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남자랑 키스하면 생기는 일
(부제; 下)
"누구세요?"
전화가 끊겼다. 분명, 옆집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독특한 억양의 사투리를 쓰셔서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럼, 민윤기 지금 우리집 앞인건가? 내게 더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미친 민윤기, 새벽두신데, 지금까지 우리집 앞에 있었던거야?
집 앞에 멈춘 택시에서 내려 계단을 뛰어 올랐다. 하느님, 민윤기가 아직 집 앞에 있게 해주세요. 제발,
층수가 가까워질 수록 내 발걸음은 느려졌다. 한걸음씩 내딛을 때 마다, 네가 없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휘감겨서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약한 기침소리가 계단에 울렸다.
"..."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봤다. 민윤기의 얼굴은 약간의 붉은기를 띄고 있었다. 민윤기가 인상을 쓰며 참으려 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다시 기침을 했다. 일단, 들어가자.
민윤기는 말 없이 내 뒤를 따랐다. 저절로 잠기는 도어락을 뒤로 민윤기는 소파에 앉았다. 따뜻한 것이 필요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레몬청을 꺼내들었다. 몇번 들리던 기침소리를 끝으로 거실은 조용해졌다. 내가 약간 뜨거운 컵을 들고 나왔을 때, 민윤기는 소파에 누워있었다. 팔로 얼굴을 가렸지만, 붉게 상기된 얼굴은 내게 그대로 보였다. 내가 손을 뻗어 민윤기를 만졌지만, 민윤기는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뜨거워진 민윤기의 머리 위로, 차가운 물 수건이 올려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내 눈에 민윤기의 휴대폰이 띄였다. 진심이야? 민윤기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게 그런 문자를 보낼 사람은 아니였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음이 분명했다. 잠금화면도 없이 열리는 민윤기의 휴대폰을 보다, 통화기록에 들어갔다. 가장 최근 나와 한 전화를 아래로 방송 피디님, 작가님, 김남준, 정호석의 이름이 줄지어있었다. 문자메세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남준>
'왜요? 저 지금 운전 중인데'
'성이름 무슨 일 있어?'
'걔는 왜요?'
'만나야하는데 안와'
'걔 약속시간은 완전 잘 지키는데,'
'몰라?'
'네. 전화해볼까요?'
'어.'
<정호석>
'이름이 전화 안받는데요?'
'아 그래, 고맙다'
'에이 뭘요~'
<성이름>
'출발했어?'
'어 지금 버스 기다리는 중.'
'왜 안와?'
'늦어?'
'나 기다려?'
'전화는 왜 안받아'
'무슨 일 생긴건 아니지? 걱정된다. 집앞으로 갈까?'
'집앞에 있을께'
'우리, 헤어질까?'
'진심이야?'
'지금 곡 작업 중이야. 연락하지마.'
내가 받아야했던 문자 여섯통은 내 휴대폰에서 사라져있었다. 내가 보내지 않은 내 문자까지 본 뒤에야, 민윤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윤기는 세시간이나 나를 기다리다, 우리집으로 갔다. 약속 시간 일곱시간 만에 온 연락이 헤어지자는 연락이었으니 화날만도 했다. 내 문자가 가고 두시간 뒤에 민윤기의 답장이 올 때까지,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집 앞에서,너는
바닥으로 물에 젖은 수건이 떨어졌다.
"무서웠어. 그래서 그랬어."
"오빠,"
"네가 진심이라고 할까봐. 그래서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꾸 누가 속삭이는거야. 진심이라고,"
나는,
"미친 사람처럼 그럴리가 없다고 말하다가, 너한테 전화를 했는데,"
왜
"만나자는 네 말에 두려웠어."
항상,
"너무 무서워서, 네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안믿고 투정부렸어."
너를
"미안, 나 미워하지마. 제발"
기다리게만 할까.
민윤기는 말을 미처 다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굳어버린 민윤기의 뜨거운 허리에, 내 손을 둘렀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렇게 말하는 민윤기에게서 계단에 기대 울던 나를 찾았다. 민윤기도 나도, 아직은 서로에게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래서 불안해했다. 서로를,
항상 기다리는 것이 습관이 된 민윤기의 사과를 막았다. 민윤기의 뜨거운 목덜미에서 손을 떼어낼 수 없었다. 곧 사라질 존재인 것처럼, 민윤기는 날 잡은 손을 떨었고, 난 민윤기를 잡은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눈물이 피부를 타고 흘러, 고였다.
눈을 떴을 때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감기걸리면 안되는데, 자꾸 속삭이던 민윤기의 숨결이 내 귓가에 닿았다. 밤새 문자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민윤기의 오해가 풀리도록, 반쯤 풀린 눈으로 다 듣고 이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민윤기는 다 안다는 듯이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일찍 떠진 눈에, 민윤기가 깨기 전에 밥을 하고, 정지은에게 다녀올 생각이었다. 민윤기에게 줄 죽을 만들고 있는데 등 뒤로 하얀 팔뚝이 감겨왔다. 뭐해, 평소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탁하게 갈라져 낮아진 목소리가 흩어졌다. 어깨에 기댄 민윤기의 이마는 여전히 뜨거웠다.
"심한 것 같은데, 병원가자."
"오늘은 회의 안가?"
"오늘까지 안가."
"감기는 금방 나아."
"가자. 걱정되서그래."
손이 잠시 노는 틈을 타, 민윤기의 손가락 마디가 내 손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같이가, 민윤기의 작은 투정에 알겠다며 웃었다. 민윤기의 앞으로 흰색 죽이 올려졌다. 초록색과 주황색의 채소들이 불규칙하게 흩어져있었다. 민윤기는 죽을 천천히 헤집었다. 에, 그렇게 먹으면 숟가락 뜨거워져. 이리 줘봐.
내가 민윤기의 숟가락을 뺏어 들자, 민윤기는 나를 쳐다봤다. 표면의 죽을 살짝 긁어내 민윤기의 앞으로 가져다댔다. 민윤기는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수저를 입에 넣었다.
"우리 윤기, 잘먹는다."
내가 민윤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민윤기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혼난다, 진짜.
혼자서도 잘 먹는 민윤기를 보다가 나 역시 준비를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민윤기는 벽에 기대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오빠, 많이 아파? 걱정하는 내 물음에 민윤기는 눈을 살짝 떴다. 안아파, 잠이 덜 깬 것 같다. 민윤기는 내게 씨도 안먹힐 거짓말을 했다. 차키를 챙기는 민윤기의 손을 잡았다. 택시타고 가자,
"민윤기씨"
민윤기를 붙잡고 들어가자, 의사선생님이 웃으며 반겨주셨다. 감기기운이 있으시다고요? 네,
"김간호사, 열"
"아, 해보세요."
"아침은 드셨어요?"
"주사, 맞아야 될 것 같은데요?"
아 그렇구나, 나는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의사선생님과 민윤기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왜, 왜 보는데?
"안나가?"
아... 의사선생님이 멋쩍게 웃으셨고, 나는 죄송하다며 옷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 진짜 민망하네. 성이름 미쳤나봐 진짜. 상기된 얼굴에 급하게 손부채질을 하는데 문자가 왔다.
'이름아 오늘 급하게 회의해야될 것 같은데 올 수 있지?'
'네? 갑자기요?'
'어 빨리와'
아, 진짜. 민윤기 저렇게 아픈데 두고 가야되는거야? 작가고 뭐고 다 때려칠까, 머리를 잡아뜯는 손길을 누군가 저지했다. 뭐해, 민윤기였다.
"주,주사는 잘 맞았어?"
"어, 덕분에"
"안아파? 문질러야되는거 아니야?"
"왜, 문질러주게?"
걱정하는 내 말에 민윤기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당황한 내가 앞서 나가자, 민윤기는 같아가자며 천천히 걸었다.
"오빠, 근데 나 지금 회의 가야될 것 같아."
"갑자기?"
"응. 급하다는데... 미안"
민윤기는 입술을 몇번 내밀더니 괜찮다며 빨리 가보라고 했다.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본 민윤기가 바래다주냐고 물어볼 때 까지 나는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급하게 들어선 회의에는 이미 선배들이 다 와 계셨다. 연출팀은 어제도 편집으로 밤을 샌 것 같았다. 정국이의 피부가 푸석해진 것을 보며, 잠시 안타까워하다가 피디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원래 우리가 쓰던 세트를, 그 팀이 써야한대."
"그날 남는 세트 없을까요?"
"내일부터 계속 남는 세트 없을 예정이란다, 그 팀은 무슨..."
"당장 내일이요? 그럼 콘티는,"
"저번주에 짜둔게 있어서 괜찮아. 이번 분량 최대한 길게 뽑아서 한시간 반 만들고 사십분 정도 분량만 나오면 돼."
"그러면 작가팀도 편집 도와야겠다."
"일주일 반납하자. 이틀 푹 쉬었잖아."
"네,"
"그럼 당장 내일 촬영 안되는 분들은 어떻게 하죠?"
"인맥으로 어떻게든 매워야지. 칼럼니스트들이 어디 갈 곳 있겠어?"
"선배님, 민윤기씨 내일 못 나오십니다."
"왜"
"저.. 많이 아프시답니다. 열나고 지금도 병원가셨다고..."
전정국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메인작가님이 얼굴을 쓸어내리시기 무섭게 작가언니가 들어왔다.
"민윤기씨는 아파서 아파서 못 오실 것 같으시다고.. 나머지 분들은 괜찮으시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나 때문에 방송에 차질이 생겼다. 머리가 아파왔다. 어떻게든 생각해야했다. 연출팀, 작가팀 상관 없이 모두 휴대폰을 들고 연락을 하고 있었다. 민윤기의 부재를 매울 수 있으면서 음악에 대해 잘 알고, 말도 잘하는 주변 사람을 생각해야했다.
'내일 뭐하냐?'
'작업'
'급해?'
'ㄴㄴ'
"잠시만 전화하고 오겠습니다."
회의실 문을 급하게 열었다. 김남준에게 전화를 걸자 바로 수신음이 끊겼다.
"왜"
"내일 방송이 갑자기 잡혔는데, 윤기씨가 아프셔서 못나오신대. 한번만 대신 나와주면 안될까? 내일 어려운 주제도 아니고 진짜 미안하다. 한번만 살려줘."
"그래."
생각보다 간단한 대답에 놀란 것은 나였다. 진짜? 진심이야? 재차 확인을 하고 나서야 긴장이 다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김남준 이 멋있는 자식, 누나가 촬영 끝나면 먹고싶은거 갖고 싶은거 다 사줄께. 회의실 안에는 아직도 한숨소리가 계속 되고 있었다. 저, 피디님..
"혹시 김남준이라고 아세요?"
"작곡가?"
"네, 방금 전화했는데, 내일 시간 괜찮으시다고.."
작가님께 연락처를 넘기자, 피디님은 삼십분 휴식이라는 말을 남기고 나가셨다. 작은 탄식이 퍼져나갔다. 다행이다.
"누나 커피마실래요?"
전정국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같이 가자며 손을 끌었다. 로비까지 가는 내내 전정국과 나는 조용했다. 전정국이 커피를 시킨 뒤, 내 앞에 앉았다.
"누나"
"어?"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뭘?"
"누나 민윤기씨랑 사귀,"
"무슨 말이야."
"연락을 했으니까 아는 거잖아, 왜 연락하는데요."
"그게 니가 왜 궁금한데"
"그야,"
전정국의 입에서 나온 갑작스러운 민윤기에 놀라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나 때문에 아파서 촬영도 못하게 된 민윤기가 서러웠다. 민윤기의 부재는 생각보다 내게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얼마나 기다려야하는데요."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해
"기억도 못하는 사람, 얼마나 더 기다려야 나 봐줄껀데요."
"... 정ㄱ,"
"제가 방송 왜 하는 지는 알고 있어요?"
내가 방송 왜하는지는 알고있냐
전정국의 말 위로, 술에 취한 민윤기가 오버랩되었다. 난 또, 누군가를 기다리게했구나. 민윤기와는 다르게, 눈물은 고이지 않았다. 진동벨이 안쓰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정국은 진동벨을 집어들었다. 커피를 받아드는 정국이의 옆에 서서 남은 커피를 들었다.
"못 들은 걸로,"
"아니요. 다 들었잖아요. 다 들은걸로해요."
"누나도, 나 생각하면서 아팠으면 좋겠어."
정국이의 마지막 말이 차마 내 귓가에 들리지 못하고 사라졌다.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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