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아이야
공허에서 태어난 아이야
외로워지는 법을 배우렴
어둠속에서 너의 길을 찾는 법을 배우렴
-오페라의 유령 中
-
"설마 대가 없이 널 넘겨주는거라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이미 말했잖아, 난 자선사업가는 못된다고."
어둡게 덧칠된 무의식 속 온몸을 불길하게 감싸오는 뱀의 그것과 같은 목소리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침대보를 거칠게 걷어냈다.
이런 밤도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갑작스레 밀려들어와 머릿속을 역하게 채워버리는 그런, 밤.
시곗바늘이 겨우 열시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고선 태용의 방으로 비틀대며 향했다. 밤은 길테고, 태용의 품은 그런 밤을 순식간에 지워내줄 것이라는 모순적인 기대를 안고선. 몇번의 노크에도 열리지 않는 문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이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뒤에서 황급히 느껴지는 누군가의 손길에 뒤를 돌았다.
"아가씨, 보스는 지금 급히 일이 생기시는 바람에..."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듯, 유타는 뒷머리를 성글게 매만졌다. 분명 아가씨가 일어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릴줄 알았는데... 유타의 말대로 나는 한번 잠에 들면 꽤나 오랜시간 동안 깨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나같이 둔한 사람에게도 오늘같은 밤은, 예외다. "오늘은 좀 재수없는 꿈을 꾸는 바람에." 의도한 것보다 꽤나 날카롭게 나가버린 대답에 유타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뭐, 다들 그런 날이 있지. 유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다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 이런 때에 없을 건 또 뭐야." 다른 때에는 보기 싫어도 있었으면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말하는 내 모습에 유타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가씨 그런 말 함부로 하면 못써. 여기에 보스가 계셨더라면..."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서리를 치는 유타의 모습에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저와 태용 단 둘이서만 있을 땐 태용아, 하고 잘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유타는, 내 앞에서는 그를 보스, 라 칭한다. 마치 내게 그를 향한 충성심이라도 강요하듯. "뭐 어때. 어차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잖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하는 내 모습에 유타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아가씨 깡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고개를 내저으며 감탄하는 유타를 뒤로하고 태용의 방 문에 손을 얹었다. "오늘은 여기서 잘래." 잡생각들이 하도 판을 쳐서, 정신 사나운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말이야.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유타가 본래 향하던 방향으로 걸음을 이었다. 고작 몇마디의 대화로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비웃으며 태용의 방 문을 열었다.
언제 열어도, 그의 방 문은 내 팔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무겁다.
옆에서 자꾸만 느껴지는 기척에 눈을 떴을 땐,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태용의 얼굴에 숨을 헙, 하고 크게 들이쉬었다. 놀란 티가 확연히 났을게 분명한 내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태용은 잠결에 뒤척이느라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제 손가락으로 가만히 빗어내려갔다.
"우리 공주님한테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태용의 입술 한쪽이 들어올려지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그려냈다. 그런 태용의 표정에 가만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잠이 너무 안오더라고." 내 대답에 태용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 깊게 패였다. 잠이 안온다,라.... 가만히 중얼거리던 태용이 이내 내 뒷목을 한손으로 그러쥐고선 제 입술을 내 것과 맞대었다. "밤새도록 잠못자게 괴롭히면, 그제서야 잠이 오려나?" 태용이 입을 열때마다 내 입술에 스치우는 감촉이 간지러웠다. 내 입술을 느끼듯 한동안 제 입술을 가만히 맞대고 있던 태용이 이내 내 콧등에 입을 맞추고선 점점 아래로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콧볼에서 턱으로, 턱에서 목으로. 가만히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태용의 입술이 쇄골로 향하고, 제 입술을 벌려 내 쇄골뼈를 가만히 머금고 있던 태용이 이내 제 이빨을 세워 쇄골에 동그란 자국을 남겼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띄운 태용이 엄지 손가락으로 가만히 그 자국을 문지르다 말고 일어나선 방 한켠에 놓인 진열장에서 헤네시를 꺼내들었다. 꽤나 독한 술인듯, 뚜껑을 개봉함과 동시에 알싸하게 퍼지는 알콜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내 표정을 본건지, 태용이 얼음컵에 헤네시를 따르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까지도 독한 것들은 견뎌내질 못하네." 그런 태용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응수했다. "그럴리가. 만약 내가 독한 걸 못견뎌했다면 이 방에서 나갔을거야." 내 대답에 태용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곤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았다. 적어도 이번에는 그의 웃음이 눈까지 미치진 못했다.
"우리 공주님이 잠들지 못한 이유가 궁금한데."
컵을 둥글게 흔들며 제멋대로 떠다니는 얼음을 더욱 어지럽히던 태용이 무심한듯 물었다. 그런 태용의 물음에 대답없이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처연한 푸른 색의 새벽빛에 비친 태용의 피사체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울 것 만 같다는 착각이 들어 눈을 감고 두 팔로 눈을 가린 채 이미 뻑뻑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좋은 꿈을, 꿨어."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태용이 헤네시를 크게 한모금 들이켰다. 뜨거운 호박색의 액체가 들어감과 동시에 태용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안좋은 꿈?" 한족 눈썹을 치켜 올리며 태용이 되물었다. 무슨 꿈이었길래 우리 공주님이 이럴까. 다정하게 덧붙이는 태용의 말에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누가 자꾸만, 나를 데려가려고 했어." 내 말에 태용은 한동안 아무말이 없었다. 대답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듯, 천천히 헤네시를 한모금 더 들이킨 태용이 컵을 침대 맡 탁상 위에 내려놓으며 내게 입을 맞춰왔다. 그의 입이 벌어짐과 동시에 내 입안으로 뜨거운 액체가 옮겨들어왔다. 갑작스레 들어온 알콜의 기운에 삼키지도 못하고 볼을 부풀린 채 인상을 찡그리는 내 모습을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태용이 내 얼굴을 쓸었다. "잠이 안올 때에 독한 술을 마시면, 아무 생각없이 잠들 수 있지." 내 볼을 부드럽게 쓸던 태용이 유하게 올라간 제 입술의 호선을 무너트리더니 이내 퍽 차가워진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의 꿈이라면, 신경쓰지 않는 편이 좋아."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들은, 사악한 것들로부터 저들이 구한 공주님을 두번 다시 빼앗기지는 않잖아? 장난스레 덧붙인 태용의 말에 웃으며 아직도 입안에 가만히 머물러있는 헤네시를 단번에 삼키며 생각했다.
그래, 동화 속 왕자님들은 절대 공주님을 잃지 않지.
그치만 죽었다 깨어나도 네가 내 왕자님이 될 일은 없을꺼야.
"어제 유타가 내 담당이었다며?" 의자를 까딱거리며 묻는 내 말에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유타는 현장에 나가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던 재현이 끈적한 시선을 내게 보내며 물어왔다.
"왜, 어제 나 없어서 속상했어?"
장난스레 묻는 재현의 모습에 그럴리가, 하는 짧은 대답과 함께 발로 녀석의 정강이를 차버렸다. 악, 하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제 정강이를 손으로 연신 주무르며 재현이 내게 억울한 눈빛을 보내왔다. 너무해... 그런 재현을 무시하며 가만히 턱을 괴고 있다 문득 시선에 걸린 녀석의 손 마디가 붉은 상처들로 수놓아져 있었다. "어제 작업은 좀 빡셌나봐?" 다른 날보다 상처가 심하네. 그에 내 시선이 줄곧 향해있던 제 손등을 뒤집어 몇초간 응시하던 재현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쪽에서 보낸 애들이 생각보다 많았다고나 할까." 수적 열세라. 재현의 말을 가만히 곱씹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좀처럼 자리를 비우는 법이 없는 태용이 현장에 나갔다는 사실만으로 상대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풀었을지 대충 상상이 갔다. "다음에는 나혼자 집에 가둬놓지 말고 나도 데려가." 내 말에 재현이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복에 겨운 소리 한다, 김여주." 너 한번만 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현장 소리만 들어도 몸서리 칠껄? 우스갯소리처럼 넘기려는 것 같아 보였지만 재현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 만큼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말을 마치고 제 어깨를 만지작거리던 녀석이 팔을 둥글게 돌리다 말고 아, 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제 머리를 뉘였다. "나도 유타형처럼 키보드나 두드리는게 일이었으면 좋겠다." 재현의 말에 고개를 가로젓다 말고 힘없이 축 늘어진 녀석의 뒷머리를 아프지 않게 튕겼다. "누가 들으면 유타는 하는 일 없는 줄 알겠네." 내 말에 뒷통수를 문지르다 말고 "그건 그렇지만..." 하고 말을 흐리던 재현이 이내 주머니에서 밴드를 꺼내 다른 곳보다 유독 상처가 깊게 베인 네번째 손가락에 밴드를 돌돌 감았다. 동그랗게 감긴 밴드 가운데 부분 위로 스미는 붉은 선혈을 가만히 응시하며 상념에 빠졌다. 그 애의 눈동자에도 내 상처가 저만치 흉하게 비춰져 보였을까.
종이 친지 꽤 시간이 지났을텐데도 불구하고 복도를 서성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아무래도 김동영의 얼굴을 보기 껄끄러울 것 같았다. 내게 처음으로 살갑게 말을 걸어준 그 친절함이, 내겐 버거웠다. 가만히 복도 끝 계단에 앉아 시계를 쳐다보다, 이대로 가다가는 무료함에 시달려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뒷문을 느리게 열었다. 맨 뒷자리의 정재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모양으로 물었다. 왜 이제와? 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어보이고선 이미 실험에 정신을 집중한 듯 보이는 김동영의 주의를 최대한 끌지 않으려 심혈을 기울이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의자에 앉을 때까지도 김동영의 시선은 현미경의 렌즈에 가 있었다. 아무래도 김동영은 내가 제 옆자리에 앉은지도 모르는 듯 했다. 좋아 이대로 자는 척해야지. 퍽 담대한 생각과 함께 천천히 엎드리기 위해 조용히 고개를 숙이던 찰나, 여전히 시선을 렌즈에 고정한 채 김동영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내게 인사했다.
"안녕 여주야"
손을 탈탈 털며 흔드는 김동영의 모습에 입가에 걸린 어색한 미소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늘어트리며 안녕, 하고 대꾸했다. "수업 시작한지 엄청 지났는데... 무슨 일 있었어?" 걱정했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묻는 동영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라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아, 하고 대꾸한 동영이 불편하게 앉아있는 내 모습을 훑더니 갑자기 내 허리춤을 가리켰다. "상처, 다 나았네?" 환하게 웃는 동영의 낯에 왠지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어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내 대답에 다시 현미경에 시선을 집중한 동영이 작은 핀셋으로 샬레 위에 놓인 잎사귀를 들어올렸다. "깔끔해서 보기 좋다." 동영의 대답에 순간 답답해져 핀셋을 든 그의 손을 허공에서 잡아챘다. "너 왜 아무렇지 않은 척 해?" 퍽 날이 선 말투로 몰아세우는 내 태도에 당황했는지, 놀란 토끼눈을 한 동영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꽤 세게 잡고있던 녀석의 손목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 고작 생채기 정도 아닌거, 다 알고 있잖아." 턱을 괴며 말하는 내 모습에 동영이 작게 실소를 터트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 설명해주기 싫은가보다, 해서 굳이 캐묻지 않았던 건데."
제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모습에 그제서야 이해한 것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띄게 움츠러든 내 모습에 동영은 가만히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말하기 싫은 사정 하나쯤은, 다 안고 사는거잖아." 그 말을 끝으로 누구나 그런거야, 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 흘려 말하는 동영의 모습에 책상 위로 엎드리며 그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이며 허탈하게 웃었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의 말하고 싶지 않은 사정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내 더러운 속사정들은 감히 헤아리지도 못한 채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 |
2년전의 나... 그만해... 2화를 더 늦게 수정해서 수정 알림이 이상할 수도 있어요ㅠㅠㅠ 죄송합니다ㅠㅠ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