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해지는 가을이었다. 늦가을쯤. 한달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별일 아니겠거니 했던 증상들은 임파선암이라는 묵직한 존재로 다가왔다. 말기에요. 저희로썬 최대한 늦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들어 감기몸살에 관절염, 그리고 목에 만져지는 덩어리에 병원에 들린후 함께 멀리 나가보자고 한 외출이었다. 내 옆에 있던 그도, 당사자인 나도 충격에 덤덤해져 살짝 핀트가 나간것 같았다. 우리는 입원 수속을 밞은채 병원을 나왔다. 순식간에 시한부가 되버린 사람과 그의 애인은 사형날짜 한달전 함께 드라이브를 갔다왔다. 아무말도 없는 길고 지루한 드라이브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이에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정녕 미친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밤새 서로에게 취했다. 눈물 한방울 없던 그날이 지나고 나는 병원에 입원했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청명한 가을날이었다."크리스, 하고싶은 일 있어요?""집 가고 싶어."우리는 하루종일 이 의미없는 대사를 반복했다. 별다른 이유가 없으면 보내줄 수 없다는 병원측의 한마디에 우리 둘은 한큐에 포기했다. 귀찮은일은 딱 질색인것이 죽이 척척이었다. 크리스가 가면 누가 나랑 이렇게 척척일까. 그는 내 침대에 엎드린채 나를 보며 중얼거리곤 했다. 다 낫고나면 우리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놀아요. 나가지도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우리 둘만. 그래 그러자. 나는 이상하게 축축한 병원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은 뒤 대답했다.울어?아니요, 울 일이 뭐가 있어요. 아직 죽은것도 아니고. 내일 집 다녀올께요. 가져다 줄거 있어요?아니. 아, 아니다 앨범 갔다줘. 심심해.나랑 항상 같이 있으면서.그는 내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바보같아. 바보처럼 웃지마요. 바보같다. 얄쌍한 손가락이 찌르는 느낌은 감격이었다. 내가 살아있는 것에 대한 무언의 감격. 앞으로 느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감촉."레이, 올라와."그는 꼬물꼬물 어린아이처럼 느리게 침대 위로 올라왔다. 신발을 벗고 다리를 올리고 엉덩이를 걸치고 내 옆에 편하게 자리를 잡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자세를 몇번 고치던 그는 만족한듯 편하게 천장을 보고 누웠다. 팔을 괴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있지 나 하고 싶은일이 있는데.""집가는거 빼고.""아니, 너랑 산책하고 싶어. 세상 끝까지.""퍽이나."우리는 잠시 쳐진 커튼 틈으로 바깥을 보았다. 바쁘게 지나가는 침대옆으로 사람들 서너명이 붙어있었다. 귀를 찢을듯한 절규속에 우리는 말이 없었다.*그는 요즘들어 부쩍 불안해 했다. 내가 자주 통증을 호소함도 있었지만 최근 병원 분위기에서 압박을 받은것 같았다."크리스, 나가요. 우리 나가요.""..미안해. 오늘은 아니야. 검진 시간도 얼마 안남았어."그는 이를 꽉 물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내 생각보다 그는 훨씬 아슬아슬했다. 이리 올라와. 그는 기다린듯 성급히,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올라왔다. 다짜고짜 침대에 몸을 기대 앉은 나를 끌어안은 그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왜. 레이 왜.""..같이 바다 아직 못봤어요. ..아직 멀리 산책도 못했잖아요.""다 나으면 가자. 나 건강해. 알잖아.""응, 알아요."그는 어깨에 묻은 얼굴을 들었다. 어느새 생기가 없어진 피부와 표정이 나를 콕콕 찔러왔다. 모든게 나 때문인것 같았다."난 이제 뭘 해야 할까요."그는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레이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질문 앞에 붙은 당연한 말을 자연스레 생각해냈다.'크리스가 죽으면 난 이제 뭘 해야 할까요.'"..이제 니 세상인거지."나는 우울한 그에게 작은 농담을 던졌다. 작지만 위로가 된듯 그는 웃었다. 그는 우는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웃는다. 그리고 울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로 쳐다보았다. 그것은 여전히 까맣고, 여전히 깊었다. 레이, 나 괜찮아. 그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그의 눈은 살짝 반달 모양으로 접히는가 싶더니 일그러지며 눈물을 흘렸다."크리스, 나, 나 무서워."그는 주체할 수 없는듯이 흐느꼈다. 항상 예절을 중요시하는 그답게 그는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조용히 흐느낄 수 있도록 숨을 고르고 있었다."어떡해? 벌써 혼자인것 같아."나는 차마 그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중간에 간호사 몇명이 들어온것도 있었고, 나 또한 끝없는 외로움에 시달린다는것. 이미 끝이 보이는 길에선 더이상 도리가 없었다.-"..."고막이 찢어질듯한 정적이었다. 정적임을 알리는 신호음이 계속해서 웅웅거렸다. 간이침대에 앉아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그는 읽지도 않는 책만 뒤적이고 있었다. 요 며칠 상태가 악화되어 나는 그와 함께하는 시간보다 몇시간을 주기로 찾아오는 통증을 홀로 견디는 시간이 몇배는 많아졌다. 진통제를 먹어도 남은 통증의 감각이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렸다."저기 청년들."아까 몇시간동안 재활치료를 받고온 할머니가 우리를 불렀다. 아직 무얼 물어볼지 듣지도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도 나도 내심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우리 딸 왔었어?"우리 딸 나 없는새 왔다 갔나?"할머니는 치료중인 다리를 주무르며 작은 눈을 깜빡였다."..네. 할머니 안계신다고 나중에 또 오신대요."사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쉬운듯 에구구 소리를 내며 말했다."매일 나 없을때만 오네... 내가 빨리 나아야 할텐데."그 어디에도 할머니의 잘못은 없었다. 그는 헛된 희망을 드린데 대한 죄책감에 침대에 엎드려 얼굴을 묻었다. 팔을 뻗어 그의 등을 두드렸다. 병실은 다시 정적으로.-그는 며칠전 집에 다녀오면서 종이 한장과 펜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뭐야?""집에 가다가 라디오에서 들었어요. 버킷리스트라고 죽기전에.."그는 갑자기 말문이 막힌듯 침을 꿀꺽 삼켰다."..미안해요. 맞아, 나 왜이러지. 죽긴 누가 죽어."그는 미친듯이 종이를 발기발기 찢어다가 쓰레기통에 쑤셔넣었다. 행동을 마치고 그는 숨이 가쁜듯 몰아쉬었다."레이, 왜그래.""몰라요. 아무일도 없던걸로 해요."그는 천천히 침대밑에서 간이침대를 끌어냈다. 오늘따라 손길이 서툰 그는 자꾸만 짧은 신음을 냈다. 금속과 손가락이 마찰하며 살이 찢기는 듯한 소리가 스쳤다."아..왜, 왜이러지. 아, 아.."가만히 누워서 보기 안쓰러운 장면이었다. 나는 결국 침대에서 내려와 간이침대를 꺼내어 주었다."왜그래요. 내가 할 수 있는데."살짝 각이진 말투에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빨갛게 물든 손이 정신이 없는 모습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너야말로 왜그래. 진정해. 나 괜찮다니까."그는 끝도 없이 서럽게 울었다. 결국 그는 혼자 병실 밖으로 나갔다. 울던 얇은 목소리가 그렇게 처참할 줄 몰랐다. 나의 병은 나만의 병이 아니었다. 그가 돌아오면 웃어줘야 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작은 거울을 꺼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내 모습에 놀랐음은 두말할것도 없었다. 하루하루 일어날때면 배게에 수북히 쌓인 머리카락을 보며 말수가 줄어들던 그때가 생각났다. 도저히 거울을 보는것은 무리인것 같아 나는 거울을 아주 깊숙한 곳에 넣어두곤 한숨을 크게 쉬었다. 자연스레 보이는 주사바늘로 가득한 손등. 그 시선의 끝에 그와 간호사가 서있었다."항암제 놔드릴께요. 새 항암제니까 검사할꺼에요."그는 병실 문 앞에 서서 간호사가 팔에 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주사바늘이 작은 원 안으로 들어왔다. 생 살이 붕 떠서 약물을 머금었다.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느낌에 나는 태연하게 굴기로 했다. 간호사는 이따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들어와."나즈막히 그에게 말하자 그는 아무 생각도 없는듯이 멍하니 걸어왔다."다 울었어?""...이상해. 크리스가 아닌것 같아."그는 내 얼굴과 손등을 훑어보고 절망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절망으로 가득찬 쪽은 나였다."무서워?"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에 나는 답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애석하게도 그는 겁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리고 나는 아까 맞은 항암제 근처가 붉게 올라온것을 보았다. 심지어 간호사는 말이 없었다.-너랑 세상 끝까지 산책 못했다.난 크리스가 내 세계의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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