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년 아 。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파랑의 끝, 그 너머까지. 제 모든 것을 투명히 내어 보이며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다. 이른 아침의 바다는 푸름을 머금는다.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밀려오는 파도는 끊임없이 불규칙적인 연주를 한다. 끝없는 푸름을 눈에 담다가 귀를 감으면, 바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저 멀리,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와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 이따금씩 들려오는 갈매기의 노래. 약간의 비릿함을 담은 바다 내음을 가득히 삼키고 눈을 뜨면, 비로소 푸름을 온몸으로 맞이하게 된다.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다.
여주야, 집에 가자. 흐릿한 시야 사이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인영이 어렴풋이 보인다. 언제나 배경은 푸른 바다. 나는 새하얀 모래사장 위에 우두커니 서있다. 분명 날 향해 웃으며 손을 뻗고 있는데, 결코 그 손을 잡을 수 없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잰걸음으로 다가가 손을 잡아 보지만, 인영은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버린다. 가지 마, 기다려. 아무리 애타게 인영을 붙잡아도, 절대 가까워지지 않는다. 웃는 얼굴을 하고 점점 멀어지는 사람을 목 놓아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다.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엄마…."
꿈이다. 또 똑같은 꿈을 꿨다.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손으로 훔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잊힐만하면 다시 꾸게 되는 꿈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잠결에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이 남긴 빨간 생채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높게 올려 묶고 찬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바다 냄새. 콧 속 깊이 파고드는 바다의 향에 큰 안도감을 느끼고 몸을 일으킨다.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꿈을 꾸고 난 뒤의 아침은 항상 기분이 뒤숭숭하다. 그럴 때면 바다로 나가야 한다. 온몸을 감싸는 찬 공기를 맡으러, 바다에 나가야만 한다.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어디 가니! 학교 안가?"
"바다에요! 그리고 오늘 토요일이에요오!"
"뛰다 넘어질라! 조심해!"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한 뒤, 잡히는 옷을 껴입고 대문을 나섰다. 그리곤 시원한 아침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뛰다 보면 어느새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이른 아침부터 바다에 나가기 위해 준비를 하는 이웃 아주머니들께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내가 넘어질까 소리치시는 아주머니께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낮은 지붕의 집들이 옆으로 스쳐 지나가고, 다닥다닥 붙어 있던 주택들의 거리가 점점 멀어질 때 즈음, 방파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이 탁 트인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서야 미소를 짓는다.
"하, 흐아…."
방파제를 넘어 아무도 없는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한 번에 몰려드는 숨에 급히 호흡을 골랐다. 후아, 한참을 무릎을 짚고 서서 숨을 고르다, 겨우 안정을 되찾고 고개를 들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쪽 반대편에선 배들이 줄지어 출항할 준비에 바빴고, 갈매기는 팔자 좋게 끼룩끼룩 울고 있었다. 가만히 그 푸름을 바라보다, 모래를 대충 털어내고 바위 위에 털썩 기대앉았다. 약간 딱딱했지만 상관없다. 자세를 편하게 고쳐 앉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대신 다른 걸 더 잘 들을 수 있게 된다. 가만히 귓가에 맴도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철썩, 파도가 부서져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철썩, 철썩.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 소리에 비로소 무거운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한참을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가, 문득 얼굴로 쏟아지는 햇살을 누군가 가렸다는 느낌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희미하게 보이는 익숙한 실루엣.
"여기서 뭐 해, 김여주."
"……지민아."
그 애다. 애초에 나를 부를 사람은 너밖에 없었으니, 네가 내 앞에 서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눈썹을 가리는 앞머리가 바닷바람에 살랑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씩 웃어버렸다. 위에서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지민이는 미소 짓는 나를 빤히 보다가, 따라 웃어버린다. 너 또 아침 안 먹었지, 내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나긋나긋하게 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나른한 목소리가 파도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박지민 넌 여기서 뭐 해."
"나야 뭐, 그냥 바람 쐬러 나왔지. 너는?"
"나도. 그냥……."
"……너 또 꿈꿨어?"
너는? 미소 지으며 묻는 말에 말 끝을 흐렸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에 힐끔, 지민이를 올려다보자 다 안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또 꿈꿨어? 넌 나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아,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다 알아채곤 답이 정해진 질문을 하는 건지. 아무런 대답 않고 가만히 미소를 짓자, 지민인 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않는 그 모습을 보자 괜히 마음이 불편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 오늘은 안 울었어, 지민아. 그 말에 지민이는 또 고개를 돌려 지그시 내 눈을 바라본다.
"이젠 안 울어. 나 버리고 간 엄마 뭐가 그립다고."
"정말?"
"응, 정말."
정말. 미소를 지어 보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지민인 한참을 내 얼굴을 바라보다 픽 웃어버린다. 그리곤 숨을 한 번 삼켰다, 엄지손가락을 들어 내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눈물 자국. 간결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지곤 다시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에 머쓱하게 눈가를 비볐다. 분명 울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무안해져 목소리를 높여 몇 마디를 덧붙여본다. 이, 이거 하품해서 그런 거야. 진짜루. 되지도 않는 변명이란 걸 알면서도 마구 우겨대면, 지민인 가만히 듣고 있다가 끝내 소리 내어 웃으며 아프지 않게 꿀밤을 놓는다. 으이그.
"아, 아퍼!"
"거짓말. 하나도 안 아픈 거 다 알아."
"씨이. 나 머리 안 감았으니까 건들지 마."
"어제 저녁에 감고 잤을 테니까 괜찮아."
괜히 민망한 마음에 싫은 척을 하며 손을 밀어내자, 그게 또 우스운지 소리 내어 웃는 지민이를 보며 샐쭉 웃어버린다. 저녁에 머리 감고 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으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넌 나를 너무 잘 알아. 그 말에 박지민은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생각에 잠기는듯 하다가, 다시 해사하게 웃는다. 응, 나는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지.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심술이 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냐는 듯 나를 올려보는 얼굴에 뾰로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것도 알겠네."
"뭘?"
"나 배고파. 밥 먹으러 갈래."
흥, 콧방귀를 뀌고 하얀 모래를 팍팍 밟으며 걸어나가자, 뒤에서 지민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같이 가, 여주야. 괜히 따라잡히고 싶지 않아 빠르게 걸었지만, 결국엔 지민이에게 잡힐 것을 알고 있기에,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열심히 쫓았다. 같이 가자니까. 내 팔을 붙잡고 금세 옆에 선 지민이의 목소리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가, 입술을 꾹 깨물곤 고개를 들었다. 야, 이거 놔아. 뒤로 물러서 팔을 빼면, 쉽게 나가떨어지는 손이지만 그 앤 여전히 날 보고 웃는다. 바다 내음과 함께 싱그러운 향기가 풍겨온다. 마음이 간지러웠다.
소 년 아 。
"주번 청소하고 가고, 다들 일찍 집에 들어가라. 종례 끝."
"안녕히 가세요."
오늘은 월요일임에도 유독 시간이 빨리 갔다. 늘 그랬듯 간단히 종례를 끝낸 뒤 교실을 나가시는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서둘러 교실을 나가려는데, 무언가에 가방이 턱 걸려 움직이지가 않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자, 내 가방을 손으로 움켜쥐고 삐딱하게 날 내려다보는 지민이가 보인다. 뭐냐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지민인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한다. 너 주번이야. 에에엥?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얼굴은 부여잡고 소리치자, 박지민은 웃겨 죽겠다는 듯 소리 내어 웃는다.
"오늘 일찍 가려고 했는데!"
"내가 도와줄게. 청소 같이해."
"흐, 흥! 그럼 먼저 가려고 했어? 당연히 도와줘야지."
청소 같이해. 당연하다는 듯 어깨에 걸친 가방을 내려놓고 창문을 여는 뒷모습에 괜히 심장께가 간지러워 툴툴대자, 또 한 번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나, 나는 걸레 빨아서 올 테니까 책상 줄이나 좀 맞춰주던가! 다급히 칠판 위의 걸레를 집어 들고 문을 나서자, 뒤에서 그래, 하고 늘어지게 대답하는 박지민의 목소리가 들린다. 쾅, 앞문을 힘을 주어 닫은 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나가다가 잠시 멈춰 섰다. 간질간질. 목 안에 깃털이 든 기분. 자꾸만 그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빨리 와. 내리막길까지 속도를 내어 잰걸음으로 걷다, 저만치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지민이가 신경쓰여 뒤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빨리 오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팔짱을 끼고 가만히 바라보자, 지민인 제 머리칼을 헝클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왜 그렇게 마음이 급해, 어디 가려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지민이를 올려다보며 간결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바다. 그 대답에 그럴줄 알았다는 듯 가만히 미소를 짓던 그 앤, 손을 들어 바람에 날린 내 머리칼을 정리해주곤 앞장섰다. 그래, 가자. 바다에.
손가락이 닿았던 이마가 달아올랐다. 살짝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콩, 콩, 콩. 하얀 셔츠 아래에서 천천히 뛰고 있던 심장이 점점 속도를 내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안 와? 뒤를 돌아보며 해사하게 웃는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같이 가!
"안 추워?"
"괜찮아, 오늘 날씨 좋아."
"날 풀려도 바닷바람은 차."
"……괜찮은데."
"감기 걸려."
얼마 지나지 않아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바다와 백사장이 눈에 들어왔고, 평평한 바위 위에 털썩 주저 앉아 힘껏 바닷공기를 들이마셨다. 내 옆에 앉으며 춥지 않냐 묻는 말에, 약간의 쌀쌀함을 느끼며 고개를 가로 젓자, 지민인 가방에서 겉옷을 꺼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싱그러운 향기. 바다 향과는 조금 다른 그 애의 향기가 물든 겉옷에 잠시 숨을 참았다가 내뱉는다. 바다는 늘 그러했듯 푸르다. 끝없이 푸르며, 조용하다. 철썩이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눈을 감았다 떴다.
"지민아, 너는 나중에 뭐 하고 싶어?"
"응?"
"졸업하면, 뭐 할 거야?"
"글쎄……, 생각 안 해봤는데."
문득, 바다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배를 보고 그런 생각이 들어 물었다. 힐끔, 올려다보자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수평선 저 너머를 바라본다. 생각 안 해봤는데. 푸스스, 웃으며 하는 그 말에 길게 숨을 삼켰다 천천히 내뱉었다. 너는? 가만히 파도 소리를 듣다 내게 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지그시 날 바라보는 지민이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나는 말이야…….
"육지에 나가보고 싶어?"
"응? 어떻게 알았어?"
"난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잖아."
계속 입속에서 맴돌던 말이 뜻밖에도 지민이의 입에서 나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지민인 또 다 안다는 웃음을 짓는다. 난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잖아. 바람처럼 흩어지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다. 지민아, 있지. 이 마을은 되게 좁아. 철썩, 파도가 다시 한 번 크게 밀려오고, 지민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조금씩 세차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지민이의 향이 묻은 겉옷을 힘을 주어 여몄다.
"좁고, 사람도 적고, 늘 똑같고."
"그래서 육지로 나가고 싶어?"
"……응."
"그게 다야?"
"……그냥, 엄마는 육지에서 뭐하고 사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게 다야? 내 마음 어딘가를 관통하는듯한 그 말에 잠시 지민일 올려다보다가,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는 육지에서 뭐하고 사나, 궁금하기도 하고. 마음 깊숙한 곳, 저 어딘가에서 차마 튀어나오지 못하고 맴돌던 그 말은 결국 허공에 떠돌았다. 지민이는 항상 그랬다. 항상 박지민 앞에 서면, 마음속에 꼭꼭 묻어두었던 이야기도 토해내게 되었다. 그 말을 뱉어놓곤 힘없이 웃어 보이자, 박지민은 다 괜찮다는 듯이 내 머리칼을 한번 흩어놓았다. 그래, 나중에 꼭 육지에 가자.
"같이?"
"응, 같이."
"그래,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입꼬리를 슬쩍 올리곤 힐끔 나를 보았다가, 다시 허공을 바라보는 그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바닷바람이 차가워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박지민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무심결에 내 귀를 만지작거리다, 내 손 옆에 자리 잡은 지민이의 손을 흘낏 바라보았다. 남자애치고 작다고 했었다. 그런데도 내 손을 덮을 만큼 충분히 컸다. 간질간질, 자꾸만 간질거린다. 언제쯤 갈까?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움찔이다, 한번 숨을 들이켜곤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갈 거야."
"……."
"지금은 바다가 좋으니까."
늘 그 자리에 푸르게 있는, 바다가 좋으니까. 그리고…….
"나도."
바다만큼이나, 네가 좋으니까.
소 년 아 。
점점 해가 져가는 저녁이었다. 간단히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저녁을 때우고, 멍하니 마당에 앉아있었다. 기분이 뒤숭숭했다. 분명 꿈을 꾼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나쁜 일도 없었는데 이상했다. 마음속 어딘가가 시리고 아려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가만히 심장께를 움켜쥐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바다 내음. 점점 불규칙적으로 뛰던 심장이 안정을 되찾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사라지고 오직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흐릿한 바다 내음만이 남았다. 이상한 기분을 떨쳐내려, 눈을 감고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숨을 내쉬었다.
"여주 있니?"
"……네, 여기요."
"서울에서……, 누가 널 찾아왔어. 여주야."
안정을 되찾은 것도 잠시였다. 덜컹이며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자, 이웃 아주머니께서 문 앞에 서계시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주머니의 불안함, 걱정스러움을 담은 표정.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차분해짐을 느꼈다. 서울에서, 누가 널 찾아왔어.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나는 미리 직감하고 있었던 걸지도. 철썩, 파도가 크게 몰아쳤다.
오늘따라 바닷바람이 날카로웠다. 겉옷 하나를 챙겨올걸, 하는 후회를 했지만 이미 지나온 일이니 어쩔 수 없다. 늘 앉던 바위에 혼자 앉아 멍하니 해가 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다, 몸을 웅크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춥다. 눈가가 시려왔다. 저녁의 해변은 조용하다. 이른 아침 바다로 나간 배는 돌아오기 위해 막 준비를 할 시간. 가끔씩 해변을 찾는 사람들도 찬 바닷바람에 금세 돌아갈 시간. 나밖에 없다. 여기엔, 나밖에 없다. 살짝 고개를 들어 어두운 군청으로 물드는 바다를 바라보다, 다시 얼굴을 묻는다. 저 멀리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얼마나 멀리에 있는지 모르겠다. 점점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김여주!"
"……지민아."
"왜 여기 혼자 있어, 한참 찾았잖아."
그 애다. 애초에 날 부를 사람은 그 애밖에 없으니, 그 애가 내 앞에 서있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고, 항상 생각해왔다. 지친 모습이 역력한 표정으로, 한참을 숨을 고르며 내 앞에 서 있는다. 힘 없이 그 앨 바라보며 웃음을 지어 보이자, 지민인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참을 날 바라보다, 늘 그러했듯 내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채 고르지 못한 숨이 내 옆에서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온다. 그 숨소리를 들으며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넌 항상 내가 바다에 있을 때마다 나타나. 한참을 아무 말도 않다가, 박지민은 툭, 한마디를 던진다. 안 추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 말투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응, 안 추워.
"……거짓말."
"……."
"손이 왜 이렇게 차. 이거 입어."
무릎을 감싼 내 손을 한 번 쥐어보더니, 제가 입은 외투를 벗어 어깨에 감싸주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다정한 말투다. 가만히, 그냥 그 자리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괜히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숨을 참다가, 눈을 감았다. 여전히 눈가는 시렸다. 금세 해가 져 어두워진 바닷가에, 저 멀리 항구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군청의 바다를 밝혀가는 불빛을 하나씩 세아리다, 잠긴 목소리로 지민이를 불렀다. 지민아, 있잖아.
"서울에서, 내 이모라는 사람이 찾아왔어."
"……."
"난 처음 보는 사람인데, 냅다 내 손을 잡곤 우시더라."
"……."
"……엄마가 죽었대, 병으로."
가만히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지민이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첫마디를 떼자 나머지는 자연스레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죽었대. 그 말을 내뱉고 나자 마음은 놀랍도록 가볍고, 차분해졌다. 움찔, 맞닿은 박지민의 어깨가 작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육지에서 뭐하고 사나 궁금했는데, 몇 년 동안 병원에 처박혀 있었다니. 웃기지?
"나 여기에 버릴 때부터 아팠대."
"……."
"그렇게 죽어버릴 거면, 차라리 나랑 같이 있다 가버리지…."
허탈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늘 꿈에서만 만나던 하얀 원피스를 입은 사람. 그렇게 붙잡으려, 붙잡으려 해도 결코 잡히지 않던 그 손이었다. 분명 나중에 내가 크면,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나 이만큼 컸다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고 싶었는데. 무릎을 감싼 차가운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차디찬 손에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떨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남자애치고는 작은, 그렇지만 내 손을 충분히 덮을 만큼 큰 지민이의 손이 내 손을 꼭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너는, 괜찮아?"
"……응, 괜찮아."
"……여주야."
"응?"
"울어도 돼."
울어도 돼. 평소와 같은 말투였다. 그런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심장을 찌르듯이 아팠는지, 내 손에 맞닿은 그 애의 손이 왜 그렇게도 따뜻했는지. 억누르던, 꾹 참고 억눌러내던 울음이 깨문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어, 여기가 너무 아파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어. 울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는데도, 한번 터져 나온 울음은 멈출 수 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그렇게 스몄다. 괜찮아, 다 괜찮아, 김여주. 애써 옷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며 그치려 노력했지만, 내 팔을 끌어당겨 제 품에 넣곤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는 그 애의 손길에,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어버렸다. 지민이의 손이 꼭 다 울고 털어버리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목놓아 울었다.
어느새 바다엔 어둠이 내렸다. 어둠을 담은 바다는 끝없는 군청으로 물든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아 피부 결을 곤두서게 한다. 바다 내음은 더 깊이, 더 진하게 콧속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어온다. 달이 뜬 어두운 바다를 가만히,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여전히 박지민이 있다. 바닷바람에 날리는 머리칼로, 하얀 교복 셔츠를 입은 모습으로. 지민아, 있잖아. 목놓아 울어서인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잠겨있었다.
"이모가, 서울로 오래."
"응?"
"엄마가 날 데려오고 싶어 했대, 서울로."
가만히, 초연하게 뱉은 말에 허공을 바라보던 지민이의 눈이 내게 닿는다. 그리곤 흔들린다. 바닷바람이 세서, 별빛이 일렁여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지민인 그냥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늘 그러했듯이 가만히 나를 본다. 계속 그 눈을 마주하다가 숨을 깊게 삼키고 허공을 본다. 어두워진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이 모호했다. 한참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다가, 희미한 그 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갈 거야?"
눈을 바라본다. 일렁이고 있었다. 목 아래 깊숙한 곳에서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한 걸음, 박지민에게 다가갔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에 손을 뻗어 정리해주었다. 그 언젠가 지민이가 그랬던 것처럼. 대답을 바라듯, 평소와 같은, 아니 평소와는 조금 다른 젖은 눈으로 날 지그시 내려다보는 지민이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니, 안가."
"……왜?"
안가. 떨리는 목소리에 지민이는 한 걸음,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묻는다. 왜? 내가 한 걸음, 그리고 네가 한 걸음. 우리 사이의 거리는 한 뼘 더 좁혀졌다. 철썩, 큰 파도가 밀려온 모양인지 바위에 부서져 내리는 파도 소리가 귓가에 크게 맴돈다. 맞춰볼래? 다소 뜬금없었던 내 물음에 박지민은 한참을 흔들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속삭인다.
"……바다가 좋아서?"
"……아니."
아니, 그게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음을 지어 보이자, 지민이는 특유의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인다. 한 걸음, 다시 네게 걸어갔다. 이젠 박지민의 불규칙한 숨소리까지 들린다. 어깨에 걸친 외투에선 박지민의 향이 난다. 네 웃음과 같은 싱그러운 향기. 넌 늘 그랬듯 지그시 나를 바라본다. 거짓말쟁이, 넌 나에 대해 다 안다고 말했으면서.
"네가 좋아서."
네가 좋아서 그래, 지민아. 바다만큼이나 네가 좋아서. 늘 내가 바다에 나올 때마다 너는 내 곁에 있어주어서. 그래서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오랫동안 꾹꾹 눌러왔던 말은 네 앞에서 항상 하게 되니까. 그래서 가장 큰 비밀을 너에게 말해버린다. 그리곤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로 뒤돌아 해변을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한참이나 뒤가 조용하다가, 모래에 부딪히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짐을 느꼈다. 그래, 내가 아무리 빨리 뛰어도 결국엔 너에게 잡힐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잠시 걸음을 늦춘다. 결국 네 손에 팔이 잡혀버렸을 때, 가만히 고개를 들어 네 눈을 바라본다. 다정함을 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눈을.
"……알고 있어."
"……."
"나는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니까."
그래, 그 웃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다정하게 웃는 그 웃음을 좋아해.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은 지민이의 손에 힘을 주었다. 이마에 뜨거운 네가 천천히 닿았고, 그제야 눈을 떴다. 넌 네 앞에 서 있다. 네 숨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 거리에, 가만히 서 있다. 늘 푸름을 담고 있는 바다처럼, 싱그러운 향을 풍기며 내 옆에 서서.
"좋아해."
그렇게 웃는다. 여린 나뭇잎처럼 싱그럽게, 한낮의 바닷물처럼 투명하게. 내 손을 감싸 쥐며 박지민은 그렇게 웃는다.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파랑의 끝, 그 너머까지. 제 모든 것을 투명히 내어 보이며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사랑한다. 끝없는 투명, 그 안에 서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기에. 차가운 바다 내음을 머금고 늘 그 자리에 있기에. 그 자리에는 항상, 너도 있기에.
그래서 소년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소 년 아 。
안녕하세요, 티티입니다. 일단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신알신 받으신 독자분들 내놓으라는 로개줘는 안 내놓고 웬 지민이 글이? 하셨겠지요ㅎㅎ
사실 요새 개인적인 일로 바쁜 상태라 글을 쓸 시간이 거의 없었는데, 어제 뜬 지민이 트윗 사진을 보고 '아, 이 사진은 꼭 글로 담아야겠다.' 생각해서
급히 단편을 쓰게 되었답니다…. 사실 어제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전 느림보라 오늘에서야 글을 완성했네요!
이 단편은 진짜 뜬금없이 지민이 사진만 보고 쓰기 시작한거라 두서 없고, 짜임새 없는 글일수도 있습니다. 8ㅅ8
어떻게 써야겠다, 정해놓지 않고 그저 느낌만으로 쓴 글이거든요.
대충 바다와 소년, 첫사랑으로 키워드를 잡고 글을 써보았는데 괜찮은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바다 내음과 작은 섬마을의 해변 분위기를 읽는 독자님들 눈 앞에 그려지게 하고 싶었는데 어땠나요?!
독자님들께서 재밌게 읽어주셨다면 저는 그걸로 만족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개인적인 일을 해결하고 로개줘 4화로 찾아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