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경호원
ㄱ 핏치핏치
하나
"아이고오..허리야.."
양 손에 꽉꽉 찬 쓰레기 봉투를 움켜쥐고 횡단보도 앞에 선 나는, 아직 빨간불인 신호에 앓는 소리를 내며 잠깐 봉투를 내려놓았다. 스물 여섯이 되는 올해, 원하던 카페에 취직을 했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커피향을 맡으며 음료를 만드는 일은 항상 즐거웠지만, 지금처럼 '막내라서' 도맡아야 하는 일을 할 때면 온 몸에서 힘들다고 난리였다. 봉투를 내려놓은지 1분도 되지 않았는데 금세 바뀌어버린 신호에 한숨을 내쉬며 무겁기만 한 쓰레기봉투를 들고 길을 건넜다.
우리 카페의 맞은편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백화점이 위치하고 있다. 유동인구가 많고, 카페의 규모가 큰 만큼 당연히 쓰레기도 많이 배출된다. 그 덕에 나는 백화점 뒷편에 있는 쓰레기 분리수거 장소에 이 두 개의 봉투를 일주일에 두세번은 가지고 가서 버려야 했다. 갈 때 마다 민망하고 힘든 일이었지만 어쩌겠나, 또 다른 막내가 들어올 때까지 나의 일인데.
오늘은 유난히 손님이 많아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힘든 날이었다. 겨우겨우 쓰레기를 던져놓고, 허리를 펴는데 백화점 뒷문으로 나오는 검은 정장 무리들이 눈에 띄었다. 귀에 이어폰같은 기계를 하나씩 끼고 있는 걸 보니, 백화점 경호원인 것 같았다. 하나같이 흰 긴팔 셔츠에 검은색 정장 자켓을 입고있었다. 더운 날씨가 아니였는데 다들 땀을 조금씩 흘리는게,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다시 카페로 돌아가려던 와중에 돌아가던 내 고개를 고정시킨 사람이 있었다.
"...정재현?"
가깝지는 않은 거리지만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자켓을 손에 들고, 살짝 땀이 맺힌 머리를 쓸어넘기며 동료들에게 웃어보이는 저 남자는 정재현이 확실했다. 순간 든 생각은 쟤가 왜 여기에? 였다. 고등학교를 졸업 할 즈음에 들었던 소문으로는, 무슨 경호학과를 갔다고 하던데. 일하는 곳이 여기라니. 나도 모르게 멍한 표정으로 정재현을 빤히 바라봤다. 여전히 하얗고 잘 웃네. 예전 추억에 잠겨 시선을 오래 두었더니, 고개를 돌리던 정재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굳었던 나는, 얼른 정신줄을 붙잡고 초록불이 깜빡거리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정재현의 눈빛이, 나를 알아보는 것만 같아서.
오지마라..제발 오지마라..
팔로 엑스자까지 그려가며 마음으로 열 번도 넘게 외친 내 바램은 이뤄지기는 커녕 와장창 깨져버렸다. 아까 봤던 경호원들은 커피나 한 잔 할 마음인지 우르르 길을 건너 우리 카페로 다가오고 있었다. 당연히 그중엔 정재현도. 우리 카페의 문이 열리는 딸랑, 소리가 나자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 했다. 다행히 같이 일하는 직원인 도영오빠가 잡아주었다. 아, 지금 꼴 엉망인데 이런 식으로 마주하다니.. 내 표정이 너무 안좋았는지 도영오빠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이름아, 아파?"
"아니요, 괜찮아요!"
"힘들면 3층 보던가."
"아니요, 오빠도 일하는데 제가 어떻게.."
"그치? 간다고 하면 좀 화낼 뻔 했다."
"아 진짜 ㅋㅋㅋㅋㅋㅋ"
내 기분을 풀어주려 농담을 던지는 도영오빠 덕에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다. 주문만 정재현이 안하면야.. 우리 카페는 넓으니까.. 열심히 합리화하는 내 속도 모른 채, 정재현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카운터로 걸어왔다. 좌절도 잠시, 손을 재빨리 움직여 머리라도 살짝 정리했다. 설마 나를 알아보겠어..
"주문 도와드릴까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 잔 주세요."
"네, 카드 받았습니다."
목소리는 여전하네. 하면서도 최대한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 고개를 더 푹 숙였다. 다행히 못 알아본 것 같았다. 딱 좋았는데,
"저기요."
"네?"
머리를 댕-하고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절대 고개를 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어 정재현과 얼굴을 마주했다. 아, 스벌. 망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애매한 표정을 짓고있던 정재현이 활짝 웃는다. 설마, 하는 조바심과 더불어 웃는거 여전히 예쁘네 하는 정신나간 생각도 든다.
"맞지? 성이름."
"..아..어! 안녕! 오랜..만.."
"긴가민가 했는데, 명찰 보고 알았어."
"아..하하..명찰,어.그래.."
내 왼쪽 가슴에 달려있는 명찰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이 그지같은 명찰 매니저님 없으면 떼어버리던가 해야지.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재현은 자리로 돌아갈 생각을 안 한다. 커피 나올때까지 기다릴거니..? 우리 카페에는 진동벨이라는 친절하고 디지털하고 좋은 기계가 있는데..^^..
"진짜 오랜만이다. 여기 직원인거야?"
"어,어.."
"그렇구나. 나 여기 앞에 백화점에서 일하는데 왜 한번도 못봤지?"
"그러게..하하.."
도영오빠 제발 빨리 만들어주세요..제발..물만 부으면 되잖아요.. 내가 정말 반가운 듯 여러 말을 건네는 정재현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짧은 대답만 해댔다. 아, 얘는 왜 나이를 먹어도 잘생긴거야. 백화점 손님들 다 홀리겠네. 겨우겨우 대화를 이어나가는데, 정재현과 함께 들어왔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때마침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 잔도 다 만들어졌다. 드디어 가는건가..드디어..
"재현아. 저녁 시간 다 끝났다. 들어가자."
"네 선배님."
여기 백화점 경호원은 얼굴 보고 뽑는건가. 뭔가 꽃밭을 보는 기분인데. 잘생긴 분들의 얼굴에 홀려 잠시 눈이 풀렸었는데, 내 눈 앞에서 손을 흔드는 정재현 덕에 정신을 차렸다.
"뭘 그렇게 멍때려?"
"어? 아냐아냐."
"나 갈게. 자주 보겠다 앞으로."
"하하..응.."
"간다!"
고등학교때와 다를 게 없는 과즙미를 팡팡 뽐내며 나에게 웃어보인다. 어색한 손동작으로 손을 흔들어주고, 정재현이 카페 밖으로 나서자마자 카운터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경호원 원래 얼굴보고 뽑나봐?"
"오빠.. 저 오늘 어때요?"
"응? 너?"
"네.."
"고된 일에 찌든 모습이지. 언제나."
냉정한 도영오빠에게서 들려온 말은 나를 두 번 죽이는 말이었다. 이 거지같은 상태로 정재현을 마주치다니. 그것도 7년 만에. 내가 아, 망했어. 하며 머리를 움켜쥐자 오렌지 주스를 쪽쪽 빨아먹던 도영오빠가 왜왜? 하며 물어온다.
"나랑 얘기하던 애 있잖아요.."
"응."
"제가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애에요.."
"..저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도영오빠의 눈빛에 또 다시 좌절해버렸다.
아..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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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라 떨리네요..!
두근두근
잘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