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7구역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합니다.
[세븐틴/최한솔] 눈 뜨다
w. 뿌존뿌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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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을 휘감는 이상한 감각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나를 빙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 내가 여기 왜 누워있는지, 난 누군지 알아차릴 틈도 없이 숨막힐 듯 들이대는 손전등, 주사 바늘, 체온계, 카메라. 카메라. 카메라? 내가 카메라라는 말을 어떻게 알지?
"정신이 들어요?"
복제인간 17호, 닉네임 버논. 온통 하얀 이 방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은 난 복제인간이고, 내 이름은 버논이다. 본체는 V라는 이 연구소의 연구원. 사고를 당해 쓰러진 V를 대신하기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존재. V가 깨어나면 난 어떻게 되는걸까.
"W, T는 얘를 어쩌라는거야"
"모르죠 뭐, 그나저나 S. 고위간부들 오기전에 여기에 적응시켜놔야하지 않겠어요?"
"그럼 T한테 무전 넣을까?"
"그래요, 가만보면 S도 T한테 무전 넣는거 되게 좋아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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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버논?"
"........."
예쁜 여자, T라는 여자가 날 보고 웃는다. 날 안아주고, 재워주고. 태어난지 이틀 된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V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오늘 급식은 어쨌다는 둥, 오늘 연구는 어땠다는 둥. 날 보는 네 눈빛이 그저 한 실험체를 보는 눈빛이란걸 알면서도 난 당신을 놓을 수가 없다.
"미안 버논, V가 깨어났어."
V, 또다른 나. 아니다, 그를 뭐라고 칭해야할까? 아파오는 머리에 고개를 묻고 웅얼거리듯 그녀에게 물었다. 내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안절부절 하는 손이 보인다.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내 다시 그녀의 무릎으로 안착하는 손. 잔 상처가 많다. 내가 다 아프다. 꼭 잡아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난 복제인간이다.
"그럼 T, 나는 어떻게 되는거예요?"
"세상으로 나가는거야. V가 원래 살던 곳은 아닐거야"
"아,"
"아마 네가 복제인간인걸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이쪽에서 잘 조치해줄거야.
그동안 고마웠어 버논, 잘 살아야 해"
"많이 보고 싶을거예요. T도, 이 연구소도"
내가 T를 보면서 느끼는 이 감정을 뭐라고 정의해야할까. 엄마를 보는 아이의 감정? 아니면 여자를 보는 남자의 감정? 여튼 중요한것은 복제인간인 내가 죽을 때까지 그녀를 잊지 못 할 것 같다는 거다. V라는 사람을 대신하기 위해 날 만든 T를 평생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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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창문이 창살로 막혀있는 버스를 타고 덜컹덜컹거리며 연구소를 떠나는 길. 사실 이곳이 한국인지, 외국인지 알 길은 없지만 정확한건 여기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라는거다. 살짝 찢어진 선팅 필름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햇빛은 연구소 안에서 태어난 나에게 무언가 희망 같은 거였고, 난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스무살의 몸으로 태어난지 한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난 살아가기에 썩 괜찮은 놈이란걸, 그 햇빛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T?"
"예?"
"T! 연구소에서 나온거예요?"
"누구세요?"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온지 일주일. 길을 걷다 T를 봤다. 아니, T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사뭇 달랐지만 그녀는 분명한 T였다. 아는 척을 해봐도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연구소에서 나가면 모든 기억을 지운다는 T의 아픈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래, 다시 시작하면 돼.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시 시작하면 돼, T
"이름이 뭐예요?"
"김세봉이요"
"난 버논이에요"
그래, 다시 시작하면 되는거다. T의 본명이 김세봉이었구나, 김세봉.. 세봉. 입 안에서 한참을 우물거리며 그 자리에 뚱하게 서있자 세봉이 햇빛을 가리기 위해 들고있던 양산으로 내 팔 언저리를 꾹꾹 누르며 묻는다. T의 예쁜 손에 끼워진 반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거기서 계속 서있을 거예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차라도 마실까요?"
그리고, 그녀가 내게 한 말로 미루어보았을때, 그녀의 무의식 속엔 내가 어느 정도 남아있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아닌 여자 대 남자로? 비가 온다. 햇빛을 막기 위해 펼쳐져 있던 그녀의 양산이 제기능을 하지 못한다. 뜨거운 햇빛대신 찬 빗물만이 우리 둘을 오롯이 적신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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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날 처음 봤을때 왜 T라고 불렀어요?"
"아- 그냥 알던 어떤 사람하고 많이 닮아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그건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다는 세봉이의 목소리가 가슴에 아프게 꽂힌다. 불과 일주일전의 다정한 T의 목소리가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세봉이의 목소리. 일주일 사이에 참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내 전부이던 그녀가 변했고, 내가 변했다. 복제인간이던 내가 오롯이 인간의 구실을 해나가며 살고 있으며, V라는 사람은 아마 다시 복귀해 많은 일들을 하고 있겠지. 이상한 생각이든다. 다시 연구소로 돌아가면 T가 있을 것 같다, 내 앞의 세봉이 아니라 T가.
"아마 봤어도 기억 못 할거예요 난"
"예?"
"예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전의 기억이 없어요."
"몇살때요?"
"한 5년 전? 깨어났을 때 모든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했어요."
오늘 처음 만난 낯선이에게 그녀는 그녀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녀를 보는 내 눈빛이 처음 본 이를 보는 눈빛이 아니란 걸 알았던걸까, 세봉이 제 고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힘겹게 말을 시작했다. 그녀의 손을 꼭 잡는다. 일주일 전, 나로 인해 아파했던 T의 손을 잡지 못했지만, 이젠 잡아본다. 따뜻하다. 그녀가 놀라 날 응시한다. 더 세게 쥔다.
"너무 아픈 기억이라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거래요, 그 차안에는 저 말고 또다른 제가 있었어요"
"......."
"제 쌍둥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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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봉! 나와 결혼해줄래요?"
안녕 T? 오늘은 세봉과의 결혼식 날이에요. 정말 T의 말대로, 전 복제인간인 것을 숨기고 잘 살아가고 있어요. T와 아주 다르지만 T를 꼭 닮은 세봉이는 연구소 밖의 제 활력소라는걸 T가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T, 오랜 시간이 흘렀네요. 당신이 연구소를 나왔다면 날 기억하지 못할테고, 연구소에 그대로 있다면 날 그저 지나가는 그냥 그런 실험체로 기억할테지만 난 신경쓰지 않을래요. 당신이 어디있는지 이젠 알지 못하지만, 어디에 있던지 늘 행복하길 바라요, V라는 사람도 항상요.
설명 |
갑자기 올라온 이상한 글에 많이들 놀라셨죠? 이 글은 17구역에 관련된 여러 사건들중 하나를 다룬 글입니다.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세봉과 T는 쌍둥이예요. 두 사람이 쌍둥이라는 건 손에서 알 수 있습니다.
흔히들 쌍둥이는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해도 무의식적으로 연결된다고 하죠, 세봉이 버논을 처음 봤음에도 경계하지 않은 것은 그 탓입니다.
두 사람이 18살일때 불의의 사고를 당했고, 세봉이는 구조 되었지만 T는 구조 되지 못했어요. 그냥 그대로 파도에 휩쓸려서 연구소 근처까지 밀려가죠. 연구소에서는 T를 구조해서 기억을 지운 후 연구원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T. T라는 별칭의 뜻은, 발견하다 - trouver의 T를 따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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