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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깨질듯한 머리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가만히 있다가 그 전날 밤의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옆을 쳐다봤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미동도 없이 자고 있는 경수를 마주하자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달아버렸다. 일단 깨끗한 곳에 눕혀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내니 피로 잔뜩 젖어 있는 아래가 보였다.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울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며 다른 방으로 가 이불을 편 뒤 경수를 조심스레 안아 옮겼다. 불편하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아무 수건 하나를 따뜻한 물어 적셔서 경수가 깨지 않게 조심히 피를 닦아냈다. 제대로 씻겨야 하는데.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고 무심코 머리카락을 쓸어주려다 멈칫했다. 그냥 더는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와 대충 옷을 주워 입고 뭘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죽을 젓는 단조로운 행동이 반복되는 동안 내 정신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잡념에 빠져들었다.

 

 

--*-*-*--

 

 

식당에서 준면 형을 처음 봤던 날. 자신의 일이건 주변의 상황이건 아무 관심도 없던 애가 그 형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순간적으로 왠지 기분이 상해서 옆구리를 쿡 찔렀고 바로 나를 돌아보는 경수의 눈에 그 날 아침에도 한 판 했었던 상황이 떠올라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하려했던 건지 까먹었다. 아침부터 하는 게 아니었어. 그리고 그저 잠시의 관심이라 생각하며 그냥 넘겼었다.

다음 월요일. 여느 때처럼 종례를 패스하고 바로 간 pc방에서 게임 한 판을 하던 찰나 변백현이 들어오더니 자연스레 내 옆자리에 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경수도 같이 왔을 텐데 옆에 보이질 않아 물었더니 준면형이랑 학교에 있댄다. 알 수 없는 충동에 휘말린 나는 남아 있던 시간을 변백현에게 싸그리 넘긴 후 학교로 뛰어갔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6층이나 되는 넓은 건물에 순간 숨이 턱 막혔지만 순간적으로 준면형이 3학년이라는 게 생각나 3학년 층으로 직행했다. 도착한 복도에서 도경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 날만큼은 내 좋은 머리가 고마워졌다.

 

"수고했어. 근데 경수야."

"."

 

끝난 건가. 굳이 쳐들어가서 괜한 오해를 살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교실 옆 쪽 벽에 기대어 기다렸다. 그 때 문을 열고 들어갔으면, 뭔가 달라졌을라나.

 

"...찬열이랑 친구 맞니?"

"아마도요."

 

아마도...라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들린 그 목소리가 원망스러웠다. 십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도 도경수의 대답은 아마도였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거에 감사해야하나. 갑자기 시큰해지는 마음 한구석에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던 마음을 접고 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역시 그런 짓을 해오고도 친구로 남아주길 바란 게 무리이려나. 착잡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조회대까지 내려와 계단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나도 인정한다. 솔직히 도경수와 나는 관계를 정의할 수가 없다. 돈이 오가는 섹스라면 한 쪽의 쾌락을 한 쪽은 금전을 원해서 만나는 관계지만 우리는 조금 달랐다. 나는 도경수라는 존재에 대한 소유욕이었고 도경수는 금전적인 보너스 같은 거였다. 아니, 분명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지금 도경수는 그저 내가 깔리라면 깔리는 인형에 불과했다. 실험삼아 돈을 안 준적도 있었지만 반응은 없었다. 돈 따위 정말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답이 없는 관계의 답을 찾으려 머리를 굴라고 있을 때 저 멀리 석양 사이로 걸어가는 한 인영이 보였다. 이성과 상관없는 본능이 그의 이름을 불렀고 이성은 그 소리에 대한 변명이랍시고 집에 초대를 했다. 바로 돌아오는 긍정적인 대답에 영혼이 없어져버린 너를 슬퍼해야 하는 건지 나에게 거리낌 없이 대해주는 것에 감사해야하는지 헷갈렸지만 그래도 일단 기분은 좋았다. 좋았었다. 분명히.

 

 

--*-*-*--

 

 

tv에선 나에게 의미 없는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엄청 재밌는 듯 구르고 박장대소를 하는 모습들이 펼쳐졌지만 내 신경은 온통 재미도 없는 옆의 도경수에게 쏠려 있었다.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지. 준면형과 대화를 이어나가는 도경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입 안에 신경질적으로 고기를 집어넣었다. 내가 아는 도경수는 말 잘 안 하는데. 지금 내 옆의 도경수는 대답도 꼬박꼬박하고 심지어 질문을 던지기까지 한다. 역시 그 날인가. 학교에 남았던 날. 그 날 친해진 거겠지. 중간중간 준면형이 경수에게 사적인 부분의 질문을 던질 때마다 움찔하는 나를 보니 한심스러웠다. 심지어 내가 몰랐던 부분까지 나왔다. 도경수가 노래를 잘한다던가 하는. 알 리가 없지. 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애니까. 준면형도 음악 쌤한테 들은 거라니까. 그렇게 수도 없이 자기합리화를 시키며 들이킨 술은 후회할 정도로 내 이성을 서서히 지워갔다. 그리고 본능만이 차지한 내 머리는 이성이 그렇게도 부정하던 현실을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인정해버렸다. 내가 도경수를 좋아한다. 여태까지 무의식으로 부정하던. 그 사실. 나만의 세계에서 나 혼자 온갖 갈등을 겪던 중 나를 제외한 무리가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정신은 깨어있는데. 몸이 안 따라준다. 다른 사람들이 현관을 나서고 나서야 겨우 몸에 힘을 줘 일어선 나는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 근데 경수야. 넌 애들한테 성 붙이고 이름 불러? 나한텐 안 그러잖아."

"……."

 

왜 답이 없는 건데. 왜 그렇게 보고만 있는 건데. 그 형이 그렇게 좋아? 씨발,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달빛에 가만히 서서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도경수를 보자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 다음 행동은 너무 어린아이 같았다. 억지로 도경수를 잡아끌고 들어온 나는 그대로 침대에 집어 던졌다. 도경수는 무서우리만치 덤덤했다. 표정변화 하나도 없이. 욱하는 마음에 내 호칭을 물었더니 그 녀석이란다. 그 소리에 더욱 열이 뻗친 나는 도경수를 몰아붙혔다. 괴롭히고 싶었다. 저 입에서 제대로 된 내 이름이 나오게 하고 싶었다. 저 감정 없는 눈을 울게 만들어서라도 바꾸고 싶었다. 그런 어린 마음에 전에 없던 강압으로 몰아 붙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해버렸다. 애초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3년 전부터 시작되긴 했지만. 3년 전에, 아버지한테 쫒겨나고 술만 먹지 않았더라면. 가장 알고 지낸지 오래됐다는 이유로 도경수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그 때 도경수가 급했던 돈이 나에게 없었더라면. 도경수가 날 밀어냈더라면. 바뀌었을까.

 

과거부터 차근차근 짚어 내려오던 내 생각은 어느새 방금 전 일까지 다다랐다. 죄책감에 울며불며 빌어도 모자랄 판에 도경수 얼굴보고 설레고 있었으니.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얼추 죽이 다 끓었을 때쯤 조용히 들어선 방 안은 전보다 미묘하게 더 후끈거렸다.

 

"경수야, 일어났어?"

 

분명 고개는 움직인 것 같은데. 걱정스런 마음에 조심스레 마주한 얼굴은 온통 땀범벅이었다. 걱정돼서 주체가 되지 않는 마음을 겨우 다잡고 바싹 마른 입술이 신경 쓰여, 밥부터 먹일지 씻길지 물어본 나는 서둘러 죽을 그릇에 담아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랑 같은 자세네. 큰 눈만 굴려 나를 쳐다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움직일 힘이 없는 것 같았다. 도자기 다루 듯 조심스레 일으켜 최대한 경수가 편한 쪽으로 몸을 받쳐줬다. 그 와중에 열이 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차마 도경수의 흰 피부를 보기가 겁이 나서 이불을 여몄다. 죽을 한 숟갈씩 불어 천천히 먹여주니 주는 대로 입만 뻐끔뻐끔 벌리고 받아먹는 게 아기 새같이 귀엽다. 간간이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나도 모르게 식탁 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죽을 다 먹어갈 때쯤 다행히 어느 정도는 기운을 차린 듯 경수가 몸을 꼼지락 거리는 게 느껴졌다. 다 먹은 상을 치우고 욕실에 따뜻한 물을 틀어놓은 채 돌아오자마자 경수와 눈이 마주쳤다. 경수의 눈이 정확하게 날 바라보고 피하지 않았다.

 

"왜 이 방에 있어?"

"아아니, ……. 침대가 더러워져서……."

 

순간 아침의 땀에 젖어있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 정말 미쳤나 봐. 깜박거리며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눈을 보니 아무래도 계속 쳐다보고 있을 작정인 것 같았다. 흘러내려 어깨가 드러난 상체로 시선이 향하다가 불현듯 씻겨야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혼미해진 정신을 다시 불러 세웠다. 이불채로 씻기는 건 무리겠지. 경수가 자신의 상태를 못 보길 기도하며 이불을 걷어냈지만 못 봤을린 없었다. 아프지 않게 껴안은 몸은 내 맨 상체와 맞닿았고 나를 꼬옥 끌어안아 목께에 울리는 경수의 숨소리는 내 심장을 더욱 뛰게 했다. 도대체 왜 가만히 고분고분 한 건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도, 지금도. 욕조에 경수를 내려놓고 계속 상체가 겹쳐진 채로 손만 뻗어 조심스레 피가 굳어있는 자리를 매만졌다. 아픈건지 나를 더 꼭 끌어안는데 숨소리에 신음 아닌 신음이 섞여 나를 미치게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더 하고 싶지 않아 그냥 머리를 텅 비우려 노력하면서 경수를 씻겼다. 다 씻겨질 때까지 입 한 번 열지 않고 가만히 있던 경수를 큰 수건으로 감싸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기대어 앉히고 뒤에서 머리를 살살 말려주자 앞의 검은 tv화면으로 꿈벅꿈벅 조는 경수가 보였다. 귀엽다. 맨 정신일 때보다 비몽사몽일 때 사과하고 고백하면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오늘, 정말 애처럼 행동하는 내가 밉다.

 

"미안해……. 어제, 어제 준면형이랑 얘기하는 모습 보니까. 질투 났나봐. 처음엔 그냥 소유욕인줄 알았는데."

"……."

"아닌가 봐."

 

차라리 집착이었으면 더 나았을까.

 

"경수야."

"……."

"내가……."

 

바보같이. 말을 끝내지도 못했다. 그런 나를, 결국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려버린 나를 경수는 힘없는 손으로 감싸주었다. 내 무릎을 꼬옥 잡아주는 손길이 뭐라고 울음이 더 비집고 새어나온다. 울고 싶은 건 너 일 텐데, 왜 내가 위로받고 있는 걸까.

 

'...박찬열, 무슨 일인데?'

'쫓겨났어.'

'…….'

 

그때도 가만히 안아줬었나. 나는, 평생 이 작은 몸에게 기대고 살 수 밖에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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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잘보고가여ㅎㅎ 찬열이 준면이랑 경수가 이야기한거에 질투심을 느꼈나봐여....
8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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