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 홍일점 II
#1
"...... 아."
복통 때문에 잠에서 깼다. 생리통이다. 한 번 아프면 몇 시간은 가기 때문에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약을 먹을 생각이다. 눈 비비며 부엌으로 나갔더니 민윤기가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또 늦게까지 작업하는 거다.
"아직도 안 자?"
"......."
"언제 자려고?"
"......."
내 말이 이가탄인가 보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게. 아, 다시 보니 민윤기가 헤드폰을 끼고 있다. 나는 김빠진 얼굴로 민윤기를 지나쳐 주방으로 들어간다. 천장을 열어 전에 놔뒀던 복통약을 찾으려 손을 더듬는다.
"저러다 몸이나 망가져라. 엉망진창."
"......."
"내 목소리는 주파수가 다른 거지? 존나 초음파라도 되는 거지?"
"......."
"지금이야 헤드폰 꼈다쳐도, 오늘 너한테 씹힌 말만 몇인 줄 알아?"
민윤기는 가끔 자기한테 곤란한 질문이나 쓸데없어 보이는 말을 하면 무시해 버리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많이 싸우기도 했었다. 이제는 그저 민윤기의 여러 습관 중 하나라는 걸 알지만 무시당할 때마다 기분이 구린 건 변함없다.
김남준은 내 말을 들으면 한숨이라도 쉬지, 민윤기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들리지도 않을 거 계속 툴툴대며 계속 찬장을 더듬었다. 이 놈의 약통은 대체 어딨는 거야.
"왼쪽에서 두 번째."
"......."
"......."
갑자기 난 소리에 뒤를 돌아봤지만 여전히 보이는 건 민윤기의 뒤통수 뿐이다. 두 번째 문을 여니까 아니나 다를까 약통이 보인다. 이걸 언제 여기다 뒀지? 기억을 더듬다가 다시 몸을 돌려 민윤기의 차분한 뒤통수를 쳐다본다.
"... 어떻게 알았어?"
"이유 없이 내 팔 꼬집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뾰루지 났다고 소리 지르고, 뉴텔라 들고 다니면서 퍼먹고."
내 복통의 원인과 내가 찾던 약이 뭔지 어떻게 알았냐고 물은 건데, 돌아오는 대답은 생각보다 구체적이었다. 저렇게 티를 내고 다녔나 싶어 할 말을 잃은 나는 조용히 약을 꺼내 삼킨다.
"그리고 인하무인이 아니라, 안하무인."
"......."
나는 눈을 꼭 감고 뒈지기로 한다.
#2
"응. 이제 똥머리도 된다!"
"똥머리? 그거 하면 뭐가 좋은데?"
나는 전정국의 질문에 인상을 쓰고 잠시 고민한다.
"...기분이?"
"퍽이나."
내 대답에 전정국은 김빠진 표정으로 냉장고에 고개를 박는다. 작년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잘 기르던 머리를 단발로 확 잘랐었다. 그때가 겨울이었으니까, 그 바람은 북서풍일 거다. 이래서 겨울을 조심해야 하는 거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거지존을 겨우 탈출하고 머리가 꽤 자랐는데, 그걸 전정국이 문득 상기시켰다. 나는 식탁에 앉아있는 민윤기와 노트북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머리 많이 길렀지."
"......."
"많. 이. 길. 렀. 지."
"어."
나는 민윤기의 대답을 듣고서야 흡족한 얼굴로 노트북 앞에서 나왔다. 내 모습에 김태형이 부엌으로 들어오며 묻는다.
"야동 많이 봤어?"
"응!"
"......."
등 뒤로 김남준의 한숨이 들린다. 하지만 하루 이틀 듣는 것도 아니니까 넘어가기로 한다. 나는 이어서 자랑을 해댄다. 이제 머리가 가슴까지 닿는다! 하고.
"그럼 뭐해. 머리에 닿을 가슴이 없잖아."
"......."
"아! 더럽게 진짜! 뒤지고 싶어? "
지나가던 김남준이 툭 뱉은 말에 김태형이 전정국의 등에 대고 마시던 물을 뿜었다. 그리고는 사래라도 걸린 건지 미친듯이 기침을 해댄다. 전정국은 김태형이 기침을 하든 기절을 하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더럽게 진짜! 하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부엌에 등 뒤로 민윤기의 한숨이 들린다.
#3
아침에 일어나 출근 시간이 비슷한 전정국과 나란히 거울 앞에 섰다. 전정국은 면도를 하고 나는 양치를 한다. 전정국은 얼굴에서 거품이 나고 나는 입에서 거품이 난다. 한 손에 칫솔을 들고 한 손에 컵을 들고 입을 헹구려니까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서 자꾸 물이 묻는다.
"......."
"금스."
인상을 쓰면서 머리를 흔들고 있는데 전정국이 면도를 하다 말고 내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잡아준다. 감사. 하고 또 물로 가글을 하는데,
"... 으그 느르."
"뭐?"
"느으르그."
"잘 안 들려."
양치물을 뱉으려고 할 때마다 전정국이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머리를 뒤로 잡아당기는 거다. 이거 놔라. 놓으라고. 내가 정색하고 말해도 양칫물을 입에 물고 있으니 전정국은 계속 안 들린다고 말하며 처웃기 바쁘다. 눈으로 살인 협박을 해도 이미 웃겨 죽으려는 전정국에게는 보이지도 않는다.
"......."
"......."
"너 일로 와!!!!!"
결국 나는 물을 전정국의 얼굴에 뿜고 튄다.
#4
저녁을 다 먹고 거실에 빙 둘러앉아 티비를 본다. 아육대다. 오늘은 누가 메달 따는가, 를 두고 전정국과 김태형이 내기를 벌인다. 문제는 둘 다 틀린다는 거다. 난 이제 모르는 얼굴들이 많은데, 이 둘은 모르는 아이돌이 없다.
"쟤 진짜 예쁘지 않냐?"
"쟤는 네가 지금 베란다 밖으로 떨어져서 뉴스에 나와도 몰라."
"뭐, 너는 아냐?"
"어. 어제 내 작업실에 왔는데."
"뭐라고!"
민윤기에 말에 김태형이 벌떡 일어난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눈을 동그랗게 뜬다. 하지만 정작 민윤기는 천하태평에 시큰둥하다. 말해서 뭐하게. 김남준도 눈이 동그래진 걸 보니 쟤도 몰랐나 보다. 우리는 차례로 민윤기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너 요즘 뭐 필요한 거 없냐."
"넌 왜 그럴 때만 나 안 불러? 존나 서운하게."
"나보다 예뻐?"
내 말에 일제히 조용해져서는 민윤기가 아닌 나를 쳐다본다. 뭐, 왜. 불만있냐는 얼굴로 틱틱대니까 다들 말없이 일어나더니 각자 방으로 들어간다. 말은 안 해도 오늘은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보라고 자리를 피해주고 배려해주는 거다. 이런 사려 깊은 씨발 친구들.
#5 : 민윤기 시점
그녀는 방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윤기야 나와 봐, 누구야 나와 봐. 하면서 한 명씩 불러 앉혀놓고 거실을 왔다갔다 돌아다닙니다. 할 말이 있나 봅니다.
"왜 그렇게 예뻐요?"
"......."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예뻐요? 뭐 먹고 그렇게 예뻐요?"
"......."
"이번 주 통틀어서 학교에서 가장 많이 들은 소리야.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술하시오. 서술형 3점."
뜬금없이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겨우 하는 말이 저겁니다.
"들어가서 반성문 써와."
"난 진지해."
"그 말들을 네 옆자리 선생님이 듣는다는 거지?"
"......."
미안. 그녀의 째림에 태형은 다시 입을 다물고 다리를 모으고 앉습니다.
"너는 어떤데. 그 사람 마음에 들어?"
"아니!"
내 한 마디에 그녀는 경기를 일으킵니다. 아침부터 쉬는 시간 내내 어디서 튀어나오는 것도 모자라 학교가 끝나고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라고까지 말했다는 그녀는 치를 떨고 있습니다. 더럽게 싫은가 봅니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그녀가 갑자기 김남준의 앞에 서서 남준의 손을 꼭 잡습니다.
"나 좀 도와줘. 어떻게 하면 떨어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야 네가 연애 경력이 제일 화려하니까."
"야, 쟤가 하는 건 연애가 아니지."
옆에서 가만히 듣던 정국이 발끈합니다. 쟤가 하는 건 연애도 아니라고. 집에 여자를 데려오는 일이 잦은 남준이 그녀의 눈에게는 연애 고수로 보였나 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남준의 가장 길었던 연애 기간을 따지자면 두 손 안에 꼽힙니다. 일주일이거든요. 저 새끼는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막는 쓰레기입니다. 하지만 알 리 없는 그녀는 눈도 초롱초롱 빛내며 도와달라고 합니다.
"남자 친구 있다고 해."
"이미 했어."
"남편 있다고 해. 애도 둘 있다고. 하루 정도는 내가 남편인 척 해줄 수도 있어."
"야! 내가 도와달랬지 유부녀로 만들어 달랬냐?"
그녀는 잡았던 남준의 손을 뿌리칩니다.
"아니면 한 번 만나 보든지. 또 모르지, 만나다 보면 마음이 맞을지."
드디어 김남준이 말다운 말을 합니다. 이건 김태형의 그림 일기에 써놓고 김남준 집의 가보로 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근데 마음보다는 몸이 맞아야 오래가기는 하더라. 혹시 아냐. 이참에 좋은 파트너가 생길,"
"......."
김남준을 벌레보듯 몇 초간 쳐다보던 그녀는 머리를 짚으며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녀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우리 셋은 김남준을 밟습니다. 이 새끼는 밟혀도 싸요.
#6
민윤기랑 김남준은 어제 작업실에서 밤샌다고 했고, 김태형과 전정국은 아직 잔다. 나 혼자 평온한 주말 아침을 만끽하면서 늦은 아침으로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었는데,
"... 아."
"......."
"... 아!"
간이 잘됐나 먹어보려고 고개를 숙이니까, 머리가 자꾸 흘러내리는 거다. 얼마 전까지도 뿌듯한 머리였는데 음식 앞에서는 짜증 덩어리가 됐다. 한 손으로는 국자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뜨거운 걸 못 먹는 탓에 찬 물이 든 컵을 쥐었다. 둘 중 어느 것도 양보할 수가 없단 말이다.
"... 병신도 아니고."
전정국이 내 머리를 모아 잡고는 턱으로 김치찌개를 가리켰다. 잡아줄 테니까 먹어.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젓는다. 지난 아침처럼 고개만 숙이면 내 머리를 당기려는 속셈을 누가 모르냐고. 요즘은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머리 잡으러 오는 것 같다. 난 매일 아침 강제로 전정국의 기쁨조가 된다. 존나 수치다.
"이번에는 안 할게."
"놓으라고."
"진짜 안 할 테니까 먹어."
"......"
"먹으라니까?"
또 당했다. 고개 숙일 때마다 잡아당겨놓고, 뭐? 먹으라니까? 좋아 죽는 전정국은 말없이 째려보니까 손으로 내 머리를 꾹 눌러 숙이게 만든다. 누가 만들었는 지는 몰라도 김치찌개는 완벽했다. 맛있어? 전정국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내 머리를 놓고 숟가락을 가지러 간다. 지 준다는 말은 안 했는데 숟가락은 왜 챙기나 모르겠다. 김칫국을 끓였더니 김칫국 드링킹이다. 얘는 찌르면 피가 아니라 김칫국이 흐를 거다. 전정국은 내 뒤에 서서 숟가락을 들지 않은 손으로 내 머리를 빗었다.
"넌 단발보다 긴 머리일 때가 더 예뻐."
... 뭐. 그렇다고 한다.
#7
소파에 누워서 전정국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데 카톡 알림이 떴다. 아! 뒤질뻔했잖아! 짜증을 내며 계속 게임을 하는데 이번에는 아예 알람을 눌러버렸다.
"... 이게 뭐다냐."
원래 남의 카톡 같은 거 안 보는데, 카톡 방 멤버가 이상하다. 나를 제외한 독수리 오형제가 있는 거다. 김남준, 민윤기, 김태형. 그리고 전정국까지. 아, 이러면 내가 없으니까 사형제인가. 아무튼. 감히 나를 왕따 시켰겠다. 카톡 내용을 찬찬히 보니까 카톡은 없고 죄다 사이트 링크 아니면 영상들을 보내놨다. 거의 구글 드라이브 수준인데... 메모장보다도 못해보이는 카톡방에 올라 온 많은 영상 중에 하나를 눌렀는데,
-자, 자기야! 흐읏, 읏!
"......."
"......."
야동이다. 심지어 게임한답시고 소리도 최대로 올려놨다. 거실을 지나가던 민윤기가 동작을 뚝 멈췄다. 방금 튼 영상의 전송인이니까 이게 무슨 영상인 지는 잘 알 거다. 민윤기는 나와 마주친 눈을 굴렸다.
"있잖아, 그게... 그... 아, 이걸 뭐라고 해."
"너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니네가 이러고도 인간이냐?"
"야, 사람이 그럴 수도,"
"나도 공유해줘!!!!!"
"......."
나는 경악하며 도망가는 민윤기의 뒤를 쫓아간다.
-
암호닉은 이번 글부터 받도록 하겠습니다.
[ ] 여기 안에 넣어서 써주시면 제가 조오금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저번 글에 신청해주신 분들은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신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 얼른 암호닉으로 한 분 한 분 기억하고 얘기하고 부둥부둥하고 싶네요. 다 예뻐서. 이거 거짓말 아니고 저 진짜,
댓글 하나하나 이러고 봤습니다. 제 글의 조회수 절반이 저 아닐까 할 정도로 여러 번 읽었습니다. 네.
다들 잘 지내셨나요? 일교차도 심하고 날씨도 변덕을 부리는 만큼 몸 조심 꼭 하셔요. 전 벌써 수면 양말을 신고 잡니다. 할머니 다 됐어요. 요즘은 비 오기 전에 무릎도 시립니다. 인생...
참, LED 램프는 보통 그렇게 아프지 않다고... 윤기 말대로 정말 별로 아프지 않았슴다. 네.
오늘도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구빰!
BGM : Banana pancak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