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w. 로스트
개츠비는 위대하지 않다. 그저 부질없는 사랑 앞에 제 모든 것을 내던진, 철 없는 멍청이일 뿐이다.
하늘로 끊임없이 터져 오르는 불꽃이 여주의 좁은 방 안을 비췄다.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침대 위에 앉은 여주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큰 저택 하나를 바라보았다. 불꽃 하나가 터질 때마다 침대 옆의 벽 위로 여주의 왜소한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초여름의 찬란한 밤하늘에 당겨진 화려한 불꽃이었다.
-
“말해.”
“...으.”
“끝까지 이렇게 입 다물고 있겠다 이거야?”
여주의 볼이 광기에 찬 김 씨의 손에 의해 이리저리 짓눌리고 뭉개졌다. 김 씨의 손에 스며들어있는 기름 냄새가 지독하리만큼 고약했다. 현관부터 이어진 거실 바닥은 이미 김 씨가 흩뿌린 기름들로 즐비했고, 끝까지 입을 다물고 악에 받친 눈에 날을 세운 여주는 그런 김 씨의 눈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죽자.”
“......”
“그냥 죽자고, 같이.”
말 끝에 바짝 힘을 준 김 씨의 이마 위로 비쭉 검붉은 핏대가 올라섰다. 여주의 볼귀짝을 강하게 내려치는 김 씨의 손에 의해 맥없이 돌아간 여주의 고개가 거실 수납장의 모서리에 부딪혀 기다란 상처 하나를 드러냈다. 여주가 가쁜 숨을 내뱉으며 바닥 위로 나동그라졌다. 입술이 터져 흐른 붉은 핏물이 여주의 침과 함께 바닥 위로 길게 늘어져 흘러내렸다. 기름 냄새에 피 냄새까지 섞여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었다.
“딸이라는 년이 그깟 돈이 뭐라고.”
“......”
“당장 지 애비가 죽게 생겼는데.”
투견 도박에 찌들려 몇 천만 원을 탕진한 김 씨가 노리는 건 딱 하나. 여주의 어머니, 자신의 아내가 병으로 죽고 남긴 보험금 하나였다. 제 생명줄이 그리 길지 않음을 진작에 감지한 여주의 어머니가 여주를 위해 꼬박 몇 년을 부어온 돈이었다. 딸깍, 딸깍. 자신의 작업복 뒷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김 씨가 이내 조그마한 싸구려 모텔 라이터 하나를 꺼내들었다. 어지러운 정신을 붙잡은 여주의 눈이 그런 김 씨의 뭉툭한 손가락으로 달라붙었다.
“너나 나나 맞아 죽는 것보단 이렇게 죽는 게 더 낫잖아. 안 그래?”
쉽게 켜지지 않는 라이터 불이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취기가 오른 김 씨가 덜덜 떨려오는 손으로 덜그럭거리며 플린트 휠을 돌려댔다. 마침내 조그마한 라이터의 구멍 위로 조그마한 불꽃 하나가 피어오르고, 여주는 마지막으로 부들거리는 제 손목에 최대한 힘을 실어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섰다. 오직 그 작은 불길 하나만을 오롯이 노려보며 여주는 김 씨에게로 있는 힘껏 제 체중을 실어 달려들었다.
“이 시발..!”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죽음을 갈망했던, 매일이 지옥 같아 하루라도 빨리 콱,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만 싶었던 자신이었으나 막상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덜컥 겁부터 나고 본 여주였다. 제 몸에서 나올 힘이란 힘은 최대한으로 끌어모아 김 씨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빼앗은 여주가 이내 김 씨를 밀치고 무작정 현관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철문이 열리고 새벽의 찬 공기가 여주의 목구멍 너머로 가득히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때, 문을 박차고 뛰쳐나온 여주의 눈동자 속을 가장 먼저 메워온 것이 바로,
아득한 거리 너머로 피어오르는 찬란한 불꽃 한 다발이었다.
여주는 어지럽게 꺾이고 휘어지는 골목길들을 지나 무작정 그 불꽃만을 보고 달렸다. 턱 끝까지 차오른 가픈 숨결 탓에 여주의 고개가 절로 하늘을 향해 추켜 올랐다. 아무렇게나 꺾어 신은 신발이 턱턱 소리를 내며 새벽의 골목길을 울렸다. 신발이 벗겨지기라도 할까 발가락에 바짝 힘을 준 채, 여주는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흐으, 으..”
눈가로 사정없이 들이치는 새벽바람 때문인지 괜스레 눈이 말랐다. 그럼에도 눈물은 여주의 벌건 볼 위로 죽죽 잘도 흘러내렸다. 판잣집과 재개발을 알리는 붉은 깃발들이 여주의 양 옆으로 빠르게 넘어가고 어느새 여주의 머리 위로 청량한 바람 소리를 내는 나무들이 드리웠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조금씩 조금씩 여주의 목구멍을 죄여오고 있었다. 다리 한쪽이 부러진 나무 의자처럼 발을 절뚝이며 속도를 늦추던 여주는 거대한 저택 하나가 제 시야로 들어옴과 동시에 길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집을 나설때까지만 해도 조그맣게만 보였던 불꽃이 어느새 여주의 머리 위로 웅장한 소리를 내며 펑, 하고 터져 올랐다.
오랫동안 이어진 불꽃놀이는 그 한 방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솟아오르지 않았다. 불꽃이 사라지자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와 저택 안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음악 소리뿐이었다. 여주의 불규칙한 숨결이 한층 차분해지고 있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여주를 막연히 사로잡았다.
-
길 건너 저택의 후문에서 걸어 나온 한 남자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제 수트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이내 뭔가를 두고 온 건지 제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뒷머리를 헤집어보이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의 시선이 얼마 못 가 길 건너 도보에 앉아있는 여주에게로 향했다. 파티가 시작된 지 오래라 그 흔한 차 한 대 조차 지나다니지 않는 저택 앞의 도로였다. 버려진 길 고양이처럼 도보에 앉아있는 여주를 보며 남자가 여주의 얼굴을 살피기 위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제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로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여주의 얼굴이 그런 남자의 눈에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
“저기.”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길 건너 여주에게로 다가선 남자가 여주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갑작스레 지독한 침묵을 뚫고 들어온 사내의 목소리에 놀란 여주가 숙였던 고개를 벌떡 들어올렸다. 여주의 검은 두 눈으로 여주의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의 얼굴이 가득히 들어찼다. 선선한 초여름의 냄새를 물고 온 밤바람이 두 사람의 앞머리를 이리저리 흩트려놓았다. 한동안 여주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하던 남자는 이내 빙긋,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여주가 순간 주춤거리며 미간을 구겨 보았으나, 제 한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디딘 채 턱을 괴 보인 남자는 다른 한 손으로 여주의 주먹 쥔 오른손을 가리켜 보일 뿐이었다. 그랬다. 그가 바로,
“불 좀 빌릴 수 있을까.”
연신 터져 오르던 성대한 불꽃의 주인, 태형이었다.
딱봐도 화려해 보이는 착장에 멀끔한 외모를 가진 젊은 남자였다. 여주는 태형의 손짓에 그제야 제 손에 아직도 그 싸구려 모텔 라이터가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술이 들어간 건지 게슴츠레 떠 보인 태형의 눈은 조금 풀려있었고, 몸에선 양주 냄새가 옅게 섞인 향수 냄새가 지긋이 풍겨오고 있었다. 여주가 잠시 제 손에 쥐어진 라이터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내 태형에게로 손을 뻗어 라이터를 건넸다. 여주에게서 라이터를 받아드는 태형의 손이 여주의 손끝을 짧게 감싸 안았다.
“고마워요.”
라이터를 받아 든 태형이 여주의 옆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서서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김 씨가 리이터를 켤 때와는 달리 단번에 피어오른 라이터 불이 태형의 담배 끝을 지졌다. 상처 하나 없이 길고 매끄러운 태형의 손가락 사이로 끼워진 담배 끝에서 붉은 불씨를 품은 담뱃재가 서서히 바스라져 내렸다. 방금 전까지 여주의 목숨을 위협했던 그 라이터 하나가 태형의 손에 쥐어지니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파티 끝나 가는데,”
“......”
“안 들어가요?”
담배를 한번 깊게 빨아들인 태형이 여주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뿌연 담배 연기를 한번 내뱉고는 다시 여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태형의 물음을 들은 여주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입술이 터지고 이마가 찢어지고. 머리는 산발에 누가 봐도 거지꼴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저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밖에 해석이 안됐기 때문이었다. 여주가 조금은 날카로워진 시선으로 태형이 내뿜는 담배 연기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검은 하늘 위로 태형의 담배 연기가 구름처럼 떠올랐다 빠르게 흩어져 사라졌다. ...어,
“지금 뭐 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태형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여주가 채가듯 빠르게 뺏어 문건. 대체 이깟 것 하나가 뭐 그리 위로가 된다고 엄마는 살아생전에 부득불 담배를 끊지 못했던 걸까. 여주가 태형에게서 뺏어든 담배를 어설프게나마 깊숙이 빨아들이며 생각했다. 순식간에 담배를 빼앗겨버린 태형의 표정이 꽤나 볼만했으나 여주는 그런 태형의 표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태형의 표정까지 살피기엔 처음 피워보는 담배가 너무도 매웠고 여주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곧 입안으로 차오른 담배 연기를 제대로 뱉어내기도 전에 사레에 들린 사람처럼 제 목을 부여잡고 연신 기침을 뱉어내는 여주였다. 여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눈가 주변으로 희미한 물기가 어렸다. 태형이 여주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고개를 숙여 여주의 얼굴을 살폈다. 여주가 담배를 쥔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런 태형의 어깨를 밀어냈다. 태형이 그런 여주의 손에서 한없이 닳아가는 담배를 다시 뺏어들어 바닥 위에 내던지듯 떨어트렸다. 희미한 불씨가 태형의 매끈한 구둣발에 처참히 짓이겨졌다.
-
“......”
여주의 기침소리가 서서히 잦아든 이후에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는 태형이었다. 놀란 건지 화가 난 건지, 아무 말 없이 여주를 바라보는 태형의 표정이 미묘했다. 안 들어가요?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고, 먼저 그 정적을 깨트린 건 여주 쪽이었다.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제 눈가를 손등으로 쓸던 여주가 옆에선 태형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앞머리가 날려 훤히 드러난 여주의 이마가 태형의 두 눈에 담겼다. 붉은 피딱지가 내려앉은 상처 또한 함께.
“같이 들어갈래요?”
그리고 잠시 후 들려온 대답이라곤 저런 뜬금없는 대답뿐이었다. 또 장난을 치려는 건가 싶었지만 장난 치는 사람의 얼굴 치고는 표정이 꽤나 진지했다. 여주가 곰곰히 머리를 굴렸다. 안 그래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대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평소엔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갔다가 주말에만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였으니 오늘 밤만 버티면 또다시 조금이나마 숨 쉴 틈이 생길 터였다. 그런 여주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한 사람처럼 태형은 여주에게로 망설임 없이 제 손을 뻗었다. 자신과 함께 가자고.
“경찰에 잡혀갈 일 있어요?”
“그래서 지금 정식적으로 초대하고 있잖아.”
“당신이 무슨 수로 날 초대..”
터무니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집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집에 도둑고양이처럼 숨어들 순 없는 노릇이라고, 여주가 애써 태형을 외면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초대라니. 순간 태형의 말에 뭔가를 깨닫기라도 한 사람처럼 갑작스레 뒷말을 잇지 못하는 여주였다.
“불 빌려 준 값이라고 생각해요.”
여주의 앞으로 다시 무릎을 굽혀 앉은 태형이 자신이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여주의 어깨에 둘러주며 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한 시를 넘어가고 있는 시간, 태형이 장난스레 제 눈가를 찡긋이며 여주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일으킨 여주의 옆으로 나란히 발을 맞춰 선 태형은 이내 붙잡은 여주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팔에 엮었다. 팔짱을 끼긴 했으나 허공에 어색하게 붕 떠있는 여주의 손을, 태형이 지긋이 감싸 눌렀다.
“손은 이렇게.”
“......”
“안에 사람이 많아요. 놀라지 말고 나한테 붙어요.”
태형의 차분한 목소리가 여주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자신도 모르게 태형의 팔을 잡은 손에 더 바짝 힘을 준 여주가 제 입술을 물었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여주는 그렇게 태형을 따라 저택 안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화려한 음악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져 오고 있었다.
-
“이층으로 가요.”
저택 내부는 가히 웅장했다. 천장은 끝도 없이 높았고, 중세 시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샹들리에는 색색의 빛을 받아 번뜩이고 있었다. 단순한 사교 파티라고 태형은 말했으나 여주의 눈에 보이는 광경들은 조금도 단순하지 않았다. 간간이 티브이로만 접하던 유명 배우들과 사업가들이 샴페인을 터트리며 한껏 술에 취해 파티를 즐겼고 갖은 공연과 이벤트들이 이어져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드문드문 소문으로나마 접하던 이야기보다도 더더욱, 말 그대로 호화롭기 그지 없는 파티였다.
“도련님.”
태형이 그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주를 제 방이 있는 2층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런 태형의 발을 붙잡은 건 말끔한 정장 차림의 한 중년 남자였다. 태형의 귓가에 뭐라 깍듯이 속삭이는 걸 보니 태형의 비서 정도로 보였다. 비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태형이 피곤하다는 듯 제 목덜미를 주무르고는 슬며시 제 팔에 끼워져있던 여주의 손을 풀어냈다.
“금방 따라 올라갈게요.”
태형이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자신의 비서를 향해 여주를 챙길 것을 당부하고는 다시 1층으로 향했다. 그런 태형을 뒤로하고 여주가 비서를 따라 올라간 2층엔 1층과 달리 고요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여주의 머릿속으로 문득, 파티가 끝난 뒤 이 넓은 공간에 홀로 남게 될 태형의 모습이 그려졌다.
“편하게 자리에 앉아 계시면 됩니다.”
“...아, 네.”
비서를 따라 2층의 끝 방으로 들어온 여주가 주춤거리며 방 안을 살폈다. 정갈하게 배치된 미술품과 가구들. 어디 한 군데 빠질 곳 없이 부티가 가득 묻어난 침실이었다. 침실 중간의 소파로 여주를 안내한 비서는 여주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섰다. 제 어깨에 덮여있던 태형의 자켓을 조용히 의자에 걸쳐둔 여주가 달빛이 훤한 태형의 방 창문으로 조심스레 다가섰다. 역시나 파티가 한창인 1층의 테라스가 보였다.
여주의 눈이 자연스레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태형을 쫓았다. 태형의 곁으로 수많은 귀빈들이 드나들었고 태형은 그런 한 사람 한사람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띠어 보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는 미소였다.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처럼 부드럽게 말려올라간 태형의 입꼬리는 쉽게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태형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여주는 이내 자리에서 돌아서 욕실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세면대 앞에선 여주가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지워내고 입술과 이마 주변의 피딱지를 닦아냈다. 물이 닿은 상처 부위가 따끔거렸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얼굴을 닦느라 축축이 젖어버린 앞머리를 대충 털어낸 여주가 깊은 한숨을 한번 뱉어내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세수를 마치니 안 그래도 하얗던 여주의 얼굴이 조금 더 창백해져 있었다.
“씻었어요?”
그렇게 욕실 밖으로 나오니 태형은 어느새 방 안의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갑작스러운 태형의 모습에 여주가 제 손에 들린 수건과 욕실을 번갈아 바라보며 실례했다는 듯 제 뒷목을 긁적였다. 아, 몰골이 너무 지저분해서 세수 좀 하느라...
“난 또 물소리가 들리길래.”
“...괜히 긴장했네.”
태형이 제 옆에 놓인 뭔가를 뒤적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주가 그런 태형의 뒷말을 듣지 못하고 천천히 태형의 앞으로 다가섰다. 이게 뭐예요? 태형의 앞에 놓인 건 다름 아닌 흰색의 구급 상자였다. 그새 어딜 다친 건가 싶어 힐끔, 태형의 얼굴을 살피던 여주의 손을 태형이 단숨에 끌어다 제 앞에 앉혔다. 침대가 조금 흔들렸고, 한 손엔 소독약을, 또 다른 한 손엔 여주의 손을 쥔 태형이 앞에 앉은 여주의 눈을 또렷이 바라보며 말했다.
“앞머리 좀 들어봐요.”
“...네?”
“얼른.”
뜬금없는 태형의 요구에 여주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그런 여주를 재촉하는 태형의 목소리에 여주가 주춤거리며 제 이마를 가리고 있던 앞머리를 조심스레 옆으로 넘겨 보였다. 비스듬히 옆으로 돌아간 태형의 고개가 그런 여주의 얼굴 앞으로 가까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가왔다. 여주의 고개가 조금씩 뒤로 밀려났으나 그럴 때마다 여주의 손을 붙잡은 손에 더 힘을 주는 태형이었다.
“이지메?”
“...아뇨.”
“그럼?”
이런 태형의 배려가 여주는 그저 어색하기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론 누군가에게 챙김을 받아본 적이 업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이 가까워 충분히 느껴지는 태형의 숨결과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이마만 들어냈을 뿐인데 제 모든 것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 소독약을 쥔 태형의 손가락이 퍽 조심스럽게 여주의 상처를 두드렸다. 태형의 물음에 대답을 아끼며 내리깐 시선을 슬쩍 창문으로 돌린 여주가 하나둘, 손님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1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파티가 끝났나 봐요. 여주가 작게 읊조렸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
“..뭐, 아쉬우면,”
우리끼리 애프터라도 할까요?
상처를 치료하는데 집중을 해서인지 태형의 말이 약간의 텀을 두고 뒤로 밀렸다. 태형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여태 무심하던 여주의 얼굴에도 문득 희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런 여주의 미소에 태형의 손이 순간 멈칫거리며 허공에 멎었다. 여주가 태형을 바라보았고, 다급히 고개를 돌린 태형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구급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왜 웃어요, 진심인데. 태형이 제 입술을 달싹였다.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파티라니 웃겨서요.”
“......”
“애초에 저 같은 사람이 저런 배경이랑 어울릴 리가 없잖아요.”
그런 태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1층을 바라보며 웃음 섞인 쓸쓸한 대답만 내놓는 여주였다. 손님들 사이엔 여주의 나이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여성 손님들도 많았는데, 그 때문인지 괜스레 제 꼴이 더 우습게만 느껴진 탓이었다. 하루만. 딱 하루만이라도 돈 걱정 없이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고, 여주가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 한 여름밤의 꿈같은 제 바람을 들어줄 사람이,
“어울려요.”
“그쪽이랑도 충분히.”
지금 제 코앞에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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