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선배가 자주가는 카페옆에 샌드위치 가게 생긴거 알아요?"
"아, 맞아. 거기도 맛있다더라. 그럼 오늘 수업끝나고 거기 갈ㄹ…"
같은 수업을 듣는 후배인 하은과 이야기를 하며 강의실을 걸어나오던 준면이 누군가와 부딪혔다.
죄송합니다.정말 죄송해요. 꾸벅 고개를 숙인 준면이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준면과 부딪힌 사람이 준면을 붙잡았다.
팔에 전해져오는 악력에 고개를 든 준면의 입에서 아, 하는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랑 얘기좀 하지."
"너랑 할 얘기 없어. 가자 하은아."
"하은아, 나 준면이 형이랑 할얘기가 있어서. 자리좀 비켜줄래?"
세훈의 말에 준면의 곁에선채 머뭇대단 하은이 주춤거리며 걸음을 옮기자 이번에는 준면이 가지말라며 하은의 발을 붙잡았다.
"하은아, 응?"
"가지 말라니깐!"
날카로운 준면의 고함소리와 자신이 떠나기를 재촉하는 세훈사이에 끼인채로 어찌할바를 모르는 하은을 구한것은 강의실에서 나오던 민석이었다.
"하은이 내가 데리고 갈께. 얘기해라."
"야, 김민석! 내가 가지말라고 그랬잖아!"
하은을 이끌고 가는 민석의 뒤로 꽂히는 준면의 목소리에 한숨을 내쉰 민석이 준면에게로 걸어왔다.
"김준면."
"뭐, 뭐."
"너네 엄청 민폐거든? 너는 내가 니 편들어줘도 오세훈 욕하지 말라고 지랄, 오세훈은 너 잘챙겨주라고 지랄. 나보고 어쩌라고.
그렇게 걱정되고 좋아죽겠으면 화해하던가. 왜 엄한사람을 힘들게해."
짜증스럽게 머리를 흐트러뜨린 민석이 세훈과 준면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이 민폐덩어리들아, 앞으로 화해안하면 나한테 말걸생각하지마.
거지같은것들. 세훈과 준면, 두사람을 거지에 민폐덩어리로 만들어버린 민석이 하은을 이끌었다.
가자, 너도 오늘 고생했는데 오빠가 밥사줄께.
멀어지는 민석과 하은을 멀거니 바라보는 준면의 어깨위로 손 하나가 올라왔다.
"김준면, 이제 얘기좀 할까? "
"알았어."
"자리 좀 옮기자."
세훈과 준면에게 시선이 집중된 건물에서 나온 두사람이 향한곳은 두사람이 자주가던 카페였다.
공강일때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깨를 볶던 그곳.
오늘은 깨를 볶는게 아니라 전쟁을 하러 왔지만. 어쨌든.
"딸기 프라푸치노 하나요."
카페에 들어선 세훈이 한 주문은 준면이 좋아하는 딸기 프라푸치노 였다.
이 와중에 또 준면이 좋아하는것을 챙길 정신은 있었는지 주문을 마친 세훈이 준면을 이끌고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벨이 울릴때까지 두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미치도록 어색한 공기를 찢으며 진동벨이 울리고, 진동벨을 든 세훈이 딸기 프라푸치노를 가져오는 짧은 시간동안 준면은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떨어대는
정서불안의 끝판왕을 보여주었다.
"마셔."
"어."
세훈이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모든 행동을 일시에 멈춘 준면이 눈을 내리깔고 '니가 권하니 한번 먹어줄께.' 하는 표정으로 프라푸치노를 홀짝였다.
그런 준면을 잠시 바라보던 세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
밑도 끝도없이 뜬금없이 던져지는 세훈의 사과에 프라프치노 컵을 조금 세개 내려놓은 준면이 표정을 굳혔다.
"뭐가 미안한데."
"클럽간거."
"그거 말고."
"솔직히 클럽은 형도 갔으니까 서로 퉁치…"
나 갈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준면의 손을 붙잡은 세훈이 미간을 구겼다. 지금 뭐하는거야?
"너야 말로 뭐하는건데."
"지금 사과하고 있잖아."
"미안, 하고 한마디 하면 그게 사과야?"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는, 너한테."
잠시 말을 멈춘 준면이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었다. 쌓였던 설움에 눈물이 터질것 같았다.
뿌얘지는 시야에 눈을 몇번 깜빡여 눈물을 말리는 동안 테이블에 놓여진 프라푸치노 컵 표면에는 물방울들이 송글송글 생겨났다.
"나는 너한테 많은걸 바란게 아니야. 그냥 날 조금만 이해해 주길 바랬는데."
"……."
"혜란이 일. 난 그냥 위로 받고 싶었어.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잘 해결했네, 같은."
"…‥."
"어린애 같다는 거 알아. 너보다 나이도 많은 내가 그러는게 우스워 보일수도 있어. 그래도 너는,"
너는 내편 들어줬어야지. 넌 내 애인이잖아. 나는 니가 너무 좋은데 너는…
말을 끝맺지 못한 준면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투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눈물을 쓱쓱 문질러 닦은 준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갈께. 프라푸치노 잘마셨어."
카페를 나서는 준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준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못하던 세훈이 착잡한 표정으로 테이블위에 얼굴을 묻었다.
나보고 어쩌라는거야 진짜…
*
"이야- 이게 누구야. 내 동생 세나왔네."
"뭐야 이 미친놈은."
시니컬한 표정으로 세훈이 중구난방 흔들어대는 손을 쳐낸 세나가 세훈의 앞에 앉았다.
왁자지껄한 술집안 분위기에 세나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자신의 앞에 술이 떡이된채로 허우적거리는 제 오빠를 살폈다.
무슨일이길래 이렇게 술이 떡이되어서 있는지. 뭐 대충 감이 오기는 하지만.
"무슨일인데."
"어어, 아무일 아닌데."
혀가 꼬인채로 비실비실 웃어대며 손을 휘휘젓는 세훈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은 세나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르고는 한입에 털어넣었다.
"준면이 오빠랑 싸웠어?"
"어, 너 어떻게 알았냐."
풀린 눈을 끔뻑이며 신기하다는듯이 쳐다보는 세훈의 시선을 무시한 세나가 술 한잔을 더 털어넣었다.
니가 준면이 오빠말고 힘든일이 어딨냐. 만사 태평하게 사는 인간이.
무슨일인데, 말해봐. 테이블에 놓인 안주를 우물거리며 세훈의 술잔에 술을 따르자 세훈이 잔에 채워진 술을 털어넣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주절주절 풀린 혀로 열심히 말하는 세훈의 설명을 듣던 세나가 숟가락으로 세훈의 머리를 후려쳤다.
꿍 하며 꽤나 큰 소리를 내며 부딪힌 숟가락에 세훈이 끙끙대며 맞은 부분을 문질러 댔다.
아, 왜때려, 왜!! 세훈의 고함에 머리를 한번더 후려친 세나가 술한잔을 더 털어놓고 입을 열었다.
"야. 그거 편한번 들어주는게 그렇게 힘들어? 어? 준면이 오빠가 많은거 바랬냐? 혜란인지 계란인지 걔 찾아가서 혼내 달라 그랬어?"
"그럼 뭐…"
"그냥 힘들었겠다, 걔 나쁜애네, 이렇게 말이나 한마디 해주면 되는걸 뭐 그렇게 힘들다고 이 사단을 만들어!"
"과제는 잘 끝냈다 그랬단 말이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 멍청아!! 준면이 오빠는 과제가 아니라 걔 행동때문에 화난거잖아! 그것도 하나 몰라?"
하긴, 니가 뭘 알겠니… 세훈에게 비웃음을 날린 세나가 오징어 안주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어댔다.
"그럼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니가 알아서 해야지. 너 준면이 오빠랑 싸워본적 없어서 어떻게 풀어줘야 되는지도 모르겠지?
어련하겠냐 그동안 착한 준면오빠가 니한테 맞춰줬겠지. 열심히 머리 굴려봐라. 나 간다."
소주병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잔을 털어넣고 크- 하며 입을 쓱 닦은 세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니 인생이 불쌍해서 오늘은 내가 계산해준다.
테이블에 올려진 계산서를 들고 일어난 세나가 떠난후 세훈도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지자로 걸으며 집으로 향한 세훈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준면아, 김준며언."
준면을 부르며 방안을 휘젓고 다니던 세훈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맞다. 준면이형 아직 안들어 왔지…
같이 살자는 자신의 말에 알겠다던 준면은 지금 살고있는 집도 정리해야하고, 집에도 둘러대야 한다며 잠시 시간을 달라 그랬더랬다.
그래도 근래에는 항상 세훈의 집에서 생활하던 준면이었는데 싸운 이후로는 준면의 발걸음이 끊긴 상태였다.
끙 하고 한숨을 쉰 세훈이 갈증을 해결하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 페트병째로 입을 대고 물을 아시려던 세훈이 휘청대며 부엌으로 걸어가 컵에 물을 따뤘다.
페트병에 입을 대고 마시지 말라는 준면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반쯤 열린 냉장고를 풀린 눈으로 보던 세훈이 집안을 휘 둘러봤다.
엉망으로 어질러진 집, 텅빈 냉장고. 며칠간 준면의 손길이 닿지 않은 세훈의 집은 엉망진창이었다.
컵과 물병을 식탁위에 올려두고 냉장고를 닫은 세훈이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준면이 항상 곱게 개어 두었던 세훈의 옷은 세훈이 벗어둔 그대로 바닥 곳곳에 허물처럼 남아있었다.
자리에서 또 하나의 허물을 만들어낸 세훈이 침대위로 엎어졌다.
준면과 사귄 이후로 세훈의 침대위에 두개로 늘어난 베개중 하나는 주인을 잃은채 세훈의 베개 옆에 뉘여있었다.
더듬거리는 손으로 준면의 베개를 끌어안은 세훈이 준면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베개를 끌어안은채 들썩이는 세훈의 어깨가 세훈이 울고있다는것을 알려주었다. 들썩이던 세훈의 어깨는 한참뒤에야 멈추었다.
그렇게 준면이 없는 세훈의 밤은 길고도 험하게 지나고 있었다.
*
"저기 그러니까 그쪽이 세훈이 동생…"
"아, 맞아요. 저 세훈오빠 동생이에요. 저번에는 실례가 많았죠? 아, 오늘도 실례다. 술냄새도 좀 나고. 죄송해요."
"저희 집은 어떻게…"
"오빠가 예전에 가르쳐준적 있어요. 자기 집 비어있으면 이리로 오면 된다고."
"아, 아, 네…"
사근사근 하게 웃으며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세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음지은 준면은 지금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싶은 심정이었다.
친동생이라니… 예전에 세나에게 못생겼다며 세훈에게 연락하지말라고 했던 자신의 행동이 생각나 준면은 속으로 절규를 해대고 있었다.
이 미친 김준면아, 김준면아!! 준면의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하는것을 지켜보며 웃음짓던 세나가 준면이 내어준 음료수를 한모금 들이켰다.
"저 근데 무슨일…"
"오빠, 저희 오빠랑 싸우셨죠?"
네,네? 버벅대며 대답하는 준면을 향해 웃어보인 세나가 손에 쥔 컵을 매만졌다.
음, 그러니까… 자신의 앞에 앉아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준면을 흘끔 본 세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집 멍청이가, 아 아니 그러니까 우리 오빠가 좀 눈치가 없어요. 연애를 안해봐서…"
뭐, 두분의 사정이고 사랑싸움엔 끼는게 아니라지만 한 가지 알려 드리고 싶은게 있어서… 저희 오빠가 준면오빠 엄청 좋아해요.
그래서 오늘도 술이 떡이 되서는 준면오빠 이름이나 부르고 앉아있고 그래서… 제가 할말은 아니지만 저희오빠좀 용서해 주세요.
애가 머리는 좀 나빠도 오빠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니까…
주절주절 말하던 세나가 준면의 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런 접촉에 화들짝 놀란 준면이 눈을 크게 뜨자 세나가 미소를 지으며 준면의 손을 다시한번 다잡았다.
"저희 오빠데리고 사시느라 힘든거 알아요. 그러니까 이참에 버릇좀 뜯어 고치고 잘 데리고 살아주세요."
마치 제 딸을 잘 부탁한다는 친정엄마와 같은 세나의 멘트에 벙쪄있던 준면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세나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시간에 실례가 많았어요. 저 이만 가볼께요.
현관으로 향하는 세나의 뒤를 따라나간 준면이 어정쩡하게 서서 세나를 배웅했다. 문을 열고 나가던 세나가 다시 몸을 돌리고 준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저 준면오빠 엄청 좋아해요. 그러니까 우리집 멍청이가 말 안들으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다음에 또 뵈요 오빠.
상큼하게 웃음짓던 세나가 사라진 현관을 멍하니 바라보던 준면이 현관앞에 주저앉았다.
폭풍처럼 몰아친 세나의 방문에 혼이 쏙 빠진 준면이 마른세수를 했다. 사랑싸움에 애인의 동생까지 껴서 자신들을 중재하는 꼴이라니…
"이게 무슨 망신이야 진짜…"
한숨을 푹푹 내쉰 준면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카톡함에는 자신이 일부러 확인하지 않은 세훈의 카톡들이 쏟아져 있었다.
미안해 준면아, 사랑해, 보고싶어, 내가 잘할께, 연락좀 해줘, 점이라도 하나 찍어줘, 확인이라도 해주면 안될까.
구구절절한 세훈의 애원을 읽어내려가던 준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핸드폰을 손에쥔채 무릎에 얼굴을 묻은 준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세훈과 싸운이후, 세훈의 얼굴을 마주보고 웃으며 얘기를 나눈것이 꽤나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고싶다…"
항상 자신을 든든하게 감싸주던 세훈이 없는 밤, 준면은 새삼 느껴진 외로움에 몸을 떨어야했다.
:) 민석이에 이어서 하은이, 세나까지.. 이런 민폐덩어리들..
서로의 빈자리를 느끼며 외로움에 떨어보렴 낄낄
:) 뭐 이렇게 싸우더라도 둘이 다시 만날꺼니까 뭐
만나기 싫어도 내가 너네 붙여놓을꺼라서(후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