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묵직하게 사파이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입구 홀로 들어서던 성우와 도연의 걸음이 멎는다. 둘의 시선이 벽의 거대한 모래시계에 걸렸다. 이제는 조건반사적으로 이어지는 행위였다. 성우가 목소리를 잘게 떨었다. 하하, 설마. 그러나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여주는 그 '설마'를 십 분 활용할 줄 알았다.
래번클로 모래시계의 사파이어가 서른 개 남짓 줄어 있다. 괴짜의 수 역시 그에 비례하긴 했어도, 우등생과 모범생이 대거 포진한 래번클로의 감점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범인은,
Fucking Dorothy. 도연이 나직이 뇌까렸다―도로시는 여주의 영문 이름이다―. 사람 좋고 다정스럽기로 어딜가도 뒤지지 않던 도연이 친구의 이름자를 갖은 육두문자로 수식하기 시작한 것은 까마득한 일이다. 성우와 도연이 여주를 뒷바라지하며 보낸 세월 역시 헤아리기도 무색한 오래 전부터고. 대체 왜, 하필 왜. 착하진 않아도 바르면 바랐지 결코 그르게 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우리가 뭘 잘못해서! 언젠가부터 둘은 이 재앙의 근원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재앙이 다른 데 있겠어. 도여주 자체가 재앙인 걸.
"이번엔 또 누구랑 싸웠길래."
눈은 여전히 싯푸른 모래시계에 고정한 채로, 망연자실한 얼굴의 성우가 물었다.
"누구긴 누구야."
도연의 대답이다. 사방에 적을 두고 사는 여주라지만, 기숙사 점수까지 까먹어가며 목숨 걸고 싸우는 상대는 하나였다.
슬리데린의 그 이름도 저명하신
강다니엘.
호그와트에서, 여름 00
슬리데린 양아치 X 래번클로 또라이
호그와트가 동양인 입학에도 관용을 베풀게 되면서 등장한 동양 마법사 가문은 여럿이었지만 주 세력가로 성장한 케이스는 손에 꼽혔다. 노출을 꺼리던 강씨 일가가 모습을 드러낸 건 100년이 채 되지 않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들은 빠른 속도로 마법사 사회를 지배했고, 곧 유서깊은 정계 가문으로 깊게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역시 마법부 고위직의 부모 밑에서 그는 태어났다. 강, 다니엘. 묘하게 이질감이 이는 조합이라고 여주는 생각했었다. 한국 이름이 없지는 않을 테지만, 어쨌거나 모두가 으레 그를 다니엘이라고 불렀다.
가문의 명예를 비롯해 수려한 외모, 명석한 두뇌같은 저로서는 특별할 것 없는 사실들이 저를 사랑받게 한다는 걸, 다니엘은 일찍에 눈치챘다. 엉망으로 대하고 제멋대로―여주의 표현을 빌려 지 좆대로― 굴어도 따르는 이의 수는 줄지 않았다. 머글 태생에 혼혈은 물론이요 이따금은 입지가 좁은 가문의 순혈 학생들조차 모조리 짓밟고 그 우위에 섰다. 패거리의 가장 우두머리 격이었지만 한 번도 제 손으로 일을 내거나 제 발로 먼저 나서는 법은 없었다. 나긋나긋 일러주기만 해도 알아서 조종당하는 애들이 수두룩했으니까. 촘촘히 설계한 판을 그는 눈에 띄지 않는 가장자리, 또 가장 꼭대기에서 언제나 언제나고 그저 관망할 뿐이다. 건조하고, 따분한 얼굴이다.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저는 모른다는 양. 뒤늦게야 함정에 빠졌음을 자각한 멍청한 얼굴의 수를 세어나갈 때, 다니엘의 입매는 잠깐 호를 그렸다. 그런 강다니엘이 직접 상대하는 이는 아마, 도여주가 유일했고.
여주의 부모는 동족의 배신자라며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마법사 가문과 달리 머글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호그와트 전쟁이 발발할 무렵 1순위 제거 대상으로 떠올랐고, 그 과정에서 여주는 얼굴도 모르는 오빠가 불타는 집에서 목숨을 잃었다. 여주가 태어나기 꼭 3년 전의 일이다.
태어나니 낳아준 부모는 물론이옵고 친인척 모두가 나몰라라다. 맏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어머니는 하루에도 열두번씩 조증과 울증을 오갔고, 신념을 굽히는 법이 없던 아버지는 어둠의 세력에 빌붙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졸개가 되어있었다. 이 모두가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라 변명하는 아버지를 여주는 이해할 순 있었지만 사랑하긴 힘들었다. 그래서 스큅인 유모의 손에서 컸다. 다행히도 탈선은 않았으나, 그러니까 좀…….
도여주의 기행을 임팩트로만 놓고 보자면 호그와트의 수십 세기 역사와도 가히 견줄 만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만을 나열하면 이런 것들이 있다.
첫 어둠의 마법 방어술 강의 시간, 대뜸 여주의 가정사를 들먹이던 교수가 있었다. "내 말에 틀린 게 어디 있다고 너 눈을 그렇게 뜨니? 저주라도 쏠 기세네?"라 비아냥하는 교수에게 정말로 지팡이를 꺼내어 크루시아투스 주문을 왼 일을 기점으로―다행스럽게도 마법 능력 미달로 저주는 발현되지 못했고 성우와 도연은 교내 모든 교수를 찾아가 퇴학만은 말아달라 여주를 대신해 빌어야 했다― 호그와트 주방에서 억울하게 노동을 착취당하다 생을 마감한 집요정 폴의 이름이 1박자에 64번 꼴로 언급되는 노래를 피브스에 가르쳐 웬 종일 부르고 다니게 하는가 하면, 구남친 알렉스의 여성편력에 관한 글을 논문 수준으로 작성해 연회장 벽면에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로 게재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여주가 정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충동에서 비롯돼 행해진다는 것이었다. 여주는 철저히 본능에 충실해 움직였다. 직진은 있으나 후진은 없음, 내가 꼴리는 대로, 인생은 한 방 따위가 도여주 인생의 모토였다. 다들 미친년이네 어쩌네 뒷말은 많으면서도 홉뜬 눈의 여주 앞에선 맥도 못 추는 게 바로 그런 이유였다.
어쩌면 당연하게 들릴 얘기지만, 도여주는 친구가 몇 없다. 집안끼리 연이 닿아 입학 전부터 알고 지낸 옹성우와 김도연이 전부로, 실은 그나마도 친구보다는 부모님이나 보호자라는 이름에 더 잘 어울렸다. 특히 여주의 평판은 다른 기숙사보다도 외려 같은 래번클로 내에서 바닥을 쳤다. 그도 그럴것이, 다른 학생들이 기껏 쌓아놓은 상점을 여주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게 까먹고 다녔으므로. 도여주 깽판 한 번에 날아가는 상점이 일주일 어치였다. 그리고 여주의 현란한 성질은, 역시 다니엘과 있을 때 그 진가를 발휘했다.
둘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입학식 날, 먼저 손을 내민 건 다니엘이었다.
"나 너 아는데."
여주가 손을 내민 상대를 뚱하게 바라봤다. 정확히는 제 집안에 대해 알고 있을 터였다. 콧대 높게 굴다 보기좋게 망한 도씨 일가는 훌륭한 가십이었고 더할 나위 없는 조롱거리였다. 제아무리 어린 여주라고 해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난 모르겠는데."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다니엘의 어린 미간에 작은 실금이 갔다.
"알 텐데? 머리가 나쁜 거야, 나쁜 척을 하는 거야."
"아니, 내가 기억이 안 난다는데 니가 뭐라고 내 지능을 이분법 따져 넘겨짚고 난린데. 나한테 한 번만 더 말 걸면 죽여버릴 거야."
앳된 얼굴과 대비되게 여주가 퍽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이하는 생략. 어쨌거나 그 날 이래로, 근 5년간 둘의 관계는 그렇게 정의되어 오고 있다.
원수,
앙숙,
그리고 천적.
갸악 안녕하세요 |
1. 앙칼지고 새침하지만 어딘가 좀(많이) 모지른 헛똑똑이 여주와 양애취에 여주 못잖게 성깔있지만 능글과 다정이 거진 팔 할인 다니엘의 배틀로맨스.. 2. 였으면 하지만 제가 다 망친 것 같네요 하하 3. 비자발적 여주 보호자 옹+도연이와의 케미는 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