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으로만 듣던 술탄의 궁은 화려했을 뿐만 아니라 웅장하기까지 했다. 쇠고랑을 끄는 병사의 거친 손길에 의해 건조한 사막의 위로 고꾸라진 민석은 신음을 뱉으며 다시 일어섰다. 혹독한 행군의 끝엔 언제 술탄에게 죽을지도 모르는, 그저 한낱 노예의 위치에 서 있는 자신이 선명해 보였다. 질질 끌려 장터로 즐비한 도성을 지나 궁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으로 금빛의 옥좌에 앉아 있는 술탄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분수에선 귀한 물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식물들이 술탄의 궁 안에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민석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오늘 들어온 노예들 입니다. 술탄은 저 멀리 있는 곳에서 노예들을 강제로 잡아온다. 그 결과가 바로 민석 외에 여러 사람들 이였고, 더운 바람이 부는 술탄의 궁 뜰에 위치했다. 민석에게 시선을 보내던 술탄은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궁 안에 정적이 흐를 무렵에, 술탄은 입을 열었다. 이자들을 변두리에 보내어 가축을 돌보도록 해. 술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사들은 노예 행렬을 다시 일으켜 다른곳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행렬의 뒤편에 있던 민석도 일으켜져 따라가기 시작했다. 카랑한 쇠고랑이 발목에서 부딫혀 껄끄러운 소리를 낼 무렵에, 술탄이 잠깐 이라며 손을 들고 행렬을 멈추게 했다. 왜그럴까. 민석은 속으로 의아해 했고, 이내 그 궁금함은 놀라움이 되어 되돌아 왔다.
"저기, 저 노예는 놓고 가."
"예?"
"쟤. 주황 머리 남자애."
술탄의 손가락이 향한 곳의 끝에는 민석이 있었다. 왕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사들은 민석의 발과 손에서 쇠고랑을 풀어 이상한 장소로 끌고갔다. 영문도 모른채 따라가는 민석의 눈엔 의아함이 가득했지만, 이내 여인들에게 맏겨져 욕실로 향하게 된 현실에,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욕탕 안에서 여인들은 민석의 옷을 거리낌 없이 벗겨 묵은 때들을 씻겨내고, 향유를 부어 매력이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고급 소재의 옷을 입은 민석은 여인들의 안내를 받아 욕실을 나섰다. 쭈볏거리며 발을 옮긴 곳엔 딱 봐도 고급스러운 방이였다. 밀쳐지는 힘에 못이겨 얼떨결에 방 안으로 들어온 민석은 멍하니 서있어야 했다.
"서서 뭐해? 다리 안아프나?"
"...아. 아!"
몇분 후에, 뒤에서 들리는 말에 놓았던 정신을 바로 잡는 민석이였지만, 이내 그 목소리의 주인이 술탄이라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그의 발치에 넙죽 엎드려 버렸다. 술탄 폐하. 딱 봐도 벌벌 떨리는 목소리에 픽 웃은 술탄은 그만 일어나라며 민석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조그마한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귀엽네."
"네?"
"아냐. 아냐. 그나저나 노예, 네 이름은 뭐야?"
아, 우물쭈물 거리던 민석이 어서 말해보라는 술탄의 명령 아닌 명령에 민석 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민석. 민석. 이름이 좀 독특하네. 민석의 이름을 몇번 중얼거린 술탄은 해사하게 웃으며 쿠션 더미에 몸을 묻었다. 카펫 위를 툭툭 치는 술탄의 손에, 민석도 자동적으로 다가가 다소곳이 앉았다. 흡사 여인이 된 기분이여서, 느낌이 매우 묘했다. 느긋하게 구는 술탄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내 소개를 해야지."
"...술탄 폐하. 아니신가요?"
"호칭이 그런거지. 난 루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야."
다 아는 사실이려나. 루한이라는 이름의 술탄은 그릇에 담겨진 사과를 집어 들어 와삭 베어 물었다. 아까부터 불안한 눈치던데. 말을 마친 루한이 사과 꼭지를 입에 물며 싱긋 웃었다. 민석은 괜히 위축되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술탄과 자신이 지금 뭘 하는지는 모르겠다. 어깨에 루한의 손이 닿아오자 몸을 더욱 움츠리는 민석을 보고, 까르르 웃어버렸다. 내가 널 어떻게 해버리는 것도 아닌데, 왜그렇게 벌벌 떨어? 루한의 말엔 장난기가 배어 나왔지만, 진심이라는 감정도 약간 섞여 있었다.
"이제부터 민석은 술탄의 노예가 아니야."
"...그럼, 뭔데요?"
"표면적으로는 내 하렘, 깊이 파고들면 내 말동무. 나머지는 민석이 알아서 생각해봐."
루한의 손가락이 빙글 돌아갔다. 손가락에 끼워진 금빛의 반지가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빈짝였다.
"하렘 이라면..."
"맞아. 내 여자가 되는거지. 민석은 여자가 아니라서 하렘이 아닌가?"
민석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몇날 며칠을 힘겹게 행군하여 도착한 술탄의 궁에서 만난 진짜 술탄이라니. 그리고 자신이 술탄의 하렘이 된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민석의 고장에서 여자들이 끌려가 하렘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풍문으로 들었던 적이 있어도, 그 위치에 자신이 올라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술탄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
"ㄴ, 내가 무슨 하렘이에요.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여기선 술탄의 말이 곧 법이야. 다시 사막을 건너서 멀리 팔려가고 싶지 않으면 내 말대로 하는게 좋을껄?"
그랬다. 민석은 한낱 하렘일 뿐이였다. 한숨을 쉬는 민석의 머리에 루한의 손이 닿았다. 죽이지는 않을꺼니까, 걱정마. 작게 경직되어 있던 몸이 부르르 떨렸고, 루한은 픽 웃으며 하인을 붙여 줄테니 여기서 생활하라고 얘기했다. 얼떨떨하고 불안한 민석은 루한의 말을 대강 흘려 들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술탄은 고고한 자태를 풍기며 민석만 남겨놓고 방을 나섰다.
"아, 그리고."
"에?"
"매일 밤마다, 널 찾아 올꺼야. 그럼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나는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께."
방의 입구에 어지럽게 달려 있는 유리발을 걷어 올린 루한이 민석에게 짤막하지만 강렬한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아아, 카펫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민석은 얼이 빠진 목소리만 계속 내었다. 이윽고 방 안에 남자가 한명 들어와, 앞으로 민석을 모시게 될 첸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고개를 숙이기에 얼떨결에 같이 고개를 숙여버린 민석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생활이 힘들어 지겠구나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목이 메었는지, 민석은 첸에게 조심스럽게 물을 부탁했다.
익숙하지 않은 하렘으로서의 삶을 지낸지 벌써 며칠이 넘었던가. 민석은 부채를 부쳐주는 종대의 옆에서 손가락으로 셈을 하다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자신의 안색을 걱정하는 첸의 표정에 아니라며 민석의 손이 저어졌다. 화려한 옷들과 머리를 조아리는 시종들, 그리고 화려한 생활들은 여전히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궁 안에는 민석 말고도 루한을 위한 하렘이 얼마든지 있으리라. 첸에게 부채질을 그만 하라 이르고, 물이나 떠 달라고 부탁을 했다. 사막을 강렬히 데우는 햇빛은 매우 뜨겁기만 했다.
민석에게 밤마다 찾아 온다고 했던 루한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낱 하렘따위가 술탄을 마음대로 보러 갈 수도 없고, 속으로 은근 루한을 원망하며 민석은 애꿎은 사과만 씹어댔다. 그럴때마다 첸이 나서서 그만 좀 하라고 타이르는 바람에 분풀이를 할 수도 없게 되었지만. 아마 루한은 다른 여인들을 밤새 안느라 그런거겠지. 갑갑했던 궁 안이 더욱 갑갑하다고 느껴졌다.
창문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매우 덥거나 건조했다. 궁 안은 삭막하다 못해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왔다. 민석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올렸다. 바람이 시원하고 촉촉하게 불어오며, 물이 넘쳐나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노래와 춤을 부르고 추며 항상 웃던 조그마한 시골 마을. 넓디 넓은 사막에서 민석의 마을 하나만큼은 푸른 원석처럼 곱게 빛났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춤을 추던 자신을 상상하던 민석은 첸이 떠온 물의 차가움에 의해 망상의 공간에서 깨어나왔다.
"민석님. 오늘 술탄 폐하께서 오신다고, 미리 준비하라 하시던데요?"
"참 빨리도 오신다... 전해줘서 고마워요."
"제 일인데요. 그리고 편하게 말 놓으세요."
도리도리. 당분간은 제 주인께서 자신에게 말을 놓지 않는다는걸 직감적으로 느낀 첸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다시 창가에 엎드린 민석은 따가운 볕에 눈가를 손으로 가려야 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으면 좋겠다. 민석이 간절히 원하는건 오로지 바람, 한가지 였다.
어정쩡하게 나가봅니다
순탄치는 않을 것 같은 푸른 사막이지만, 움켜잡고 나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