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독스에요.
내 사랑들 너무 오랜만이다, 그쵸?
그동안 못와서 미안해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어, 내가.
변명을 하자 치면 좀 많이 아프고 직장을 그만두고, 옮기고. 삶에 풍파가 좀 있었어요.
몇 년 산 것도 아닌데 좀 힘이 부쳐서 모두 내려놓고 휴양 아닌 휴양을 즐기다 왔네요.
건강이 최고에요. 모두들 아프지 않고 건강히 나 기다려준 거 맞겠죠?
두꺼운 낯짝 들고 오늘부터는 꽤 열심히 남은 럽랔슈를 마무리 짓도록 노력할게요.
중간에 몇 번이고 돌아오고 싶었는데 너무 용기가 없었어요.
나 사실 간이 개미 똥보다 작아서 말이에요.
돌아오면 나를 반기는 사람이 남아 있을까 무서워서 망설였다고 솔직하게 말할게요.
문득 독방이 그리워 찾아갔다가 용기를 얻고 찾아왔어요.
내 글 제목 서치해보다가 '아, 아직 나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구나.' 깨닫고 부랴부랴 왔어요.
날 기다려주는 사람이 한 명 뿐이래도, 난 그 한명을 위해서 글을 쓸거야.
서론이 길었네.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그저 무한히 미안하고 한없이 사랑한다는 거. 그게 핵심이에요.
이번 화를 마지막으로 럽랔슈는 이제 미자탈출을 합니다.
14화부터는 성인이 된 럽랔슈,
음주가무를 하게 되는 보다 성인스런 럽랔슈를 만날 수 있으실 거예요.
이번 글은 성급히 들고 온 글이라 완성도는 보장을 못하겠네요(눈물)
고마워요
고마워 너무
고마운 내사랑들,
그대들을 위해 이 글을 바칩니다.
...
..
.
Sentimental Scenery - Soundscape
기지개를 쭉 펴고 일어났다. 어깨부터 찌르르 퍼지는 근육통에 감기 몸살이 단단히 왔음을 확신했다. 엊그제 찬바람을 쐬고 돌아다닌 게 원인일 터. 주륵 흘러내리는 콧물을 흡 들이마시고 이불에서 벗어났다. 맨 발바닥이 장판에 닫자마자 소름이 온몸으로 뻗었다.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해.
찌뿌듯한 몸을 웅크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자 우웅 진동소리를 내며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필히 누군가일거란 확신으로 웃으며 침대 위로 몸을 내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민윤기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히죽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말하자 잠깐 키득 웃다 ‘네, 여보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민윤기의 목소리에 더 크게 소리 내어 푸하하 웃어버렸다. 요즘 우리끼리 자주 하는 농담이자 장난, 그리고 애정표현이었다.
-내가 ‘네, 여봅니다.’ 할 줄 알고 있었지?
“응.”
-그래서, 내가 ‘네, 여봅니다.’ 해주면 기분 좋아?
“응!”
민윤기는 요즘 들어 나를 더욱 우쭈쭈 해주고 있었다. 어린 아이를 대하듯, 자상하고 조심스러운 행동이 늘 마음을 간지럽게 했다. 나도 모르게 헤실 웃다 코끝이 간지러워 손톱으로 살살 긁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네 번째 손가락 위로 그려진, 어젯밤 차마 박박 문질러 씻지 못한 민윤기가 매직으로 그려준 하트 그림 반지가 귀여워 또 헤실 웃고 말았다.
-씻었어?
“아니, 아직. 이제 일어났어.”
-졸업식이라고 늦장 부리는 거야?
“아니야아.”
-우리 졸업식 아니야. 우리는 얼른 가서 강당 청소 해야지.
“아, 청소 그만 하고 싶다.”
-왜, 난 너랑 강당에서 만나는 거 좋은데.
또 의미심장한 민윤기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나랑 민윤기가 강당에서 서로 수줍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지. 멀지 않은 과거가 떠올라 입술을 삐죽였다. 지각한 날 민윤기랑 복도에서 마주쳤던 일. 그리고 나를 대신해 지각한 벌을 받게 된 민윤기. 그때의 민윤기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나를 대신해 벌을 자처해 받아 준 걸까.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인 사건이자 지금까지도 확인하지 못한 민윤기의 마음이었다. 그날에 강당에서 무슨 마음으로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걸까. 그날에 강당 앞에서 무슨 마음으로 내게 저 강아지 인형을 준 걸까.
-여보세요?
“아, 응.”
-뭐야, 통화하다 갑자기 아무 말도 안하는 게 어디 있어.
“잠깐 멍 때렸나봐. 잠이 덜 깼나.”
-무튼 일찍 와. 보고 싶다고 내가 입이 닳게 말해도 꾸물대실 거예요?
어김없는 민윤기의 보고 싶다는 소리에 웃었다. 일찍 갈게. 대답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읏차― 하는 소리에 그가 살짝 웃는 소리를 냈다. 요즘 들어 민윤기는 부쩍 잘 웃어줬다.
-이따 봐요, 내 탄소.
“네, 이따 봐요, 내 윤기.”
민윤기가 전화기에 대고 쪽 소리를 내는지, 내 쪽에서 큰 잡음이 들렸다. 웃으며 나도 전화기에 대놓고 쪽 소리를 들려줬다.
-먼저 끊어.
그 소리에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끊지 못하고 질질 끌어대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시간이 지체 될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엉덩이를 침대에서 일으켰다. 늦지 않게 가려면 삼십분 안에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빨아 놓은 교복이 어디있지.”
가려운 뒷덜미를 긁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빨래 건조대에 잘 다려진 채 걸린 내 교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미간을 구긴 채 아무도 없는 집에서 짝짝 박수를 쳤다. 역시 민윤기의 목소리로 시작하는 하루는 느낌이 좋다.
Love Like Sugar
W. 독스
13
졸업식은 생각보다 뭉클했다. 언니들이 서운한 마음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어대는 모습이 왜 이리 남일 같지가 않은지, 나는 괜히 내 앞에 늠름히 선 정호석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느 졸업식처럼 송사가 끝나고 졸업생 대표가 답사를 했다. 목이 멘 듯, 몇 번의 헛기침으로 감정을 가다듬는 학생회장 언니의 눈가가 불그죽죽한 게 아마 송사를 들으면서 눈시울을 붉힌 듯 했다. ‘답사.’ 마이크로 전해져 나오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덩달아 나도 떨리는 마음에 옆에 선 박지민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내 쪽을 흘끔 내려다보던 박지민은 내 손을 치우고 구겨진 내 옷깃을 바로 펴주었다. 잠깐 얽힌 시선에 눈을 느리게 깜박이자, 박지민은 입 꼬리만 살짝 올려 웃어줬다.
“왜.”
“몰라, 막 마음이 이상하다.”
“뭐가.”
“몰라, 내년에 우리가 저 자리에 서 있을 거 아냐. 기분 이상하지 않아?”
“왜.”
“모른다고, 새끼야.”
공감이라는 걸 모르는 자식마냥 ‘뭐, 왜.’ 만 반복하는 박지민에 욱 해서 옆구리를 쿡 찌르자 박지민은 킥킥 댔다. 나를 놀리려던 거였는지 웃어대던 박지민은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무슨 일로 감성적이야.’ 나만 들릴 작은 목소리에 입술을 삐죽이자 박지민은 ‘입, 입.’ 하며 내 입술을 툭 쳤다. 일부러 더 못생긴 표정을 지어보이자 박지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우리가 투닥거리며 장난을 치는 사이에 답사는 끝이 나있었다. 밑에 앉아있던 언니들 몇몇의 고개가 떨어지고, 오빠들은 자꾸만 헛기침을 해댔다. 모두 느끼는 감정이 아주 다른 건 아닌지, 답사를 끝낸 학생회장이 단상위로 올라 교장선생님께 답사를 전하는 순간까지도 길고 긴 침묵과 고요가 이어졌다. 교장선생님은 학생회장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었고, 이내 무거운 얼굴이던 회장 언니도 얼굴을 조금 폈다. 악착같이 이어온 12년 교육 생활의 끝. 그 마침표이자, 새로운 문장의 시작점에 선 언니의 표정은 복잡했다.
모든 식이 끝나고 친한 졸업생들과 사진을 찍을 사람 외에는 전부 교실로 돌아왔다. 흘깃 봤는데, 민윤기도 강당에 남은 듯 했다. 딱히 친한 선배를 두지 않은 나와 박지민은 교실로 돌아왔고 모범생이자 학생회장 언니와 안면이 있는 정호석도 강당에 남았다.
“오늘은 학교 일찍 마치겠지.”
“넌 오로지 그런 것들밖에 관심이 없냐.”
내 말에 박지민은 날 한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괜히 기분이 상해 뭐― 하고 박지민의 배를 툭 치자 내 손을 살짝 피하고 웃던 박지민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우리도 졸업을 하겠지.”
“아마.”
“우리도 대학을 가겠고.”
“……아마.”
두 번째 질문엔 별로 확신이 없었다.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이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선을 떨어트리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나를 말없이 보던 박지민은 ‘설마, 너 대학을 못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하고 물었다. 속을 들킨 기분에 고개를 휘휘 저었지만, 박지민은 이미 다 안다는 듯 한 쪽 입 꼬리만 올린 채 웃었고, 그게 또 얄미워서 나는 박지민의 가슴팍을 퍽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래.”
“네가 어떻게 알아.”
“정호석이 그랬어. 더하기 빼기 모르는 바보 똥멍청이 아니면 대학 갈 수 있대.”
“걔가 신이냐?”
“적어도 우리보단 나으니까, 걔 생각도 우리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럴 것 같긴 해.”
박지민은 살짝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겠지. 내 어깨를 툭 쳤다. 고개 숙인 채 눈만 들어 박지민을 봤다. 무슨 일로 어른스러운 박지민이 어이도 없고 위로도 되어서 입술을 쭉 내밀었더니, 그런 내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박지민은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너같이 못생긴 애도 대학은 받아준 다 이거지. 넓은 아량으로.”
잘 나가다 꼭 그렇게 옆길로 새는 박지민이 짜증나서 실내화 끝으로 녀석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악! 하고 소리를 지른 박지민은 허리를 둥그렇게 말고 정강이를 벅벅 문질러댔다.
“아씨, 안 그래도 추운데 발로 걷어차면 어떡해! 존나 아프다고!”
고함을 버럭 지르다 다시 손으로 정강이를 문지르는 박지민이 웃겼다. 그래서 낄낄 웃자, 박지민은 다리를 문지르다 말고 고개를 쳐들었다.
“킥킥, 하하하!”
“이게 돌았나. 길가다 머리 부딪쳤냐.”
가끔 불쑥불쑥 머릿속에 나타나고 괘씸하게 날 못생겼다 놀려대긴 해도, 박지민이 좋았다. 나에게 이렇게나 잘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 이 놈 말고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 딱 친구로 박지민이 좋았다.
*
시작은 전부 비슷했을 거다. 새로운 학기라는 설렘과 어깨에 짊어 진 자리의 무게. 내게 주어진 타이틀과 아직은 어울리지 않는 나. 새로운 나이가 그저 어색하고 새로운 학년이 그저 설레기만 한, 모두가 어수룩하게 그랬을 거다. 열여덟과 열아홉의 차이를 알지 못하듯, 고 2와 고 3의 차이를 깊이 알지 못했겠지. 아마 그래서 다들 당황했을 게 뻔했다. 나처럼.
“후우…….”
창밖을 보고서 나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컴퓨터에 띄워진 한글 문서에 ‘자기소개서.’ 다섯 글자만 적혀 있었다. 막막했다.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는 내게는 미래를 찾는 일이, 또 그 미래를 위해 뭔가를 준비해야 하는 일이 버겁고 힘들었다.
컴퓨터정보실에 앉아 키보드 위에 올려진 손가락만 굴렸다. ‘자애롭고 지혜로운 부모님 밑에서 자라……’ 글을 쓰다 다시 지웠다. ‘책임감 강한 어머니와 다정하신 아버지 밑에서 자라……’ 글자 옆에서 커서가 깜박였다. 망망대해 한 가운데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노를 젓는 것부터 해야 하는지, 키를 돌리는 것부터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야, 너 다 썼냐?”
“아니, 아직. 마무리 남았어.”
박지민은 화면에서 한시도 눈을 떼질 않고 열심히 손을 놀려댔다. 타다다닥― 바삐 움직이는 박지민의 손이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해서 괜히 박지민의 키보드만 툭 건들었다. 불쑥 나타난 화면 위의 ‘2’에 박지민은 타이핑을 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새하얀 내 화면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한 줄도 제대로 못썼지.”
“응.”
“그러니까 무턱대고 그러면 어떡해.”
“…….”
박지민의 타박에 눈을 깔고 입술을 내밀었다. 박지민은 사회복지학과를 가겠다고 했다. 평소 나 몰래 다니던 복지센터가 있었는지, 그곳의 센터장이 우리 학교 학생부장에게 박지민의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껄렁해 보여도 학교생활은 성실히 하던 박지민을 평소에도 좋게 보고 있었는지 학생부장은 흔쾌히 박지민의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했고, 덕분에 박지민은 원하던 대학에 수시 원서만 넣으면 일 년 정도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무슨 정신으로 담임에게 박지민과 같은 학교, 같은 학과를 가겠다고 했지. 나도 모르고 박지민도 의아해 했지만, 오직 담임만 그럼 그러라며 수시자료를 내게 줬다. ‘너 정도 성적이면 갈 수 있어. 물론 지민이처럼 장학생은 될 수 없지만.’ 그 말에도 상관없다며 수시 원서를 받아들던 그때의 난 대체 무슨 정신이었을까.
“진짜 알 수가 없다, 김탄소. 네 머릿속을 알 수가 없어.”
박지민은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리고는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리며 ‘봐봐.’ 하고 말했다. 흰 공간을 가득 메운 검은 글자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거 문학 선생님이 조금 손봐주신 거라서, 아주 도움 없진 않을 거야.’ 오늘 박지민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더 낮고 듬직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대충이라도 읽어본 박지민의 자기 소개서는 꽤 괜찮고, 학과가 원하는 것을 제법 나타내고 있었다. 몇 줄 읽다 고개를 푹 숙이며 ‘나 대학가지 말까….’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박지민은 내 뒤통수를 딱 하고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같은 대학 가기로 했잖아.”
“…….”
“같은 대학가서 계속 친구 하기로 했잖아.”
“…그러긴 했는데….”
“그럼 너도 대학 가야지. 난 대학 갈 건데.”
오빠 같은 박지민의 음성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내가 허튼 생각을 했지. 남들 다 가는 대학, 안가면 중간만도 못한 놈이 될 거야― 생각하며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정 답이 안 나오면 너도 문학 선생님 찾아가봐. 귀찮아하지 않으셔.”
“응, 알겠어.”
다시 모니터 화면으로 눈을 돌리는 박지민은 이내 집중하는 듯 아무 말이 없어졌다. 사나워진 눈빛이 화면을 찢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뭐가 나오니? 묻고 싶었지만 아무말 않았다. 날렵한 옆태를 보다 그냥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어디 가게?”
“문학 선생님한테.”
핑계였다.
그냥 난 나와 다른 박지민이 어색해서, 나보다 앞서 달리고 있는 박지민이 낯설어 그냥 자리를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
“별 거 아니네!”
김태형이 시험장에서 나오며 소리쳤다. 어쩌다 김태형과 같은 시험장, 같은 반으로 배치를 받은 나는 녀석과 함께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수능은 그저 그랬다. 긴장했던 것 보다는 조금 덜 무서웠고, 마음 놓았던 것 보다는 조금 더 어려웠다. 시험을 잘 치른 건지 어쩐 건지 감이 오지 않은 나는 김태형의 혼잣말에도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고, 김태형은 그런 내가 시시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조금 들 뜬 녀석의 반응에 시험을 잘 친 건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김태형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싱글벙글 이었다.
“수능 쉬웠어?”
“아니, 하나도 모르겠던데?”
“근데 뭐가 그렇게 신나?”
“끝났잖아. 잘 봤든 못 봤든 간에, 일단은 끝났잖아. 그리고 난 어차피 대학 안 가니까.”
김태형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김태형은 나보다 더 놀란 듯 눈을 깜박이다 ‘아, 몰랐어? 나 대학 안가. 바로 군대 가서 말뚝 박으려고.’ 하고 대답해줬다. 의외의 진로에 내가 아무 말 못하자 김태형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나 앉아있기 힘들어 하는 거. 몸 쓰는 것도 잘 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잘 하니까 그냥 군대 일찍 가려고. 기회 되면 계속 군인하고 싶기도 하고.”
모두 원하는 미래를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만 끄덕인 채 허공을 응시했더니 김태형이 ‘너는?’ 하고 물어왔다. 나? 되묻자 김태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나는 명성대 사회복지학과 가려고.”
“어, 거기 박지민 간다던 데 아니야?”
“응, 맞아.”
“이야― 너희는 삼년 내내 붙어 다니더니 이제는 사년 내내 붙어있겠다?”
“아마도.”
김태형은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걸었다. 내 걸음이 느린 건지, 김태형의 걸음이 빠른건지 몰라도 걷는데 숨이 턱끝까지 차 올랐다. 박지민과 걸을 땐 이런 느낌 없었는데. 숨을 몰아쉬다 김태형이 묻는 질문에 잠깐 숨 쉬는 걸 잊어버렸다.
“박지민이 어디가 그렇게 좋냐?”
“……어?”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쫓아다녀?”
누가 누굴 쫓아다녀? 김태형의 물음에 정신이 번뜩 들어오면서 갑자기 추워졌다. 그런 거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도 김태형은 눈귀를 좁히며 ‘그런 게 아니긴. 너희 맨날 붙어 다니잖아. 둘 사이에 뭐 있는 거 아니었어? 최소 네가 박지민 좋아하는 거 아니면 박지민이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 라고 말했다. 누군가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은 기분이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넋을 놓고 김태형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야, 내가 잘생긴 거 아는데 그래도 너무 그렇게 빤히 보면 좀 부담스러워.’ 김태형이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는 데도 웃어넘기지 못했다.
마치, 이 기분은 놓쳤던 뭔가를 깨달은 기분이었다.
“탄소야, 이제 나오네?”
그때 내게 말을 걸어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언젠가부턴지 모르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민윤기가 서있었다.
“한참 기다렸어. 탐구 어려웠어?”
나와 민윤기를 번갈아보던 김태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
“너도 몰랐구나. 나 윤기랑 사귀잖아.”
“아…….”
“내가 말 안했지.”
“어, 어…. 야, 그럼 내가 방금 오해했네. 미안해, 내가 입 조심이 없었다.”
“아냐.”
“먼저 갈게, 둘이 와. 방해 안 할게.”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 반짝 손을 흔들고 먼저 걸어가는 김태형의 뒤통수를 보다 내 어깨를 감싸오는 민윤기의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었어? 그리고 물어오는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태형이가 좀 오해를 하고 있었나봐.”
“무슨 오해?”
“나중에, 그거는 나중에 이야기 해줄게.”
민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볍게 내 손을 잡아 쥐었다.
“차다. 춥지?”
“조금.”
“이거 해.”
그리고 제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 내 목에 둘러주었다. 민윤기의 코끝이 닿아있던 부분이 따뜻하게 내 목을 감아왔다. 전해진 민윤기의 온기에 얼굴을 파묻고 웃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예쁘다.’ 홀린 듯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가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듣기 좋았다.
“한번 더 말해줘.”
“예쁘다.”
“한번만 더.”
“예뻐.”
민윤기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내 등 뒤로 수명의 여자 무리가 지나가며 웅성댔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민윤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까끌한 교복 재킷의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 좀 전까지 내 머리를 세게 두드렸던 이상한 기분을 없앴다.
“사랑해, 윤기야.”
나도, 사랑해. 낮게 울리는 그 목소리가 잊혀질 듯 말 듯 한 내 기분을 지워냈다. 금방 또 기분이 좋아져 미소 지으며 얼굴을 붉혔다.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 던 민윤기의 큰 손이 내 가물가물한 기억의 끝을 잡았다.
*
“결국 섰네, 이 자리.”
“그러게.”
박지민이 내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우린 일 년 전의 우리가 바라보던 그 곳에 서있었다. 딱딱한 표정과 경직된 자세로 서있는 삼학년 졸업생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단상 위의 태극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나도 박지민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졸업생, 그리고 재학생 여러분. 아직 찾아오지 못한 봄이 기다리는 오늘,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여 서있습니다.”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다시는 들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서운 한 것도 같은 기분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전해지는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강당 안으로 울려 퍼지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바닥에 깔린 초록 매트가 낯선 건지, 단상 위에 앉은 처음 보는 손님들의 얼굴이 낯선 건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기분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옆의 박지민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더는 아침에 일어나 이 학교로 등교를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으면 살짝 고개를 까닥이기도 하면서 집중이었다. 일학년 초기와 지금의 박지민은 확실히 다른 느낌이 있었다. 마냥 어린 학생 같던 박지민은 요즘에 들어서 부쩍 늠름해졌다.
“우린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슬퍼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잠깐의 안녕이자, 새로운 만남임을 알고 있기에 오늘의 이 자리를 웃으며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생각임을 교장인 저는, 확신 합니다.”
정호석은 대한민국 상위 1프로의 대학에 합격했다. 그럴 줄 알았다던 박지민도, 이변은 없을 거라던 나도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TV에서나 들을 수 있던 그 학교에 합격한 정호석은 우리보다 더 덤덤했다. 오히려 앞으로 해야 할 공부가 많아졌다며, 수능 전보다 더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와 박지민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는 또 그만의 세계가 있을 거라고 이해했다. 아니, 이해하는 척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능 끝난 지가 겨우 몇 개월인데 그새를 못 참고 공부라니. 혀를 끌끌 찬 나를 보며 박지민도 완전 다른 생각은 아닌 듯 눈빛을 주고받았었다.
박지민도 원하는 대학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그리던 그림대로 일 년 장학생으로도 발탁 되었다. 나 또한 그와 같은 대학에 합격했다. 면접 때 많이 떨어버리긴 했지만, 다행이도 합격이었다. 우린 이제 또 다른 사년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박지민의 합격 소식에 너무 기뻐서 박지민의 등을 손이 빨개질 정도로 두드렸고, 그런 다음 나의 합격 소식엔 너무 놀라 박지민을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박지민은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내 등을 토닥여 주었고 다정한 목소리로 ‘축하해. 잘 됐다 정말.’ 하고 말해주었다. 그러다 어색해하며 품에서 떨어지는 나를 보고는 픽 웃었었다. 뭐야, 먼저 안아놓고 지금 피해자 코스프레?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는 박지민을 잃을까, 잠깐 몇 개월 마음고생한 일이 떠올라 괜히 코끝도 시큰 한 것 같았다.
“모두들 웃는 얼굴로 헤어지고, 또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그대들을 만나 반가웠습니다. 이상.”
차렷. 재학생, 졸업생 모두 인사. 사회자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교장 선생님도 교단 옆으로 나와 우리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또 뭉클했다. 오늘의 졸업식으로 나의 고등학교 삼년이 마무리가 될 거라는 생각이 자꾸 나를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다음은 재학생 대표의 송사가 있겠습니다. 재학생 대표, 앞으로.”
이학년의 여 후배가 나왔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와 선하게 휘어진 눈매가 꼭 정호석이 여자라면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야, 쟤 정호석이랑 진짜 닮았다.’ 나만 느낀 건 아닌지, 옆에서 박지민이 앞에 선 여 후배를 가리켰다.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송사.”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나가던 재학생 대표의 글이 꼭 편지처럼 느껴졌다. 포장하기 식으로 쓰인 문장들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진실하게 전해졌다. 생각보다 빨리 송사가 끝이 났고, 사회자 선생님이 마이크를 들자 맨 앞줄에 앉아있던 정호석이 파란 책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졸업생 대표의 답사가 이어지겠습니다. 졸업생 대표, 앞으로.”
정호석은 몇 걸음 걸어나가 마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떨리는 지 심호흡도 했다. 덩달아 나까지 떨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답사.”
조금 떠는 목소리였다. 정호석은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올렸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 박지민의 옷소매를 잡았다. 전해지는 무게감에 박지민이 내 쪽을 흘긋 내려다보았고,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기분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추웠던 날씨가 개이고, 어느 덧 교단 앞에 싹들이 자리하고 앉았습니다. 계절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렸던 우리에게 이제 잠깐 앉아서 숨을 돌릴 때가 온 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또박또박 글자를 읽어 내려오는 정호석의 목소리에 괜히 내 목 끝이 저릿하게 당겼다. 한 박자 멈추고 숨을 고르는 정호석과 잠깐 눈이 마주친 건가 싶은 찰나에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빨리 달리다 지친 친구, 갈피를 못 잡고 제자리만 맴돌던 친구 가릴 것 없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자리에 앉아있네요.’ 며칠 고민하며 준비한 정호석의 답사는 역시 완벽했고 모두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일 년 전의 그날처럼,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보이는 여학생들도 몇몇이 보였다. 칼칼하게 잠겨오는 목을 몇 번이나 풀어대고 옆에 앉은 박지민을 쿡쿡 건드려 보아도 젖은 감정은 쉬이 가시지를 않았다. 정호석이 읽어가는 몇 줄 사이에 장내는 보다 엄숙해졌고, 졸업생 모두는 그가 말하는 추억과 미래에 완벽하게 젖어들었다. 그건 나도 박지민도 마찬가지였다.
즐거웠던 기억들과 잊지 못할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으로 스쳐지나가는 듯 했다. 잊어서는 안 될 어느 날의 기억과 잊고 싶은 어느 날의 기억. 그 모든 기억들이 추억이 되어 오늘로써 정리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앞에 선 정호석은 어떤 기분일까. 자신의 말로써 앉아있는 졸업생 모두가 짧게는 지난 삼년, 길게는 지난 십 이년의 학창생활을 추억으로 정리하는 지금 본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에 괜히 눈 끝이 젖어드는 것 같아 눈을 벅벅 비볐다. 그러자 박지민이 흘끔 나를 쳐다봤다. 나는 반사적으로 ‘안 울어.’ 하고 작게 말했다.
“저는 후련합니다. 시원하고 조금은 아쉽습니다. 모두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값진 기분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떠나겠습니다. 앉은 자리를 비워주며 우리는 다시 달리던 그 자리로 돌아가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우리가 비운 자리를 누구보다 빛나게 채워 주심을 부탁드리면서, 모두에게 감사와 안녕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답사가 끝이 났다. 긴 숨을 몰아 내쉰 정호석은 들고 있던 책자를 덮어 단상으로 올라갔다. 교단 앞에 서있던 교장선생님은 정호석이 단상으로 올라가자 교단 옆으로 나와 맞이했다. 정호석은 가지런히 접은 책자를 교장선생님께 건넸고, 그 책자를 받아 든 교장선생님은 정호석을 가볍게 안았다. 그리고 인사를 담아 그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공손한 인사를 올린 정호석은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남은 식을 차례로 마치고 교가 제창과 스승의 은혜 제창이 이어졌다. 그리고 재학생들의 축하 무대도 이어졌다. 꽤 축제 같은 분위기의 졸업식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아 즐겁게 식을 마무리했다. 모두 같은 졸업장을 받고, 비슷한 꽃다발을 안은 채 우리는 셋이 마주보고 섰다.
“사진 찍을 거지?”
“당연한 거 아니냐.”
가족들과 사진 찍기에 앞서서 나와 박지민, 정호석은 셋이 나란히 섰다. 그리고 각자 부모님이 들고 오신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나중에 좀 커서 보면 이 사진 개 흑역사일듯.”
“인정.”
우린 웃었다. 웃음으로 헤어지는 슬픔을 대신했다. ‘야, 정호석. 너 연락 꾸준히 해라. 혼자 좋은 학교 다닌다고 우리 무시하면 죽음이야.’ 박지민의 말에 나도 옳다구나 동의했다. 설마 그러겠느냐고 손 사레를 치던 정호석도 우리의 기세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너네나 잘해!’ 라고 반박했다. 모두 즐거웠다. 우리의 졸업식은 즐거웠다.
웃는 박지민을 보며, 정호석을 보며. 내일이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어. 나는 남몰래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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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방으로 들어 온 너는
아무 말 없이 침대로 올라와 누웠다.
나도 별 말 없이 이불을 들춰 주었으며
너는 그런대로 내 허리를 끌어 안았다.
떠나도 달라진 것이 없듯,
돌아와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너 하나.
다시 내게 들어 찬 너 하나.
* 미안합니다.
* 너무 늦게 돌아 온 나를 부디 용서해줘요.
* 그럼에도 날 잊지 않아준 내 사랑들이 있어 내가 존재 하나 봅니다. 저는 이렇게 또 살아 있음을 느끼네요.
사랑해요. 얼마나 더 사랑한다 말해야 내 마음이 다 할 수 있을까요.
*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사랑합니다 (쪽) 오타나 탈자는 애교로(찡긋) 댓글로 알려주시면 더욱 좋아요
* 작가님이라는 호칭보다는 독스님이라는 호칭이 더 좋아요(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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