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즐거운 수학여행날! 초등학생도 아니고 수학여행에 이리 기뻐하는 이유는
수업을 안 들어서도 아니고, 여행이라는 말에 들떠서도 아니다.
단지, 이제 정말 넌덜머리가 나는 그 선도부실을 요며칠은 들락거릴 수가 없다는 사실이
날 너무도 들뜨게 만드는 것이다.
오랜만에 나의 업된 모습을 본 친구는 입을 내밀며 감탄사를 뱉는다.
"오~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보네?"
"당연하지, 헤헤..."
헤실헤실 거리며 오늘은 간절하게 조회가 빨리 이루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선도부는 오늘 할 일이 없으니 각자 자기교실로 가있는 모양이다.
물론 녀석 또한 반에 있기에 알 수 있다.
볼때마다 꼴보기 싫어서 얼굴을 구겼지만 오늘만큼은 미소를 지어주기로 했다.
내가 조금은 인위적인 얼굴로 웃어보이니, 녀석이 미간을 찡그리다가 곧 밝은 얼굴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난 다시 평소때와 같은 경직된 얼굴로 가까워져오는 녀석을 바라본다.
"이제 고3이면 수학여행도 못 갈텐데, 마지막이니까 제대로 즐겨야지."
"......"
겉으론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어쩐지 뼈가 있는 말이다.
그 말이 거슬려서 띠꺼운 얼굴을 하며 외면하려다, 앞에 있는 친구가 신경쓰여 어색하게 웃는다.
"...아하하.... 그래야지..."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걸쳐진 손을 확 깨물고 싶다.
선생님의 간단한 조회를 마치고 운동장으로 인솔되었다.
버스에 차례차례 올라타서, 옆에 친구가 앉는 것을 설렘을 잔뜩 먹은 얼굴로 보고 있는데 엉덩이가 붙다만다.
내 친구의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게 만든 것은 바로 녀석이다.
"미안한데 오늘은 다른 자리로 가면 안될까?"
"...어?..."
친구가 나의 눈치를 보며 앉아있는 내게로 시선을 내린다.
나는 친구의 팔을 붙잡고 낑낑 대는 강아지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눈이 번뜩하는 녀석의 표정 때문에 한숨을 쉬며 친구의 팔을 놓아준다.
"그럼... 이따봐...?"
"...응......."
절망적인 몸짓으로 고갤 떨군다.
내 옆으로 와서 앉는 녀석은 내 귀에 잠깐 붙어서 속삭인 뒤 떨어진다.
"애들 쳐다보니까 싫은 티 좀 그만 내지?"
"......"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니, 쳐다보던 시선들이 뿔뿔히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난 버스 등받이에 몸을 비틀어대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내 옆에 앉아서 나를 잠깐 지긋하게 바라보다 벌떡 일어나서는 인원점검을 한다.
뒤에서부터 아이들의 머릿수를 헤아리면서 점점 앞으로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며 '서른여섯.' 이라고 중얼거린다.
때마침 선생님께서 차에 올라타시자, 녀석은 바로 인원보고를 한다.
저렇게 똑 부러지는 녀석이 하는 짓이 고작 날 희롱하는 거라니
한심해서 눈매를 얄쌍하게 떠 자리로 돌아오는 녀석을 바라본다.
내 눈을 본 녀석은 눈썹을 팔자로 바꾼다.
눈을 조금 크게 뜬 채로 내 옆자리에 앉는 녀석.
"표정이 왜 그래?"
"...대단하셔서요."
나는 고갯짓과 함께 비아냥 거려준다.
녀석은 이상한 걸 봤다는 표정으로 고갤 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은 자연스럽게 좌석버스의 등받이와 내 허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나는 깜짝 놀라며 자연스러울 뻔한 손길을 쳐내며 작게 말한다.
"야! 여기 앉은 건 그렇다치고, 이건 뭐하는 거야?!"
"뭐긴. 허리 잡는 거지."
"간도 크다, 진짜."
난 녀석의 몸집에 가려진 옆 좌석 애들의 눈치를 살펴본다.
다행히 본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난 한숨을 쉬며 다시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며 눈을 감는다.
"조용히 가자..."
"......"
담임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인원을 점검하신 후, 기사분께 다 왔다는 말을 전하신다.
좌석버스의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가 수학여행의 출발을 알린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눈을 작게 뜬 나는 고갤 가까히 하고 있는 녀석을 본다.
창에서 들어온 빛이 녀석의 눈을 밝은 갈색으로 보여준다.
"그럼 게임하자."
"...웬 게임."
'녀석의 게임' 을 그저 '게임' 이라고만 받아들인 내가 바보였다.
결국 난 녀석과의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휴게소에 들렀을때부터 도착하기까지
저번, 문제의 그 물건으로 속옷을 흠뻑 적셨다.
다른 애들이나 선생님들은 눈이 즐거운 모양이지만 내게 경치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야, 바다 진짜 예쁘다!"
"바다...?"
나는 이상하게 아랫배가 뜨끈거리는 느낌이 나서 배를 부여잡고 간신히 고개를 든다.
바다가 예쁘다기보다는 그냥...
"...뛰어들고 싶다."
"어?"
"...아니야.
...아, 언제 숙소 도착하지..."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어기적 어기적 캐리어를 끌고 오니 외관은 그리 나쁘지 않은 곳이 나온다.
사실 그보다도 당장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눈 앞에 보이는 숙소에 마음이 급해져 캐리어를 우다다다 끌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다행히 잠시 자유시간을 줘서 난 무사히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문제라면 이미 갈아입을 팬티 한 장을 입어 버렸다는 정도?
그치만 어차피 이젠 선생님들 눈치에 희롱은 커녕 붙어있지도 못할텐데 뭐 어떤가.
나는 기분좋게 화장실에서 나와, 배정받은 방에 놓여있는 가방으로 걸어간다.
뒤적거리며 스리슬쩍 눈에 띄지 않게 후다닥 벗어버린 속옷을 집어넣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혹시 대낮부터 속옷을 갈아 입었다는 것을 들킨 걸까.
나는 괜히 움츠린 어깨로 고갤 돌려본다.
"진짜 반장이랑 친해?"
"...어?"
"아, 좋겠다."
"야, 너도 반장이랑 얘기하잖아~"
"그래도 왠지 반장 은근 철벽치는 느낌이야."
"......"
나한테 질문을 해놓고는 저들끼리 떠드느라 바쁘다.
'그래, 제발 좀 걔랑 친해져라.'
나는 들쑤신 가방을 다시 정리하여 개어넣으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다.
방장이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자, 그 뻔뻔한 낮짝이 있다.
"지금 바로 로비로 모이라고 하셨어."
"어, 알았어~"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문쪽에서 시선을 거둔다.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들이 나의 행동을 본 모양인지 웃음소리가 들린다.
"반장한테 그런 거야?"
"어..? 아.... 어... (웃음)"
"너네 싸우고 진짜 친해졌나보다~"
"부럽다~"
나는 가방을 조금 큰 소리로 '턱' 하니 닫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여자애들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이고는 제일 먼저 방문을 연다.
"지금부터 1시간 정도 줄테니까 자유답사하고 여기로 모여."
"네~"
또 다시 찾아온 자유시간.
나는 기분 좋게 친구 곁으로 가려는데, 누군가 내 손목을 덥썩 잡는다.
녀석이 아닐리가 없다.
애들이 아직 무리지어 있는 사이, 나를 천천히 어디론가 데려간다.
"이러다 누가 본다?"
"보면 어때. 이제 공식적인 사인데."
"...야, 뭐가 공식적인 사이야."
"......"
녀석은 뒷통수만 보이며 나를 그대로 끌고 갔지만 난 알 수 있다.
지금 저 얼굴에 웃음이 그려져 있다는 걸.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끌려간 곳은 일부러 둘러보지 않는 이상 절대 눈에 띌 수 없는 곳이다.
녀석은 내 손목을 놓자마자 나의 가랑이 사이로 손을 쑤욱 집어넣는다.
"!!!"
"그새 갈아입었네."
"XX....!"
"얼마나 젖었는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그런 말을 웃는 얼굴로 잘도 말하는 구나.'
녀석은 날 자연스레 벽으로 밀어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