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거
w.로스트
“오빠.”
“......”
“오빠, 잠깐 일어나 봐. 밖에 누구 온 거 같은데.”
두 번의 초인종이 울렸다. 먼저 잠에서 깬 건 여자 쪽이었다. 맨 살이 훤히 드러난 지민의 어깨를 서스럼 없이 터치해 지민을 깨우는 여자의 눈가에 마스카라가 진하게 번져있었다. 잠에서 깬 지민이 그 뒤로도 한참을 베개에 얼굴을 부비다 붕 뜬 뒷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덜 깨 도톰히 부어오른 지민의 눈가에 짜증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누구세요.”
“......”
어젯밤의 흔적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방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옷가지들 가운데에서 대충 티셔츠 하나를 주워입고 나온 지민이 현관문을 향해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마땅히 현관문 너머로 들려오는 대답같은 건 없었다. 지민이 현관의 슬리퍼를 대충 짓이겨 밟고는 벌컥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건,
“......”
자신의 몸 만한 캐리어 하나와 뭐가 들었는지 모를 박스 두개를 짊어지고 서있는 여주였다.
짧은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 정적 가운데에서 지민과 여주는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지민은 상황파악을 위해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건 여주 쪽에서도 마찬가지인듯 보였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처음보는 얼굴로 밖에 안보이고, 자신만치 꽤나 놀란 듯한 여주의 표정을 보고있자니 나만 처음보는 얼굴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 지민이었다.
“뭐야, 오빠 누구야?”
지민이 방을 나가고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여자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지민이 나갔을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서서히 지민의 어깨 너머로 드러나는 낯선 여주의 얼굴이 보였고 여자는 단번에 미간을 구기며 지민이 여주에게 했어야 할 질문을 대신해서 내던졌다. 누가 봐도 날을 세운 표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여자를 발견한 여주의 얼굴에 번뜩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 집에 계셨구나. 다행이다.
”오늘 입주하기로 연락 드렸던 김여주에요.”
“......”
“집에 안 계신 줄 알고 방금 막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손님..이 계신 줄은 몰랐네요. 죄송해요.”
손님이라는 말을 꺼내며 여주가 슬쩍 지민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지민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리며 뒤틀렸다. 손님? 지금 저거 날 보고 하는 소린가. 묵묵히 여주가 여자에게 건네는 말들을 듣고 있던 지민이 손님이라는 단어에 곧장 언짢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여주의 앞으로 불쑥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기요.”
“방향이 틀렸잖아.”
“......”
“집 주인은 그 쪽이 아니라, 이 쪽.”
갑작스레 다가온 지민의 얼굴에 놀란 여주가 뒤로 바짝 고개를 빼며 다시금 커진 눈으로 지민을 마주보았다. 여주의 검은 눈동자 속으로 지민의 얼굴과 표정, 모든 것이 단숨에 포화상태가 되어 가득히 들어찼다. 그럼에도 여주는 지민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작게 목소리를 낮춰 말할 뿐이었다.
“어, 분명 여자 분이 전화를...”
그런 여주를 보던 지민이 고개를 숙이며 피곤하다는 듯 뒷목을 쓸었다. 아무래도 이 여자가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구나, 싶었다. 말이 안되잖아. 집 주인도 모르는 세입자라니.
“저기요. 그게 아니라, 지금 그 쪽이 집을 잘못 찾아오신..”
...잠깐만, 여자?
아, 설마.
“야, 너 미쳤어?”
ㅡ 아침부터 언행이 격하네, 브라더.
“브라더 같은 소리하네. 너 나 엿먹이려고 작정했지, 아주?”
ㅡ 하여튼 누나한테 따박따박 너너 거리는 꼬라지하고는.. 싸가지 없는 놈.
순간 뭔가가 떠오르기라도 한 듯, 막무가내로 현관문을 닫아버린 지민이 다급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이불 속을 뒤졌다. 그리곤 베개 밑에 아무렇게나 쑤셔박혀 있던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들어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짚은 채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바로 지민의 누나, 지나였다. 지민은 설마,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건 것이었지만 지독히도 차분하고 능글맞은 지나의 목소리를 듣고있자니 곧장 확신이 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또 이 인간이 일을 벌렸구나.
“지금 나랑 장난해? 저 여잔 갑자기 뭔데, 대체?”
ㅡ 뭐긴 뭐야, 세입자지.
“아니, 그러니까 내 집에 왜 네가 마음대로 세입자를 들이냐고!”
ㅡ 허, 그게 왜 네 집이야?
“..뭐?”
분명 그 날 내가 말했을텐데. 그 집 명의는 쭉 나로 간다고.
-
“진짜 그 집을 날 주겠다고?”
정확히 세달 전, 지민은 지나의 갑작스런 호출에 지나의 회사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저 또 뭐라 잔소리를 하려나, 싶었던 지민이었지만 불쑥 자신이 지금 살고있는 집을 지민에게 넘겨주겠다는 지나의 말에 지민은 얼빠진 표정을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너 지금 집 필요하잖아. 작업실이랑 겸으로 쓸.”
“아니, 그러니까 그걸 누나가 왜?”
“나도 어차피 미국 가면 적어도 3년인데, 빈 집 놔둬서 뭐해? 하나뿐인 남동생 구원이나 해주자 뭐, 그런거지.”
너 어차피 아빠한테 카드 뺏겨서 돈도 없잖아. 아니야? ‘이사 박지나’라고 적힌 명패를 앞에 두고 앉은 지나가 매끈한 볼펜 하나로 책상 위의 서류들을 체크하며 무심히 말했다. 지나의 말대로 요즘 자신의 앞에 내려지는 작업량이 시도때도 없이 늘어나 진지하게 작업실과 집을 통합해 쓸 수 있는 넓은 집을 생각하고 있던 지민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한 여자 아이돌과의 작업실 스캔들이 터져 사태 수습에 진을 뺀 지민의 아버지가 지민의 카드며 통장을 전부 압수해버린 탓에 그저 답 없는 고민이 되어버리려던 참이었다.
“그건 진짜 억울해. 존나 사랑했는데.”
막혀버린 카드 얘기가 나오자 급 우울해진 지민이 입술을 비죽이며 어린 아이처럼 툴툴댔다. 그런 지민을 보던 지나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아, 맞다. 그리고,
“당연히 공짜는 아닌 거 알지?”
“뭐?”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거, 모를 나이 아니잖아?”
“아니, 그럼 어쩌자고. 나보고 돈을 내라고?”
“애초에 돈 없는 놈 구제해주자고 주는 집인데 돈을 받겠니? 돈 대신 조건을 받겠다는거지.”
..조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지나의 목소리에 잠시 구겨졌던 지민의 인상이 조금은 풀어지고 의문을 품은 지민의 목소리 만이 방 내부를 떠돌았다. 마지막 서류 파일까지 빠르게 검토를 마친 지나가 탁, 소리가 나도록 파일을 덮으며 소파에 앉아있던 지민을 바라보았다.
“집에선 음악 작업만 할 것.”
“......”
“음악 작업을 제외한 다른 작업은 절대 금지.”
난 내 집에서 여러 여자 향수 냄새 나는 건 싫거든. 남자 향수 냄새면 몰라도. 그 말을 끝으로 지나는 점심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한다며 자신의 방 한 쪽의 옷걸이에 걸려있던 롱코트를 집어 들었다. 지민은 그런 지나의 뒷모습을 넌지시 응시했다. 무슨 조건이 그래. 지민이 자신의 엄지손톱을 깔짝이며 작게 웃었다. 목소리 또한 능청을 부리기에 아주 적당한 톤이었다.
“그 조건 어기면?”
그런 지민의 목소리에 자신의 방을 나서려던 지나의 날카로운 구둣발 소리가 한순간에 멎었다. 지나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뒤에 있던 지민을 돌아보았다. 그럼 너, 천벌 받는다?
-
“그래서 지금.. 저 여자가 그때 말한 그 벌이라는 거야?”
ㅡ 뭐, 그런 셈이지.
지민은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한 기분에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마를 짚었다. 열이 올라 후끈거리는 이마의 온도가 지민의 손으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야.. 아니, 누나.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저 여자부터 쫓아내. 그럼 나도 앞으로 조심할..”
ㅡ 쫓아내긴 뭘 쫓아내. 니가 먼저 쫓겨나가고 싶어?
“아, 누나!”
ㅡ 난 참을만큼 참아줬고, 계속 참아주니까 네가 날 누나로도 안 보는거 같고.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누나 노릇 좀 해야겠고.
암튼 너 우리 여주 씨한테 괜한 허튼 짓 하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너부터 쫓아내버린다. 지나의 목소리가 짐짓 단호했다. 전화는 그렇게 허무하게 끊겼고 지민은 결국 넋을 놓아야 했다. 그리고 이때, 지민이 한 가지 놓치지 말았어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지나의 입에서 나온 ‘우리 여주 씨.’라는 애칭이었다.
지나는 오래 전, 여주가 썼던 장편 소설 하나를 읽고 그 소설에 단단히 꽂혀 그때부터 여주의 열성 독자가 되었는데, 그건 여주가 시나리오로 방향을 튼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영화 쪽의 아는 지인으로 부터 우연히 여주를 알게 되었고 여주가 영화사와 가까운 동네에 싼 집을 하나 구하고 있다는 제보까지 주워들어 마침 제 동생 버릇도 좀 고쳐줄 겸, 진정한 성덕의 길을 걸어보기 위해ㅡ따지고 보면 이 이유가 대부분의 8할을 차지했다.ㅡ 여주를 지민이 있을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지민은 애석하게도 그 사실을 단단히 놓쳐버렸고, 그저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만을 내려다보며 실없이 웃었다. 그렇게 웃음이 나면서도 지민에게 드는 생각은 단 하나 뿐이었다. 아, 진짜 좆됐네.
“오빠 저 여잔,”
“너 오늘은 집에 혼자 갈 수 있지.”
“..어?”
“지금 보다시피 내가 아주 대단한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
침대에 걸터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웃고만 있던 지민의 곁으로 아까부터 불퉁한 표정을 짓고있던 여자가 가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지민은 그런 여자의 표정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보였다. 그저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이라는 여주의 존재에 대해서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을 뿐. 닫혔던 현관문이 다시 한번 지민의 손에 의해 열리고, 두 사람은 앞으로도 지겹게 마주해야 할 서로의 얼굴을 또 한번 오롯이 바라보았다.
“들어와요.”
“...아.”
“넌 조심히 가고.”
열린 현관문에 등을 기댄 채 서있는 지민의 곁으로 마침내 두 여자가 엇갈리듯 지나쳤다. 남자가 혼자 사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짙은 화장품 냄새가 감돌던 지민의 집에 처음으로 달큰한 바디워시 향기가 스며들던 순간이었다.
*
헐, 님들... 저 감동 받았잖아요..
정말 아무런 기대없이 쓴 프롤로그였던지라 맘편히 엄마 생일 겸 가족여행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많은 분들이 댓글과 암호닉 신청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정말 오자마자 신나서 다급히 1화를 질렀습니다
일단 두 사람이 같이 살게 된 경유부터 푼다고 풀었는데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져서 당황...
다음 화부터는 여주랑 지민이 두 사람의 본격적인 얘기가 나올 예정이니 1화가 좀 지루하시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세여..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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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합니다8ㅅ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