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부제: 173) w.체다
한달 만에 드디어 사무실에 새 얼굴이 들어왔다. 강아지처럼 생겨서 키도 쪼끄만 남자 애였는데,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계약직 인턴으로 들어온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 사무실은 그 아이가 들어오는 날 일동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왔어! 왔다고! 어서 와! 우리 사무실에선 그 아이를 구할 때 잡코리아가 아닌, 알바천국을 이용해서 구했기때문이다.
‘사무보조. 20~28세. 월100.’
한달 간 공석으로 비워져있던 사무보조 자리가 채워지지마자 얼굴도 익히기 전에 그 아이는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온갖 사.무.보.조. 일을 했다. 백현아 이거 복사 좀. 백현아 이거 우체국 닫기 전까지 붙여야 된다. 백현아 세 시까지 강남점 가서 샘플 좀 받아와. 사무보조로 들어온 그 아이가 하는 일이란 복사, 우편물 붙이기, 샘플 받아오기. 백현아 냉커피 좀 타와라. 백현아 짜장 다섯에 짬봉 셋 볶음밥 둘.짬뽕에 양파랑 야채 넣지 말라그래라. 백현아 고기 좀 잘라봐. …를 비롯한 커피 타기, 배달음식 주문하기, 회식 때 고기 자르기 등등. 백현아. 위스퍼 중형 날개 달린걸로 사와라. 싸다고 예지미인 이딴 거 사오면 죽는다. …가끔 여직원들 생리대 심부름까지. 말만 사무보조지, 셔츠 입은 아저씨 아줌마들이 시키는 것이라면 하늘에 별도 따와야하는 빛 좋은 시다바리였다.
‘쟤가 새 알바야.’
화이트 카라 속에 단연 눈에 띄는 남색 니트가 보였다. 뭐야, 저거…
‘...저 남자애?’ ‘응. 그렇대.’ ‘왜 여자 안 뽑고.’ ‘몰라. 김부장님이 뽑았어.’
별로야. 그 동안 사무보조는 모두 꼼꼼한 여자들이 해왔는데 이번엔 남자, 그것도 시퍼렇게 어린놈이다. ─무려 저보다 다섯살이나 어리다고 한다─ 사내새끼가 여자들 하는 사무보조를 한다는 것도 그다지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손님이 사무실에 전화했는데 예쁜 목소리가 네, 어디입니다 하는게 좋지 사내새끼 걸걸한 목소리로 네에, 하는건 고객에 대한 예우가 아니지 않는가. 거기다가 아무리 알바여도 그렇지 사무실에 남색니트에 청바지에 스니커즈라니. 딱 봐도 알바 처음이다. 기본이 안 된 것이 분명하다. 오해할까봐 말해두지만, 지지난 번 알바는 산다라박을 닮았고 지난 번 알바가 전효성을 닮았으니 이번엔 가인이나 닮은 알바가 들어왔음 좋겠다 이런 마음은 절 때 아니다. 절때. 맹세코.
‘아. 그거 복사해드릴까요?’
내가 저를 싫어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 건지, 아니면 정말 그냥 눈치가 없는 건지 그 아이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여기저기 굴러다녔으면 좀 뺀질거리던가, 화장실 가는 척 쉬던가 하면 될 것이지, 끝까지 자기 할 일 없나 찾으러 다니는 것이 마음에 안든다. 그런 건 융통성 없는거야. 복사쯤이야 사원들이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을, 꼭 제가 하게 해달라는 듯이 손에 들린 기획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영 아니꼽다. 아가야. 사회는 성실한게 다가 아니야.
‘내가 할건데?’ 직접 복사기 앞으로 가니 작은 눈 속에 동그란 눈동자가 꿈뻑, 한 대 맞은 얼굴이다. 복사하는 사람 처음 보냐? 지 할 일 뺏겼다고 뚱해있는 얼굴이, 가까이서 보니 영락없는 개상이다. 그냥 평범하게 생긴 남자 아이라고 하기엔 완전 개랑 판박이다. 저거 완전 개새끼네. 종으로 치자면 코커스 페니엘이나 말티즈 같은…좀 귀여운 거. 아니다, 작은 거? 코는 작지만 오똑하고, 입 꼬리에 작은 점이 있다. ─입술 근처에 있는 점은 복점이라던데─ 무엇보다, 크지 않고 작은 눈꼬리가 아래로 축 쳐져있다. 근데 이상하게 울상은 아니다. 오히려 눈꼬리가 팍 쳐진게, 그러니까 너 말이야 웃으면...
좀, 괜찮을 거 같은,
’에이. 저 주세요. 몇 장 해드리면 되요?’ ‘….’ ‘몇 장 복사하면 되요?’ ‘…세 장.’ ’세 장요?’ ‘아…아니 열 장인가?’ ‘….’ ‘….’ ‘…삼십 장 아니에요?’ ’어?’ ‘다들 삼십 장씩 해가시던데….’ ‘아. 어. 맞아. 삼십 장.’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 아이는 내 손에 들린 서류를 가져가더니 능숙하게 복사기를 작동했다. 종이 아껴야되니까 양면 복사 할게요. 방긋 방긋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두 눈 앞에 가득찼고, 곧 이어 윙윙 거리는 복사기 소리가 들려왔다. 윙 윙.
‘저 원래 기계 진짜 못 다루는데 이거 복사기, 다니던 학교 거랑 똑같아요.’ ‘…아.’
귀엽다. 웃으니까. 귀 아래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이 윙윙 거리는 소리가 단지 복사기 소리만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 아이를 보고…
‘근데 키 완전 크시다. 몇 이에요?’
커다란 복사기를 작동하는 꼬물꼬물한 손과, 실 없는 소리를 하며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삼 십….’
‘네?’
가인보다 낫다, 아니,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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