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서운 겨울 틈. 한 줄기 빛이 들어와 고개를 들었을 땐 봄이 찾아왔다. 그 따스함도 잠시. 겨울이 그 빛을 질투 하듯, 세찬 바람을 불며 괴롭혔다. 그것을 떼어내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세찬 겨울보다 더욱 끈질긴 봄은 나에게 또 한 번 다가와 햇빛을 내려주었다.
그렇게 내 인생에도 빛이 찾아왔나보다.
"어...?"
홀로 달동네 언덕을 오르며 '갑자기 찾아온 나를 보며 놀랄까.',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행복한 상상을 하며 베시시ㅡ 웃다가 언덕 중간. 가게 앞에서 생각이 멈췄다. 곧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은 개나리 때문에.
한참이고 가게 앞에서 구경을 하다, 아직은 찬바람에 다리가 따끔해지는 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초록 대문인, 그 집으로.
달동네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초록 대문도 보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눈에 틔는 노란 색상. 그리고 익숙한 실루엣.
개나리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
"봄 왔다."
아름다운 나의 빛.
예쁘게 핀 웃음 꽃에 아직 녹지 못한 겨울이 사르르 녹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삐쭉 날 정도로 뜨겁다가도 찾아오는 장마에 열기를 식혔다. 그 장마를 버텨낸 여리지만 강한 잎들이 옷을 갈아입으며 무채색인 도시에 다양한 색상을 내려주었고, 그 색상에 혹해 품에 안으려 했을 때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웅크리게 하다가 곧 하늘이 주는 선물에 어린 아이가 된 듯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둘은 사계절처럼 연애했다.
따뜻하게 뜨겁게 아늑하게 포근하게
달동네 사는 음악하는 민윤기 X 달동네 사는 학생 OOO
25
完
"다시 오네, 여기를."
달동네에서 내려다보던 그 회색 도시 속에 윤기가 있었다. 남이 보면 전혀 이상할 점이 없었지만, 예전의 민윤기를 알던 사람은 그 모습이 참 낯설어 보일 것이다. 사실 윤기 본인이 제일 낯설었지만.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직장 때문이다.
20대 초반. 돌도 씹어 먹을 그 창창한 나이에 모인 아이들은 대부분 ‘좋아서’ 음악을 했다. 참 단순하지만 20대이기에 할 수 있는 그 단순한 생각.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하나 둘 나이가 들면서 괜한 겁이 생겼는지, 하루 종일 작업실에 앉아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이것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불안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국 이들은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하였고 각자의 길로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남준이는 부모님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경영 수업을 들으며 오랜만에 하는 공부에 머리를 싸맸고, 호석이는 그 특유의 희망적인 성격으로 청소년 심리 상담사가 되어 마음을 다잡게 하였고, 태형이는 휴학했던 유교과를 복학하여 따뜻한 마음으로 어린 아이를 보듬어주었고, 지민은 한 회사의 퍼포먼스 디렉터로 들어가 관객의 눈을 즐겁게 했고, 정국은 춤에 사랑에 빠져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렇게 이들은 함께 공연하는, 음악 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 와중에 윤기는 끝까지 음악을 했다. 사실 윤기도 불규칙한 수입에 걱정이 되어 자신의 학과를 살려 취업을 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회사를 들어갔을 때의 자신의 미래가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분명 음악이 하고 싶어 때려치우고 나올 거라고.
그렇게 소처럼 묵묵히 노력하던 윤기는 어느 날 한 힙합 사이트에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그 실력이 알려졌는지 러브콜이 들어왔다. 같이 작업을 하고 싶다, 한 번 만나보고 싶다, 방송 출연에는 관심 없느냐. 다양한 러브콜.
함께 음악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절하던 윤기에게 어느 날 최근에 새로 지어진 엔터테인먼트라며 함께 일하고 싶다는 캐스팅 전화가 들어왔다. 그 말에 회사에 갇혀있는 게 싫다며 거절의 의사를 표하다 회사에서 당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게 원하는 모든 것을 밀어주겠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그렇게 회사를 다니기 싫다던 윤기는 ‘밑져야 본전’ 그 생각으로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계약하고 난 일주일 후. 윤기만을 위한 작업실 하나가 뚝딱 만들어졌다. 처음 그 작업실이 만들어졌을 때는 잘 들어가지 않고 계속해서 달동네에서 작업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와 이야기도 해야 하다 보니 회사 작업실에서 밤을 새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렇게 자연스레 달동네를 벗어나게 되었고.
곡을 만들 때는 힘들지 않았다. 곡에만 집중을 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곡 작업이 완료가 되면 갑자기 퇴근길의 강남역처럼 꽉 막힌 듯한 가슴에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고 있으면 뒤에서 산뜻한 향기가 났다.
“…수고했어요.”
따뜻한 온기로 채워주었다.
남자 친구지만 그 전에 사람 민윤기의 꿈에 대한 열정, 노력, 자부심을 동경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에 적절한 사람이 되겠다며 고등학생 때는 코피가 날 정도로 열심히 공부 했으니까.
하지만 요즘 윤기의 모습은 안쓰러워보였다. 분명 회사와의 곡 작업은 끝마쳤는데 그때보다 무언가 더 몰두하는 듯, 작업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판다와 사귀는지, 윤기와 사귀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윤기의 얼굴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축ㅡ 내려와 있었다. 윤기 작업실 뒤, 소파에 앉아 가만히 과제를 하던 도중, 잘 풀리지 않는 건지 ‘아.’ 윤기의 입 밖으로 짜증 섞인 짧은 탄식이 나올 때면 괜히 움찔. ‘노트북 키보드 소리가 신경 쓰이는 건가.’ 짧은 찰나에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너무 지쳐 보여 힘내라고 어깨도 주물러보고, 좋아하는 음식도 사와보고, 없는 애교도 쥐어짜보고 했지만 윤기는 어색한 웃음을 보여주고는 다시 표정을 굳혔다.
둥ㅡ, 둥ㅡ,
드럼 비트 소리가 울리는 작업실에서 한참이고 과제를 하다 핸드폰 홀드키를 눌러 시간을 확인해 봤을 때, 벌써 시간은 11시를 향해 달려갔다. 집에 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짐을 챙기고 있었을까,
“ㅇㅇ아.”
뒤로 몸을 젖혀 의자에 몸을 기대더니 천장을 응시하며 갑자기 나를 불렀다. 계속 아무 말 없던 윤기가 갑자기 이름을 불러 놀라 ‘네?’ 놀란 티를 내버렸다. 그 목소리에 윤기는 비잉ㅡ, 의자를 돌려,
“…달동네 가자.”
천천히, 느리게 오르막길을 올랐다. 개 짖는 소리, 밤 고양이의 매서운 눈빛, 잔잔히 들려오는 TV 소리, 두 명의 발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달동네의 중간 지점인 가게에 도착했을 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안전제일>
그 표지판이 둘만의 추억을 막았다. 큰 표지판을 읽어보니, ‘재개발’ 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둘의 눈동자에 담겼다.
아쉬워 보이는 윤기의 모습에 ㅇㅇ이는 원래 재개발 된다는 말이 많았다며 윤기를 다독였다. 하지만 윤기는 ‘하아ㅡ’ 깊은 한숨과 함께 털썩, 가게 앞에 앉았다.
가게 앞에 앉아있는 윤기의 그림자가 유난히 작아 보이던 그 밤.
사실 ㅇㅇ이도 아쉬운 마음이 컸다. 힘든 공간이었지만 분명 자신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한 공간이 이제는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표지판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곧 손에 묻은 먼지에 대충 바지에 훌훌 털어, 가게 앞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아 가로등을 보는 윤기 옆에 쪼르르 가 앉았다.
벌레들이 옅은 가로등 빛에 의지하여 달라붙어 있었다.
“ㅇㅇ아.”
“네.”
“ㅇㅇ아ㅡ”
“네에ㅡ”
한참이고 조용했을까. 윤기가 ㅇㅇ이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다. 평소 같았으면 장난치지 말라고 아프지 않게 윤기의 팔뚝을 쳤겠지만, 윤기의 기분을 맞춰주는 건지 화도 내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대답하는 ㅇㅇ이가 여전히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없어졌어, 달동네.”
“…그러게요.”
“가장 아팠지만 그만큼 아름다웠던 동네가 이제는 없어.”
“……”
“비록 동네는 없어졌어도 우리 둘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으니까. 그 추억을 잊지 말자.
우리의 봄, 달동네.
소박했지만 항상 행복했던 그 때.
너랑, 평생을.”
“…그렇게 살고 싶어.”
작게 읊조리듯 윤기는 말했지만 그 소리는 달동네를 채우는 데 충분했다. 윤기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천천히 발을 굴리던 ㅇㅇ이가 마지막 말에 행동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윤기를 쳐다봤을 땐 자신의 코끝을 한번 매만지더니,
“어쩌면 넌 아직 봄.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봄이 더 잘 어울릴지 몰라.
너가 아직은 어려서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마치 달동네 같을 거야.
힘들 거야. 정말 많이 힘들 거야.
그래서 더욱 값지고 아름다울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붉어진 귀와 어디에 둘지 모르는 손. 하지만 그 행동과 상반되는 덤덤한, 어쩌면 당당한 그 말투.
“그러니까, 결혼 하자. 같이 성숙한 여름 을 걷자.”
아무런 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다가 조심스럽게 윤기의 등을 쓰다듬다, 살포시 안아주었다. 그리고 귀에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둘이 함께 있는 그림자는 컸다.
그 어떤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결혼식의 주인공,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아아악! 아 어떡해애ㅡ 저 진짜 못하겠어요.”
얼마나 매만졌는지 그 두꺼운 종이가 사람 손때를 탄 듯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연습했지만 막상 결혼식장에 오니 떨리는 지 공들여 한 머리를 쥐어 뜯는 지민이었다. 양 주머니에 손을 꽂고 다리를 꼬고 있던 남준은 그 모습을 보다, '민윤기 결혼식 망치고 싶나 봐. 너한테 사회를 맡기고.' 지민이를 놀렸다. 그 말에 제법 어른 티 나던 지민이가 다시 20살. 그때로 돌아간 듯, '아 진짜 뭐라는 거예요? 저 잘하거든요?' 소리를 지르다 큼큼ㅡ 목을 가다듬더니 연습하기 시작했다.
"형님들, 여기 왜 이렇게 더운 겁니까ㅡ"
이마에 맺힌 땀을 휴지로 닦으며 다가오는 정국이 모습에 연습하던 지민이는 눈이 2배로 커지더니 '정구가ㅡ' 하며 쪼르르 달려갔고, 어린 하객과 눈높이를 맞춰 놀고 있던 태형이도 마치 어제 본 사이마냥, '야, 그러니까.' 라며 수트자켓을 벗었다. 그러다 곧장,
“윤기형도 참 유별 나.”
“그니까. 아야!ㅡ 벌이다, 벌!”
“유난 좀 떨지 마. 가만히 있으면 안 쏘니까.”
오랜만에 모여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 떠들고 있는 중,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두들 뒤를 돌았을 땐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낯선 윤기가 있었다. 항상 밝은 톤의 머리 색이였던 윤기가 흑발에, 수트를 빼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낯설고, 웃기고, 멋지기도 한 아이들은 다 같이 입 모아 ‘뭐야ㅡ 아 이상해!ㅡ’ 시끄럽게 했지만 윤기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자신의 넥타이를 매만졌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난 진짜 민윤기가 제일 먼저 결혼할 줄 몰랐는데.”
“근데, 형! 왜 여기서 결혼식 해요?”
“왜.”
“아니 뭐 멀쩡한 결혼식장 두고,”
“의미가 있는 곳이야.”
“너무 늦게 왔지. 여기.”
“괜찮아요.”
“항상 신경 쓰였어. 너가 오고 싶다고 했는데.”
“……”
“손.”
버진로드 앞. 맞잡은 두 손이 살짝은 느슨했다. 전에는 꽉 붙잡혀 놓치면 큰일 날 것 같던 그 두 손이.
사람은 그런 거다. 놓치기 싫어 꽉 붙잡고 있으면 순식간에 지쳐 놓칠 수 있다. 서로를 믿으며 신뢰해야 오랫동안 함께 맞잡을 수 있다.
사랑도, 사람과 같다.
“가자.”
천천히, 느리게 꽃길 을 함께 걸었다.
우리의 봄, 달동네.
소박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행복했던 그 봄을 기억하며 두 손을 맞잡아 여름으로 접어드려 합니다.
아름답게 개화하는 그 순간을 지켜봐주시길 바랍니다.
20XX. 4. 24
꽃을 수놓은 그 곳, XX 수목원에서.
차남 민 윤기
장녀 ㅇ ㅇㅇ
Wedding
안녕하세요 오토방구입니다.
'달동네 사는 음악하는 민윤기 X 달동네 사는 학생 OOO'
끝이 났습니다.
너무 허무하죠. 죄송합니다. 제가 더 잘 썼어야 했는데요...
네. 뭔가 기분이 너무 묘해요.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지금 되게 먹먹해요.
시간을 돌려 처음으로 갈 수 있다면 더욱 탄탄하게 돌아오고 싶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돌릴 수 없기에... 만족스럽진 못하지만 만족하려합니다.
중간에 포기 하려고 했어요. 여러분들에게 바로 답글을 달아드리지 못했던 그 때. 제 실력이 너무 부족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끝까지 봐주시는 분들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어요. 실망을 안겨드릴 순 없었거든요.
네. 어찌됐든 정말 끝이 났습니다. 달동네는.
제 글을 처음, 중간, 끝까지 함께 와주신 독자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글을 조용히, 묵묵히 봐주신 분들 모두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의 부탁이 있다면, 조용히 제 글을 봐주신 분들도 오늘만큼은 댓글을 남겨주세요.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지만 그 모든 건 꾹 숨겨 놓고. 좋은 글로 곧, 찾아 뵙겠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을 달아준 이유 |
답글을 달아준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실 글을 읽고 댓글 쓰는 것. 그거 그렇게 쉬운 일 아닙니다. 한 편의 책을 읽고 그에 대한 독후감을 매회 쓰는 것과 같으니까요. 물론 제 글이 그 정도의 퀄리티는 절대 아니지만... 네. 그래서 제가 작가로서 할 수 있는게 그 정성어린 댓글에 하나하나 답댓글을 다는 거. 그거 밖에 못 했네요. 언젠가는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네. 함께해서 좋았습니다. 댓글로 소통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느꼈어요. 그 느낌을 느끼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부연 설명 |
봄과 빛
처음부터 계속 나왔던 윤기의 초록대문
수목원
사계절
따뜻하게, 뜨겁게, 아늑하게, 포근하게.
|
... |
외전 올까요, 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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