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탬뉴] 물망초
w.진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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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을 자 지각할까봐 열심히 뛰어 겨우 지각을 면하고 수업을 듣고 알바를 마치고서 집으로 왔다. 밀린 과제를 생각하며 피곤한 몸을 끌어 책상에 앉았다. 가방을 열어 관련 자료를 모은 파일을 꺼내는데 정성스레 예쁘게 접어놓은 종이가 보였다. 파일에 있던 종이가 빠졌나, 하는 마음에 종이를 들어 살펴보았다. 곱게 접힌 종이에 진기형에게 태민이가, 라고 써있길래 태민이의 동글동글한 글씨체를 생각하며 마저 펼쳐보았다.
[형, 안녕. 이 편지 당황스럽죠? 있죠, 내가 큰 비밀을 말할거에요. 심장에 무리가면 안 되니깐 심호흡 한 번 하세요. 빨리요, 얼른 하세요. 후후후. 했죠?
사실 내가 형을 많이 좋아했을지도 몰라요. 처음에는 친해지고 싶은 형이었는데 형이 점점 좋아졌나봐요. 왜 좋아하는지는 아직도 이유가 생각이 안 나. 어느 순간 보니깐 그냥 형이 좋았어요. 형이 좋아지니깐 형 옆에 있던 종현이형이 괜히 싫어져서 틱틱거리고 그랬나봐요. 형도 알죠, 내가 종현이형 처음에 무지 잘 따라다닌거. 근데 형을 좋아하고 보니깐 형이랑 종현이형이랑 사이가 너무 좋아서 질투가 났어요. 형 옆에 있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는데 왜 종현이형일까, 저렇게 종현이형이 있는데 형을 가질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요.
나 나쁘죠, 알아요. 나 무지 나쁜거. 근데 그거 알아요? 형이 더 나빠요. 나는 형이 좋아죽겠는데, 형이 좋아서 형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형한테는 그저 좋은 착한 동생이라는 거 알아요. 형이 종현이형이랑 붙어있을 때면 나도 형을 좋아하니깐 나를 봐줘요, 나도 많이 좋아해요. 라고 수백번도 수천번도 더 말하고 싶었어요. 형은 지금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럼 왜 진작에 포기를 안 했냐고. 어떻게 그래요, 그렇게 쉬우면 내가 이러겠어요? 내가 포기할려고 할 때마다 형은 나한테 와서 방긋방긋 웃죠, 가끔씩은 종현이형이랑 크게 싸우고 와서 나랑 술 한잔 하자며 울 때 나도 기회가 있진 않을까. 이런 생각 얼마나 했는지 형은 몰라요. 진짜 내 맘 죽어도 몰라요.
형 그 날 생각나요? 나 2학년 되어서 내 밑으로 후배 들어온다고 좋아했던 신입생 환영회 날이요. 그 때 나 형이랑 종현이형이랑 키스하는 거 봤어요. 일부러 본 거 아니에요. 형이 화장실 가는데 열쇠 흘리고 가길래 형, 이거 두고 갔어요 라면서 따라가는데 형이 화장실에 먼저 있던 종현이형이랑 완전 진하게 입 맞추고 있었잖아요. 나 사실 그 날 형한테 열쇠 주고서 집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형 마음에는 종현이형이 가득 찼구나 라는 생각에 진짜 펑펑 울었어요, 말 그대로 펑펑. 내가 우는 거 형은 한번도 못 봤죠? 형한테는 멋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일부러 한번도 형 앞에서 울지 않았어요. 입술 꾹 깨물고 눈물 참아냈어요. 나 신기하죠.
지금 생각해보니깐 형을 그 때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낯가림이 좀 심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잘 다가가지도 못 하고 가만히 혼자 있었는데 형이 먼저 다가와서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주었을 때 형은 그냥 천사 같았어요. 좀 오글거리죠? 그래도 정말 그 때는 그렇게 보였어요. 지금도 형이 그렇게 보이기도 해요. 그 좋아하던 마음을 질질 끌고 오면서 지금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심장이 쿵쿵 거려요. 형한테서 내 심장소리 봐요, 하고 들려주고 싶을만큼 세게 뛰어요. 형 생각만 하면 형만 보면 진짜 이렇게 쿵쿵거려요, 라고 말하고 싶을만큼. 그래도 형이 날 부담스러워할까봐 아무 말 못하고 있었어요. 그냥 날 이렇게 형이 좋은 동생으로 봐줘도 좋을 것 같아서 아무 말 않고서 가만히 있었어요. 근데 이제는 내가 떠나니깐 말하고 갈려구요.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죠? 아무리 생각해봐도 형은 나한테 올 것 같지 않아서 멀리멀리 떠날거에요. 잊을려면 형을 안 보는게 낫겠다 싶어서요. 사람들한테는 유학이라고 할건데 정확히 말하면 이진기 피해서 도망가기에요.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형 잊고서 나중에 형이 놀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형 앞에 나타나고 싶어요. 내가 이런 사람을 몰라보다니 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요. 그러니깐요, 그 때까지 종현이형이랑 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오면 내 곁에 와주었으면 좋겠지만 그 때도 나는 형한테 좋은 동생이겠죠?
아마 형은 밤에 이 편지를 볼거니깐 나는 한국에 없을지도 몰라요. 오후에 갈거니깐. 형이 조금이라도 이 편지를 일찍 봐서 날 붙잡으러 와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럴리 없지만요. 이제 편지 끝낼게요. 정말 사랑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거에요. 나 포기 안 할거야. 형 우편함 안 보고 왔죠? 거기 꽃 있을건데. 내가 좋아하는 물망초 꽃이에요. 꽃말은 형이 알아봐요. 그런 편지 마칠게요.
형을 사랑하는 이태민]
편지를 쓰는 중간중간에 보이는 꾹꾹 눌러쓴 부분이 편지를 쓰면서도 여러번 망설였을 태민이가 느껴져 가슴이 찡해졌다. 왜 태민이의 마음도 하나 몰라주고 그 고생을 시켰을까, 어째서 이제야 이 편지를 발견한건지 자책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내가 태민이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도 과연 태민이를 잡을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해졌다.
태민이가 두었다던 꽃이 생각나 자리에서 일어나 집 우편함으로 향했다. 아직도 꽃이 있을까, 시들지는 않았을까 라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아직은 멀쩡한 꽃을 보며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조그마한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예뻐서 웃음이 지어졌다. 그러고보면 태민이는 이 꽃을 무지 좋아했던 것 같다. 길 가다가도 비슷한 꽃만 봐도 아 물망초랑 닮았다, 라며 웃음 지었었는데.
인터넷 창을 열어 물망초 꽃말이라고 쳐보았다. 창이 뜨자마자 보이는 나를 잊지마세요. 라는 말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꽃을 자기로 생각하며 나한테서 잊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편지를 손에 꼭 쥐고서 꽃들을 바라봤다. 태민이가 바로 옆에 있는 듯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를 잊지말아줘요, 진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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