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 홍일점 VII
#1
피곤에 쩔어 퇴근하는 길에 문자를 한 통 받았다. 오늘 야근이라는 전정국의 통보 문자다. 그러면 오늘 저녁 담당은 내가 된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 하나 없이 '야근' 두 글자뿐인 문자를 향해 눈을 부라리다 착한 내가 오늘만 참기로 마음먹는다. 어쩌겠어. 나는 냉동실에 얼려뒀던 밥을 데우고, 반찬도 접시에 덜고, 노른자가 볼록 오른 계란 후라이를 식탁 가운데에 놓고는 소리친다. 밥 먹어!
"콩나물무침 누가 했냐? 뭘 처넣었길래 이렇게 짜."
"우리 엄만데."
"콩나물은 짠맛에 먹는 거지."
"......."
"그대로 전해드릴게."
"...자몽 워터 두 개. 딜?"
간절하게 쳐다보는 김남준에 나는 젓가락을 입에 물고 고민하는 척하다 대답한다. 딜.
#2
조용한 핸드폰을 가만 쳐다보는데 화면이 밝아진다. 전정국이 보낸 문자다. '출장. 내일까지.' 여전히 싸가지 없는 통보다. 이렇게 말할 거면 일찍이라도 말하든가. 올 줄 알고 밥 다 해놨는데. 나는 다 식은 밥을 버린다. 전정국 줘야 한다며 김태형으로부터 사수했던 소시지도. 이건 뭐 남편 기다리는 아내도 아니고.
힘없이 소파에 쓰러진 나는 문득 드는 생각에 다시 몸을 일으켜 전정국의 방으로 향한다. 노트북을 켜고 소리를 최대로 높인 나는 노래를 튼다. 선곡은 방탄소년단의 피 땀 눈물이다. 언제 들어도 소름 돋는 도입부를 들으며 주인 없는 침대로 뛰어오른다. 마침 민윤기나 김남준도 없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는 시방 제이홉이다.
"내 차가운 숨을! 다! 가져가아아아! 아! 아!..."
"......."
방문이 열리고, 거기에는 김태형이 서 있다. 내가 너무 시끄럽게 했나보다. 정색한 얼굴로 다가오는 김태형에 나는 쫄아서 눈을 꼭 감는다. 어떤 호통이 떨어질지 모른다. 화났을 때 가장 무서운 사람은 민윤기도, 전정국도 아닌 김태형이다. 눈치 없는 노트북에서는 방탄소년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내 피 땀 눈물.
"김남준! 김석진! 민윤기! 정호석!"
"......."
"박지민! 김태형! 전정국! BTS!"
... 이게 뭐람. 김태형이 우렁차게 외치며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왠지 계속 부르라는 것 같아,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내,"
"피! 땀!"
"눈물도... 내,"
"몸! 마음!"
크림! 스윗! 김태형은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응원법을 외친다. 나는 입을 떡 벌리고 김태형을 보다 손에 쥐고 있던 아미밤을 김태형의 손에 넘긴다. 김태형은 소녀팬 마냥 소리를 꺅꺅 지르며 앞뒤로 흔든다. 나는 조용히 방문들 닫고 나온다.
#3
이쯤되면 나는 전정국의 시다바리가 아닐까 싶다. 퇴근해서 막 발을 녹이고 있는 나에게 전정국은 자신의 서류 봉투를 회사로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탁 아니고 명령. 그는 분명 좋은 상사가 되지 못할 거다. 하물며 민윤기도 부탁할 땐 미안하다는 말을 꼬박꼬박 하는데. 오늘도 착한 내가 욕하려는 걸 참고 전정국의 회사로 향했다.
"저녁 뭐 먹을래."
"사주려고?"
"어."
"왜?"
내 질문에 전정국은 고개를 홱 들어 나를 쳐다본다. 왜 사주는지는 나도 안다. 고마움과 미안함의 전정국식 표현이다. 그래도 이렇게 말고 직접 말로 듣고 싶었단 말이다. 나는 모르는 척 벽에 걸려있는 액자만 빤히 쳐다본다. 전정국의 한숨을 쉬며 다시 책상에 고개를 박는다.
"고마워서."
나는 만족한 얼굴로 벽을 손으로 톡톡 치고, 나를 흘끗 본 전정국은 입꼬리를 올려 소리 없이 웃는다.
#4
"일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같이 못 먹겠다. 미안."
"뭐?"
"아직 박지민 퇴근 안 했으니까 걔랑 같이 먹어."
"뭘 같이 먹어. 그냥 집 가서 먹을게."
"어, 박지민. 난데. 오늘 바쁘냐?"
"야!"
컴퓨터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전정국은 마른 세수를 하더니 말인지 방구인지 모를 소리를 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전화를 건 전정국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박지민 금방 오겠대, 하는 통보를 했다. 나 체할 것 같은데. 전정국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을 했지만 전정국은 들은 척도 안 한다.
"무슨 일인데?"
"얘랑 밥 닽이 먹어달라고."
"...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이 자식이 퇴짜놨어요?"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이 묻는 박지민에 보시다시피, 하고 전정국을 째려보자 박지민이 낮게 웃는다. 쟤 원래 잘 그러잖아요. 바쁜 척은 혼자 다 하고. 박지민의 말에 전정국은 여전히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자신이 언제 그랬냐며, 사람 몰아가지 말라고 욕을 뱉는다. 자주 있는 일인지 박지민은 익숙하게 무시하고 나에게 묻는다. 뭐 좋아해요?
"파스타 좋아해."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야."
"나 말고, 씨발 놈아. 쟤가 좋아한다고."
"아, 파스타 좋아해요? 잘됐다. 저도 그거 좋아하는데."
누가 들어도 달라진 박지민의 목소리에 컴퓨터에만 고개를 처박고 있던 전정국이 기가 찬 얼굴로 박지민을 쳐다본다. 박지민은 전정국 쪽은 쳐다도 안 보며 마침 자기가 근처에 맛있는 파스타 집을 안다며 같이 가겠냐고 묻는다. 전정국은 허! 하고 코웃음을 쳤지만 역시 철저히 무시당한다.
"내가 3년 동안 파스타 싫어한다고 했는데. 그걸 기억 못 하냐, 넌."
"혹시 차 갖고 왔어요?"
"아뇨, 버스타고 왔는데. 많이 멀어요?"
"우리 우정이 이것밖에 안 돼? 어? 난 너희 어머님 생신도 기억하는데,"
"걸어가기는 좀 멀어요. 날도 추운데 제 차 타고 가죠."
"안 들리는 척 하는 거 봐. 망실도 이런 대망실이 없다. 너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진짜 서운한 얼굴로 말을 다다다 뱉는 전정국에 나와 박지민은 빠른 속도로 방을 나선다. 근데, 혹시 망실이 뭔지 알아요? 얼마 전부터 저 말을 입에 달고 살던데.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 같은 박지민의 말은 못 들은척 넘기기로 한다. 차마 내가 전파한 말이라고는 못하겠어서.
#5
씨발... 난 지금 벌받는 거다. 지난주에 김태형 옷 훔쳐 입고 민윤기 머그컵 깨서 벌받는 거다. 그저께 전정국 침대에서 뛰어다녀서 벌받는 거다.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불행의 시작은 1시간 전으로 돌아간다.
"저는 알리오레오요."
"...네?"
"......."
"......."
항상 시키던 메뉴 이름이 꼬이고,
"어어...!"
"......."
헛포크질로 날아간 피클이 박지민 그릇에 포물선을 그리며 착륙했고,
-쨍그랑!
"......."
"......."
물을 따라주겠다고 나서다가 컵을 깨버렸고,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지 말고 그냥 봐요."
"... 티 났어요?"
"조금."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운전하는 박지민이 또 섹시해서 훔쳐보다가 들키고. 어떻게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뒤지기로 한다. 머리를 창문에 콩콩 박는 나를 보던 박지민은 낮게 웃더니 차를 세운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어느새 집 앞이다. 벌써. 나는 박지민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연다.
"감사해요. 덕분에 좋은 데서 맛있는 것도 먹고."
"맛있었어요?"
"네! 엄청."
"저한테 물 뿌리길래 마음에 안 든 줄 알았는데."
존나 유구무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착하게 사는 건데. 나는 박지민과 눈도 못 마주치며 앵무새처럼 아니에요! 진짜 아닌데! 라는 말만 반복하다 낮게 웃는 박지민의 목소리에 입을 다문다. 아, 진짜. 내가 저 웃음에 환장을 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아서는.
"농담이에요, 농담.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네."
"잡아먹으셔도 할 말이 없네요..."
"어, 방금 발언 조금 위험한데."
"네?"
순간 잘못 들었나 하고 고개를 홱 들면, 내 눈앞에는 박지민이 있다. 너무 놀라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자, 박지민은 또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웃는다. 박지민은 나만 보면 웃는 것 같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오늘 나는 한순간도 멀쩡한 적이 없었으니까. 한숨을 쉬며 눈을 깔면 와이셔츠가 젖어 딱 달라붙은 박지민의 가슴팍이 보인다. 가까이서 보니까 또 심장 떨린다. 이건 박지민 탓이다. 박지민이 너무 핫바디라 그런 거다. 난 잘못 없다.
"말 꼬여서 얼굴 붉히고, 나 먹으라고 그릇에 피클도 던져주고."
"......."
"지금도 눈을 못 떼는 거 보면 좀 변태 같기도 한데."
나는 다시 눈을 꼭 감는다. 박지민의 말 하나하나에 그 순간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한번 더 깊은 한숨을 내뱉는데, 감은 눈 위로 따듯한 촉감이 닿았다 떨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면 박지민은 소리 없이 웃는다.
"왜 그것마저 예뻐보이지."
#6
야, 야! 일어나 봐. 빨리! 아침부터 내 단잠을 깨운 게 누군가, 하고 눈을 겨우 뜨니 울상인 김태형이 보인다. 뭐야. 놀라서 바로 이불을 걷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김태형은 다급하게 문을 가리킨다. 당장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김태형이 손목을 잡는다. 눈치를 보며 뒤통수를 긁적인다.
"그... 보여, 끈..."
답지 않게 수줍은 얼굴로 자신의 어깨를 만지작댄다. 늘어난 목티 때문에 속옷 끈이 보였나 보다. 아, 이거. 나는 티를 목 위로 끌어올리고는 방을 나선다. 부엌 한구석에는 이미 전정국과 김남준이 서로의 손을 꽉 쥐고 바닥을 보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다가갔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무슨 일인데."
"으아아아아아악!!!"
"아 깜짝이야!!!"
난 그저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다. 지금 보니 김남준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전정국도 코를 훌쩍인다. 휴지를 대충 뽑아서 김남준의 얼굴에 던진 후에 다시 바닥을 째려보면,
"세상 씨발..."
벌레다.
#7
한심하다는 듯이 물으니까 김남준은 울긴 누가 울어! 하고 오히려 화를 냈다. 웃긴다. 아까 휴지 받으면서 고맙다고 코 훌쩍인 놈이. 고개를 젓고 있으니까 김태형이 휴지를 대여섯 장 뽑더니 나에게 내민다. 저거 잡아줘.
"... 밀지 마, 씨발!"
"빨리 잡아달라고! 저거 날아가면 어떡해!"
"저거 애벌레거든?"
"지금 무서워서 죽을 것 같다고오... 진짜..."
결국 김태형도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 반 애들도 벌레 갖고 울지는 않는다. 내가 지금 몇 살짜리들이랑 사는 건지 모르겠다. 문득 민윤기는? 하고 물어보니 방에서 문 잠그고 있단다. 하여튼 도움 안 된다.
봐도 봐도 징그러운 벌레를 노려보다 휴지로 짓누른다. 김태형은 울음의 절정을 터트렸다. 쓰레기통 뚜껑을 열면 전정국이 그걸 왜 거기에 버리냐고 소리 지른다. 그럼 어디다 버려. 셋은 동시에 화장실을 가리킨다. 셋은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리는 것까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미소를 보였다. 어깨동무를 하고, 지들끼리 엄지를 치켜세워주며 수고했다고 서로를 다독인다. ...병신들이다.
#8
나는 옷장에 있는 옷이란 옷은 다 꺼낸다. 이 원피스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거울 앞에서 옷을 갈아입던 나는 최종 선택을 마치고 민윤기의 방으로 기어들어간다. 민윤기는 내가 들어오든 말든 컴퓨터 화면만 빨려 들어가게 쳐다본다. 윤기야.
"왜."
"나 어때?"
"예뻐."
"너 보지도 않았잖아."
"안 봐도 예뻐."
나는 입을 삐죽인다. 안 봐도 예쁜 게 뭐야. 카펫을 발로 찬 나는 발소리를 쿵쿵대며 민윤기 옆으로 가서 선다. 화면과 민윤기 사이에 내 얼굴을 불쑥 들이미니까 민윤기가 인상을 쓰며 내 머리를 치운다. 오빠 작업 중인 거 안 보이냐.
"오빠고 나발이고, 나 괜찮냐고. 똑바로 보고 말해."
"......."
"......."
"거 봐. 말했잖아. 안 봐도 예쁘다고. 예뻐. 걱정 말고 데이트나 잘 하고 와."
나를 위아래로 쭉 훑은 민윤기는 영혼 없이 말하고는 다시 컴퓨터에 시선을 박는다. 영혼을 담아서 말하면 어디 덧나냐고 따지다, 나는 문득 말을 멈춘다. 근데 나 데이트 가는 거 어떻게 알았어?
"와서 옷 어떠냐고 묻고, 안 하던 볼터치도 하고, 좋아하는 립스틱도 발랐고."
"......."
"아, 아끼는 귀걸이도 했네."
"......."
"더 필요해?"
아니다. 다 맞췄다. 나는 아까 발로 찼던 카펫을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추우니까 위에 두꺼운 거 걸치고 가. 민윤기는 여전히 화면만 쳐다보면서 툭 말을 던진다. 웅. 나는 기분 좋게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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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은 당분간 받지 않겠습니다. 저의 한계를 넘어선 느낌이라. TT
오랜만에 왔더니 감이 사알짝 떨어진 기분입니다... ;ㅅ; 다시는 오래 쉬지 말아야지...!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그러신다면 1. 바빠서 2. 바빠서 3. 바빠서입니다. TT 물론 4. 제 게으름도 있구요... 저의 현생과 게으름을 치워줄 자몽이를 구합니다! ㅎㅅㅎ 그래도 기다려주신다는 말들에 힘과 에너지를 받고 글을 들고 왔습니다! 비록 조금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요. ㅎㅎ
자몽이들은 잘 있었나요! 어제 막 물어봐놓고 또 물어보려니 어색하네요. 그래도 자몽이들은 늘 새롭고 짜릿하고 최고인걸요! (아무말) 요즘은 글쓰기 전에 꼭 자몽이들을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항상 힘이 되는 제 비타민들이에요. 그만큼 저에게 너무 중요한 존재입니다. 아셨죠? 이제 어디 가서 기죽지 말고 난 소듕한 자몽이다! 하고 자부심 가져여! (아무말2) 가끔 우리 아가들...ㅠㅠㅠㅠㅠㅠ 하면서 앓고 있는 저를 보면 대장 자몽말고 그냥 자몽맘 할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항상 쓰다보면 말이 길어지는데, 늘 같은 말입니다. 사랑한다고요. 매번 하는 말이라 식상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만 매번 진심인 걸요.
오늘 하루도 너무 잘 버텨줬어요. 잘 견뎌냈습니다. 좋은 꿈 꿔요. 모두 구빰 구빰!
BGM : Daydrea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