럽다는 듯 입을 맞춰주는 찬열과의 시간 뒤에 나에게 찾아 오는 것은 다름 아닌 공허함이었다.
넓고 삭막한 이 집안에 들어 오면 누군가 숨구멍이라도 막아버린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를 웃게 하는 것 뿐이라곤 커다란 TV와 간간이 말동무를 해주는 가사도우미 뿐이었다. 흉측하게 말라버린 내 몸과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이 싫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싫었던 건…, 찬열과의 달콤하고 행복한 시간 앞에서 자꾸만 준면을 떠올리는 역겹고 구역질나는 내 자신이었다. 괜찮다며, 독한 마음으로 버텨낼 수 있다며, 그렇게 애써 내 자신을 독하고 잔인한 여자로 지난 2년 간 포장 해왔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나의 남편을 보며 느꼈던 감정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물을 안 줘 시들어버린 꽃마냥 의미없는 삶들에 싫증이 났고 진력이 났다. 그래, 난 매일이 죽고싶은 여자였다.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안에서 무릎를 끌어 안고 앉아 우두커니 허공만을 주시했다.
사랑 받고 싶었다. 그 뿐이었다.
손목을 어루 만지다 이내 옆에 놓여 있던 깨진 언더락 잔의 조각으로 세차게 긋기 시작했다. 한줄, 두줄, 세줄 그리고…….
핏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수면위로 툭툭 떨어져 번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울컥울컥 솟아 나왔다. 바들바들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정신은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몇 번을 그은 건지 만신창이가 된 손목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바지춤을 붙잡다 이내 발목을 붙잡았다. 미친 듯이 몸이 떨렸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물은 금세 핏빛으로 변해버렸고 나는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
"사모님, 사모님 흑흑…, 정신 차리세요 제발…! 우리 가엾은 사모님…."
언뜻 정신이 어릿하게나마 잠깐동안 들었을 때는 세상이 어두워졌을쯤 인 것으로 보였다. 누군가가 물에 젖어 축 늘어진 내 몸을 업고 마당 너머 주차된 차를 향해 달려 갔다. 옆에서 같이 달려 오며 울부짖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들의 목소리도 흐릿하게나마 들렸다.
*
나는 정확히 4일 뒤에서야 깨어 났다. 최박사님은 안 그래도 빈혈이니 위염이니 쇄약한 몸에 정말 죽으려고 이딴 미친 짓을 한 거냐며 호통을 쳤지만 나는 정말로 살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왜 나를 살렸냐고, 누가 나를 살린거냐며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지만 손가락도 까딱할 기운이 없는 탓에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사모님…, 제발 좀 드세요! 이러다 정말 죽으면 어쩌려고 이러시는 거에요 정말…!"
음식물이라곤 입에 채 가져다 대지 않았다. 살아갈 의미도, 의지 또한 없었기에. 아주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 씩 눈물을 보이곤 하셨다. 다행히도 시댁식구나 친정에선 내 소식을 모르는 것 같았다. 최박사가 이소리 저소리 떠벌리고 다닐 줄알았는데, 용케 입을 다물었나 보다. 김준면은 일관적인 태도로 내가 입원한 뒤로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날… 누가 꺼내 준 건가요."
"당연한 걸 왜 물으세요 사모님, 사장님께서 그날 넥타이도 채 푸르시기 전에 윗층 욕실 올라갔다 깜짝 놀라셔서 사모님 업고 뛰어 나오신 건데."
비참함에 주먹이 쥐어졌지만 그마저도 몸에 기운이 없는 탓에 꿈틀거리며 풀어졌다. 눈을 감았다. 잠에 들고싶었다.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지독하고 깊은 잠이라면 좋으련만.
*
"바쁜 일정 다 미루고 왔으니까 먹어, 어서."
"지금 뭐하는 짓이야…?"
"내말 못 들었어? 식기 전에 빨리 비워."
"치워."
"OOO."
아무렇지 않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오르고 눈물이 차올랐다. 옆으로 누운 탓에 흐트러진 머리칼이 눈물로 젖어 갔고 흐느낌과 들썩임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옆에 있던 화분을 움켜 잡고 남아있는 힘을 다해 그의 옆 쪽으로 던져 버렸다. 화분은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깨졌고, 작은 파편이 그의 얼굴에 튄 건지 그의 볼에는 어느세 송글송글 피가 맺혀있었다.
"가."
"…."
"당신보고 살려달란 말 안했어. 책임지려고 하지 마. 그냥 가. 그거면 돼."
"나 이번에 상해로 장기출장가. 당분간은 얼굴 못 보니까 죽 먹는 것까지만 보고 갈게."
"제발 가…. 당신이랑 실랑이 할 힘이 없어."
"여보."
'여보' 그 한 마디에 링거액 바늘이니 로크액 바늘이니 꽂힌 손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닥가닥 흐트러져 흘러나온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눈물이 흘렀다. 김준면은 어느새 침대 위로 걸터 앉아 나를 바라봤다. 그는 잠시 눈을 내리 깔더니 볼에서 슬몃 흘러나온 피를 손으로 닦아냈다. 그의 손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 아마도 지난 밤에 자신의 화에 못이겨서 낸 자상일 것이리라.
"안아 줄까?"
"…"
"그럼, 키스 해 줄까?"
나는 같잖은 그의 말들에 실소를 흘렸다. 눈물은 여전히 볼을 타고 턱끝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거 봐."
"…."
"넌 항상 아무것도 하지 못해."
"…."
"어쩜 여자들은 이렇게 질로도록 똑같을까. 싶었는데 너같은 미련한 애들도 있다는 게 참 신기해."
"…"
"꼭 누구랑 많이 닮았어."
김준면은 내 볼을 어루만졌다. 그의 익숙하고도 독한 향수 냄새가 알싸하고 달큰하게 코끝을 싸고 돌았다.
"대체 나한테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당신…!"
"…."
"제발 나 좀 놔줘…. 이혼해줘…."
"…."
"당신은…, 그래, 현주…, 현주씨. 그 사람이랑 같이 살면 되잖아, 응?"
김준면은 소리없이 조용히 눈물만 흘리는 나를 감싸 안았다. 그의 향이 내 폐부 깊숙히로 들어왔다. 여전히 잔인하고 악랄하다. 내가 아무리 그의 앞에서 죽겠다며 몸부림을 치고 발악을 해봐도, 나좀 놔달라고 애원을 해도…, 내가 아는 김준면은 그대로였다.
"네가 아무리 그렇게 애원을 해도…, 난 영원한 네 남편이야. OO아."
"…."
"넌 영원한 내 아내이기도 하고."
김준면은 나를 더욱 꽉 감싸 안았다. 나는 두려움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는 김준면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이혼한다 하더라도…, 그를 절대 잊을 수 없을테니까. 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아 폭행을 하고, 다른 남자와 만난다고 감금을 하고, 구속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조용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정신적 구속과 집착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더욱 미치겠는 것은 그가 나에게 집착을 하고 구속을 할 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의 울음소리만이 차갑고도 넓은 1인용 병실에 가득 찼다.
부족한만큼 채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암호닉은 다시 새로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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