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구 짝사랑에게 사과를 받았다. 미안하다는 말에, 갑작스레 떠난다는 말에 내 사고는 순식간에 정지가 된듯 할 말을 잃었다. 영원히 듣지 못하고, 들을 일 조차 없을 것 같던 전정국의 사과는 날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미안할 것 없다고, 난 괜찮다며 만류를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내게 등을 내보였다. 유학을 간다고. 잘 다녀오라고, 성인이 되어서 더 멋드러진 모습을 하고 만나자고, 그렇게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 낯선 동네에서 걸음을 뗐다. 이젠, 다시는 올 이유도 없이.
객관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이 사랑 놀음에 내 잘못이 얽혀있는가. 아닐 것이다. 허나, 그의 속 사정을 듣고나니 마치 그의 상처가 오롯이 내게로 쏟아지듯 가슴에 콕 박힌 마냥 추욱ㅡ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아, 짧은 한숨과 함께 어깨에 무의식적으로 들어갔던 힘이 빠지며, 볼품없는 모양새를 만들어낸다. 말없이 일어서는 전정국의 뒷모습에 대고 정국아, 하고 따스하게 불러볼 기회도, 자신도 없이,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뒤를 돈 전정국의 표정은 어떠려나. 울고 있을까, 아니면 평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 전정국이라면, 아마 무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내가 그렇게나 그를 좋아했을 때에도, 그는 항상 같은 표정이였으니. 지금도, 그때와 같이 얼음장같은 표정을 짓지않을까.
아니, 절대 아니였다.
그렇게, 날 놔두고 카페를 나선 전정국의 걸음을 눈으로 쫓았다. 카페의 큰 유리창을 너머, 터벅 터벅 날 돌아선 뒷모습 그대로 인적이 드문 거릴 걷던 전정국이, 그대로 걸음을 멈추더니, 자신의 큰 손바닥으로 눈가를 한참이고 쓰는 그 장면을 목격했기에. 이내 눈가를 벅벅 닦던 그 손바닥이, 앞머리로 덮힌 이마까지 덮어 그의 눈물을 받아내는 모습까지. 그 안쓰러운 광경을 보고도 그의 등을 토닥여줄 사람이 내가 되기엔 너무도 늦었고, 선뜻 울고있는 그를 껴안아줄 수 없는 상황이 내 가슴을 그렇게나 후벼팠다.
어쩌면, 미안하다는 사과는 그가 아닌, 내가 해야했을지도.
미안하다고, 내가. 네 눈물을 받아주지 못 해서, 그래서 미안하다고. 응어리진 말을 애써 아이스티와 함께 꼴깍, 삼켜버렸다. 터벅 터벅 존재를 남기던 발자국이, 이제는 도시의 사람들과 섞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그 때, 나는 몸을 일으켰고, 자연스레 시선을 옮긴 그의 자리에는 오롯이 식은 커피잔만이 남아있었다.
어반 자카파 - Love is all around
러브 로열티 09 :: 장마 후, 쨍쨍한 햇빛
“와, 진짜 개실망. 어떻게 말을 안 하냐? 그것도 나한테?”
“어.. 그니까 있지, 내가 말을 안 하려던 게 아니고..”
“됐어, 전학가니까 이제 난 보이지도 않다 이거지. 맞지? 맞네. 나쁜 년, 됐어.”
“사귄 지 별로 안 됐다니까? 아 그리고, 애들 다 몰라.”
“네 친구들은 모르는데 전정국은 안다는 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아니 그건.. 걔가 먼저 안 거고.”
돼써어. 실망, 존나 실망. 진심으로 삐친 듯 입술을 툴툴 내밀고 잔뜩 심술궂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던 김태형이 아니꼬운 눈빛을 마구 보낸다. 전정국을 만난 그 날이 지난 주말. 오랜만의 연락으로 만난 김태형에게 전할 말은 딱 하나였다. 나, 오빠랑 사귄다. 어김없이 고개를 쳐박고 음료와 함께 시킨 빵을 우물거리며 먹는 김태형이 내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모든 행동을 멈췄다. 뭐라고? 시발? 빵 조각을 입 안에 가득 담고 있어도 발음 하나 틀리지않는 저 정겨운 욕은 언제들어도 서운치가 않다.
그렇게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김태형에게 설명을 시켜주자, 김태형은 입 안의 음식물을 삼키곤 입가심으로 음료를 쪽 빨아마시더니 간만의 브런치가 마음에 든 듯 제 배를 통통 두들긴다. 나쁜 년, 진작 말해줄 것이지. 서운할 뻔 했잖아. 그 모습을 보자, 영락없는 코 찔찔이 초등학생 같아서 읊조리듯 작게 등신.. 하니 이제는 턱을 괴고는 날 빤히 바라본다.
“내가 저번에 말했지? 전정국이 너 좋아하는 것 같다고.”
“아, 왜 또 전정국 얘기야..”
“아니 뭐, 그냥. 이젠 추억으로 남기지? 쌍방삽질의 결과잖아. 아무튼, 내 촉이 대단하다는 걸 또 한 번 느끼게 해준 결과였다.”
그래, 퍽이나 대단하다. 건성 건성 대답해도 여전히 뭐가 그리 신나는 지 김태형은 입꼬리를 씰룩쌜룩 움직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넌 별로 안 슬프냐?
“뭐가?”
“..전정국 유학 가는 거.”
“야, 뭐 유학이 대수냐?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카톡도 될 거고, 페북도 될 거고.”
“..그치. 틀린 말은 아니네.”
“그나저나, 전정국 그렇게 안 봤는데 존나 로맨티스트네. 낭만 쩐다니까, 안 그렇게 생겨서.”
안 닥치냐, 진짜. 놀려먹는 투에 정색을 하듯 김태형을 쏘아보자 곧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축 늘어트린다. ..히잉.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삐져나온 입술도 함께. 저, 저거 또 수작 부리려고. 시팔 개팔 욕은 자기가 다 해놓고서는 저 자식은 꼭 자기한테 욕이 돌아오면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처럼 굴었다. 웃는 낯에는 침을 못 뱉는다던데, 김태형을 보면 우는 낯에도 침을 못 뱉겠다고 생각이 든다. 아니지, 김태형의 낯에만 그러나. 아무튼, 저 나쁜 자식은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 얼굴을.
“야야. 연애는 좀 할만 하냐?”
“..못할 건 뭔데, 등신아.”
“너 쑥맥이잖아. 눈은 마주치냐? 손은 잡고? 막, 눈치 없이 내치는 건 아니지? 어우. 야, 조심해라 진짜. 남자들은 손 한번 내치면 얼마나 상처인지 몰라요, 몰라.”
축 늘어트린 눈꼬리가 사라지고 다시 자기가 들떠서는 몸을 이리저리 들썩이며 잔뜩 흥이 난 얼굴로 내게 묻는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별 뜻 없이 대답을 하자, 내 모든 사고 회로를 정지 시킬 말들이 줄줄이 뱉어진다. 역시 얘만큼 날 제일 잘 아는 애는 없을거다. 내 주변에 감시 카메라를 달아놓았나 싶을 정도로 내 지난 행동을 떠올리게 하는 발언에 그대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일방적으로 민윤기를 짝사랑하면서 저도 모르게 했던 행동들이 급히 머릿 속을 스쳐지난다. 부끄러워서 눈도 못 마주치고, 잡기가 불편하다며 투덜투덜대고는 민윤기의 흰 손가락 하나 잡았던 것도. 이렇다할 짝사랑은 해봤어도, 이렇다할 연애는 해본 적이 없기에 나는 연애에 분명한 초짜였다. 좋아하면 눈도 못 마주치고, 그러면서도 더욱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물론 성격 좋은 민윤기가 내가 항상 부끄러워하는 것을 알고 어이구 이쁘다, 이쁘다 해주면서 날 예뻐해줬다는 게 다행이지만. 지난 내 행동을 성찰하고 있을 그 짧은 찰나에 넋이 나간 내 표정을 캐치한 김태형이 한숨을 푹 푹 쉬며 혀를 내두른다.
“..으휴, 초짜년. 안 까인 걸 다행으로 여겨.”
“ 안 까여, 안 까인다고..”
“ 만나면 먼저 손도 잡고, 뽀뽀도 먼저 해주고, 키스도 먼저 우,우윽!”
“ 미친놈이 못하는 말이 없어! ”
시한 폭탄 마냥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저 공포의 주둥아리를 늦기전에 닫아놓아야했다. 재빠르게 포크를 집어 김태형이 환장하는 빵을 콕 찍어 얄미운 요 입이 크게 벌려져있을 때 구겨넣으니 욱욱거리며 날 죽을듯이 째려보았다가 그래도 입 안에 들어온 빵 조각에 쩝쩝거리며 그새 또 멀건 웃음을 짓는다.
“ 아무튼, 오늘 만나면 먼저 손이라도 잡으라고. 오빠 말 좀 믿어봐, 내 말 듣고 잘 된 애들이 얼ㅡ마나 많은데.”
망했다, 저 터무니없는 말들이 자꾸 꼭 행해야 할 의례마냥 머릿 속에 강하게 인식되어버렸다.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 고민 있어? ”
“ 어? 어, 아니..”
“ 왜 그러지, 오늘따라. 좀 불안한데.”
언제까지고 쓸데없을 거라 생각했던 김태형의 말들이 자꾸만 머릿 속에 남아있는 게 화근이였다. 김태형을 집으로 보낸 후 민윤기와 전화하는 도중에 이미 우리 집 아파트로 나와버린 민윤기가 저만치 손을 흔들고있어 원래 예정과는 다르게 놀이터 벤치에 마주보고 앉아있게 되었다. 월요일도, 토요일 오늘도 모두 전학 오기 전 친구를 만나야한다는 내 예정에 민윤기와 깨 떨어지는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던 노릇이라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김태형은 그렇다쳐도, 전정국은.. 민윤기가 만나지 말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나 혼자 뜨끔. 하며 찔릴 수 밖에 없었다.
“..바람 펴? ”
“에? 내, 내가 무슨..”
“ 저번주도 친구 만났고, 오늘도 친구 만났고. 무슨 친구를 그렇게 자주 만나. 나 서운하라고.”
“..그게 아니구..”
“..같은 사람이야? ”
고개를 내저으니 흐음, 하던 민윤기의 표정이 결코 밝지 않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항상 날 쳐다볼 때면 그렇게 밝은 웃음을 보여줬었는데. 아씨, 이러다가 민윤기 냅두고 친구랑 외도난 년으로 찍힐 수 있겠다 싶었다.
“..그 친구 만났어? ”
그 친구 ㅡ 이름 석자 불리지 않았지만 우리 둘다 전정국을 뜻하는 사람임을 알 수가 있었다. 어, 음.. 그니까. 저, 그 월요일에.. 더듬거리는 말에 조금과는 더 크게 한숨을 내뱉은 민윤기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 걸 알 수가 있었다. 또 화를 삭히려는 모습도, 내게 큰 소리치지 않으려는 민윤기의 노력도. 민윤기는 나를 이렇게 아껴주는데, 나는 그 부끄러움 하나 때문에 언제까지고 민윤기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빠른 판단이 섰다. 일단, 해명부터하고, 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아져있는 두 손을 잡아줘야지.
“..내가 만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왜 만났어.”
“ 할 말 있다고 불렀어, 오늘 아니면 안될 것 같다길래..”
“ ..왜? ”
“..유학 간대서.”
“……”
“ 나 전학 오기 전에, 안 좋은 일 있었던 거 사과하러 온 거 였어. 주말에 유학가서 만날 시간도 더 없구, 그때 하루 시간 된다길래 만난 거였어.”
“….”
“ 가서 별 이야기 안 했고, 오빠랑 사귀는 것도 그 친구가 다 알고 있었어. 오늘 만난 친구는 진짜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친구고..”
“ ..그랬어? ”
“ 으응, 내가 자꾸 시간 안 된다해서 속상했지. ..미안해.”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의 뜻을 전했다. 잘한 건 없지만 그래도 민윤기가 단단히 오해를 했을 그 간의 일들에 대해 쭉 해명을 하니, 긴장감이 탁 풀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숙이니 민윤기의 행동, 얼굴, 표정이 다 보이지가 않았다. 한참이고 민윤기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민윤기가 내가 잡을 목적이였던 큰 손으로 내 두 볼을 감싸 고개를 들린다.
“ 이여주.”
“ 응? ”
“ 안아줘, 나. ”
내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한 웃음기 없는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입에서는 앙증맞은 소리가 나왔다. 결국 터진 웃음에 헤실 헤실 웃으며 그와의 거리를 좁혀 내 얼굴을 감싸던 두 손을 떼어내고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그에게 안기니, 내 등을 그가 몇 번이고 쓰다듬는다. 힐끔 고개를 돌리니 민윤기가 눈을 꾹 감고는 내 쓰다듬에, 잘 준비를 하는 아가마냥 몸을 맡기고 있었다. 피곤했던 몸을 엄마의 쓰다듬 몇 번에 치유받듯, 복잡했던 마음을 오롯이 내 쓰다듬음에 천천히 치유를 받고 있기를.
“ 미안해, 오빠가 오해해서. 너가 그럴 애 아닌 거 아는데도, 불안해서 그랬어. ”
“ ..아니야, 나같아도 그랬어. 내가 미안해.. ”
그의 어깨에 내 턱을 괴고는 그가 하는 것처럼 나도 어설프게 그 마르고 큰 등을 몇 번 쓸었더니, 그가 내 어깨에 올렸던 얼굴을 떼고는 나를 마주보았다. 어둑어둑해진 하늘, 주황빛 가로등에 비친 허연 얼굴에 웃음이 돋아났다. 내 등에 얹혀졌던 손이 그의 무릎 위로 올려지고, 나는 덥썩 그의 큰 손을 마주 잡았다. 손에 땀이 나서, 혹은 아프다는 핑계로 몇 번이고 그의 손을 쳐냈던 내가 자신의 손을 잡자 꿀이 뚝 뚝 떨어지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민윤기였다.
“ 뭐야, 팬 서비스야? ”
“ 아니거든, 이제 내가 먼저 잡을 거야. 오빠 손. ”
“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누가 알려줬어. ”
“ 오늘 만난 친구가 그랬어. 손도 먼저 잡아주고, 먼저 안아주라고.”
“ 친구 잘 뒀네, 나중에 밥 사줘야겠다. ”
선선한 저녁의 바람이 불었고, 우리는 두 손을 마주잡았다. 서로의 눈을 향해있던 웃음은 언제 질 지 모를 만큼 길고 길게 이어졌고, 이어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웃던 민윤기가, 안 그래도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 고개를 틀더니 그대로 입술이 포개어지고, 꽃이 피었다. 길고 긴 폭우,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영원할 줄 알았던 연애 전선에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여름을 알리듯 내리쬐는 햇볕은 쨍쨍했으며, 더운 여름 날 우리에게는 꽃이 피어났다. 꽃말은 영원한 사랑.
그동안 잘 계셨나요 독자님들!
러브로열티를 얼마만에 쓰는 건지.. 벌써 2월이네요.
춥기만 했던 날씨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어요, 대부분의 학교는 개학을 시작했구요.
전 메르스 난리일때도 학교가 잠잠했던 탓에 다음주에 종업식을 해요. 이제 본격적으로 공부할 나이가..
아마 다음편이면 러브 로열티도 끝이 날 것 같아요. 그동안 긴 연재 텀으로 독자님들이 고생 많으셨어요ㅠㅠ
여유가 많을 때 올 걸 그랬습니다.. 너무 죄송해요ㅠㅠ
이제 길고 길었던 스토리가 정리가 되었고, 남은 건 진짜로 여주와 윤기의 연애씬!
지금까지 너무나 감사했고, 남은 한 편도 열심히 써서 오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너무 감사합니다ㅠㅠ
♡남준아 여기봐/1013/8ㅅ8/귤/회색별/권지용/0324/슙슙/비빔밥/버누/민군주님/인사이드아웃/씨걸정국/사귀자/춘심/국아여기봐/짐그래/들국화/눈부신/슈가슈가슈가너만이나의스타/외로운쿠키/론/박지민/꺄룰/핑슙/밤비/탱탱/밍/녹차/페이볼/달걀/짱구/마름달/슈팅가드/천상여자/짱구/토끼/밀짚모자/햄쮸/젤리/들레/이부/짐짐/미니미니/제이/이삐/매직핸드/윤기꽃/슈민트/현/슈징슈징/분홍빛/밤식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