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성이름…….”
“……정호석?”
서늘한 가을날, 그다지 달갑지 않은 재회였다.
*
“호석 오빠, 어디야?”
-당연히 집이지, 왜?
늦은 밤 불쑥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에게 어디냐 물었다. 물론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하고 있던 대답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너는 내게 항상 밖에 있으면서 집이라고 말한다. 다 들킨 걸 알 텐데, 뒤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음을 내가 듣고 있다는 걸 알 텐데. 하지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러냐고, 잘 자라고,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말한다.
오늘 정호석 클럽에서 놀던데, 알고 있었어?
에이, 호석 오빠가 그럴 리가.
다른 여자애랑 손잡고 있던데.
닮은 사람 아니야?
아, 그런가?
어제 호석 오빠 집에 있었다고 했어.
그럼 말고.
너는 내 귀를 막고, 나는 눈을 감았다. 너와 내 사이는 지독하게 얽혀선 계속해서 악순환했다. 이런 이상한 관계에도 너는 아무렇지 않았고, 이에 힘들어지는 건 나였다. 그렇게 이어지던 관계는 결국 파국에 치닫고 말았다. 너에게로 향하던 마음은 재가 되어 바람에 휘날렸고, 내 눈물은 내리는 빗물과 함께 흘러갔다. 하지만 넌 아쉬운 기색 하나 비추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깨닫고 말았다.
이건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고.
*
“여자 혼자서 그렇게 많이 마시면 어떡해요.”
“…….”
“늦은 밤인데 집에 어떻게 들어가려고…….”
“……흐……흐어어…….”
말을 걸어오는 남자에 놀라고, 남자의 다정한 말투에 울었다. 처음 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말 한 마디에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이 한순간에 쏟아져버렸다. 난 저 다정한 한 마디만을 바랐던 건데, 정호석한테 바랐던 건 그것뿐인데…….
“어, 저, 울지 마요! 아, 이거 미치겠네!”
“저기, 제 얘기 좀 들어봐여! 내가 정말 좆같아서! 흐어으어으…….”
“들을게요, 들을게! 그러니까 좀…… 뚝 그쳐요…….”
나는 처음 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그에게 말해버렸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치며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아, 구남친이 나빴네!
그쳐? 그쳐!
아니, 이렇게 예쁜 사람 놔두고 왜 그랬대요?
정호석…… 길 가다 아스팔트에 이마나 갈려라!
물론 그저 취한 사람에게 베푸는 배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꽤나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에 들떠버렸다. 그리고 작게나마 바랐다.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설렘을 느꼈으면 좋겠다. 한순간이라도. 나만 느끼면, 내가 너무 불쌍해 보이니 말이다.
*
그날의 술이 큐피드의 화살이 되기라도 한 것인지, 우리는 몇 번을 만났다. 서로의 이름도 알았고, 사는 곳도 알았고, 썸이라는 것도 탔다. 영화도 보러 가고, 카페에도 가고, 노래방에도 가고.
다 무시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잘 됐다 말했다. 나를 축하하고 정호석을 욕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그놈은 천벌받을 거라고. 나는 어째서 정호석이 천벌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의 벌은 받아도 마땅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친구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일어났어?
“응, 지민이 너는 잘 잤어?”
-나 완전, 진짜…… 오늘 꿈에 네가 나왔다니까?
“진짜?”
-진짜! 그래서 나 지금 일어나자마자 전화했어!
“어이구, 잘 했어.”
그와의 연애는 정호석과는 다르게 하루하루가 신기했다. 어떨 때는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짜릿했고, 어떨 때는 솜사탕을 먹는 것처럼 달고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그는 거짓말을, 나를 불안에 떨게 하지 않았다. 그가 내 전 연애사를 알고 있기에, 내가 거짓에 더욱 신경이 날카로운 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더욱 신경을 썼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더욱 사랑을 쏟았다.
그는 언젠가 내 손을 꼭 붙잡고 장난인 듯 진심인 듯 알 수 없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네 구남친한테 고마워해야겠다.”
“뭘?”
“너랑 헤어져줘서.”
“그러게. 그 오빠랑 안 헤어졌으면 우리 지민이 못 만났겠지~”
그리고 나는 그 손을 마주잡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호석이랑 안 헤어졌다면 난 박지민을 못 만났겠지.
*
“오랜만이네, 오빠.”
“그래, 오랜만이네.”
정호석은 애써 담담한 말투로 내게 대답했다. 내가 모를 줄 알고, 네가 내 SNS 훔쳐보는 거.
“잘 지내?”
“나야 항상 똑같지. 너는 잘 지내?”
“나도 잘 지내.”
내 말에 정호석의 얼굴은 약간 씁쓸한 듯이 물들어갔다. 나는 그 모습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래, 뭐…… 남 주긴 아깝고, 네가 갖긴 싫었던 거겠지.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약속 있었어?”
“응. 가야겠네.”
“붙잡고 있었네, 미안.”
“아냐.”
나는 정호석에게 나중에 보자며 인사하곤 뒤를 돌았다. 그리고 가던 길을 멈춰 정호석에게 막 생각났다는 말투로 말했다.
“내 남자친구가 고맙대. 나랑 헤어져줘서.”
-
이번엔 호석이가 나쁜 스아람이 되어버렸다....☆
헤이즈의 내 남자친구가 고맙대를 듣고 너무 좋아서 휘리릭 썼습니다 ㅠㅠㅠ
암호닉 (∩´∀`)∩♡
[바나나] [망고] [흥탄♥] [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