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네가 좋아'
이 말이 왜 이렇게 낯간지러운지 모르겠다.
친구들끼리 하는, 진지한 감정이 담기지 않은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 말은 그리 쉽게도 뱉으면서
진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그 말을 하려 하니 왜 이렇게 죽을 맛인지.
아니 서울 올라온지 3년째면 나도 좀 서울 감성에 익숙해질 때도 된 거 아닌가
난 도대체 온 몸에 소름끼치는 이 느낌을 뚫고 어떻게 고백을 하는지 모르겠다
겉으로 보면 영락없는 서울 깍쟁이 아가씨일지 몰라도 아직 내 안에서는
틱틱대고 무심한, 낯 간지러운 거 못 하는 경상도 아가씨 DNA가 안 지워졌나보다.
"김민지, 뭐하냐?"
"아! 깜짝아. 넌 나 놀리는 게 재밌지?"
"어, 완전. 내 삶의 낙이지"
안 그래도 자기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내 눈 앞에 덜컥 나타나버리면 그게 얼마나
놀랄 일인지 얘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얘한테 아무 감정 없었으면 진작에 때리고 말았을텐데.
난 왜 하필 좋아해도 이런 눈치 없고 장난기만 많은 애를 좋아하게 된 걸까..하..
"어? 너랑 안 어울리게 왠 책이야"
"왜~ 나도 책 좀 읽어보려고."
"진짜? 이걸 직접 네가 골라서 샀다고?"
"..영민이 형이 사 줬다. 가사 쓰는데 도움될 거라고"
"그럼 그렇지. 하긴.. 책 보면서 가사 영감도 얻고 그런거니까"
몇 년전, 유명한 한 구절에 꽂혀서 충동적으로 구매했던, 그러니까 내 책장 한 켠에도 꽂혀있던 책이었다.
정말 아무런 정보 없이 샀기에 생각과 달라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꽤 재밌게 읽었던 기억도 있다.
박우진은 저 책을 얼마나 읽었으려나... 읽기는 했을까. 그래도 형이 사 준 건데, 빨리 읽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벌써 6월 다 끝나가네"
"그러니까. 시간 너무 빠르다. 벌써 반이 지나갔다니까?"
"이제 7,8월 되면 더 더워지겠지? 난 더운 건 싫은데"
"벌써 걱정이다. 지금도 더운데 그 땐 진짜 어떻게 견디냐"
"그치. 그래서 난 11월과 12월 사이를 좋아해."
"나도 그 때가 딱 좋다. 너무 춥지도 않고. 더군다나 내 생일도 있잖아. 니 내 생일 알재? 11월 2일"
...그래, 네 생일. 잘 알지. 저러다 또 시덥잖은 이야기로 말이 넘어갔다. 그러더니 이건 영민이 형한테는 절대 비밀인데 요새 이 책이 자기 베개로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는데,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도대체,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 난 얘를 좋아하는 걸까?
*
"형, 일어나요"
"ㅇ,왜?"
"왜긴 왜야. 집에 안 가요?"
책을 읽다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결국 또 골아떨어졌나보다. 사실 연습 때문에 피곤한 것도 있지만 이 책을 교과서 위에 딱 올려놓으면
어찌나 완벽한 높이의 베개가 되는지 얘 하나만 있으면 꿀잠은 확실히 보장된다. 영민이 형이 무슨 내용이냐고 물으면, 좋은 내용이라고 대답해야지
밤이라도 꽤 더운 날씨에 결국 대휘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집으로 향했다. 아 진짜 빨리 가을이나 겨울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걸어갔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야식을 먹고 있는 동현이 형과 쇼파 위에 늘어져 있는 영민이 형이 보였다. 좋겠다, 저 둘은.
대휘는 동현이 형 옆으로 쪼르르 가 아기새처럼 야식을 받아 먹고 있었고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은 뒤 거실로 나왔다
"아, 근데 진짜 요즘 너무 덥지 않아요? 난 빨리 겨울 됐으면 좋겠어"
"겨울 되면 맨날 춥다고 찡찡댈 거면서. 형, 저 손이 다 얼어버릴 것 같아요- 이럴 거잖아"
"맞아, 이대휘 맨날 '형, 나 추우니까 붕어빵 사 줘' 이러면서 내 지갑 다 털어가잖아, 너"
"왜, 난 겨울보다 가을이 좋은데.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11월에서 12월 사이. 김민지도 그 때가 좋다던데"
그 말에 설거지를 마치고 온 동현이 형과 영민이 형 그리고 대휘는 물음표를 가득 띈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뭔데, 셋이서 그런 눈빛과 표정으로 나를 보는 이유가 뭐냐고. 나 뭐 잘못한 거 없는데?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지?
"응? 민지누나가? 민지 누나 1월 좋아해. 장판 틀어놓고 이불 덮고 귤 까 먹으면 거기가 천국이라면서. 그래서 내가 늙은이라고 놀렸는데"
"민지 눈 내리는 것도 좋아하고 꽁꽁 싸매고 밖에 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하는데? 근데 걔가 진짜 11월에서 12월 사이를 좋아한다고 했어?"
"응. 막 이제 더 더워질거라고, 그러면서 자기는 11월에서 12월 사이를 좋아한다고 그랬다니까? 내가 뭐 이런 걸로 거짓말 하겠냐?"
다들 뭐지, 왜지. 하는 표정을 짓다 일단락 되었다. 그럼 나한테 거짓말 한 건가. 에이, 설마. 뭔가 좀 찝찝하긴 하지만
사람 마음이 바뀔수도 있는거고, 뭐. 그나저나 영민이 형은 아까부터 뭘 저렇게 심각한 표정이지, 뭔 일 있나?
"형,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왜 그래요"
"응? 아니, 무슨 일은. 그냥 뭐 생각하느라. 형 걱정했어?"
뭐지, 이 소름 끼치는 쓰다듬은. 형은 내 머리를 두 어번 쓰다듬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왜 저래. 무섭게. 그나저나 방심한 사이에
이대휘가 내 과자 다 뺏어먹었어. 아! 이대휘!! 이거 하나 남은 거라고! 이 돼지야!!
*
"야, 빨리 찾아 봐"
"맞는 것 같다니까요? 그게 아니고선 왜 그런 말을 해"
"그치? 내가 분명히 그걸 봤다니까. 여기 어디 있을텐데..."
"아, 표시 좀 해 놓을 걸. 뭔가 이 쯤.. 어! 여기! 찾았다!"
"어디, 어디. 맞지? 그래, 내가 봤거든! 분명히 기억하는데"
"우진이 이거 아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알긴 하겠죠?"
"글쎄.. 쟤가 빨리 읽어야 될텐데. 그나저나 민지 대박이다. 그 순간에 그 말을 할 생각을 하냐"
아이고, 우리 불쌍한 민지.. 하필 저 무딘 놈을 좋아해서는. 그나저나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고백할 생각을 했지? 귀엽게.
민지야, 내가 딱히 뭘 할 수 있는 게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내 나름의 최선이다
"우진아, 내가 준 책은, 읽고 있어?"
"네? 아, 읽고 있죠. 내용이 좋더라구요"
"웃기고 있네. 형, 내가 아까 봤는데 베개로 잘 쓰고 있더라"
"야, 가사 쓰는데 도움되라고 줬더니 꿈 꾸는데 쓰면 어떡해"
"우진아, 형이 충고하는데 하루라도 빨리 그 책을 많이 읽는 게 너한테 좋을거야"
"형은 갑자기 튀어나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뜬금없이 왜 나와, 거기서"
"11월쯤 되면 날씨는 쌀쌀하고 추워도 누군가는 엄청 따뜻한 봄 날씨를 느끼고 있겠구나~ 좋겠다~"
'11월과 12월의 사이를 좋아합니다. 그건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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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에 갈까요' 에 비해 저 말은 덜 유명한 것 같아서 써 봤습니다. 뭔가 더 몽글몽글하고 소년소녀의 느낌을 더 내고 싶었는데 결론이 망..ㅠ
우진이는 언제쯤 알게 될까요? 여름이 가기 전엔 알아차려야 할텐데. 나름 용기낸 고백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