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쁩니다."
"곱네요."
남자는 후궁을 두지 않고 별 볼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나를 세자빈으로 간택했을뿐더러 나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아, 그런 그도 가끔은 내가 보는 앞에서도 왕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냉한 기운을 숨기지 못할 때가 있었지만 그래 봤자 그는 나와 둘이 있을 때만큼은 한없이 다정한 남자였기에 딱히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 따위 없었다. 그렇게 언 2주를 남자의 흘러 넘칠듯한 호의를 받으며 보내고 나니 어느새 넓디넓은 왕실 안이 답답하고 갑갑해졌다. 그에 남자와 같이 식사를 하며 흘리듯이 밖에 나가고 싶다 얘기했다
"따로 무언가 필요한게 있으시면 구해다 드릴겁니다."
와인을 입에 머금다 삼킨 남자는 냅킨으로 입을 닦곤 말을 이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아니 저는,"
"아니라면 됐습니다. 그럼 이 얘기는 더이상 꺼내지 않는걸로 합시다."
내 말은 더이상 듣기 싫다는 듯 끊어내곤 자신의 말만 하고 내게 미소짓는 남자였다. 남자의 말에 반박하려 입을 달싹거렸지만 곧 왠지모를 남자의 강압적인 태도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에 하루종일 시무룩해져있는 내게 이곳에 온 첫날부터 같이 있어준 여자가 새벽에 몰래 나가게 해준다고 그만 시무룩해져 있으라 나를 달랬다. 여자의 말에 금세 기분이 거짓말처럼 좋아진 나는 그렇게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달이 뜨고도 몇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였다. 여자는 약속대로 나를 불렀다. 밖은 위험하니 호위할 기사도 한명 데려왔다 했다. 여자의 소개와 함께 내게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하는 기사였다. 그런 행동에 의하면 나름 왕실 사람들 중에서는 직책이 꽤 높아보이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이런 일을 꾸며주다니 나는 더 없이 고마웠다. 연신 고맙다는 말만 계속하는 내게 한시간만 나갔다 와야한다고 내 엄마라도 되는 양 단호하게 말하는 여자였다.
"한시간이에요, 저도 그이상은"
"알겠어요, 고마워요. 금방 갔다,"
"어디 가십니까?"
"..."
남자였다. 남자가 어디선가 나타났다. 순간 남자에게 들켰다는 생각에 놀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남자를 그저 그를 쳐다보고만있자 여자가 데려온, 내 옆에 있던 나를 호위해 준다던 남자의 허리춤에 있는 칼을 뽑아들었다.
"어디가냐고 물었지 않습니까"
"..."
남자는 재차 물어오며 나를 보았지만 그마저도 내가 벌벌 떠는데에 그쳐 대답하지 못하자 곧 나를 궁밖으로 나가게 해주는데에 일조한 내 옆에 있는 궁녀의 목을 아무렇지 않게 베었다. 피가 튀었다. 남자의 볼에도 내 볼에도. 동강나버린 머리통은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끔찍했다. 그에 내가 이내 눈을 파르르 떨며 질끈 감자, 남자의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말해 봐요. 어디가시냐고요."
"아,안갑니다."
"그치? 난 또, 도망이라도 가는줄 알았네."
그 말을 끝으로 피가 묻은 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옆에 있던 남자의 허리춤에 다시 꽂아놓곤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웃어보이는 남자였다. 곧 내게 다가와 내 볼을 쓰다듬으며 피를 닦는 남자였고, 남자는 내 옆에있는 남자에게 뭐해. 어서 처소로 모시지않고, 했다. 그 말을 끝으로 처소로 끌려가느라 스쳐가듯 본 달빛의 비친 그의 눈빛은 광기가 서려있었다.
*
남자는 항상 나와 식사를 함께 했다. 지금도 그랬다. 그렇게 언제나 늘 그랬듯 나는 어젯밤 그 끔찍한 일이 있었음에도 오늘도 여김없이 남자의 호출에 꼼짝없이 아침, 점심, 저녁까지 남자와 같이 밥을 먹고있었다.
"입에 안 맞습니까?"
"네?"
"음식이 입에 안맞아서 도망치려고 했던건가 해서요."
남자는 웃으며 내게는 더 없이 끔찍한 농담을 건냈다. 어젯밤의 일을 아무렇지않게 거론하며 아닌척 내게 한번 더 주의를 주는 남자였다. 슬쩍 눈치를 보니 음식을 내온 상궁이 떨고있었다 '아니, 그런게 아닌.' 그때였다. 남자가 눈 깜짝할 새에 떨고 있는 상궁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맞지 않는 음식을 내온 사람을 벌해야 될 텐데,"
"아니요, 아닙니다. 입에 맞습니다."
"그래요"
음식이 입에 맞는다는 내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어보이던 남자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아 내 심기를 살피는 듯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미 제 자리로 돌아간 남자에도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덜덜 떨고있는 상궁이 더 눈에 들어왔다. 이제야 남자의 위치를 알 것 같았다. 그에 어젯밤 일이 떠올라 소름이 끼쳐와 몸을 잔뜩 움츠렸다. 내가 무어라 불편하단 말만 해도 엄한 사람에게 해코지할 남자를 이제는 알아서. 나는 음식을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갑작스레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느안전이라고, 빨리 들여보내주지 못할까.' 하는 투닥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슨일이지 하는 마음에 눈을 도륵도륵 굴려가며 남자의 눈치를 봤다. 어찌할바를 모르겠다. 그때였다. 그런 나를 남자가 본게.
"왜 그러십니까."
"아, 밖에..."
"시끄럽습니까? 가라 전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상관 없습니다. 들라 하셔도,"
"들라하라."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 들라고 명령하는 남자였다. 말을 마치며 마치 잘했냐며 칭찬을 갈구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는 남자였다. 그에 내가 남자에게 뭐라 말하려 입을 떼자 문이 열리고 나이도 지긋해보일 뿐더러 계급까지 꽤 높아보이는 남자가 나타나 열린 입이 무색하게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세자저하!"
"무슨 일이십니까 재상."
세자는 문이 열리던 말던 나를 보고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음식을 먹느라 쥐고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으며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아내곤 남자에게 무슨일이냐고 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나를 보며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는 언제그랬었냐는 듯 재상을 심기불편해보이는 얼굴로 맞이했다. 그에 모든 궁인들이 그런 그의 눈밖에 나지않으려 숨을 죽였다.
"다 들었습니다. 왕위계승식 날짜를 잡으셨다고요, 왕위계승식은 대신들과 충분한 상의 후에 하는걸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국장을 치른지 반년도 더 지났습니다. 아버지가 떠나신지는 어언 1년이 지났다는 얘기죠. 더이상 미룰수도, 미루고 싶지도 않아서요."
"그렇게 미루고 싶지 않으셨으면 저! 미천한 계집년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지 말으셨어야,"
남자가 나를 보며 말을 잇다 다시 입을 닫았다. 내 눈치를 보며 입을 닫았다하기엔 남자는 자신의 바로 옆에있는 세자에게 모든 신경이 쏠려있는듯 했다. 그런 세자는 남자가 무슨말을 하던지 내게만 시선을 둘 뿐이었다. 미천한 계집년이라, 오랜만에 듣는 나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잠시 세자의 나를 향한 분에 넘치는 관심에 까먹고 있었던 말.
"미천한. 또 뭐요."
"...아무튼, 말도 안됩니다. 후궁도 아니고 왕비로 저런 계집을 둔다는건 말이 안된다고요."
"..."
"저 계집은 후궁자리라도 내주면 좋아라 할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왕위를 계승하시기전 세자빈자리에 맞는 다른 여자를."
분명 맞는 말임에도 날이 선 단어에 목이 매여 내가 밥 먹는 걸 멈추자 그런 나를 보고있던 남자는 그 즉시 재상에게 말했다.
"내전에 가 계시죠."
"예?"
"저도 곧 따라가겠습니다. 아무래도 재상과 긴히 할 얘기가 있을 것 같아서요."
재상은 남자의 말에 이내 불같이 내던 화를 멈추고 불안감이 가득담긴 눈으로 남자의 말에 대답하며 문 밖으로 나갔다. 재상이 나가고 난 뒤 남자는 나를 살피며 '괜찮으십니까' 하고 물어왔다.
"...무엇이요."
"재상이 한 말, 말입니다."
"괜찮고 말고 하기 이전에 사실인데요. 그리고 괜찮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아니요, 저는 원래 태생부터가 그랬습니다. 세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남들 눈에는"
"저한테만 아니면 되지 않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까?"
"..."
"처소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재상과 얘기를 마치고 곧 바로 가겠습니다."
*
재상은 반역에 성공했다. 자신이 왕과 왕비를 죽음에 몰아 넣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나라의 왕이 승하한 왕과 하도 친분이 두터워 자신이 반역을 꾀했다는 걸 안다면 그 즉시 자신을 포함한 대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껏 반역에 성공했더랬지만 세자에게 왕위를 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차선책으로 세자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자신이 실권을 잡으려 하는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영리한 세자 때문에 일이 하나 둘 그르쳐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출처도 모를 계집을 데려오더니 말릴 새도 없이 세자빈으로 간택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세자가 왕위를 계승한다면 필시 왕비라는 자리는 자신의 딸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반역을 도모한 의미가 없어질 뿐더러 자신의 입지 또한 좁아질 것이라는 얘기다. 거기까지 재상의 생각이 미치자 재상은 마음이 급해졌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재상이 기다리던 세자가 내전으로 들어왔다. 평소 제 성격과 어울리게 차 보다는 와인을 즐겨마시는 세자는 재상에게 차 대신 와인을 건내주었다. 그에 꽤 많이 기다려 목이 탄 탓인지, 긴장감에 목이 마른건지 모를 재상이 와인을 꿀꺽꿀꺽 물을 마시 듯 마셨다. 그런 재상을 지켜보던 세자는 마치 우스꽝스러운 걸 봤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목이 말라서"
"아니요, 재상. 덕분에 웃었네요."
"...제가 아까는 너무 흥분해 몹쓸 말을 꺼냈던것 같습니다. 일단 그 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네"
"그런데 아직도 그 여자를 왕비로 들인다는 건,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본디 왕에게 맞는 짝은 따로 있습니다. 그 여자는 후궁으로 들여도 문제 없을터,"
"헌데 이미 그 얘기는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세자빈을 간택한지 벌써 2주도 넘었습니다."
"어차피 대신들의 반대로 거사도 제대로 못..."
재상의 말에 세자는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를 지워냈다. 그리고는 곧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재상은 세자의 냉한 표정에 눈치를 보며 하던 말을 곧장 멈추었다.
"아직도 당신의 딸 이난향이 왕비에 맞는 여자, 아니 계집이라 생각하십니까."
"제 말은 꼭 제 딸이 아니여도 격에 맞는 여자만이,"
"제가 제 아비와 같을거라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예? 그게 무슨,"
"아버지는 성군이었죠. 백성들이 추앙하는, 그런데 그런 아버지는 별 같잖은 놈들한테까지 넓은 아량을 베푸시더니 곧 반역을 당하셨습니다."
"ㄱ, 그걸 어떻게"
"헌데 저는 그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는 아버지를 보며 느낀 건 단 한가지 였습니다. 저렇게 살아봤자. 뭐 이런 생각이요. 웃기죠"
"그런데 정말 우습게도 그렇게 생각하고나니, 무서울게 하나 없더라고요. 내 어미를 죽인자든, 아비를 죽인자든 말이에요."
"일주일 뒤입니다. 왕위계승식."
"왕비를 미천한 계집이라고 칭한 죗값은 그때 치르는걸로 하죠."
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