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어제 밤부터 줄곧 냉전이었던 둘 사이는 도무지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날 줄 몰랐던 택운이 힘겹게 눈을 떴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와 풀린 눈, 온통 쑤시는 어깨에 미간을 찌푸린 택운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재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새 어딜 나간걸까. 홀로 남겨진 제 모습에 헛웃음이 터졌다. 자기가 먼저 짜증나게 했으면서. 툴툴거리면서도 이불을 걷고 일어나 방문을 열어본다. 재환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제가 나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쳐다보질 않는다. 시선이 휴대폰에 고정되어 있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재환은 제가 연애를 하고 있는건지 마는건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재환을 먼저 좋아했던 것은 택운이었다. 절 한참 빤히 바라보길래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널 좋아해, 같은 황망한 대답이 돌아왔던 것이었다. 예? 그 말에 벙찐 재환을 뒤로 하고 한동안 보이질 않았던 택운을 기어코 찾아내 고백한 제 과거가 떠오른다. 그렇게 표정이 다양한 사람인 줄 몰랐다. 그 말을 하고 부끄러워 학교도 나오지 못했었다며 제 품에 안겨 울던 사람이었다. 첫 고백에 뽀뽀하지 하고나서 무작정 동거를 시작한 이후, 신기하게도 택운은 제 표정을 싹 감추어버렸다.
그리고 어제 밤, 재환의 성질이 드디어 폭발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200일이었다. 재환은 제 통장을 깨 커플링을 맞췄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은색 반지가 꽤 예쁠 것이라 생각하고 건넨 재환은 택운의 덤덤한 표정에 넋이 나가는 기분이었다. 고마워, 그 한 마디가 끝이었다. 표현이 서툴다는 그 이유 하나로 200일을 참아온 재환에게 그것은 성의의 문제였다. 하다못해 포옹 한 번 해주지 않았던 택운을 홀로 두고 거실에서 밤을 샌 것이다.
택운은 제 손가락의 반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재환의 손가락을 살폈다. 재환의 손에는 반지가 없었다. 한숨을 푹 쉰 택운이 용기를 내 재환의 옆에 앉았다. 재환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소파의 끝으로 자리를 옮길 뿐이었다. 멀어지는 재환의 옆모습에 입술을 곱씹는다. 아침에 일어날 때만해도 재환을 탓했던 저지만, 그의 모습에 어쩐지 짠해져 갑자기 눈물이 왈칵 터지려는 것이었다.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세면대에 얼굴을 쳐박아버린 택운은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고맙다고, 너를 만나서 내가 사람답게 산다고 말하고 싶었다.
얼마 후, 숨이 가빠진 택운이 수건에 얼굴을 비벼닦고 화장실을 나온 그 즉시 재환은 겉옷을 입고 있었다. 향수도 뿌렸는지 향이 좋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재환의 뒷모습을 본다. 웃을 때와 웃지 않을 때의 갭이 참 크다. 항상 웃던 재환의 미소를 없애버린 것 같아 미안함에 우물쭈물하다, 택운은 크게 한숨을 들이쉬고 뒤에서 와락, 그를 안았다. 재환이 숨을 참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