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은 한꺼번에 듣기를 추천드립니다(하트))
지루한 수업시간의 연속. 숨을 쉴 틈도 없이,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는 쌤의 말에 적느라 손이 빠질 지경이다. 옆의 김한빈은 아침에 봤던 그 얼굴 그대로 뽀송미 낭낭하게 잘만 적고 있는 중이다. 쳐다보는 시선이라도 느껴진건지 돌아가는 고개에 황급히 숙여 내 필기를 써내려갔다. 다시 칠판을 보려 고개를 드는데, 김한빈이 옆에서 내 손가락을 가리킨다. 아무래도 어제 붙여준 밴드 얘기를 할 모양이었다.
"괜찮아 이제?"
"뭐, 조금 베인건데."
"다행이네."
다행이라며 자기 또한 칠판을 바라본다.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살짝 살갗이 올라온 부분을 매만졌다. 거칠한 부분을 당장이라도 손톱깎이로 깎아버리고만 싶었다. 길고 긴 수업이 10분을 남겨두고 끝이 났다. 숨 좀 고르라며 선생님은 우리에게 딱 1분, 1분을 주셨다. 곧 명예퇴직을 앞두고 계신 분이라 그런지 가기 전 수업열정을 모두 태우고 가실 심산인 것 같았다. 얼마 안있어 선생님이 다시 입을 떼셨다. 수행평가 공지였다. 고3에겐 웬만해서 선생님들 모두 수행평가를 안내는 쪽인데, 이 쌤만은 꿋꿋이 1학기 때부터 내주고 계신다. 기간도 엄청 짧으면서, 할 일은 더럽게 많이 주신다지.
"자, 수행평가는 조별 평가다."
"에에?"
개인 플레이도 아니고 그룹 플레이라니.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1, 2학년 때 죽어라 하던걸 또 하라고? 학생들의 반발심 섞인 야유에 늙은 노장 선생님은 이럴거라 예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다 꿋꿋이 말을 이어가셨다.
"이미 랜덤으로 조는 짜놨고, 주제는 ..."
주제는, 하고 다시 입을 떼실 때까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1학기 때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어서 일까.
'주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 10명을 소개하는 글을 써와라. 분량은, A4로 10장이다.'
'물론, 앞 뒤로.'
"아, 제발... 그런 것만 아니면 좋겠건만."
끔찍한 기억에 고개 도리질을 치고 다시 쌤의 말에 집중했다. 아이들의 애절한 눈빛을 보던 선생님은 뒤돌아서더니 칠판에 적어내려가셨다.
"이.. 세상에.... 귀..."
[이 세상에 귀신은 있는가?]
그 주제를 보자마자 허, 하고 헛웃음이 났다. 도대체 저 주제로 무슨 답을 얻길 원하시는건지. 아, 물론 그 때 1학기 수행평가도 분량만 채우면 애들 모두 만점을 주시기도 했었다. 그래도, 아니 그래도 저건 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주제를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김한빈이 풉, 하고 웃는다. 웃음이 나오니? ... 아 그래, 나올만도 하지. 저런 터무니 없는 주제를 내주시는데.
"분량은, 1학기보단 줄였다. 아무래도 한참 공부할 때니까. A4 한장이다."
"그건 좋네요, 쌤."
"그럼 앞에 랜덤 조 붙여놓을테니까 알아서 봐라"
교탁 밑의 스카치 테이프를 탁 찢어 쓰신 주제 밑에 붙여버리고는 유유히 떠나는 쌤을 애들 모두 벙찐 채로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칠판 앞으로 달려갔다. 이상한 애들이랑 조되면 골치만 아플테니까. 성 ..이름 ... 아, 여깄다.
"구준... 회."
아, 벌써 망한 삘인데.
"김동혁 ..."
얘는 뭐 그렇다 치고,
"... 김... 한빈."
어쩜 랜덤으로 돌려도 걸리는 애들만 걸리냐, 왜. 뒷머리를 손으로 마구잡이로 흐뜨러놓으며 다시 확인해도, 성이름, 구준회, 김동혁, 김한빈 이 한 조라고 적혀있다. 소리를 질러버리려다 속을 삭히며 한숨만 내뱉었다. 옆에 구준회가 야, 난 누구랑 같은 조냐? 하며 건들건들 걸어오는데 지금 마음 같아서는 정강이를 확...!
"팀에 방해안되게 잘해라."
"... ?"
내 말이 이해가 안간다는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종이를 보곤 기겁하는 구준회다. 아니 뭐 나도 놀라긴 한데, 기겁할 것 까진 없지 않냐?
"와 우리 조 망했네."
"닥쳐. 주축은 너니까."
아직 자기가 누구와 같은 조인지 모를 김한빈에게 말해주려 다가가는데, 복도 창문을 흘끔보더니 한번도 못봤던 차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린다. 누가 왔나? 하고 나 또한 창문을 보니 귀엽게 생긴 아이 한 명이 김한빈을 불러낸듯 보였다. 이 학교에 아는 애가 있었나보네.
"각자 알아서 조사해서, 나한테 보내는걸로 하자. 내일까지."
"내일까지?!"
"야, 주제가 저런데 대충 쓰면 될거 아냐."
"... 그렇긴 하네."
저 밥통진짜. 구준회에 혀를 쯧쯔 차다, 공부하고 있는 동동이에게도 말을 하니, 문제에 열중하느라 대충 고개만 끄덕인다. 아주 서울대 가시겠어요, 서울대.
"근데 왜 너야?"
"그럼 니가 할래?"
물어보자마자 입다물걸 왜 묻는거야, 도대체. 그나저나 김한빈은 안들어오고 뭐하는지 모르겠다. 아까 나갈 때 표정 싹 굳혀서 나가는 것도 걸리고 말야. 아직도 복도에 있나 싶어 살짝 열려있는 뒷문을 열고 나가보려는 순간, 바로 그 앞에 있는 둘을 보고 벽에 바짝 밀착했다.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들.
"이제 돌아가, 반으로. 곧 종 쳐."
"아직 3분이나 남았는데요, 뭘. 오늘도 밤에 올거에요?"
밤? 밤에 어딜 와, 오길. 그 소리에 문 틈 사이로 귀를 더욱 가까이 대었다.
"만약 오늘도 오면, 나 또 있게요. 네?"
"몰라, 상황 봐서."
"그럼 나 오늘도 요 앞에서 기다릴테니까 와야 해요, 알겠죠? 아직 더 남아있단 말이에요, 오빠가 못본."
얼씨구, 오빠?
아 뭐, 딱 봐도 우리보다 어려보이긴 하더라. 근데 느낌 참 이상하네, 나도 맨날 우리 집 김진환이 한테 오빠, 오빠 하면서도 막상 김한빈이 오빠란 소리 듣는걸 보니. 대충 짐작해보면 만나자고 조르는 것을 보아 여자애가 관심이 있는 것 같아보이는데. ... 뭐가 남아있다는건지는 모르겠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고개를 끄덕거리다, 뭔데? 하며 날 따라 옆에 바짝 붙은 구준회에 놀라 흠칫하며 뒤로 넘어질 뻔 했다.
"너는 좀 ...!"
"아니 혼자 여기 바짝 붙어서 고개 끄덕거리고 있는데. 궁금하지 안궁금하냐. 뭔데, 나도 알려줘봐."
"너 얼굴 뭣같다고 욕하고 있었어."
"야 나만한 얼굴 찾기 드물...!"
".. 여기서 뭐해?"
구준회의 입방정은 김한빈이 들어오며 끝이 났다. 그 입을 막아버리려다, 애써 자연스러워보이려 그저 웃어보였다. 여기서 뭐하냐는 김한빈의 물음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다 아까 못한 말을 마저 했다.
"내일까지 내 메일주소로 보내주면 돼."
"너 혼자 할 수 있겠어? 아니면 내가 해줄게, 나 시간 많은데."
"아냐아냐, 나 괜찮..."
"야 차라리 그럴거면 만나서 해라."
괜찮다고 하는 사람 말을 딱 자르던 구준회가 차라리 만나서 하라며 부추기기 시작하고 나섰다. 낄낄빠빠 모르냐 새끼야.
"그래, 차라리 만나는게 좋겠다."
... 뭐? 지금 내가 잘못들은거 아니지?
"그럼 나도 만날래."
"넌 왜."
"아 왜, 둘이는 만나고 나는 왜!"
"너 주말에 학원가잖아"
"안가도 돼."
"쓸데없는데 고집 부리지말고."
"싫어싫어. 나도 갈래."
... 그래, 니 멋대로 해라 새꺄.
"자, 그럼 다들 주말 잘보내고 다음주에 보자"
"차렷, 공수, 배례. 감사합니다."
종례까지 하고서 가방을 드는데, 책상 위에 노란 포스트잇을 딱 붙인 김한빈이 웃으며, 그날 봐. 란 말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써놓은건가, 하고 포스트잇을 떼어 자세히 보니, '내일 저녁 7시, 학교 건너편 카페에서 만나. 내 번호는 010-xxxx-1022 야' 라고 적혀져있었다. 말로 하면 되는 것을 또 이렇게 적었다냐, 얘는. 괜히 귀여워보여 픽, 하고 웃으니 친구들이 내 곁으로 와 그 포스트잇을 쏙 뺏어가버린다. 아 저저 망나니들.
"뭐야뭐야. 너네 둘 사겨?"
"아 뭐라는거야, 빨리 이리 내놔."
"말해주면 줄게. 너 김한빈이랑 사겨 정말?"
이것들이 또 왜이러실까. 아니 걔랑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사겨, 사귀길.
"안사귀니까 내놓지?'
"정말이지?"
"어, 정말이지."
이제서야 포스트잇을 내놓던 친구는 내게 가까이와 눈치를 보더니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를 하려구, 또.
"너 아까 복도에 김한빈이랑 어떤 2학년 애 같이 있는거 봤어 못봤어."
"... 봤는데, 왜."
"김한빈 걔랑 사귀는 사이 아니지?"
"만약 오늘도 오면, 나 또 있게요. 네?"
"몰라, 상황 봐서."
"그럼 나 오늘도 요 앞에서 기다릴테니까 와야 해요, 알겠죠? 아직 더 남아있단 말이에요, 오빠가 못본."
아 또 기억나네. 고 기지배.
"..... 몰라, 여자 애는 관심있어 하던 것 같던데?"
내 말에, 어머머머 하며 다시 주위 눈치를 보던 친구는 이번엔 귓속말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 나 귓속말 간지러워 한단 말야.
"야, 너 김한빈한테 관심 있으면 ..."
"아 진짜 자꾸 뭐라는거야!"
"아 들어봐 기지배야!!"
자꾸 이상한 말 하는 것에 팍 밀쳐버리니, 들어보라며 되려 큰소리치고 있다. 뭔데, 빨리 말해 본론만.
"그 여자애랑 떼어놓아야 돼."
"... 왜?"
"걔가 보통 애가 아니라, 신기 있대."
"... 신기? 막, .. 무당같은거?"
"어어. 그거. 내 동생이 걔랑 같은 반인데, 애들도 그래서 다 피해다닌다고 하더라고."
"얼굴은 예쁘장하던데?"
"야, 예쁘면 뭐하냐? 귀신을 본다는데."
그러니까, 알았지? 명심해 진짜!
내 어깨를 두어번 치던 친구는 가보겠다며 발걸음도 낭낭하게 뒷문으로 걸어갔다. 신기있는 애라, ... 귀신을 본다고? 갑자기 수행평가 주제 생각나네. 걔한테 물어보면 술술 나올텐데. 아 무슨 생각하는거냐, 나 지금.
"... 그런데 왜 김한빈이랑..."
둘만의 뭔가가 있는건가. ... 그 신기있다는 애랑, 김한빈이랑.
그 생각에 아까 김한빈이 붙이고 간 포스트잇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왠지모를 쎄한 기운과 함께.
구준회: 야, 나 못하겠어. 도와줘.
구준회: 내일 만나니까 그 때 내 몫까지 끝내버리자 ㅇㅋ?
구준회: 묻어가려는거 아니다. 나 한 다섯줄은 썼어 그래도.
구준회: 야 성이름, 내 톡 씹는건 아니지?
구준회: 야 성이름
구준회: 야야
구준회: 야
구준회: ㅇ
"그러면서 뭘 너만 하냐고 묻길, 물어 ..."
끊임없이 오는 구준회 톡을 확 차단해버릴까 하다, 그냥 핸드폰을 덮어버렸다. 그나저나 진짜 내일 만나는데 뭘 준비해가야하나 ...
[Q. 귀신은 있나요?]
[☞ 오나귀를 보세요.]
"하아... 뭐야 이게 ..."
초록똑똑이한테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변은 다 그지같기만 한데. 뭘 찾으라는건지. 귀신의 사전적 내용도 찾아보고, 별걸 다 훑어보았지만 남는게 없잖아 남는게. 거의 반쯤 포기해갈 때에, 문득 김한빈이 생각났다. 아직 새벽 1시도 안됐는데, 자진 않겠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아까 적어준 폰번호를 저장시키곤 김한빈에게 카톡을 보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까지 괜히 떨려서는 혼났다.
나: 자?
보내자마자 아, 자는거 아냐? 괜히 보냈나? 별의별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데, 마법처럼 슥 없어져버린 '1'에 또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기 시작했다. 분명 안좋아한다고 말했어. 잘생겼다고 말하지도 않았어. 관심있다고, 마음있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 마음은 이런건지 1도 모를 일이였다.
김한빈: 아니, 아직.
아니, 아직. 마치 음성지원되는 톡에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 자, 한 자 타이핑을 해나갔다. 그리고 다시 누른 전송버튼.
나: 아 그게 혹시 수행평가 다 했나 해서.
김한빈: 이제 막 끝냈어. 너는 다 했어?
김한빈: 어려운건 없고?
나: 아무것도 못하겠어 ㅋㅋ
나: 뭘 조사해야하는건지 .. ㅋㅋ
김한빈: 내가 어느 정도 다 해놨으니까, 그냥 사람들이 믿는 영적인 것들만 찾아봐.
김한빈: 부엌에 물떠다놓고 조왕신한테 비는거나,
김한빈: 여름에 주로 하는 공포영화나. 그런것들.
나: 오오...
김한빈: 어렵지 않지?
나: 이 정도는 뭐...
김한빈: 그래 어려운거 없어. ㅋㅋ
나: .. 그러게 ㅋㅋㅋ
어려운거 없다는 말에 순간 얼굴이 확 빨개지는 느낌이다. 그냥 생각하는것들 찾아보면 될 것을. 누가보면 일부러 모른 척하고 김한빈한테 톡 보낸 줄 알겠네.
"...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아까 전에 감아 물기를 머금고 있던 머리를 수건으로 마구잡이로 흔든다음, 수건을 뒤로 홱 던져버렸다. 부끄러워. 부끄럽다고. 답장도 안오는 톡을 바라보고 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나머지 찾아놔야겠다는 생각으로 노트북을 껐다. 덩달아 핸드폰도 다시 덮어버리고선 그대로 침대로 직행했다. 배게에 머리를 뉘자마자 눈을 감아버렸다. 이럴 땐, 잠을 자야돼 잠을.
"자자, 얼른... 자 버려야 돼."
김한빈: 내일 보자.
김한빈: 잘 자, 성이름
더보기 |
우리 독자님들, 잘자요 (하트)
암호닉! (암호닉은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당)
주네띠네 님♡ 구닝 님♡ 초록프글 님♡ 핫초코 님♡ 뀰지난 님♡ 바람빈 님♡ 비비빅 님♡ 부끄럼 님♡ 0324 님♡ 마그마 님♡ 까까 님♡ 깜냥 님♡ 준회윙크 님♡ 환생 님♡ 김밥빈 님♡ 바나나킥 님♡ 바뱌 님♡ 괴물 님♡ 뿌요를 개로피자 님♡ 감귤 님♡ 하이린 님♡ 시작 님♡ 이원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