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러서지 않으면 다쳐도 몰라
야, 너 새터 갔다며.
새터 얘기 꺼내지도 마라. 죽여버릴라니까.
뭐, 그렇게 말한다면야 새터 얘기는 입 다물고 있을게.
그래서 전정국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인데. …야, 내가 꺼내지 말랬지. 가던 길을 멈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뒤 돌아보자 눈썹을 꿈틀거리며 어깨를 으쓱이는 김남준이다. 그리고선 하는 얘기가 ‘새터 얘기 꺼내지 말랬지, 전정국 얘기 꺼내지 말라곤 안 했잖아.’ 저 논리적인 개새끼를 그냥.
발끈하는 거 보니까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슬쩍 나와의 거리를 좁혀 묻는 김남준의 모습에 입에 지퍼를 잠근 듯 묵묵히 좁은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 놈의 학교는 무슨 길을 이렇게 좁게 만들어 놨어. 괜히 앞에 널려져 있는 돌멩이만 뻥뻥 찬다. 야, 그런다고 학교 무너지겠냐. 좀 더 열심히 해 봐. 재수 없게도 품에 두꺼운 책을 껴안고는 힐끔 나를 보며 가볍게 말을 내뱉는 김남준이 얄밉다, 세상에서 제일.
사전에 나눴던 조가 조금 바뀌었으니까 확인들 하고.
네엡.
요즘 SNS나 포털에 얘기 나오는 거 알지, 알아서들 잘하리라 믿는다.
안경을 한 번 추켜올린 교수님이 우리를 지나쳐 나가신다. 덕분에 과실에 옹기종이 모여 있던 학생회 임원들과 재학생들은 한숨을 푹 내쉬며 각각 전해 받은 용지를 확인했다. 항상 입학식 때마다 우리 학교는 신입생들을 모아 놓고 학교 탐방이라며 재학생을 앞세워 쪼르르 학교를 돌아다니는데, 하필이면 그 많은 재학생 중 한 명이 나일까 왜. 다행히도 타과보다 그나마 인원이 적은 우리 과 대신 다른 과 쪽으로 들어갔던 나는 오늘이 지나고 나면 나중엔 볼 일이 하나도 없을 신입생들과 학교를 잠깐 돌아다니면 끝이었지만,그 신입생들이 우리 과 소속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야, OOO 너 우리 과로 바뀐 것 같은데?
말이 달라졌다. 병팔이의 말에 급하게 스테이플러가 찍힌 종이를 뒤로 넘기자, 빽빽이 수놓아져 있는 신입생들의 명단이 보인다. 검지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집어가며 훑는데, 분명히 뒤 쪽에 있어야 할 내 이름이 우리 과 사이에 쏙 끼워져 있다. 아… 옘병 진짜. 이 학교는 왜 나한테 뭐 하나 도와주는 게 없어요? 네?
조 편성 다시 한 번 불러준다. 잘 들어. 1조….
제발, 제발, 제발.
… 4조 담당 OOO. 전정국, 김태형, 김은지, 이은아, 박형수, 김철수.
좆됐다. 병팔이 눈이 잘못됐다고 해 주세요 라는 나의 바람과는 달리 내 이름 바로 뒤로 전정국의 이름이 호명되자, 과 사람들의 시선이 알게 모르게 나에게로 집중된다. 망했다 이거에요. 멀대 같이 키만 큰 김남준이라도 있었으면 뒤에 숨었겠건만, 하필이면 같은 학번 동기 중 나만 떡하니 입학식 도우미에 걸려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왜 하필 전정국이야, 왜. 신입생들도 많은데 그 중에 전정국이 왜 내 담당이냐고. 며칠 전 코 앞에서 봤던 전정국의 따가운 시선이 아롱거렸다.
지금쯤이면 입학식 끝났을 거니까, 강당으로 가서 조원들 확인하고. 자기가 맡은 코스 밟고.
인터넷에 말 안 올라오게 조심하세요. 말을 마친 병팔이는 스태프 옷을 걸쳐 입고 과실을 급하게 나갔다. 요즘 SNS에 허다하게 올라오는 게 대학의 실상이라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신입생들이라, 까딱했다가는 ‘선배들의 똥군기’ 하고는 제 신상이 다 털릴 수도 있으니 학생들도 저 스스로 조심하는 듯 했다.
OOO, 너도 탐방 도우미야?
아, 깜짝이야… 어, 선배? 선배도 이거 하세요?
그렇게 됐다. 하기 싫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데.
전정국이 속한 조를 담당하긴 했지만, 배 째라 하고 빠지기엔 이미 늦은 터라 반포기 상태로 우르르 나가는 학생들의 뒤를 따르는데,누군가가 내 티의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놀란 마음에 쥐고 있던 종이를 떨어트리고 돌아 보자 특유의 시원한 입동굴을 내보이며 웃고 있는 윤기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놀란 내가 선배에게 말을 걸자 정말로 도우미가 하기 싫었는지 스탭 목걸이를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제대한 후 한 번 술자리를 가진 뒤로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해 반가운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종이를 줍고는 과실을 나가는 선배의 뒤에 따라붙었다.
여전히 간은 콩알만 하시네, OOO.
손에 들고 있던 파일로 내 머리를 아프지 않게 내려친 선배는 나의 보폭에 맞춰주려는지 걸음을 늦춘다. 그러게 누가 콩알만한 후배 목덜미를 그렇게 잡아당기래요? 장난스럽게 눈을 세모꼴을 하고는 올려다보자 고개를 살짝 돌려 웃음을 터뜨린 선배는 예전의 버릇대로 내 볼을 살짝 쥐고 흔들었다.
뭐, 요즘 불편한 건 없고?
불편한 게 뭐가 있겠어요. 우리 윤기사마 바빠서 얼굴 못 본 거 빼곤 뭐….
또, 또. 한 번만 더 윤기사마라고 해라.
에이, 왜요. 민윤기 이꼴 배용준. 우리 과에서 유명한 공식이잖아요. 정호석이 윤기사마 못 봐서, 읍! 쉴 틈 없이 입을 나불대는 나를 보다 못한 선배가 집게손가락으로 내 윗입술과 밑입술을 맞잡는다. 사마의 사 자만 입에서 나와 봐. 그 땐 이거 내가 떼서 어따 버리는 수가 있어. 웃는 얼굴과는 다르게 살벌한 말소리에 꼬집힌 입술 가까이에 손을 들어 지퍼 잠그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거두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듯 톡톡 두드린다. … 존나 사마는 개뿔이. 사악해, 민윤기.
야, 민윤기 OOO! 너희 조원들 다 기다리고 있잖아, 지금!
강당에 다다르자 이미 조원들을 통솔해 강당을 빠져나가고 있는 병팔이가 보인다. 시시덕대는 우리를 발견했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다 앞에서 가만히 저를 따라오는 신입생들을 힐끔 바라보고는 손을 들어 입을 조심히 막는다. 병팔이 존나 병신새끼. 윤기 선배는 한심한 듯 병팔이를 쳐다보다 내 팔을 한 번 툭 쳤다. 야, 나 간다. 나중에 호석이랑 남준이랑 밥 먹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정신 차리라며 헝클어진 내 앞머리를 대충 만져주고는 자리를 뜨는 선배를 바라보다 ‘4’가 적힌 팻말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선배! 4조 여기 있는데요!
아….
OO 선배 맞으시죠?
안경을 끼지 않으면 먼 거리의 형체가 자세히 보이지 않아 미간을 찌푸린 채로 손을 휘휘 저은 남학생에게 걸어갔다. ‘4’의 팻말과 가까워지고, 흐릿하던 형체가 점점 뚜렷해질 때 쯤 잠시 잊고 있었던 얼굴이 눈에 가득 담긴다. 모순적이게도 어색한 상황에서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는 다른 여느 학생들과 달리 입이 찢어질 듯 웃고 있는 남학생을 뒤로 하고, 요 며칠간 우리 과 핫이슈의 한 주인공이었던 전정국은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있는대로 찌푸리고는 나와 눈을 맞춘다. (물론 핫이슈의 또 한 주인공은 나다. 옘병.)
저희 어디 가면 돼요, 네? 화장실도 어딘지 알려줘여?!
아무도 모르는 눈싸움을 하고 있는 전정국과 나 사이로 불쑥 들어온 남학생은 뜬금없는 소리를 해댄다. 핑계거리를 잡은 나는 전정국에게서 얼른 시선을 거뒀다. 조금만 더 쳐다보고 있다가는 아주 때리겄소?! 제게 시선이 쏠리자 헤에 하고 실없는 웃음을 터뜨린 남학생이 방방 뛰며 내게 목에 걸린 이름표를 들어 눈 앞에 들이댔다.
저는 김태형이에요, 김태형!
아, 그렇구나….
근데 저희 탐방 안 가요!? 탐방 간다던데?
아, 가야지. 쉴 새 없이 쏘아대는 남학생의 말소리에 정신없이 허우적댄다. 화장실은 어딘지, 학식은 맛있는지, 교수님들은 어떤지….끝이 보이지 않는 물음을 던지는 김태형을 어색한 웃음으로 밀어냈다. 기가 빨리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귀찮은 티를 내며 손을 휘휘 내저었는데도 개의치 않는지 헤헤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OOO, 너랑 나랑 코스 같으니까 뒤 따라 와라.’ 신입생들을 줄줄이 달고 나를 지나쳐가며 윤기 선배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두 줄로 서자.
내 말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아이들이 꾸물적거리며 대열을 맞춘다. 많이 어색한 모양인지, 짝을 찾지 못하고 서성댄다. 그 사이 아까 정신없던 친구, 그러니까 김태형이 순식간에 전정국의 팔을 잡고 끌어당기며 바로 내 앞에 자리한다. 전정국과의 거리가 한 발짝 더 가까워지자 뜨거운 시선이 더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선배,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요!
아, 그래? 잠깐만 인원 점검 좀 하고….
네!
뒤를 한 번 휘 둘러보던 김태형이 대충 대열을 맞춘 신입생들을 보곤 나에게 말했고, 나도 대열이 맞춰지길 기다리며 하고 있던 손장난을 멈추고 명단을 들었다. 그러니까, 인원을 점검하려고 했는데…. 왜 하필은 키는 멀대같이 크고, 덩치도 큰 전정국과 김태형이 맨 앞에 자리했는지 아무리 고개를 기웃거려도 뒤에 줄을 맞춰 서 있는 신입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취방 들어가자마자 우유나 원샷 해야지, 진짜.
씨ㅂ, 야 눈 돌려.
어떻게든 확실하게 인원을 점검하려 까치발을 들고 손에 쥐고 있던 명단을 들어 머릿수를 확인하는 순간 곁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들려왔다. 놀란 마음에 들려있던 고개를 바로하고 앞을 바라보자, 안 그래도 찌푸려져 있던 인상을 아예 구긴 전정국은 입학식 초반에 전 신입생에게 나누어 주었던 학교 신문으로 내 다리쯤을 툭 쳤다. 그러니까, 제 셔츠로 여자친구의 다리를 가려주는 남자친구처럼. 전정국의 말소리를 들은 김태형은 의아한 듯 나를 빤히 바라보다 답답해하는 전정국이 입을 다시 열 때 쯤 아! 하고 바보 도 터지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돌렸다.
치마, 정리하세요 선배.
느, 느에? 뭘 정리…?
아, 진짜….
그거 치마, 올라간 거 정리하라고 좀. 전정국의 눈썹이 꿈틀댄다. 존댓말은 어디다 버리고 반말을 찍찍 내뱉어내는 전정국의 작은 목소리를 들은 김태형이 눈동자를 도르르 굴려 우리 둘을 번갈아본다. ‘눈, 돌리라고.’ 전정국의 말소리에 금방 입고 있던 후드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급하게 고개를 숙여 보니 오늘 아침에 입학식이라며 꾸미고 가라는 동기들의 말에 그나마 고심해서 입었던 테니스 스커트가 반의 반 쯤 접혀 올라가 있었다.
아, 이게 언제 이렇게….
명단을 옆구리에 끼우고 급하게 손을 털어 치마를 내렸다. 그래도 아직까지 얼굴에서 쓴 표정을 지우지 않은 전정국은 탐탁치않은 듯 느릿하게 내 다리를 가리고 있던 손을 거뒀다. 얼굴이 뜨거운 걸 보니 아마도 볼이 빨개져 있을 게 뻔하다. 급하게 전정국에게서 몸을 돌린 나는 서두를 필요 없는 발걸음을 다급히 뗐다. 우리도 가, 가자 얼른.
-성장, 느낌, 18세 -
야, 근데 혹시 너 쟤랑 아는 사이냐?
같은 코스인 김에 같이 움직이자며 결국 조를 합친 윤기 선배와 나는 신입생들을 뒤에 세우고 유유히 두 번째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굳이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불평불만 없이 걸어오는 신입생들에 만족하고 있을 때 쯤 윤기 선배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물어온다. 의아한 마음에 만지던 핸드폰을 후드 주머니에 찔러 넣고 뒤 쪽에 눈길을 두는 선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고 두리번거리는 김태형 옆에 끈질기게도 나를 따라붙는 전정국의 시선이 보였다.
아, 뭐. 그냥.
뭐야, 대답이 시원치 않다, OOO?
선배, 선배. 저 뒤에서 선배 부르는 것 같은데 얼른 가 봐요.
때마침 뒤편에서 윤기 선배를 부르며 손짓을 하는 병팔이가 보였다. 내 재촉에 의심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모한 윤기 선배가 찜짐한 듯 나를 돌아보다가도 다시금 들리는 병팔이의 외침에 결국 자리를 뜬다. 쓸데없는 말 늘어놓을 뻔 했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윤기 선배의 부재로 10명에 가까운 신입생들의 행렬이 멈추고, 거의 20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 세 번째 코스로 움직일게요!
얼른 눈을 돌린 나는 앞만 보고 걸었다. 어색해, 스포트라이트. 낯가려, 나. 뻘쭘한 기분에 바스작거리며 최대한 빠르게 걸어가는데,뒤에서 누군가가 가까이 따라붙는다. '좀.'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누구인지 예상 가능하게 하고, 한 마디, 아니 한 글자만으로도 움츠러들게 만든다.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 넣고 있던 전정국이 한 손을 빼내곤 내 손에 있던 명단을 앗아가 내 뒤 쪽을 가린다.
코트라도 긴 걸 입던가요, OO 선배님.
어? 또 올라갔어?
앞이나 봐.
급하게 손을 뒤로 하자 그런 내 팔을 쥐고 앞으로 넘긴 전정국이 앞을 보라며 턱짓을 한다. 아까보다 표정이 굳어진 전정국의 눈치를 보며 가만히 앞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걷는데,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다. 아니, 무슨 남자친구야? 가만히 있는 나한테 고나리질은? 괜히 심통이 나 내 뒤를 가리고 있는 전정국의 손을 소심하게 밀었다. 전정국의 따가운 시선이 나에게 꽂힌다.
아니, 나 혼자! 알아서 할 수 있거든…?
그리고 너 자꾸 반말한다, 선배한테. 전정국의 고개가 삐딱하니 기울고, 입꼬리가 뒤틀어진다. 하필이면 그 시점에 세 번째 장소인 도서관에 도착했고, 10명의 신입생들은 사서를 따라 학생증을 만들러 우르르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딱 한 명, 전정국 빼고. 덕분에 복도에 남은 건 전정국와 나, 둘 뿐이다.
반말?
느, 네?
아, 반말. 뭐, 깍듯하게 존댓말 해드리길 원하십니까, 선배님?
아무리 둔한 나라도 지금 전정국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은 절정의 비꼬기를 뜻함을 모를 리가 없다. '아니, 뭐. 그정도 까진 아니더라도 적당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존심을 놓칠 수 없었던 나는 마지막 발악을 한다. 모기소리만하게 나온 내 목소리를 들으려 인상을 응그린 전정국이 나에게 느린 몸짓으로 다가온다. 야, 야. 더 오기만 해라. 진짜 그땐 후배고 뭐고 없다?!
좋네, 그거. 나 지금 너 선배라고 부르는 거 좆같거든.
코와 코 사이의 거리는 1cm 남짓 남아있다. 전정국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코를 찡긋거리자 살을 스치는 느낌이 느껴진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아 눈을 질끈 감아버리자 실소하듯 낮은 웃음소리가 내 귀를 건드린다. 저 개새끼 지금 나 보고 웃는 거 맞지.
그러니까 그나마 지금 선배, 선배 해주는 거로 감사히 여기세요, 선배님.
… 야, 전정국!
아직 감이 안 오나본데, 나 지금 그쪽한테 화난 상태라니까요?
또 능글맞은 전정국에 발끈 화가 나려고 하다가도 마지막 말을 남기며 잠시 굳은 전정국의 표정을 보자니 말문이 막힌다. 벙 찐 채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머리를 퍽 다정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은 전정국은 아까 제 동기들이 들어간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전정국의 얼굴에서 옛날 아기 때의 전정국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나의 모습이 겹쳤다.
선배, 선배. 저 학생증 등록 끝났어요! 이제 어디로 가요?
전정국이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김태형이 발랄한 걸음으로 도서관을 뛰쳐나와 내 앞에 선다. 아직도 멍한 상태인 내 앞에 고개를 이 쪽, 저 쪽 들이밀더니 반응이 없자 에이 하며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도 제 옆자리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정국이는요? 아직 등록 덜 했나?
그, 그런가 보지 뭐.
그렇구나…. 음, 선배, 선배. 혹시 퀴즈 좋아하세요? 제가 문제 내는 거 맞춰보실래요?
전정국이랑 저 무슨 사이게요?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까와는 다른 조그마한 목소리로 맞추겠다고 하지도 않은 나에게 묻는다. 왜 하필 퀴즈도 전정국이야…. 안 그래도 전정국 때문에 복잡해 죽겠는데. 티가 나게 억지웃음을 지은 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뭐, 동기사이…?' 몰라, 모르겠고, 앞으로도 모를 예정이니까 그냥 입 닫아. 물론 내 속마음을 김태형이 알아 들었을 리는 없지만 그런 의미를 내포한 채로.
땡, 땡! 전정국이랑 저랑 고등학교 동창사이에요! 신기하죠?
그래서 아까부터 붙어있었던 거였구나. 딱히 김태형의 말처럼 신기하지는 않고 그렇구나 싶다. 애초부터 전정국과 김태형의 사이는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김태형도 나랑 봤을 수도 있겠다. 애니메이션으로 보자면 눈에 별이 박혀 반짝이는 듯한 모습을 한 김태형이 나를 바라본다. 어렸을 적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았다며 자랑하던 나를 본 사촌 오빠의 심정이 이랬을까 생각 됐다.
사실은 전정국은 여기보다 더 좋은 대학교 갈 수 있다 그랬거든요, 쌤이?
어?
그래서 제가 왜 여기 지원하는 거냐고 물어봤었는데.
….
찾을 거라고, 꼭 찾아서 자기 옆에 둘 거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도대체 뭘 찾는다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읍! 김태형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나도 모르게 집중을 하고 있어 숙여졌던 고개를 들자,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려대는 전정국이 김태형의 입을 절실하게 막고 있는 게 보였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라, 김태형’ 전정국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 뭘 봐. 아니, 뭘 보세요.
전정국의 큰 손에 입이 막혀 읍읍 대고 있는 김태형과 전정국을 얼이 빠진 채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나를 전정국의 외침이 깨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조금 진짜 조금 감동 받으려고 했거든? 근데 감동은 옘병. 뭘 봐? 뭘 봐아?! 버르장머리 없는 것을 그냥. 결국 유해졌던 눈빛을 다시 세모꼴로 바꾸고는 몸을 홱 돌렸다. 내가 다시는 전정국한테 감동 같은 거 받나 봐라.
-성장, 느낌, 18세 -
야, 오늘 개총 있는 거 알지.
무슨 하루걸러 술자리야, 술자리는.
낸들 아냐. 정호석한테나 물어 봐.
입학 초 시즌이라 연이어 이어지는 술자리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였다. 다행히도 전정국이 내 아랫 후배가 아니라 자주 마주치는 일은 없었지만, 이렇게 과 사람들과 단체로 마주하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맞대야할 거다. 병팔이의 눈치도 있고, 과 사람들의 눈치도 있고. 아씨, 아픈 척이라도 할까….
아픈 척 할 생각은 말아라. 너 그러고 저번주도 빼먹었다.
나를 힐끗 바라 본 김남준이 넌지시 말한다. 하긴, 감기에 걸렸다며 하루이틀 술자리에서 빠진 것도 아니니. 그럼 감기 말고 좀 신선한 게 뭐가 있으려나. 머리를 골똘히 굴리며 강의실이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어째 복도가 웅성웅성한 게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야, 이거 무슨 일이냐?’ 자다가 금방 일어나 온 건지 머리가 삐쭉 솟아서는 손에 덜렁 책 하나를 든 정호석이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며 말한다. 하지만 방금 건물에 발을 들인 김남준과 내가 상황의 정황을 알 리가 없다.
저기 옆에 정수정 아니야? 야, 정수,
야, 미쳤어 미쳤어. 이리 와 봐. 빨리.
야 잠깐, 나 팔 빠지겠다….
우르르 모여 있는 무리 사이에서 정수정을 발견한 정호석이 큰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정수정을 가리키자, 그런 우릴 발견한 정수정이 빠른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정호석과 나의 팔을 덥석 잡고는 제가 서 있던 곳으로 끌어당긴다. 뒤를 돌아보자 제 주변 일이 아니면 원체 흥미가 없는 김남준은 고래를 저으며 강의실로 유유히 걸어간다. 어찌나 힘을 주는지 빠질 것 같은 팔에 도착하고 나서야 탈탈 손을 털어댔고, 아랑곳 하지 않는 정수정은 저 복도 한 가운데를 가리킨 뿐이었다. 뭔데.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
저거 신입생 아니야? 정전국인가, 정정국인가.
남자와 여자가 마주보고 서 있는 모양새에 정호석이 심드렁하게 바라보다가도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눈구멍과 콧구멍을 확장시킨다.덩달아 궁금해져 까치발을 들고 복도 한 가운데를 바라보는데, 적잖이 놀랐는지 정호석의 큰 소리는 복도에서 울려 메아리친다. 덕분에 전정국와 여자에게 집중돼 있던 시선은 바로 우리 쪽으로 모아진다. 아, 존나 쓸데없이 목소리만 큰 새끼야….
정호석 개새끼야.
… 미안.
일단 빨리 튀어.
시선이 집중되는 걸 좋아라하지 않는 나와 정수정은 금방 몸을 돌렸고,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던 정호석도 이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품에 있던 책을 놓칠세라 꼭 끌어안고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을 향하려고 하는데, 바로 뒤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진다.그 소리에 호기심이 생긴 정호석은 뒤를 돌았고, 일단 이 곳을 벗어나는 것부터가 문제였던 나는 꼼꼼히 막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가는 중인데,
선배, 어디 가세요. 저 기다리신 거 아니에요?
목이 턱 막히고 빠르게 움직이던 발이 멈춘다. 내 과잠바의 목덜미를 잡아챈 누군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니 건장한 몸체가 보인다.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목소리는, 당연히 내가 한동안 시달린 사람의 것이고. 이미 저 멀리 도망간 정수정도 놀라 나와 전정국을 번갈아 보기 바빴고, 옆에 있던 정호석도 벙 찐 채로 나와 전정국을 바라봤다.
제가 좀 늦게 왔죠? 죄송해요.
야, 야 너….
보시다시피 워,낙. 인기가 많아서. 죄송합니다, OO 선배님.
아니, 니가 그걸 나한테 죄송해 할 필요는 없는데요. 제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걸 눈짓으로 가리키는 전정국의 말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다가도 웅성거리는 사람들에 이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챈다. 이 새끼 이거 뭔 수작이야. 불편한 낌새로 아직도 목덜미에 위치한 전정국의 손을 털어냈다. 그러자 허공에 뜬 제 손을 금방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너, 지금 나 엿먹이려고 이러는 거지.
사람들의 웅성이는 소리는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심지어 앞 전 수업이 끝날 시간이 됐는지 사람이 더 몰리기 시작한다. 그와 대비되는 전정국의 여유로운 표정에 열이 받힌 내가 입을 앙 다물고 잇새로 짓눌린 소리를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정국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설마요. 제가 선배를 얼마나 깍듯이 여기는데요.
… 야.
설마 한 학번 선배를 제가 엿먹이려고 하겠습니까?
그리곤 나의 반응을 살필 것도 없이 내 등을 주욱 밀며 걸음을 뗀다. 사람들은 전정국과 내가 지나가자 모세의 길이라도 트는 듯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덕분에 치이지 않고 편하게 걸어갈 수 있었지만,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아까 정수정과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나가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옘병.
전정국,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어?! 왜 자꾸 괴롭히는 건데.
몰려있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와 몇 분을 걷자 한적한 복도가 나왔고, 그 틈을 타 걸음을 멈추고 전정국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까보단 높아진 언성에도 전정국은 놀라지 않았는지 내 등에서 손을 떼고선 씩씩 거리는 나를 물끄러미 본다. 그 때 일 복수라도 하는 거야 뭐야. 복수할 거면 이렇게 찌질한 방법으로 하지 말고 어?! 정정당당하게 해! 한 번 물꼬를 트자 막힘이 없는 말이 술술 입에서 흘러나온다.
뭐, 찌질?
그래, 찌질. 찌질!
찌질이라고 말하는 거 보면 아직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네요, 선배.
뭐? 무슨 소리,
내가 입을 열자마자 전정국이 언제 왔는지 모를 강의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아까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을 때 전 수업이 끝났을 테니까, 아마 수업이 시작하고 시간이 조금 지났을 거다. 쟤 지금 일부러 저런 거지. 강의실 안의 학생들과 교수님의 시선이 나에게 꽂힌다. ‘흠, 흠. 늦었으면 얼른 자리에 와서 앉게.’ 헛기침을 하시고는 다시 칠판으로 눈을 돌리며 말하는 교수님에 저절로 허리가 숙여진다.
뭐하십니까, 찌질하게 OO 선배님.
그런 나를 보며 한 마디 툭 던지고는 자리가 남아있는 맨 뒷자리에 털썩 앉는다. 전정국 개새끼. 어떻게든 전정국과 거리를 두려고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수강신청 때부터 경쟁이 치열하던 강의라 자리가 꽉꽉 차 있었고, 남은 빈자리는 전정국의 옆자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씨,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눈동자를 굴리다 인상을 찡그리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전정국은 실소를 지으며 의자 등받이에 제 몸을 기댄다.
여기 앉고 싶어서 앉는 거 아니거든. 자리가 없어서, 자리가 없어서!
네, 네. 알죠. OO 선배가 설마 찌질한 제 옆에 앉으실 리가.
아오.
아까부터 찌질을 입에 달고 있는 전정국의 미간을 진짜 세 번째 손가락 마디로 콩 찧어주고 싶다. 사람이 저렇게 얄미워서야. 내가 없던 1년 동안 얄미운 거란 얄미운 거는 다 어디서 배워온 것 같다. 더 이상 말을 섞었다간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아 꾸물꾸물 가방에서 필통을 꺼냈다. OT라도 필기할 건 있겠지. 과제에 대해 설명하시는 교수님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필기할 것도 없는 것들을 끼적이고 있는데,
… 그만 봐라.
교수님의 설명을 곧잘 듣다가도 금방 흥미를 잃었는지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글자를 적는다고 고개를 숙이면 작게 움직이는 나의 손을 따라, 교수님 설명을 듣는다고 고개를 들면 끄덕이는 나의 얼굴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보다 못한 나의 말에도 어깨를 으쓱인다.
하….
….
내가 찌질하다고 한 거 미안하니까 그만 보라고 좀.
한숨을 쉬듯 내뱉은 나의 말에 전정국이 처음 보는 웃음 아닌 웃음을 짓는다. 뭐, 웃는 거 보니까 아직 아기는 맞네. 휘어지는 눈에서 옛날의 전정국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미안해요?’ 그러다가도 또 거만하게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전정국의 모습에 잠시 아른거리던 눈을 거둔다.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볼 수 있는 틈을 안 줘요, 틈을.
미안하면, 나랑 약속 하나 해요. 아니, 계약이라고 해야 되나 이걸.
약속? 나의 되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갑자기 계약은 무슨 계약이야….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세울 게 뻔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교수님께 시선을 고정했다. 안 하고 말지. 다시 볼펜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고, 의미 없이 앞에 띄워진 PPT구석에 캐릭터를 따라 그리는데, 그런 나의 손 위를 커다란 손이 덮는다.
후회할텐데.
안 해, 후회. 그러니까 이것 좀 놓지?
안 하면 강제로 내가 해버릴 거거든요. 소원, 기억 안 나요?
뭐, 뭘 해 하긴. 미쳤어, 전정국!? 의미심장한 말에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간다. 다행히도 앞자리까진 소리가 전해지지 않았는지 주변에 있던 사람이 뒤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의 사과를 본 사람들은 그제서야 다시 앞으로 제 고개를 돌린다. 식겁했네.
이상한 생각 하는 겁니까, OO 선배님?
전정국이 다른 의미로 눈썹을 꿈틀거리며 묻는다. 아, 쟤가 저렇게 능글 맞은 애였나…. 새삼 이질감이 느껴져 몸이 부르르 떨린다.그런 나를 본 전정국이 제 손으로 덮인 내 손을 힘을 주어 꼭 그러쥐었다. 덕분에 볼펜을 쥐고 있던 내 손은 힘이 빠졌고, 볼펜이 도르르 책상 밑으로 굴러갔다.
지금 머릿 속에 있는 거 보다 더 심한 거,
뭐?
강제로 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지금 약속하라고요.
볼펜을 주으려 몸을 숙인 나를 저지한 전정국이 허리를 숙여 나와 제 자리 사이에 떨어진 볼펜을 줍는가 싶더니 허리를 숙인채로 나와 눈높이를 맞춰 앞으로 쑥 다가오더니 작게 속삭이는 듯 말한다. 코 앞에 전정국의 얼굴을 두 번째로 맞이한 나는 아직도 바로 앞에서 보이는 전정국의 얼굴이 익숙치 않아 의자를 당겨 뒤로 물러났다.
어때요. 약속이든 계약이든, 하는 게 나을 것 같지 않아요? 지금 엄청 불안해 보이거든요, 너.
전정국의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성장, 느낌, 18세 (+ 투표도 있으니 참여 부탁드립니다!) |
1. 아무래도 유교과를 연재할 때는 방학이었고, 누구보다도 시간이 많았으니까 빠르면 2~3일을 주기로 연재할 수 있었는데 방학이 아니고, 또 시험기간이다 보니까 빠른 연재가 쉽지 않네요. 8ㅅ8 아무래도 성느십은 조금 느리게, 느리게 연재 될 예정입니다. 그래도 느리게, 느리게, 오오래 연재할 거니까 걱정 마세요 헿. 절대 연중은 없읍니다. (단호) 2. 아무래도 제목이 어렵다보니 헷갈려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독방을 보니까 제목을 모르는 분부터, 다른 글과 헷갈려하시는 분들까지…. 그래서 투표를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세 후보를 넣었으니 투표 해주세요! 그럼 그걸로 주구장창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헿. 3. 오늘도 참 재미가 없네요. 다음부터는 더 더 열심히 글을 써 오도록 하겠습니다. (ㅠㅠ) 재미없는 글인데도 항상 꼬박꼬박 봐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진짜 감사합니다 ♡ (+ 암호닉은 2화까지 받도록 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