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17년 소꿉친구 민윤기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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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 다닐 적에 만난 친구와 17년째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내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줬고, 나를 변화시켰다. '윤기야, 이거 먹어봐. 아까 만든 거야.' '내가 그걸 왜 먹어.' '원래 친구끼리는 콩 한쪽이라도 나눠주는 거랬어. 얼른. 나 팔 떨어진다?' 작은 거라도 자기보다는 내게 먼저 가져다주는 사람이다. 그런 여주에게 나도 무언가 표현을 하고 싶었다. '이게 뭐야, 윤기야?' '내가 샀는데 안 맞아서. 버리기는 좀 아깝잖아.' '이걸 네가 입으려고 샀다고...? 분홍색인데, 윤기야?' '입기 싫으면 말고. 버려.' '아니 너무 예뻐서 그렇지. 고마워, 친구야.' 가끔 허술하게 흘러나오는 내 대답에 진땀을 빼기 일쑤였다. 그래도 내가 무안하지 않게 넘어가 주는 여주 덕분에 지금은 자연스럽게 챙겨줄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찾아오는 상술 기념일을 우리는 챙기지 않았다. 그런 날을 제외하고도 서로한테 작지만 항상 해주니깐 우리에게 그런 날은 그저 지나가는 하루에 불과하지 않았다. 올해 화이트데이에도 아무 말없이넘어갔다. 물론 여주만. 최근에 많이 아팠을 때, 여주가 집에 있던 초콜릿과 사탕을 몇 개 가져가는 걸 봤다. 어차피 집에 있으면 아무도 먹지 않아서 버려질 텐데, 여주는 그걸 알았는지 가져갔다. 그리곤 종종 주머니에서 꺼내 먹는 걸 심심하지 않게 봤다. 최근에 여주한테 미안한 일만 있었는데 어떻게 만회를 할까 고민하던 내게는 그런 여주의 모습들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대부분의 음식 취향이 같지만 한가지 다른 게 있다면 그건 간식이었다. 나는 단 음식을 안 좋아하는데, 여주는 좋아했다. 많이 좋아했다. 처음에는 동기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만들어서 줄까, 하는 1초의 멍청한 생각도 들었다. 남자친구도 아닌데 무슨. 그냥 동기들이 마트에 간다길래 신경 안 쓰는 척, 같이 들어갔다. 알록달록한 갖가지 사탕과 초콜릿을 사는 모습을 대충 흘겨보았다. 내게 살게 없냐는 질문에 고개만 끄덕거리자 박지민이 조용히 다가왔다. '형, 누나 거 안 사요? ' '누나?' '네, 여주 누나요. 난 형이 그래서 따라온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야. 저기 팔자 좋게 늘어진 진돗개가 웃겠다.' '그래요? 그러면 내가 누나 거 대신 사야겠다. 그래도 되죠?' '미친놈아, 그걸 왜 네가 사.' 짧은 대화 속에서 지민이는 만개한 웃음꽃을 피웠고, 내게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초콜릿 이름을 몇 개 알려주곤 동기들 틈으로 들어갔다. 알려준 초콜릿을 대충 보는데, 포장지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까만 겉 포장지에 하얀 곰돌이가 그려진 초콜릿. 눈으로 도장을 찍어놓고, 동기들 틈으로 들어갔다. 빈손으로 온 나를 보고, 지민이는 입술을 내밀어 보였다. 주먹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자 깨갱하고, 내게 시답잖은 장난을 쳤다. 10시가 넘자 친구들은 술을 마시자며 술집으로 향했고, 한 시간가량을 마시다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낮에 보니깐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는 여주에게 전화를 걸면서 아까 낮에 들렸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들려오는 경쾌한 소리와 동시에 여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기야.' '응, 어디야?' '나 지금 술 마시고 있어. 너는?' '그냥 밖이지. 언제 들어가냐.' '글쎄... 오랜만에 만난 거라서. 올래?' '됐다. 동네 포장마차겠지, 뭐.' '헐 맞아. 역시 내 친구야, 민윤기. 멋져.'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들어가는 길에 전화해.' '응, 윤기야. 이따 봐.' 아까 눈도장을 찍었던 초콜릿을 사서 여주가 있다는 포장마차로 갔다. 사실 이건 술기운에 나온 약간 미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혹시 여주가 왜 이러냐면서 안 받으면 어쩌지. 그래, 며칠 전에 아팠을 때 간호해준 보답이라고 하면 된다. 머릿속에서 시나리오를 상상하면서 포장마차 근처에 다다라서 문자를 보냈다. '김여주, 밖으로 나와.' 1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문자에 전화를 걸자, 여주의 친구가 받았다. '안녕하세요, 여주 친구분 맞죠? 지금 저희가 합석을 했는데, 그쪽 남자분이 여주한테 바람 좀 쐬러 나가자고 해서요.' '아, 네.' '오면 전화하라고 할까요? 금방 올 텐데.' '괜찮습니다. 전화 온 거 말하지 말아 주세요. 김여주 술 약하니깐 적당히 마시게 부탁드립니다.' 포장마차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서 마셨나 보다. 괜히 가슴속에서 무언가 타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허탕쳐서, 그래서 그런 거겠지. 나도 안 좋아하는 커다란 초콜릿을 어떻게 치워야 되나 고민하다가 그냥 집에 놓자 싶어서 거실 구석에 놓았다. 그래. 내가 뭘 하겠다고 이 난리를 친 건지 모르겠다. 내가 하는 일은 항상 이렇다. 오늘도 그렇게 멍청한 하루를 마무리했다. 추신 - (연필로 그어버린 엑스) 오늘은 윤기의 일기장입니다! 여주의 일기도 곧 올라와요 :0 [암호닉] 항상 받습니다! 땅위, 찡긋, 설탕물, 달밤, 윤기야메리미, 핑쿠릿, 다솜, 너만보여, 사랑, 쿠크바사삭, 보보, 바다코끼리, 둘리, 또로롱, 미뉸기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