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체육대회는 위기를 싣고 下
얼른 오기를 기다리기도, 또 막상 온다고 생각하면 두렵기도 한 일요일이 왔다.
얼른 오기를 기다린 이유는 그저 빨리 체육대회가 휘리릭 지나가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막상 온다고 생각하면 두려웠던 이유는 이어달리기에서 혹시라도 우리 팀이 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때문이다.
그래도 연습 많이 했으니까. 충분히 했으니까 쉽게 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며 옹과장님 차에 몸을 실었다.
"잘 잤어요?"
"음... 네. 잘 잔 것 같아요.
그런데 과장님은 아침에 만날 때 잘 잤는지 꼭 여쭤보시네요."
"잘 자고 잘 먹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매일매일 잘 잤으면 좋겠거든요."
"......"
웃었다. 웃겨서 웃은 건 아니었고 좀... 뭔가 고마워서 웃었던 것 같다.
사실 잘 자지 못했다. 잘 잤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요 며칠 잠이 잘 안 왔다. 사람이 든 건 몰라도 난 자리는 그렇게 티가 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
길게 이야기하면 우울해지고 힘 빠질까봐 많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멍을 때리다 옆자리에 앉은 옹과장님을 쳐다봤다. 과장님은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셨다.
"왜요?"
"....아니에요."
"그렇게 쳐다보면 운전에 집중하기가 힘든데."
내용은 진지했지만 말투는 장난스러웠다. 나는 작게 웃으며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후로 내 긴장을 풀어주시려는듯 과장님이 약간의 농담을 던져주셨고,
나도 지금 만큼은 나중 걱정은 접어두고 같이 웃고, 조금이라도 덜 우울하게 있자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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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짝궁 이어달리기는 하이라이트였기 때문에 오전에는 축구와 피구가 먼저 진행됐다.
이어달리기에 참가하면 축구와 피구에는 참가하지 않는 게 원칙이기 때문에 나와 옹과장님은 응원석에서 열심히 응원을 했다.
고개만 조금 돌리면 강과장이 보이는 위치였지만 그 옆에 꼭 붙은 한사원을 가만두고 볼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황민현! 황민현!
꺄아아아!!!!"
남자들이 하는 축구는 A팀과 B팀으로 나눠서 겨뤄졌다. 영업마케팅부와 전략기획부는 A팀에 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A팀을 응원했다.
A팀의 다크호스는 전략팀 황민현 대리님이었다. 축구를 엄청엄청 잘한다더니 정말 잘하셨다.
그렇지만 B팀에 있는 인사총무팀 박우진 인턴도 만만치 않은 다크호스였다. 축구로는 투탑인 둘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어쩐지 여직원들에게 인기는 황대리님이 더 많은 것 같고, 남직원들 사이에서는 박인턴을 향한 응원이 더 뜨거운 듯하다.
어.... 저는 A팀이지만 개인적으로 B팀에 박우진 인턴 달리는 모습이 참 멋있네요. 박우진 인턴에게 한 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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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차가워!"
"하하. 덥죠? 이거 마셔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한참을 빠져들어 축구를 보고 있는데 볼에 뭔가 차가운 게 닿아왔다.
무언지 봤더니 음료수를 가지러 가셨던 옹과장님이 내 몫의 얼음물까지 챙겨오신 거였다.
나는 감사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뚜껑을 땄는데, 아귀힘이 부족한 건지 영 뚜껑이 열리지를 않았다.
불량품인가... 나 이 정도로 약하지는 않은데.
"줘봐요."
뚜껑을 붙잡고 낑낑대는 나를 보신 옹과장님이 물병을 가져가서는 뚜껑을 따주셨다.
똑, 하고 가볍게 열리는 뚜껑을 보며 오... 남자다잉- 하면서 물병을 받았다.
다시 과장님과 축구에 엄청 몰입. 오후에 달려야 된다는 걸 까먹기라도 한듯 열심히 응원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또 포상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같은 A팀이니 이기면 좋은 거였다. 이런 점에서는 또 황대리님 화이팅! 이었다.
"황대리님 진짜 잘 뛰시네요."
"학교 다닐 때 내내 축구부였대요."
"와... 역시."
"○사원 축구 되게 좋아하네요.
원래 좋아해요?"
"찾아서 보는 편은 아닌데 볼 기회 있으면 보는 것 같아요.
과장님은요?"
"축구 싫어하는 남자 없죠, 거의."
장난스레 웃어보이는 과장님이다. 이렇게 웃어보일 때는 또 천진난만한 개구쟁이 같은데.
진지하게 말씀하실 때와는 갭이 상당하다. 그렇게 변하는 얼굴이 매력이기도 한 것 같다.
축구가 남자들끼리의 땀냄새 폴폴 풍기는 진한 경쟁이었다면, 피구는 여자의 파워를 볼 수 있는 경기였다.
축구도 충분히 재밌었다고 생각했는데 더 재밌는 게 따로 있었다. 역시 피구는 하는 것보다 보는 게 더 재밌다.
쉴 새 없이 날아다니는 피구공 속에서 여사원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니 내가 피구에 나갔다면 뼈도 못추렸겠다.
저 안에 있었더라면 최소한 타박상이었을 거야.... 뭐 저렇게 살벌해....
근데 또 그게 재밌어서 더 목소리를 키워서 응원했다.
"○사원 엄청 열정적이네?
힘 아껴둬요. 우리 달리기 때 써야지-"
"근데 이게 진짜 재밌네요.
저는 체육대회 이렇게 재밌을 줄 몰랐는데..."
"다들 엄청 열심이에요.
저도 처음에는 왜 이렇게 열심인지 몰랐는데,
하다 보니까 재밌더라고요."
달리기를 연습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이걸 왜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지 좀 회의감이 들곤 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엄청 열심히 하고 있는 거다.
물론 그 이유가 나처럼 팀장님의 압력과 같은 것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뭐 상품이 좋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다들 열심히 하니까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이 재미 때문에 다들 체육대회를 좋아하시고 또 목숨 걸고 하시는 건가 보다.
-
"아, 진짜 힘들어요. 형."
"얼른 들고 따라와. 엄살 부리지 말고."
"아... 진짜 도시락 왜 이렇게 무거워..."
전략팀 황대리는 옹과장님을 형이라 불렀다. 둘의 투샷은 처음 보는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놀랄 정도였다.
자연스레 황대리에게 어깨동무를 하는 옹과장님의 여유로움하며, 형형 하며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황대리님의 귀여움(?)도 모두 신기했는데 또 재밌었다.
점심은 도시락이어서 우리 쪽에는 황대리님과 옹과장님이 도시락을 나눠주셨다.
나는 옹과장님과 황대리님 옆에 나란히 앉아서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저는 마케팅팀 ○○○라고 합니다!"
"알아요. 응원 엄청 열심히 하는 거 봤어요."
"아...."
조금 민망한 마음에 아... 하며 멋쩍게 웃으니 옹과장님이 ○사원은 원래 모든 일에 열심이야. 라고 치켜세워주셨다.
황대리님은 아유, 또 우리 옹과장님 같은 팀 막내라고 엄청 챙겨주시네. 하면서 웃으셨다.
겉모습만 봤을 때는 좀 차갑고 날카로워 보였는데 막상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좀 수더분한 편이라 의외였다.
"○사원, 우리 옹과장님 어때요? 사람 되게 괜찮죠?"
"야. 당사자 앞에서 물어보면 대답을 어떻게 하냐."
"아니 뭐, 이런 건 원래 있을 때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
응? ○사원, 우리 옹과장님 괜찮지 않아요?"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그냥 멋쩍게 웃었다. 옹과장님은 괜히 애 민망하게 만들지 말라며 황대리에게 눈치를 주었다.
황대리는 아니 뭐 내가 이상한 거 물어본 것도 아니고... 라고 중얼거리면서 도시락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옹과장님이야 뭐 당연히 괜찮지... 괜찮지만 바로 옆에 계신데 그렇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서 딱히 대답을 못했다.
먹는 데 집중하다 보니 눈치를 못 채고 있었는데, 내가 멍하니 시선을 두던 곳에 강과장과 한사원이 있었다.
그쪽도 우리 만큼이나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딱히 내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계속, 신경을 끄려고 해도 계속, 한사원의 웃음이 보이는 거다. 웃음이 보이기 시작하니 애교 섞인 목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아이, 과장님-
이거 좀 더 드실래요-?"
아.......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은데. 한 번 보이고 들리니까 계속 나를 괴롭히는 느낌이다.
이럴수록 일부러 더 밝아지려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옹과장님을 쳐다봤는데, 옹과장님도 그 쪽을 보고 계셨다.
나는 금세 과장님께 말을 거는 것도 별로 좋은 방법 같지가 않아서 군말 없이 도시락을 먹었다.
도시락을 다 비우고 옹과장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더니 어느덧 이어달리기를 시작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
"영업마케팅부서 예선 시작합니다.
준비하시고-"
탕!! 하는 총성이 들리자마자 나는 냅다 달렸다. 처음에 스퍼트를 확 냈더니 한 바퀴를 금방 돌았고, 곧바로 옹과장님이 내 뒤를 이어 달렸다.
다행히도 내가 한사원보다는 훨씬 빠르게 달렸던 것 같다. 그래서 옹과장님은 그 페이스를 유지해주시기만 하면 됐다.
강과장이 빠르게 옹과장님을 따라잡을 뻔했지만 곧 다시 나와 한사원이 달리기 시작했고, 나는 죽기살기로 달려 한사원을 한껏 따돌렸다.
그 다음 옹과장님의 차례. 내가 워낙 한사원을 멀리 따돌려서인지 강과장은 옹과장님을 따라잡기 힘들어했다.
그렇게 옹과장님이 1등으로 들어오면서 예선이 마무리됐다.
"와아-!!!!!"
나는 한사원을 이겼다는 기쁨에 너무 좋아서 옹과장님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옹과장님은 밭은 숨을 몰아쉬며 나를 향해 웃어 보이셨고, 나 또한 과장님, 짱이에요!!! 하면서 과장님의 어깨를 토닥토닥 해드렸다.
한껏 업된 기분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한사원을 보려는데,
다리를 접지른 건지 강과장의 팔을 잡고 절뚝이고 있는 거다.
"아아..."
"괜찮아요?"
"스읍... 아, 접질렀나봐요. 과장님.."
"걸을 수 있어요?"
"아, 너무 아파요..."
"........"
어찌할 줄 모르는 과장님 앞에 한사원이 묻는다. 저 좀 업혀도 될까요?
강과장은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아무런 말없이 그들을 보고 있다.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어서.
옆에 옹과장님이 계시다는 걸 알면서도, 옹과장님이 이 분위기를 다 눈치챌 거라는 걸 알면서도 차마 눈을 돌릴 수가 없다.
강과장은 몇 초 간의 고민 끝에 한사원 앞에 제 등을 보인다. 한사원은 살풋 웃으며 그 등에 업힌다.
나는 머릿속에서 뭔가 툭, 끊기는 느낌이 든다. 한사원을 등에 업고 멀어져가는 그 모습에 이제서야 시선이 돌려진다.
옹과장님은 내게 아무 말 안 하신다. 나는 이성이 돌아와 차가워진 목소리로 고생하셨어요, 과장님. 저희 1등해요, 꼭. 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본선이 되기까지 나와 옹과장님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축하합니다.
남녀 짝궁 이어달리기 1등은 영업마케팅부 마케팅팀에게 돌아갔습니다-!!!"
1등했다. 오히려 본선보다 예선이 더 막상막하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본선이 쉬웠다.
나와 옹과장님은 여유롭게 1등을 거머쥐었고 당당히 1등 상품도 받아냈다.
우리를 향해 쏟아진 팀장님, 그리고 마케팅팀원들의 칭찬이 아주 달았다.
근데 내 입 안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투 샷 정도 추가한 느낌의 씁쓸함이 맴돌았다.
막상 1등을 하고 나니 내가 왜 1등을 했어야 했는지 그 이유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1등만 하고 나면 강과장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내가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한사원을 등에 업은 채로 멀어지던 그 모습은 내가 그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가 화난 건 어디까지나 내 잘못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굳이 잘못한 게 아니더라도 내 위치 때문에, 내 상황이라서 그를 화나게 했다면
그건 내가 잘못한 게 맞다고 믿었다.
근데... 이건 아니잖아. 이렇게 되어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1등 팀 전원에게 사이판 왕복 항공권을 쏩니다! 항공권은 연말까지 이용 가능합니다.
1등 짝궁 두 분에게는 야... 이거 우리 인사총무팀에서 구하기 정말 어려웠습니다.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실 텐데요,
락페스티벌 티켓 두 장 드립니다!!"
팀 전원에게 사이판 왕복 항공권이라니... 우리 회사는 좋은 회사였다.
게다가 구하기 어려운데다 비싸기까지 하다고 소문난 락페스티벌 티켓이라니. 가고 싶다고 생각만 했지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는데.
상품의 퀄리티가 대단하다 싶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 있는 과장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도 상해버린 기분 위에 갑자기 상품이 주는 행복이 얹어져 일단은 좋은 티를 냈다.
옹과장님이 하이파이브를 하자는듯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시길래 나도 짝! 소리가 나게 하이파이브를 한 후 손깍지까지 껴서 잡았다.
아, 이쯤 되니 진짜 모르겠다. 마냥 싫어할 수도,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복잡한 감정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
꼬박 일주일이 더 지났다. 강과장과 연락을 안 한 지는 꼬박 2주째.
한마디로 그렇게 한사원을 업고 사라진 이후로 한 번의 접촉이 없었다는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회사에서 한 번 정도 마주치긴 했지만 일대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이 섞여 있는 데에서 마주친 게 나았다.
락페스티벌이야 둘이 같이 열심히 해서 두 명 분의 티켓을 받았으니 둘이 같이 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이쯤 되니 양심의 가책도 없는 거다. 그냥 강과장과의 관계가 사실상 끝난 기분이었다.
일본에서 사오긴 했는데 아직 건네주지 못한 셔츠를 챙겨 집에서 나왔다. 집 앞에는 옹과장님의 회색 SUV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페스티벌은 엄청 오래간만인데.
○사원은요?"
"저도요. 한 2년만에 가는 것 같아요."
"그렇구나...
오늘 진짜 재밌게 놀아야겠다, 우리."
또 이쯤 되니 강과장의 차보다 옹과장님의 차가 더 익숙해졌다. 빈도가 많아서가 아니라 강과장의 차를 탈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차라리 잘된 거라고. 입사하자마자 사내연애는 내게 너무 위험했을 수도 있다며 자기합리화를 해보았다.
그렇다고 강과장이 보고싶지 않아진 건 아니었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밉긴 한데 보고 싶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걸 부정해버리면 내가 내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아서.
"아, 과장님. 여기요.
출장 갔을 때 샀던 건데, 이제야 드리네요. 죄송해요."
"이게 뭐에요?"
"어... 그때 쇼핑했을 때 산 과장님 선물이요.
큰 건 아니고요, 와이셔츠에요."
"........"
과장님은 감동한 것 같았다. 나는 잘 맞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맙다고, 잘 입겠다고 인사한 과장님은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도 받은 사람이 고마워하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향수를 받은 강과장도 참 좋아했는데...
무의식적으로 강과장을 떠올리는 나 자신을 자책했다.
바보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계속 떠올리고만 있으니.
그래도 먼저 연락은 못하겠고. 한다고 해서 그가 받아줄 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그에게서 먼저 연락은 안 올 것 같고...
이렇게 강과장 생각이 한 번 시작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심한 생각이 이어졌다.
오늘 만큼은 그러지 말아야겠다 싶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옹과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페스티벌은 재밌었다. 날이 좀 더워서 지칠 때면 맛있는 것도 먹고, 시원한 것도 마시고 하면서 재밌게 즐겼다.
회사 밖에서 만나는 과장님도 나쁘지 않았다. 공식적인 일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밖에서 만난 건 거의 처음이었는데,
물론 이 티켓도 회사에서 받은 거라 공적이라고 한다면 공적일 수 있겠지만... 뭐, 어쨌든.
신나는 음악이 나올 때면 같이 뛰기도 하고, 또 잔잔한 음악이 흐를 때면 조용히 듣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은 빨리도 흘러 금방 어둑어둑해졌고 우리는 푸드트럭에서 맥주를 사서 벤치에 자리했다.
무대 바로 앞이 아니라 음악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는데, 그게 꼭 배경음악 같아서 차분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진짜 재밌어요, 과장님.
사람들이 왜 비싼 돈 주면서 오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러게요. 재밌다, 진짜.
배는 안 고파요, ○사원?"
"아유, 저 하루종일 먹기만 했는데요..
배 엄청 불러요."
"그렇지, 그렇지. 엄-청 잘 먹었지."
장난스레 농담을 던진 옹과장님이다. 나는 그를 흘겨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그는 농담이에요, 하면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멀리서 보이는 무대의 조명이 서로의 얼굴을 적당히 비춰줬다.
나란히 앉아 맥주를 한두 모금씩 들이키며 서로의 이야기를 했다.
조곤조곤, 작고 안정적인 목소리가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과장 되고 나서는 거의 주말은 반납하다시피 했어서,
이렇게 노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아... 주말이 없으셨어요?"
"누가 나오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내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
"근데 몸 상해요. ○사원은 주말근무 하지마요.
내가 못하게 할 거야."
주말근무라... 내가 없던 주말 동안 강과장은 뭘 했을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본 강과장은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그걸 싫어하고, 또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가 볼 때에는 그랬다.
그래서 잠시나마 주말에 내가 함께 있어주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지금 보내는 주말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영 다르다.
옹과장님과 마시는 맥주는 맛있는 것 같다. 도쿄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게 되면 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하게 된다. 아마 분위기 때문이겠지.
나와 옹과장님은 서로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편이 아니라 도란도란 말을 나누곤 했다. 그게 서로에게 편하고 안정감 있었다.
낮에 열을 많이 받은 터라 맥주 조금에도 취기가 쉽게 올라왔다.
볼에 열이 몰리는 게 느껴진다. 내 얼굴이 웃길 것 같아서 옹과장님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졌다.
"...."
"......."
정적이 흘렀다. 강과장으로부터 여전히 연락이 없다.
이런 나를 알면 싫어하겠지. 같이 페스티벌에 온 것도 모자라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맥주까지 마시니.
알게 되면 정내미가 뚝뚝 떨어지고 말 거다. 그러면 그 때 보여준 그 차갑고 단호한 표정을 또 보여주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이런 나를 알아주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화라도 내줬으면, 그럼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니까. 얼굴을 보면 이야기라도 할 수 있으니까. 그냥 화냈으면 좋겠다.
싫다고, 너무너무 싫다고. 그렇게 이야기해주면 내가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앞으로는 안 그러겠다고, 과장님이 싫어하니까 안 하겠다고. 그가 나한테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데.
....근데 모두, 내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게 슬펐다.
".....과장님."
"....."
"남자는... 아무리 여자가 잘못했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마음이 크면... 먼저 연락하죠?"
세상에. 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말이 아무런 필터링 없이 입 밖으로 나간다.
말을 하면서도 내가 하는 말에 기겁하고 있는 나. 우습다, 우스워.
내 넋두리 섞인 질문에 과장님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하셨다.
"무슨 잘못이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연락을 안 하지는 않죠."
".....그렇구나...
그렇겠죠...."
목이 바싹 마르는 듯한 느낌에 맥주를 더 마셨다.
꿀꺽, 꿀꺽,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느낌에 시원함을 느끼던 찰나,
"누구 연락 기다려요?"
"..제가 잘못한 건 맞는데...
너무하네요..."
이어지는 나의 동문서답. 느낌에 옹과장님은 모든 걸 다 알고 계신 듯하다.
그래, 모르고 있을 리 없는 거다. 감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걸 안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일 거다.
"다니엘이에요?
기다리는 연락."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네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네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던 강과장과의 순간이 생각난다.
대답을 못하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과장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신 것 같다.
나와 강과장의 관계를.
"언제부터였어요? 연락 안 한 거."
"......2주 정도요."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
이미 늦었지만, 맥주를 마신 나를 자책해본다.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지만 말이다.
과장님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지지난주 말하는 거죠?"
"....네."
"...몰랐구나. 니엘이 부모님 기일이었어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를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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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강다니엘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다니엘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성우가 바보같을 만치 착해보일 수 있지만 강단 없는 캐릭터는 아니라서 일단 상황을 지켜봐주세요.ㅎㅎ 오늘은 양도 많고 탈도 많네요ㅋㅋㅋㅋ 그래도 분량 폭탄 + 새로운 얼굴들로 재밌게 봐주셨길 바랍니다. 얼마 남지 않은 주말 즐겁게 보내시고요! 제가 언제 다시 오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지만, 시간 날 때마다 오려고 노력할게요ㅎㅎ 댓글창에서 독자님들과 소통할게요!! 댓글 기다립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