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와 편의점 알바생의 상관관계
03
나갈 채비를 하고 걸음을 옮기려다 급히 테이블에 손을 뻗었다. 연고를 집어들었다. 하루동안 고이 모셔뒀던 연고를 옆 집 남자에게 다시 돌려주려던 참이었다.
그냥 주기에는 좀 부족한 것 같아 냉장고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작은 주스와 초콜릿을 꺼내들었다. 뭐, 이정도면 되겠지. 괜히 긴장이 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반대편 문 앞에 섰다. 머릿속으로 정리해둔 멘트 여러가지를 중얼거렸다. 그러나 항상 끝은 아니야, 다시 다시- 였다.
그러다 문득 이 남자가 집에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 온지 얼마 안되긴 헀지만, 아침에 남자를 마주친 것도 술을 먹은 다음 날이 처음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데 갑자기 안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몸을 돌려 우리 집 문에 바싹 달라붙었다.
"...뭐하세요?"
"...아하하하하하-"
"........."
"어, 어디 가시나봐요?"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물음에 겨우 몸을 돌려 과장되게 웃어보이고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남자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아, 네. 친구 만나러- 흐리게 말을 끝맺었다. 이미 연고와 주스, 초콜릿은 내 손에 들려있었고, 그냥 갈 수는 없어 한참을 쭈뼛거리다 겨우 그것들을 내밀었다.
"이거, 어제, 감사, 감사해서."
"다친데는 괜찮구요?"
대뜸 묻는 질문에 창피함을 없애려 시선을 피하다 고개를 들어올려 눈을 맞췄다. 표정에 걱정이 한가득 드러나있다. 그 마음이 진심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네, 당연하죠! 하고 크게 소리를 내버렸다.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안주셔도 되는데."
"아, 아니요. 저희 집에도, 연..연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
"그쪽은 어디가세요?"
패딩 주머니에 내가 준 것들을 집어넣은 남자가 어디가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순간 당황해 눈을 굴렸다. 그냥 대충 얼버무리면 될 것을 괜히 한참을 생각해버렸다.
"어, 저는, 그러니깐..."
"내가 맞춰봐도 돼요?"
"네?"
"그쪽 어디가는지."
너무나 당당한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이 남자 뭐지- 싶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대답에 남자는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더니
"드라마 촬영하러 가는거 맞죠?"
하고 물었다.
"........."
"아니예요?"
"...저, 저 알아요?"
한참동안 멍을 때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거 꿈인가- 하는 생각부터 설마 이 남자 스토커인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반면 남자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어, 어떻게 저를..."
"드라마에 나오는거 봤어요."
"지, 진짜요?"
"네, 하도 예뻐서 기억하네요."
잠시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드라마에 나온거라곤 고작 잠깐이었을텐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미간을 좁히다 이내 그럼 나 처음부터 배우인거 알았어요? 하고 물었다.
"그럼요."
"나 이사올때도?"
"저 그쪽 술 취했을때 처음 봤는데요."
"그럼 설마 내 이름도 알아요?"
"김여주. 잘 어울려요, 이름."
"...네?"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괜히 얼굴에 열이 올라 잠시 입을 내밀고 질문거리를 생각하다 나도 대뜸 물었다. 그러는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하고.
"제 이름이요?"
"한쪽만 이름 아는건 좀... 불공평한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예요."
"임창균이요."
"아, 창균씨-"
"어, 저 창균씨 아닌데."
"저 그쪽보다 한 살 어려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오늘 아침부터 정신이 없다. 나도 모르게 고데기를 열심히 한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나 어떻게 알았어요?"
"말했잖아요. 드라마에서 봤다고."
"아니, 그거말고. 내이름이랑 나이 찾아봤어요?"
"네. 예뻐서."
"......"
"예뻐서 찾아봤어요."
눈 한 번 깜빡하지않고 대답한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와 내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나저나 자꾸 예쁘다니. 이정도면 놀리는게 아닌가싶어 다시 남자와 눈을 맞췄다.
"지금 놀리는거죠."
"뭘요?"
"자꾸 예쁘다고 거짓말하는거."
"...아닌데."
"........."
"그냥 예쁘다- 예쁘다- 하니깐 내 눈에는 예뻐보여서 그러는건데요."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멍하니 남자를 쳐다봤다. 그러다 가방 안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급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매니저였다. 어, 오빠, 미안. 지금 내려갈게. 왜이렇게 늦냐며 화를 내는 매니저에게 할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급히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내 손목을 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잠시 창문으로 흘긋- 밖을 내다보고는 나와 눈을 맞췄다.
"지금 충분히 예쁘니깐 기죽지 말고."
"......"
"또 울면서 터무니없는 질문 하지말라는 소리예요."
조곤조곤한 남자의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남자는 늦은 것 같은데, 먼저 내려가세요- 라며 내 손을 살며시 놓아주었다.
"너 문자도 안받고 왜이렇게 늦어?"
"......"
"너때문에 촬영 늦으면 책임질거야?"
급히 계단을 내려와 차를 탔을 때, 매니저의 잔소리에 표정을 찌푸렸다. 미안해, 잠시 일이 좀 있었어. 들릴듯 말듯 말을 내뱉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눈치를 보는 모습에 매니저도 뭐라 대꾸하지않고 한숨을 쉬곤 차를 출발시켰다. 저 멀리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금 얼굴에 열이 오르는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