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緣]
W. 스페스
저주? 저주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웃어넘기려 했지만, 순식간에 시공간을 거슬러 여기 떨어진 걸 보면, 어쩌면 이 세계에서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실재 할지도 모르겠다. 그 날 이후 마주치는 사람마다 붙잡고 태자의 저주에 대해 물었지만, 하나같이 묵묵부답이다.
저주에 갇힌 태자. 그리고 저주를 풀어줄 귀인.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그 납득할 수 없는 태자의 말 뿐이 아니다. 태자의 표정, 태자의 눈빛, 태자의 얼굴……. 달빛에 비친 태자의 얼굴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 저주에 걸린 주제에 왜 이렇게 잘생기고 난리인지, 온종일 그 망할 태자 생각뿐이다. 아. 또 심장 아파.
그 날 이후로 태자의 궁에 밥 먹듯 드나들다보니, 태자 또한 내 출입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물론 내가 화살촉을 다 만져볼 때까지 눈을 단 한차례도 마주치지 않는다. 방을 샅샅이 뒤지고 나서, 일부러 태자 앞에 마주 앉아도 그는 늘 책에만 시선을 고정할 뿐 나를 봐주지 않는다. 저주에 대해 물어도 침묵할 뿐이고.
“태자야.”
“태자 아니랬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녀석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정국아. 전정국.”
“그간 화살 다 살펴봤으면서 왜 또 왔어.”
“네가 프로존잘러라.”
정국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모습이 너무 재밌어서 연달아 신조어 몇 개를 더 뱉으니, 그제야 녀석이 고개를 든다.
“네가 대한민국에 태어났으면, 넌 진짜 내 짝남이었다. 썸남이면 더 좋고.”
“그게 무슨 말인데.”
“안 알려줄 거야.”
“무슨 뜻이냐니까.”
“안 알려준다니까.”
녀석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께를 두어번 치더니, 손에 쥔 책을 내려다 놓고 벌떡 일어났다.
“알려주면 나도 뭐 하나 보여줄게.”
자리에서 일어난 정국이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자리에 멈춰 섰다. 꽤 솔깃한 제안이긴 하다. 혹시 보여준다는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돌아갈 길을 열어줄지도 모르고. 근데 어떻게 말 해. 면전에서 짝남이 무슨 뜻인지 어떻게 설명해.
“어? 그게... 일단 프로존잘러란, 매우 존... 어 존재적으로 잘...”
“잘생긴? 그리고?”
“어? 아니! 자... 잘생긴은 일단 아니야. 절대. 여기에는 거울 없냐? 네가 우리 세계에서는 그렇게 환영받는 외모는 아니거든.”
거짓말을 하려니 목이 다 탄다. 얼토당토않은 말로 짝남, 썸남에 대해 설명하고 나니,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한다. 혹시 너 이 세계에서도 먹히는 얼굴이니. 자꾸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당황스러워 일단 말이라도 돌릴 심산이다.
“자 그럼 이제 보여줘 봐. 네가 말한 거.”
곧 녀석이 제 자리 뒤쪽으로 걸어가더니, 길게 늘어진 병풍을 한 폭씩 접는다. 그 뒤로 서서히 드러나는 풍경에 입이 쩍 벌어진다. 방 한편에서 호수까지 연결된 공간이 마치 발코니를 연상시킨다. 발아래로는 파란 호수가, 눈앞으로는 푸른 녹음이 둘러싼 모습이 장관이다. 망설일 것도 없이 발코니 끝으로 붙어 서자, 정국이 다급하게 뛰어와 나를 붙잡는다.
“그러다 떨어져.”
그가 내 손을 붙잡는 바람에, 심장이 손 끝에 달린 것 마냥 맥박이 빠르게 뛰어댄다. 그가 슬쩍 손을 놓고는 나무 손잡이에 기대 바깥을 바라본다.
“매일 아침 이 풍경을 보면 진짜 기분 좋겠다.”
“난 다른 세상이 보고 싶어.”
가라앉은 태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허공을 응시한 태자의 표정이 어딘가 슬퍼 보여 괜스레 목이 멘다.
“근데 저번에 왜 태자가 아니라고 했어? 유리가 아니라는 말은 또 뭐고?”
“저주를 받고 쫓겨났어. 왕위를 계승할 적자였지만 저주받은 후로는 아니야. 다들 별궁이라고 부르지만 여긴 유배지나 다름없고, 심복들은 내가 저주에서 풀려나 국내성으로 복귀하길 바라지.”
“무슨 저주?”
다시금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보아도 참 맑고 예쁜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한 동안 머뭇거리던 정국이 입술을 꾹 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마치 경고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몰라도 돼. 이제 정말 오지 마. 여기.”
“외롭지 않아?”
내 말에 녀석이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괜스레 나까지 애달파지는 것 같다.
“네가 무슨 비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외롭지 않아. 이제 돌아가.”
“내가 귀인이라며. 그럼 저주를 푸는 방법이라도 말해줘.”
한창 등을 떠밀던 녀석이, 내 어깨에 올린 손을 내려놓았다. 뒤돌아 녀석을 쳐다보자 애써 시선을 피하는 것이 조금 수상하다.
“…….나도 몰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모르겠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대답해줄 수 없는 건지.
이제 태자의 궁에서 내 방까지 오는 길은 눈감고도 외울 것 같다. 허나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걸음 한다. 혹시 그 노파가 비밀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르니.
* * *
노파가 내온 주전부리를 앞에 두고, 나와 그녀는 내내 신경전이다. 태자의 비밀을 알려달라는 나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녀. 여인의 방에 겁도 없이 들어가 답을 알려 달라 했지만 어째 아무런 말도 없다.
“이렇게 자꾸 마주하면 정 들어요.”
주름진 손으로 내게 약과를 쥐어 준 그녀가 느리게 말을 뱉었다.
“저 이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데, 정 좀 들면 어때요."
“글쎄. 정 들었던 사람과 헤어지는 건 늘 마음이 아프죠. 태자도 그랬을 겁니다.”
“정국……. 아, 태자요?”
“예. 태자는 어미를 잃고 태자로써 지위를 빼앗기면서 지금 있는 황후의 의뢰로 저주를 받았답니다. 한창 사랑받을 나이에, 외롭게 되었지요.”
차라리 오지 말 걸. 노파가 찬찬히 얘기를 이어갈수록 정국이의 눈빛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외롭지 않냐고 묻지 말 걸. 평생을 외로움에 갇힌 태자에게, 그렇게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럼 태자가 걸린 저주는…….”
상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노파가 천천히 입을 뗐다.
“매년 정월이 지나면 잠이 들어서 한참을 깨어나지 못하죠. 올 해가 마지막입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가 마지막이라 했으니 올해 저주를 풀지 못하면…….”
“풀지 못하면…….”
“그럼 영영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깨어나지 못한다는 화들짝 놀란다. 노파가 그런 나를 흘끗 보고는 상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돌아가시지요. 정 드는 게, 세상에서 가장 무섭답니다.”
경고와 같은 노파의 단호한 말을 듣고는 방에서 나와 한참이나 궁을 배회한다. 왠지 오늘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정국이의 저주가 풀리는 날이 언제라고 했더라. 정월이라 했나.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니 꽤 달이 차올랐다. 곧 모두가 기다린 날이겠구나.
* * *
“전정국. 오늘 날씨가”
“오지 말랬지.”
발코니에 선 정국이 뒤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잘라먹는다. 이제는 인기척만 들려도 나인지 알겠지. 평소와 다른 시린 음성에 서러운 마음마저 든다. 오늘은 쓸데없이 오지랖 부리지 말고 정국이 옆에 조용히 있다가 사라질 생각이다. 그나마 말동무라도 하면 녀석의 외로움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싶어서.
“와, 오늘도 공기 진짜 좋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 녀석 옆에서 숨을 깊게 들이킨다. 청량한 공기가 서운함마저 싹 씻어 내리는 것 같아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완벽하고.
“전정국 내가 문제를 하나 내볼게. 맞춰봐.”
“하지 마. 돌아가.”
“소나무가 삐지면 뭔 줄 알아?”
“.....”
아무렇지 않은 척 밖만 바라보지만, 분명 문제를 맞히려고 애쓰는 게 분명하다. 저번부터 느꼈지만 승부욕이 대단한 게 안 맞히고는 못 배길 성격이다.
“정답은.”
“말하지 마. 기다려 봐.”
“칫솔.”
푸흡 웃던 녀석이 입을 막고는 표정을 고친다.
“웃었지?”
“안 웃었어.”
“웃었잖아.”
결국 녀석이 나를 보고 씩 웃는다. 이 세계에 오고, 정국이를 만난 이후로 처음 보는 미소다. 이렇게 예쁜데, 자주 좀 웃지. 한동안 웃는 낯으로 나를 응시하던 녀석은 금세 또 애달픈 표정을 한다.
“익숙해지는 게 싫어. 그럼 안 돼. 너랑은.”
정 드는 게 싫다던 노파도, 익숙해지면 안 된다는 정국이도. 모두들 내가 언젠가는 돌아갈 사람이라서 그렇겠지. 또 괜한 오지랖을 부린 건가 싶어 미안한 마음뿐이다. 결국 우리 둘 모두 침묵한 채로, 잔잔한 호수에만 시선을 둔다. 마침 그 위로 새 두 마리가 푸드덕 날아간다.
“예쁘다. 꾀꼬리도 저렇게 같이 날아다니네. 보기만 해도 정겹다.”
나와는 달리 그 풍경을 보는 정국이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하는 것 같다.
“그러게. 정겹네. 그치만 나는 홀로 돌아가겠지.”
“어딜? 저주가 풀린 뒤 국내성?”
“글쎄.”
* * *
궁 안에는 입 구(口) 모양으로 처마가 둘러져있고, 그 가운데가 뻥 뚫려서 하늘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다. 더군다나 미세먼지, 네온사인도 없어 밤하늘을 수놓은 별은 곧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어릴 적 정국이와 심복들이 여기서 축국을 하며 심심함을 달래고는 했다는데, 그마저도 심복들의 나이가 많아지자 정국이 홀로 사냥을 하거나 활을 쏘는 걸로 취미를 바꾸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정말 도망 다닐 셈인지, 태자궁에서 조차 보이지 않는 정국이 때문에 까맣게 애가 탄다. 마냥 보고 싶은 마음 반, 걱정스러운 마음 반. 며칠간 사라진 녀석은 언제쯤 돌아올 건지. 곧 정국이도, 여기 있는 사람들도 기다려 마지않는 정월인데.
정국이를 다시 만난 건, 며칠이 지난 늦은 밤중이었다.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제 처소로 향하던 녀석은 나를 마주치고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란다. 매일 이렇게 아침 일찍 나와 밤늦게 들어오는 건가. 혹시 나를 피하려는 의도라면 조금 섭섭할 것 같기도 하다.
“요즘 왜 안 보여.”
정국이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대답도 않고 나를 지나친다. 서운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오지만, 일단 녀석을 붙잡아 세운다. 팔목을 붙잡힌 채 눈도 마주 않고 뱉는 정국이의 말이, 금세 비수가 되어 박힌다.
“익숙해지는 거 싫다고 했잖아.”
“섭섭하게 왜 그러냐. 나도 이제 돌아가는 건 반 포기인데……. 나는, 나는 너 많이 보고 싶었는데.”
내게 잡힌 녀석의 손목이 잘게 떨린다. 그리고는 갑작스레 한 발자국 다가오더니, 곧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로 내 등을 토닥인다. 새삼스런 녀석의 행동에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바짝 붙어선 나와 녀석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이윽고 낮은 정국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감긴다.
“너야 말로 이 시간에 왜 밖에 있어?”
“밤하늘 좀 보고 싶어서. 달도 보고, 별도 보고 그러면 마음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정국이가 축국을 했다던 그 마당으로 향하자, 녀석 또한 천천히 뒤따라온다. 무성하게 자란 풀 위에 앉아 정국이를 바라보니 녀석이 잠시 머뭇거린다. 손으로 바닥을 툭툭 치자, 그제야 나를 따라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정국이다. 우리 둘은 나란히 고개를 꺾은 채로 밤하늘을 감상한다. 빽빽하게 하늘을 수놓은 별들 사이로 손을 뻗자, 녀석이 피식 웃는다. 유독 반짝이는 몇 개의 별들을 손으로 이어보기도 하고, 가장 밝은 별을 찾기도 한다.
정국이의 눈은 밤하늘의 별을 죄다 끌어다 모은 듯 유독 반짝거린다. 양 팔을 바닥에 댄 채 비스듬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년이다.
“어? 저기 봐.”
갑작스레 별들 사이로 유성우가 쏟아져 내렸다. 하나. 둘. 살아생전 처음 보는 별똥별을 감상하다가 금세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니 정국이가 이상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소원 빌어. 얼른.”
급한 마음에 정국이의 등을 치며 소원을 빌라고 다그치자, 녀석도 나를 따라 눈을 감는다. 이윽고 슬며시 눈을 뜬 녀석과 내가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그 아이 같은 웃음을 숨기지 못한다. 그러나 또 마지막은 그 씁쓸한 표정이다.
“전정국. 뭐라고 빌었어?”
“비밀.”
“어휴, 비밀투성이.”
“그럼 넌 뭐 빌었는데?”
녀석이 여전히 몸을 한껏 꺾은 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주시한다.
“언젠가, 언젠가 꼭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녀석의 얼굴이 금세 굳어진다. 차마 하지 못한 뒷말을 마음속으로 삼켜낸다.
그리고 내 또 다른 소원은 정국이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이루어지는 거야.
* * *
그 날 이후로 정국이는 또 자취를 감췄다. 궐 안을 샅샅이 뒤지고, 밤늦도록 그의 처소 앞에서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지만,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내일이면 정월인데. 무슨 의식이라도 치루는 건가. 며칠 내내 정국이 처소를 지키느라 쪽잠을 잤더니, 그제야 환관 하나가 나타나 정국이가 멀리 다녀온다고 했다는 말을 남긴다. 저주가 풀린다는 그 정월 전에는 반드시 돌아오기로 했다고.
내게도 말은 해주고 가지. 섭섭한 마음을 뒤로 하고 정국이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 * *
드디어 달이 완전히 차오른다는 그 대보름인데, 여기 있는 사람들 누구하나 호들갑 떨지 않는다. 저주가 풀리면 정국이는 다시 왕위를 계승할 적자가 될 텐데. 그러면 오랜 시간 별궁을 지킨 신하들은 다들 복직할 테고. 그럼 나도 정국이와 함께 국내성으로 가게 되는 걸까. 신하들은 하나같이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 같다가, 어째 나와 마주치면 이내 쓴웃음을 짓는다.
모두들 정국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녀석은 어째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노을 진 붉은 하늘도 점점 어두워지고, 정월답게 커다란 달이 밤하늘 한가운데 떠올랐다. 정국이를 기다리던 하인들 모두 점점 초조한 낯빛이다. 얼른 돌아와야 할 텐데.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얼른 정국이를 보고픈 마음에 대문을 열고 뛰어나가자 처음 나와 만났던 노인과 다른 신하 하나가 나를 쫓아 나온다. 호수 밖에서부터 다리를 가로질러 가까워지는 말 한필과, 그 위에 탄 정국이의 모습이 마치 영화같다. 휘영청 밝은 달과 태자 정국. 이제 곧 저주가 풀리는 건가.
“어?”
갑작스레 옆에 선 두 남자가 내 양팔을 세게 붙잡는다. 옆에 선 노인의 차디찬 음성에 괜스레 소름이 돋는다.
"미안하오.“
“네?”
내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가 가까워지는 정국이를 향해 소리친다.
“쏘십시오!”
무슨 소린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데, 점점 시야에 들어 찬 정국이가 등에 맨 전통에서 화살을 꺼내든다. 그리고는 활시위를 겨눈다.
나를 향해.
“저기, 왜 이러는 거예요.”
“귀인의 심장이 필요합니다. 저주를 푸는 방법 말입니다.”
숨이 멎을 것만 같다. 곧 가까워진 정국이의 얼굴이 금세 시야에 담긴다. 처음 봤던 날처럼 그 처연한 표정. 녀석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활시위를 놓는 순간,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내 손을 잡아 일으킨 정국이의 모습에 정신을 놓을 것만 같다. 내 팔을 붙잡고 멈춰 선 말을 향해 뛰어가는 녀석. 그리고 등 뒤로 들리는 악에 바친 음성.
“태자저하.”
정국이에게 붙잡혀 달려가다가 얼핏 뒤돌아 보니, 두 남자의 팔에 나란히 화살이 박혀들었다. 곧장 나를 말 위에 태운 정국이가 지체할 세도 없이 내달린다. 곧 호수 위 다리를 가로질러 산등성이 앞에 멈춰 선 정국이 말에서 내려 내 손을 잡고 하염없이 산길을 뛰어 오른다.
“왜 그랬어.”
내 말에는 답도 않은 채, 수풀을 해치며 걸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에 왈칵 눈물이 솟는다. 한참을 올라간 끝에 꽤 평평한 언덕에 멈춰선 녀석이 거친 숨을 몰아쉰다. 제 무릎을 붙잡고 깊게 숨을 몰아쉬는 녀석의 머리칼을 타고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전정국.”
울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녀석을 불러보지만, 녀석은 그저 그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녀석의 뒤로 산 아래 풍경과 궐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궁을 둘러싸고 켜진 불빛들이 오늘은 더없이 슬프기만 하다. 열두시가 지나, 정월이 지나면 영영 끝인데.
“지금 아니면 못 풀잖아. 네 저주. 그럼 끝이잖아! 왜 그랬어! 내 심장이 필요하다며.”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우습게 갈라져 나온다. 정국이 나를 향해 조용히 읊조린다.
“……. 그러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잖아.”
“지금이라도 쏴. 어차피 나, 돌아가지 못할 거라면 괜찮아.”
정국이의 등 뒤로 손에 잡힐 듯 크게 떠오른 달이 점점 빛을 잃어간다.
안 되는데……. 저주가 풀리지 않으면 영영 잠이 든다고 했는데…….
한발자국 다가온 정국이가, 내 등을 끌어 당겨 나를 꼭 안는다. 떨리는 손길이, 숨결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돌아가게 해줄게.”
“아니. 너를 두고 내가 어디를 가. 못 가.”
눈앞으로 화살을 하나 꺼내든 그가, 나를 향해 애달프게 웃는다. 그리고는 말한다.
“유성우가 내릴 때 빌었던 소원 기억해? 그 소원 이뤄주려고.”
녀석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나온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어 주저앉은 나를 따라 무릎을 꿇고 앉은 정국이가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낸다.
“…….네가 있던 지난 날들이 여기서 지낸 그 몇 년보다 훨씬 행복했어.”
“정국아. 전정국.”
“……. 연모했다. 너를.”
그리고 그가 내게 다가와 입을 맞춘 순간,
달빛은 완전히 사그라졌다.
* * *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나는 현대로 돌아왔다. 중앙박물관 앞에 쓰러져있는 나를 누군가 발견해 깨웠다고 하는데, 눈을 뜬 이후로도 내내 울고 몇 번이나 실신을 한 탓에 병원으로 옮겨졌었다. 며칠간의 병원 신세 끝에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한 학기가 지나도록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렇게 정국이 등에 업혀있는 게 정말 현실인가 싶어 지금도 가끔 볼을 꼬집어보고는 한다. 녀석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한들, 어떠할까. 그저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행복인 것을.
“정국아, 너 황조가가 유리왕이 쓴 줄 알지? 그거 다 개 뻥이다. 순 거짓말이야. 그거 원래 정국이 네가 말 한거야.”
“가시나야, 이제 술 좀 작작 퍼마셔라. 뭐 좋다고 그 놈의 술을 퍼마셔.”
“너는 몰라. 전정국. 내 마음을 너는 몰라.”
“네 또 술 이렇게 퍼먹고 간 거 알면 니네 부모님 기겁하신다.”
“그럼 저어기. 저기서 멈췄다 가.”
***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돌다가 놀이터를 향해 걷던 정국이 여자를 불렀지만 답이 없다.
“가시나 또 잠들었나? 야, 쫌 인나 봐라. 아, 또. 침 흘리나.”
정국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어깨에 오만상을 지었다. 곧 놀이터로 향하던 정국은 방향을 바꿔 다시 여자의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이내 코까지 고는 소리에 정국이 웃느라 어깨를 들썩거린다.
“네, 내 소원이 뭐였는지 아나.”
고개를 돌려 업혀있는 여자를 흘끗 확인한 정국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별똥별 떨어지던 날, 내 소원은 언젠가 다시 널 만나는 거였어. 전생의 일을 네게 함구하는 걸 대가로 널 돌려보낼 수 있었어. 넌 모르지.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지.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