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 다시, 우리
w. 겨울소녀
해수욕장은 곳곳에서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로 북적였다. 나는 줄지어 주차된 차들 속에서 우리 반의 차를 잊지 않기 위해, 고속버스의 위치를 몇 번이나 곱씹으며 모래밭으로 향했다. 나보다 앞서 걷던 친구들은 어느새 서로에게 물을 흩뿌리며, 장난을 치기 바빴다.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서둘러 바닷물에 발을 담구고는 두 손 가득 물을 담아 던져댔다. 이미 손가락 사이로 물이 반쯤은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웠으니.
우리들의 물장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격해져서, 결국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은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몽땅 젖기 싫은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적당한 때를 찾아, 그들의 무리에서 빠져 나오기에 급급했고. 나 역시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다 젖기는 싫었다. 그래서 미연이가 물에 던져지기 직전 내뱉은 마지막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다음 타겟으로 미연이를 동영상으로 찍고 있던 태형이를 지목했고, 덕분에 느릿느릿 도망가는 나는 여유롭게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로부터 멀어져, 한 손에 신발을 든 채로 걸음을 옮겼다. 파라솔이 있는 곳으로 갈 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맨발바닥에 낯선 이질감이 느껴졌다. 제법 따가웠다. 나는 무릎을 굽혀 발바닥 아래의 것을 집어올렸다. 빛을 잃지 않은 조개 껍질이었다. 맨들맨들한 표면이 햇빛에 반사되어, 제법 영롱하게 빛을 냈다.
나는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 하늘 높이 조개를 들어보았다. 조개를 이리저리 흔들때마다, 다른 색이 반사되었다. 그리고 그 여러 갈래로 빛을 내는 조개 뒤로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모를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남자아이는 다른 학교의 교복을 입은 채로, 멀뚱히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바라보는 게 내가 아닌가 싶어 주변을 살폈지만, 이곳에는 나뿐이었다. 뭐지. 나는 괜한 조개만 만지작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정말 나도 모르게.
“이게 무슨 조개야?”
이게 무슨 조개야? 하고 물었다. 생전 처음 보는 아이에게. 나는 제멋대로 말을 뱉어버린 입에 당황하며, 무어라 수습을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아니, 굴리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럴 틈도 주지 않고, 답했다.
“비단조개.”
비단조개. 처음 듣는 아이의 목소리는 가지런했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정말로. 무엇 하나 튀지 않고, 잔잔했다. 하지만 그 튀지 않는 목소리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까지 집어 삼켜, 제 목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만들었다. 아이가 비단조개의 끝글자인 ‘개’를 발음할 때, 아이의 입꼬리 근처에는 제법 깊은 보조개가 파였다. 그 보조개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예쁘다.”
“... 어?”
“어? 아, 아니. 이름이 예쁘다고. 조개, 조개 이름이.”
이번에도 멋대로 움직인 입이었다. 느닷없는 예쁘다는 말에 당황한 아이는 어색함에 제 뒷머리를 헝클이던 손을 멈칫하며, 어? 하고 되물었다. 때문에 더욱 당황한 나는 조개를 가리키며, 조개의 이름이 예쁘다는 뜻이었다는 걸 강조했다. 아이는 그제서야 아. 하고 작은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이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이의 왼쪽 가슴팍에 자리잡은 ‘정호석’이라는 이름에 시선을 두었다. 정호석. 이름도 가지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조개의 이름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아이는 어째서인지 자리를 뜨지 않았고, 나 역시 어째서인지.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흘렀을까. 연신 해빛을 받아 반짝이던 조개가 빛을 잃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먹구름이 가득했다. 비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와 동시에.
“... 비 온다.”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졌다. 나는 조금 전까지 밝았던 하늘이 믿기지 않아, 손을 내밀며 굵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꼈다. 아이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허둥지둥거리더니, 제 두 손을 뻗어 내 머리 위로 가져댔다. 이렇게 하면 비가 막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김탄소! 빨리 와!”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태형이의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의 행동에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나는 손 위의 조개를 주머니 속에 넣고는 아이의 손 아래를 벗어났다.
자꾸만 얼굴이 뜨거웠다.
*
수학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도 더 지났지만. 그날 아이의 모습이 여전히 선연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가지런한 목소리와 옅은 바람에 흔들리던 머리칼. 심지어 내 머리 위로 뻗은 큰 두 손까지. 전부 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조금 전 일처럼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이의 입꼬리 아래 보조개였다. 진짜 예뻤는데.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그때마다 교과서 사이로 고개를 묻었고, 김태형은 그때마다 선생님께 ‘김탄소 또 누워요!’하고 목청을 높였다. ... 나쁜 놈. 나는 김태형의 조잘거림을 끝으로 눈까지 감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때 왜. 왜, 조개 이름을 물어봤을까. 조개 이름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그 아이는 어떻게 조개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까. 내 머리 위로 손을 뻗은 게, 정말 비를 막아주기 위함이었을까. 어린애도 아니고, 그게 뭐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다시 한 번 미소가 지어졌다. 아는 거라고는 아이의 이름 뿐인데. 오래 전부터,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오래 전이라는 표현보다 더욱 오래 전부터. 나는 가디건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맨들맨들한 조개의 표면이 만져졌다. 비단조개. 비단조개. 비단조개. 이름도 예쁘지.
*
교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전학생이 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탓에 더욱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옆에서는 미연이가 계속해서 전학생이 남자였으면 좋겠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충 미연이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교복 위에 입은 핑크색 맨투맨의 먼지를 털어냈다. 여름에 입기에는 좀 더운 감이 있었지만, 감기 기운이 있는지 파리하게 떨리는 몸에 챙겨 입은 것이었다. 아침부터 늦잠에, 감기 기운에. 괜히 별로인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일 교시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엎드려 있을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달아나지 않은 잠에 아프다는 핑계로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김태형은 그런 나에게 감기가 옮기 싫다며, 저 구석으로 달아났고 때문에 내 옆자리는 텅텅 비어있었다. 간만에 조용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일 교시 쉬는시간에 다 깨져버렸다. 전학생이 온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복도에서는 중간중간 우리 반으로 온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는데, 그 역시 사실이었다. 이 교시가 시작하자마자, 선생님은 나를 불러 깨우고는 말했다.
"다들 소문 들어서 알겠지만, 반에 전학생 온다."
이미 교무실에서 전학생이 남자라는 것까지 확인한 아이들은, 휘파람까지 불며 전학생을 반겼다. 미연이의 얼굴이 밝은 걸 보니, 잘생겼나 보네. 전학생. 나는 여전히 졸린 눈을 힘겹게 뜨며, 앞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궁금은 하니까. 선생님은 전학생 인사를 마치고 남은 진도를 나가겠다며, 국어 책을 꺼내라고 말한 뒤 '들어 와.'하고 전학생을 불렀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인사해라."
"안녕. 나는 정호석이야. 잘 부탁할게."
거짓말인 줄 알았다. 아니면 꿈의 연장선.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그 아이가 우리 학교, 우리 반에 전학을 온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심지어 같은 나이라니. 나는 순식간에 달아난 잠에 눈만 꿈뻑이며, 상황을 정리했다. 몇 번이고 확인해도, 정말로 그때 그 아이였다. 아이의 제 소개 뒤에 따라오는 아이들의 환호에 그때처럼 웃어보였다. 보조개가 피었다. ... 정말로, 너였다.
"호석이는, 어. 뭐야. 김태형 왜 그 자리 앉아있어."
"김탄소. 감기 걸려서, 감기 옮을 것 같아서요!"
"그럼 호석이가 탄소 옆에 앉아.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까, 말은 하지 말고. 아니면 책상 떨어트리고."
아이는 지금에야 나를 발견한 건지, 내게로 오던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곧 다시 걸음을 옮기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김태형이 떨어트리고 간 책상을 다시 붙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다시 열이 오르는 듯 했다. 더웠다.
"..."
"..."
누구도 선뜻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는 눈앞의 국어책만 만지작거리며, 곁눈질로 겨우 아이를 살폈다. 아이는 내가 저를 볼 때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몰래 본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느낄 만큼. 아주 대놓고. 나는 시간이 지나도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져, 나를 쳐다보는 이유라도 물으려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가 제 손가락으로 내 팔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되게 하얗다."
분홍색 맨투맨의 소매를 두어 번 접어 드러난 팔목이었다. 나는 내 팔목을 내려다보다, 특별한 뜻 없는 그 말에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 얘 진짜 뭐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대로 된 대화를 주고 받지는 않았지만. 이 아이와는 모든 게 느닷없었다. 아이 역시 제가 한 말에 당황한 건지, 습관처럼 제 뒷머리를 헝클였다. 아이의 귀끝이 홧홧했다. 선생님은 전학생의 등장으로 어수선해진 반 분위기를 정리하고는 수업을 시작했다.
"교과서 84페이지. 황순원 소나기 보자. 아. 호석이는 오늘만 탄소랑 보고."
선생님에 말에 의하면 아이는 아직 교과서가 준비되지 않은 듯 싶었다. 아이는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내 쪽에 있던 교과서를 아이와 내 책상 정가운데. 정말 딱 가운데 두었다. 교과서를 아이의 쪽으로 미는 행동이 뭐라고. 나는 그것마저 손끝이 찌르르 떨렸다. 아이는 내가 제 쪽으로 책을 밀자, 낮게 고마워. 하고 답하고는 의자를 끌어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아이가 하얗다고 한 팔목이 부끄러워, 소매를 다시 내렸다.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 소나기 中 -
선생님의 목소리로 뱉어지는 문장이 몸을 굳게 만들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너 되게 하얗다. 마냥 희었다. 되게 하얗다. 조금 전 아이가 내게 한 말이 자꾸만 겹쳐서 들려왔다. ... 나는 왜 하필 오늘 분홍 맨투맨을 입어서. 내 옆에 앉은 아이는 선생님의 말에 몸을 작게 달싹이기는 했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은 듯 했다. 오히려 놀란 나 때문에 놀란 듯 했다.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선생님의 말에 따라 이런저런 필기를 시작했다. 아이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글씨체가 예쁘지 않았다.
"얘."
못 들은 체했다. 둑 위로 올라섰다.
"얘, 이게 무슨 조개지?"
자기도 모르게 돌아섰다. 소녀의 맑고 검은 눈과 마주쳤다. 얼른 소녀의 손바닥으로 눈을 떨구었다.
"비단조개."
"이름도 참 곱다."
- 소나기 中 -
조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 아이는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거짓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었다. 창문이 열린 탓에 옅은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왔다. 창가에 앉은 아이의 머리칼이 간지럽게 흔들렸고, 우리는 서로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게 무슨 조개야?'
'비단조개.'
'예쁘다.'
'... 어?'
'어? 아, 아니. 이름이 예쁘다고. 조개, 조개 이름이.'
그날의 대화와 닮은 구절이. 분명 작품 속 주인공이 우리가 아닌데도, 그날 우리의 목소리로 읽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정말로 곧 터져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책상 위로 몸을 숙였다. 말도 안 돼.
수업은 어느덧 끝날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소나기의 비극적인 마지막 문장을 해석해주시고는, 책을 덮었다. 몇몇 아이들이 여자 주인공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두 주인공의 사랑이 제법 여럿의 마음을 동하게 만든 것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으면서 왜 슬퍼하냐며 아이들에게 핀잔을 주었다가, 종이 치기 직전 답했다.
"나도 너네 나이 때는, 이거 읽고 많이 울었지."
"에이. 울기까지?"
선생님의 말 뒤에 김태형의 비아냥이 따라 붙었다. 아이들이 장난 섞인 웃음을 흘렸다. 웃지 못하는 건, 나와 아이. 단 둘 뿐인 듯 했다. 선생님은 김태형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고, 출석부를 챙기셨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래도 이런 사랑이라면, 하늘이 아시고 분명 다시 붙여줬을 거야. 난 그렇게 믿었어. 그렇게 믿으니까 더 슬프지는 않더라."
종이 쳤다. 선생님은 교실을 벗어나셨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곧장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팔 사이로 얼굴을 묻은 채, 이유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췄다. 들키면 놀림만 받을 게 뻔해. 하지만 작게 떨리는 어깨는 어쩔 수 없었다. 팔 사이로 구깃한 종이 하나가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내가 필기를 하던 보라색 펜으로 적힌 글자였다. 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슬쩍 고개를 들어,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아이는 나와 같이 엎드린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변함없이 나를 바라보며, 내게만 겨우 닿을 정도의 소리로 속삭였다.
이번 생에서는 너를 더 열심히, 좋아할게.
약속해.
아이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창문 밖으로 느닷없이 비가 쏟아졌다. 열린 창문으로 빗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아이는 미동조차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뒷머리와 등이 빗줄기에 젖어들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를 핑계로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창문 너머로 빗방울이 넘어 왔다고 하면 되니까.
다시 내린, 소나기였다.
*
겨울입니다. 글이 이게 모야! 라고 하시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썼으니... 사랑과 애정으로... 감싸주세여! (당당?!) 저만 잘하면 되는 프로젝트라 너무 떨려요. 아직도 ㅠ_ㅠ 제 글은 제 손을 떠나는 순간, 여러분의 해석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이 읽히는 대로, 그렇게 나눠주시면 돼요! 소나기. 다시, 우리.는 한 편으로 끝나는 작품입니다. 다음 편 업서영...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구 한다.)
오늘도 귀한 시간 내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