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치자, 뚝"
어엉어으엉엉엉엉어어
"차장님~"
그때 차장님을 부르는 박대리님 목소리가 들렸음. 차장님~ 하고 한 번 부르고는 두분께서 이쪽으로 걸어오심
"뭐야, ㅇㅇ씨 울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이고 있는 나를 보시곤 대리님들께서 화들짝 놀라심
"차장님이 울리셨어요?"
"어"
"나빴네, 이리와 착한 우리 막내"
내 쪽으로 팔을 벌리며 부둥부둥 하시는 대리님 말에 차장님은 '손 치우세요 박서준씨' 하며 단칼에 끊으심
"너네 둘이 가. 전 집에 갑니다"
대리님들 모르게 내 어깨를 살짝 치시곤 능청을 떠시며 가심
그런거 아니라고 잔뜩 해명을하고 대리님들을 보낸 뒤, 나도 차장님차에 올라탐
"갈까요?"
아무일 없었다는 듯 내가 발그레 웃으며 먼저 입을 뗌
"어디"
"영화 한 편 볼까?"
"좋죠, 표가 있으려나?"
거의 영화관 문 닫을 시간에 표가 있을리 만무했음. 결국 차장님 집에 있는 스크린으로라도 보기로 함.
영화를 굉장히 보고싶으셨구나, 하고 늦은 시간에 차장님 집에 가서 맥주 한 캔씩 들고 쇼파에 나란히 앉았음. 마치 영화관을 빌린 기분이라 괜히 들떴음
70세 노인과 20대 여대생의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한 영화였는데, 차장님과 나, 둘 다 이 영화를 골랐음
영화보면서 처음으로 손을 맞잡았음. 내가 잡은 것도, 붙든 것도 아니고 정말 두 손을 맞잡았음
늦은 시간이었기에 어두운 거실, 편한 쇼파에서 잠이 솔솔 잘 왔음. 내가 정말 눈치가 없게도 또 잠이 듦
잠깐 선잠을 자고 영화가 끝나기 전에 차장님 무릎에서 담요에 싸매인 채로 눈을 뜸
한 손엔 맥주캔을 들고 한 손은 내 어깨에 둔 채로 집중해서 영화를 보시는데 멋있어서 육성으로 감탄사가 나올 뻔했음
돌아 누워서 나도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음. 중간부분을 놓쳐서 아쉽기도 하고 차장님도 깊이있게 보시는 듯 하니 다음에 한 번 더 보자고 해야겠음
엔딩크레딧이 시작될 때 즈음 꿈틀거리던 내가 등에 있던 리모컨을 눌러서 스크린이 꺼짐
순식간에 어둑어둑 해졌음
둘다 별다른 행동이나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제자리에서 움찔거리고 있었음
정적을 깨고 일어나려는데 차장님이 한 팔로 내 뒷통수를 잡으시곤 그대로 입을 마추심
짧게 입을 맞췄다 떼고,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시며 무겁고 작은 목소리로
"좋아해요, 정말 많이"
어둠 때문인지 순간의 용기인지 이번엔 내가 몸을 일으켜 차장님 입술을 찾았음
첫 연애, 첫 키스가 이 사람이라 얼마나 다행이고 좋은지. 결혼이라도 해야 하나 몰라
*
처음 입사 했을 때부터 연애와 만남보단 일에 치중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지금 서른 다섯에 내 능력, 오로지 내 힘으로 크다면 큰 이 회사에서 차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고. 신입사원 채용 면접이 있어, 평소같이 면접관 자리에 앉아 열심히 이력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의 마지막 순서에 들어온 남자들 사이에 대학생같이 보이는 앳된 여자도 한 명 있었다. 짖꿎은 나의 장난에도 꿋꿋이 씩씩하게 하나하나 다 대답을 했다. 가녀린 체구에 비해 당찼다. 신입들이 인턴과정을 마치고 새로운 부서로 배정이 되는 날에 우리 팀 대리가 지금의 우리팀 막내를 데리고 왔다. 나는 부른적이 없는데 우리팀으로 오게 된 건가, 별 생각 없이 인사를 건넸다. 왠지 모르게 날이 선 표정에 면접 때문인지 나를 별로 달가워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두어달 지내다 보니 차가웠던 말투에 비해 하는 행동은 아이같았다. 어려서 그런가 귀여웠다. 일은 정말로 잘 하는데 어딘가 둔한 것 같기도 하고. 좀 과격한 우리팀 술자리에서도 열심히 따라오려고 하는 모습에 왠지모르게 챙기고 싶었다. 처음엔 그냥 우리 팀원에 대한 애정이었다. 같이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애인 흉내를 내며 이 여직원을 챙기고 있는 내가 간지러웠다.
하루는 큰 실수를 해 내가 많이 혼을 내기도 했다. 평소라면 재수없다고 느낄 정도로 실수와 잘못에 냉정했던 내가, 어이없게도 그 날 쓴소리를 한 번 뱉은 후로 어떻게 하면 이 분위기를 만회할 수 있을까?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밥도 거르고 기운없이 축 쳐져 타자를 치는 모습이 자꾸 눈에 보여 내 일까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팔이 다쳤다고 했을 때는 병원에도 데려가고 기운 내라고 소고기까지 사먹였다. 야유회에서는 아픈팔로 혼자 올라오고 있을 막내생각에 올랐던 길을 다시 되돌아 함께 걷기도 했다. 그 때 찍은 사진은 지금도 보고 간간히 웃는다.
혼기가 차오르자 계속되는 주변 사람들의 재촉에 나간 선자리에서 내 앞 테이블에 앉아 다른 남자와 밥을 먹고 있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이 여자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물 다섯이면 한창 활발히 만남을 가질 때지, 하면서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두 번째 선자리에 나갈 때에는 이유없이 그냥 숨기고 싶었지만 들켜버렸다. 내가 선을 보러 가는 것이 언짢았던 것인지, 내 눈을 피하고 왠지모르게 딱딱해진 말투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선자리에 나온 여자와 헤어지자 마자 전화를 걸었다.
잔뜩 취해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훌쩍데는 목소리만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걱정이 돼서 속도를 밟아 곧바로 포장마차로 갔다. 사방이 술마시러 온 남자들인데. 여자 혼자 안주도 없이 몇병을 마신거야. 테이블에 혼자 엎드려 곤히 자고있는 모습을 보니 아무것도 아닌 내가 괜히 화가 났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술기운에 정신이 없어 아무말이나 뱉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이유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우리 막내를 많이 걱정했구나, 생각했구나, 좋아했구나. 그날부터 우리는 연애를 했다. 타고난 성격탓에 다정하고 따뜻한 말과 행동은 많이 못해줬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한 번은 심한 몸살이 났는데 얼굴만 봐도 낫는 기분이었다. 부모들이 자식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게 이해가 되네. 죽을 사들고 와 내 앞에 앉아서 조잘대는게 또 정말 예뻤다. 매일매일 얼굴만 보고 살아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쉴 틈 없이 일을 해 왔으니 그냥 며칠 정도 쉴 수도 있었지만 나 없다고 또 밥 안먹고 낯선 직원들 사이에서 헤매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해서 기어이 회사에 갔다. 회사에서 연애하고 그런 거 딱 싫지만 회사에 이렇게 예쁜 애인이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놔두나?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가는길에 막내 덩치만한 콜라를 든 곰인형이 보였다. 평소 탄산음료를 무척이나 즐겨 마시던게 생각나 난생 처음 인형을 사들고 집 앞으로 갔다.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와 함께 택시에서 내려 함께 내린 남자에게 환하게, 예쁘게 인사를 하고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저렇게 웃어주면 누구든 넘어오지 않으랴. 회사에서 입던 단정한 옷은 온데간데 없고 짧은 치마를 입고있었다. 복장부터 하나하나 그 상황이 불편했다. 짜증이 났다. 불안해 하는 내 모습에 또 한번 화가 났다. 그 땐 아무 말도 표정도 지을수가 없었다. 인형을 던지듯 건네고 집으로 와 몇시간 쯤 거의 탈진할 정도로 런닝머신 위를 뛰기도 했다.
불편한 감정을 마음에 담아둔 채로 일주일을 보냈다. 예쁜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져 밥도 거르는 것을 보니 미웠다. 내 여자 아직 더 커야하는데. 봐주나 봐라, 마음 단단히 먹었는데 내 옆에 앉아서 빈 속에 술을 마셔대는 모습에 또 걱정이 되네. 사람 걱정시키는 일은 골라서 참 잘한다. 애써 마음을 감추려 일부러 차갑게 말을 뱉었지만 울상이 된 얼굴은 항상 나를 안절부절 못하게 한다. 어차피 질거면서 왜 밥을 거르게 했을까, 왜 힘들게 했을까, 그런거 아닌거 다 아는데. 열살 씩이나 더 먹었은 어른이면서 그 정도 이해 못해주나, 괜히 툴툴거리고 점점 고집이 세지는 것을 보니 나도 아저씨 다 됐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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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하면 더 오랜시간 함께 있을 수 있을까 궁리하다 기껏 생각해낸것이 영화인데, 애석하게 표가 없어 결국엔 우리집으로 왔다. 이미 여러번 본 영화이지만, 관심을 보이니 그냥 모른척 한 번 더 봐야지 뭐. 나는 영화 보는 이 여인을 감상하면 되니까.
항상 차에서도 머리만 닿으면 자더니,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영화 고를 땐 언제고 그새 졸고 있다. 내 무릎에 눕히고 쇼파 한켠에 있던 담요를 찾아 덮어줬다. 감기 걸리면 안돼요, 알겠지?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또 눈 코 입 하나하나 안 예쁜 구석이 없어. 넋을 놓고 감상하고 있었는데 부시시 눈을 떴다. 재빨리 집중하는 척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영화가 끝나고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것을 붙잡고 내가 먼저 입을 맞췄다. 행여 불편한 자세에 목이 아플까 잠깐 있다 입을 떼니 잠시 후에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더듬거리며 내게 다시 입을 맞춘다. 서툴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풋풋했다.
만날 때마다 느끼지만 매일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손 까딱 안하고 잠만자도 일이고 밥이고 빨래고 다 내가 할 수 있는데. 내가 진짜 데리고 살아야 하나? 연애에는 딱히 소질이 없지만, 닭살 돋는 애정표현은 단 한번도 해 준 적이 없지만, 이 마음은 확실하다.
좋아한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