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의 목적보다 다른 것이 더 우선시 되고 그 모임 안의 모든 사람들 또한 진정한 목적을 암암리에 다 알고 있는 그런 이상한 모임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동창회라 부르고, 그것이 더욱 더 심해지는 곳은 '여고' 동창회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곳에 나와있다. 이럴 줄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심하잖아, 이건. 이 정도일줄 알았으면 그냥 삼겹살에 쏘주나 먹자던 걔 말 들을 걸
"...야, 네가 나 꼬셨지. 같이 가자고. 영 아니다 싶으면 같이 빠져줄테니까 애들 스캔이나 하고 오자며"
"몰라, 나도 애들이 저렇게 미쳐서 왔을 줄 알고 있었겠냐. 어우- 쟤는 뭐 얼굴을 그냥 갈아 엎었어. 나 동명이인인 줄 알았잖아"
"진짜 집에 가고 싶다. 옹성우는 지금쯤 뭐할까? 자기 집에서 과자나 먹고 있겠지? 걔네 집에 나쵸 있는데, 그거 내가 좋아하는건데..."
"내 말이. 그냥 우리 술 막 마시고 남자친구들한테 데리러 오라고 할까? 어차피 이미 스캔 다 떴는데 우리가 뭐 필요하다고"
"됐어. 니 애인분은 몰라도 걔 불렀다간 내일 눈 뜨자마자 잔소리 들어. 그냥 나 혼자 속으로 욕하다 집에 가고 말지"
일주일 전에 성우-내 남자친구다. 나도 인생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얘도 나 못지 않다. 어찌나 바쁘게 사는지 가끔은 시간 내서 데이트 해 주는 걸
고맙게 여겨야 할 정도로. 가끔 좀 멋있어 보일때도 있는데 그거 빼면 좀 많이.. 빙구같다- .집에서 뒹굴고 있는데 핸드폰으로 문자가 하나 왔다. 뭔가 해서 봤더니
아니 세상에 '**여고 제 37회 동창회' 로 시작하는 MMS가 와 있었다. 동창회는 무슨 동창회야. 하고 무시하려는데 이게 생각할수록 고민이 되는거다. 가자니
그 안에서 기싸움 눈치싸움 하기 싫고 안 가자니 나 없는데서 내 얘기 나올 게 찝찝하고.
"옹, 이번에 여고 동창회 한다는데 가지 말까? 그냥 너랑 놀까?"
"그래도 오랜만에 친구들 보는건데 가야지. 연락 끊긴 애들 다시 만날수도 있고"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니까? 여자들의 세계와 남자들의 세계는 조금 달라요"
아, 가기 싫다 내가 거기 가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얼굴 보고 싶은 애도 딱히 없고, 그 때 친하던 애들 중 대부분이랑은 아직까지 연락하니까.. 성우 무릎에
누워 입으론 계속 찡얼대며 손으로는 친구에게 톡을 보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오는 답장. 내용을 보아하니 얘도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나보다.
역시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지 뭐.. 그래서 나는 가, 말아
"애초에 동창회 시작한 걔가 문제야. 학교 졸업한지 이제 겨우 10년이다. 아직도 20대구만 얜 뭐가 그렇게 급해서 동창회를 열어? 무슨 벼락부자라도 됐나,
자기 자랑하려고 판 까는 거 아니야?"
"언젠데, 그렇게 스트레스 받을거면 가지 말고 그 날 나랑 데이트하던가. 오랜만에 고기나 먹을까? 삼겹살에 소주 콜?"
"그냥 그럴까? 아니야, 생각 좀 더 해 보고"
"누나가 동창회 갈 때는 최선을 다 해서 꾸며야 한다던데. 여자들은 3초면 스캔 다 끝나고 어떻게 살았는지 안다며"
그러네. 특히 여고 동창회는 더더욱. 29살이 벌면 얼마나 벌고 또 가지면 얼마나 가졌겠어. 나 명품백도 없는데.. 그나저나 동창회에 입고 나갈만한 옷은 있었나?
악세사리는 또 뭐 있지. 아니다, 그냥 가지 말아야겠다. 가서 좋은 것도 없고 어차피 나 없는데서 욕 해 봤자 내 귀에 안 들릴거니까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그게 어떻게 괜찮아 차라리 앞담화가 낫지 뒷담화는 진짜 죽어도 싫어
결국 가기로 마음 먹고 그 사이에 옹이 또 무슨 얘기를 한 건진 모르겠지만 언니(=옹 누나)가 전화 와서는 커피 한 잔 하자더니 그런 곳엔 명품백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거라며 언니의 소중한 아가를-나 이 때 진짜 눈물날 뻔. 내가 옹성우랑 헤어지는 일이 있어도 이 언니랑은 평생 가야지.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빌려줬다.
그렇게 든든한 지원군 아래 '최선을 다해 꾸몄지만 난 이 자리를 그렇게 엄청 신경쓰고 있지 않다' 패션을 한 채 동창회 장소로 향했다.
어머 얘네 힘 준 것봐. 딱 봐도 평소엔 입지도 않고 고이 모셔졌던 게 티 나는 옷들에 가방에...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다가도 나도 얘네와 별 다를 게 없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라 한숨을 푹 쉰 채 친구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얼굴들도 꽤 있었지만 그닥 반갑지도 않고 저런 애가 있었나 싶을만큼
낯선 얼굴도 몇 몇 있었다.-내가 진짜 몰라서 그런건지,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평소에 칵테일은 그냥 음료수 같아서 마시지 않았는데
원래 회비 내고 온 곳은 탈탈 털어가야 하는거라고 홀짝 마시고 있는데 누가 내 어깨를 톡톡 쳐 왔다.
"어머, 야, 너 여주 맞지? 완전 반갑다. 나 지현이~ 진짜 오랜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아, 지현이~ 너 나랑 별로 안 친했으면서 왜 아는 척일까? 하고 싶은 말이 뭐길래 그런 얼굴을 들이대는거지 나한테? 곁눈질로 옆을 살짝 보니 친구의 표정도 썩어있었다.
아무래도 네가 내 속을 뒤집으려고 혹은 네 자랑 하려고 온 것 같구나
"그냥 회사 다니고 있지, 뭐. 운좋게 일찍 대리 달고 그럭저럭 그렇게..?"
"어머, 진짜? 이런 말 어떨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난 네가 좀 더 잘 살고 있을 줄 알았거든. 아니 그렇잖아, 학교 때 공부도 잘 하고 선생님들도 다 너 좋아하시고.
그냥 회사 다니는구나..하긴 요새 취업이 좀 힘드니. 그걸로도 충분히 대단한거지"
"그럼.. 취업한 것만으로도 난 만족해. 부족한 거 없이 살고 있기도 하고.. 너는, 뭐 하고 지내?"
"나? 난 그냥.. 남편 만나서 일찍 결혼하고 지금은 카페 하나 하고 있어. 나중에 한 번 놀러 와, 커피 한 잔 마시자"
"그렇구나. 그래, 언제 한 번 놀러갈게. 어, 저기서 너 찾는다. 가 봐"
내가 장담하는데 내 발로 어딘지도 모르는 네 카페를 찾아갈 일은 평생 없을거다. 실수로라도 들리는 날엔 내가 삥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네 매출에 내 돈을
보태지 않을거야. 그러니 얼른 멀리 멀리 꺼지렴. 제가 하고 싶은 자랑은 다 한 건지 걸어가는 뒷모습에 속으로 낮게 욕을 뱉어주곤 친구에게 고개를 돌렸더니
나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치, 네가 봐도 쟨 좀 많이 아니지?
"하.. 쟤 왜 저러냐. 학교 다닐 때 나랑 친하지도 않았잖아. 왜 와서 시비야 시비는"
"보면 모르냐, 지 잘 난 거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지. 쟤 그거 했잖아, 취집. 반반한 얼굴 하나로 남자 하나 제대로 꼬셔서 인생 폈잖아. 카페도 남편이 차려준거래"
"어쩐지. 아까 얘기하는데 손을 내 쪽으로 엄청 들이대는 거야. 손가락마다 반지가 어찌나 많던지.. 나 눈 부셔서 죽는 줄 알았잖아. 본 목적이 그거였구만?"
한 차례 걔 욕을 실컷 하고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신나게 이야기도 했다. 상상치도 못한 직업을 가진 친구도 있었고, 그 때 꿈을 그대로 간직해 성공한 친구들도
있었고. 생각보단 꽤 나쁘지 않은 시간이라-그 싸모님만 빼고-고민 끝에 오기를 잘 했다라는 생각이 들 때쯤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썽우♥. 얜 뜬금없이 왜
전화지-배 긁으면서 과자 먹고 있던 거 아니었나. 내 나쵸 먹었으면 때려야지-하면서도 일단은 받았다
"응, 왜?"
"여보세요가 먼저 아니야? 어디야"
"어디긴, 오늘 동창회라고 말했잖아"
"아, 아니다. 그거 언제 끝나?"
"몰라, 한 1시간 안엔 끝날 것 같은데"
"알았어.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머리채 잡고 싸우지도 말고"
"내 걱정 해 주는 거, 맞지? 알았어.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시덥잖은 얘기 하는 거 보니까 백퍼 집에서 뒹굴다 심심해서 전화했다. 그나저나 진짜 삼겹살에 소주 먹고 싶다.. 우리 성우가 고기 하나는 참 잘 굽는데...
내일 가자고 꼬시면 넘어 가 주려나. 아니면 내가 사 준다고 하고 나와야지 뭐, 어제 월급도 들어왔으니까~
내 예상대로 동창회는 오래 가진 않았다. 애초에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고, 굳이 친목 도모의 장도 아니었으니까. 일찍이 개개인의
사정상 자리를 비운 친구들도 있었고 더 오래 있고 싶은 애들끼리는 알아서 이미 2차 약속을 잡아뒀으니까 굳이 이 자리가 지속될 필요성은 없었다.
"오늘 진짜 만나서 반가웠어. 갑작스러웠을텐데 이렇게 많이 와 준 것도 고맙고"
나갈 채비를 하고 다들 일어서는데 전교회장이었던 친구가 나와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그래, 네가 주최한 거 맞지? 그러고보니 쟤 자랑은 못 들은 것 같은데..
진짜 순수하게 친목이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운 좋게 자기 자랑을 안 들은건진 모르겠지만 내 너그러운 마음으로 너의 노고를 치하 해 주기는 하마.
우루루 빠져나가기엔 길이 복잡해 천천히 나가는데 앞에 있던 친구들이 누가 나를 찾는단다. 그나저나 쟤 얼굴은 또 왜 저렇게 빨개?
"응? 누가... 어?"
"자기야!"
넌 여기 왜 계시는데요...옹성우씨? 그 수트는 또 뭐고-머리는 언제 또 만진건지 풀세팅이었다. 그러니까, 엄청 잘생겼다고. 한낱 회사원에게서 본부장님의
향기가 났다고나 할까-새삼스러운 자기야는 또 뭐냐고. 다른 낯 간지러운 말은 잘도 하면서 자기야 여보야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며 3년 가까이 사귀는
동안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지금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자기야' 하고 말 한 게 정녕 제 남친 옹성우씨 입니까?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너 동창회 한다며. 당연히 데리러 와야지"
"어딘지도 안 알려줬고 언제 마친다고 제대로 얘기도 안 해 줬는데. 많이 기다렸어?"
"저번에 말 해줬잖아~ 아니, 괜찮아. 금방 왔어. 아, 안녕하세요. 여주 남자친구 옹성우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사실 나도 어안이 벙벙하지만-그새 언제 올려준건지 내 어깨 위엔 성우 자켓이 있었다. 근데 나 별로 안 추운데, 좀 더운데-잠깐 사이 친구들의 환심을 사다 못해
홀려버린 옹성우는 젠틀스윗의 표본이 되어 있었고 덕분에 나는 그 자리의 모든 부러움을 다 샀다. 사실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애가 잘생기긴 했다. 특히 수트 입으면
정말 완전 진짜 대박 멋있기도 하고. 티는 안 냈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걸어가는데 처음 보는 외제차로 날 데려간다. 당황했지만 자연스러운 척 차에 올라타 창문을
내려 친구들에게 한 번 더 인사 해 줬다. 지현이 표정 보니까 확실히 내가 이긴 듯. 메롱. 부럽지?
"이 차는 또 뭐야. 네 껀 어쩌고"
"당연히 친구한테 빌렸지. 이거 바로 가져다 줘야 해."
"지금? 그럼 더 돌아가야 되잖아. 이게 무슨 고생이야"
"뭐 어때! 그래도 쟤네 솔직히 좀 놀라고 기 죽은 거 같던데. 그럼 성공 아니야?"
"이 생각은 어떻게 했어? 또 언니가 알려줬지"
"아니. 원래 동창회의 마무리는 애인 자랑이라고, 내가 일부로 이 밤에 수트도 차려입고 머리도 했잖아"
아까는 무슨 기업 이사님 정도는 될 것 같은 포스 풍기더니 갑자기 또 댕댕이 되는 건 뭐야, 귀엽게. '나 잘했지' 하는 눈빛과 칭찬을 갈구하는
저 표정이란ㅋㅋㅋㅋㅋ 예쁘게 세팅된 탓에 머리를 쓰다듬어주지는 못 하고 아이고 잘 했다~ 하며 어깨를 토닥토닥 해 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는다. 생각치도 못 한 선물을 받으면 이런 느낌일까. 오늘따라 여러모로 잘 생겨보이네, 내 새끼
"잘했어. 솔직히 너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래서 나 엄청 놀랐어"
"사실 갈까말까 고민 진짜 많이 했는데 내가 주말 밤의 자유를 버리고 왔어, 큰 결심 한 거다, 이거.
"알지. 그래, 기분이다, 내가 내일 삼겹살에 쏘주 쏠게. 사실 아까 너랑 먹고 싶었거든"
"콜! 아싸, 예쁜 짓 한 번 하고 돈 굳었다. 내일 너 만나기 전까지 아무것도 안 먹어야지"
으이구. 밉지 않게 노려봤더니 '왜, 진심인데?' 하며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다. 그래 많이 먹어라, 누나 월급 들어왔으니까 사 줄게 하고 대답하자
'누나 짱! 멋있어요!' 하며 대꾸 해 온다. 잠깐 멋진 남친에 취해 있고 싶었는데 그걸 안 도와주네.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진짜... 섹시한데-성우
한테는 비밀. 저번에 이 얘기했다가 싸웠다. 입 열면 안 멋있냐고. 살짝?이라고 대답했다가 결국 초코 과자 3개 사 주고 풀었음-입을 열면 조금
달라진단 말이지. 소중하고 고귀한 차를 본주인께 돌려주고 집으로 가는 길. 힐을 신고 온 터라 아파 오는 발에 괜히 애교를 부려봤다.
"자기야~ 나 힐 신어서 발 아픈데, 업어주면 안 돼~?"
"어머, 왜 그러세요. 저 아세요? 저는 그 쪽을 잘 모릅니다. 잘못 보셨어요"
"아 왜. 진짜 안 돼? 안 되냐고~ 그럼 저기 편의점까지만 업어주면 안 돼?"
"으이구, 안 그래도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자, 업혀."
꽤 높은 힐을 보고 고개를 한 번 젓더니 궁시렁대면서도 내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사실 몇 번 하다 말려고 했는데 이게 왠 떡이야? 혹시나
맘 바뀔까 얼른 업혔더니 '가서 열심히 먹었구나' 하며 맞을 소리를 해 댄다.-장난이야 장난. 하는데 아까 그 말에 진심 100% 담긴 거 나 다
느꼈거든?-힐로 등짝 한 번 찍혀봐야 저런 소리를 안 하지.
"음~ 역시 쭈쭈바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아휴.. 생긴 건 베라나 이런 것밖에 안 먹게 생겨서는.. 좋냐? 행복해?"
편의점까지 잘 업고 가더니 날 내려 놓고는 편의점 문을 붙잡고 찡찡대기 시작한다. 나를 업느라 당이 떨어졌다나 뭐라나,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면
에너지가 회복될 것 같은데, 여주가 날 위해 하나 사 줬으면 참 좋겠는데. 그럼 나 오늘 행복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초딩스러운 말을
들어주고 있자니 낯 뜨거워서-편의점 알바생이 우리를 보고 있었고 저 멀리서 사람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래, 솔직히 좀 부끄러웠다-얼른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아이스크림 코너로 쪼르르 가더니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쭈쭈바 두 개를 골라 계산대로 들고 간다.
저 비주얼에 살포시 들려있는 쭈쭈바라니.. 그 이질감이 꽤 상당해서 헛웃음을 한 번 짓다 왠지 나와 똑같은 마음인 것 같은 알바생에게 카드를 건네
결제한 뒤 밖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꼭지를 뜯어 '이건 너 먹어'-고마워-하고는 맛있게도 먹는데 진짜...너 되게 행복해 보인다.
"응! 엄청! 나 네 꺼도 먹어볼래, 그거 맛있어?"
"자, 먹어라, 먹어. 많이 드세요, 옹성우씨"
"예~ 그럼 맛있게 먹겠습니다~"
"야! 누가 이렇게 많이 먹으래!!"
자기도 사고를 친 건 아는지 저만치 도망가 있던 성우는 눈치를 보더니 내 손짓에 쪼르르 옆으로 왔다. 평소 같으면 얼른 뛰어가 잡아서 때렸을텐데
오늘은 기특한 짓을 하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하니까. 아무 말 없이 그저 손을 잡고 걸으니 내 눈치를 보며 '가서 하나 더 사 올까?'하고 소심하게
물어오는 게 꽤 귀여워 괜히 더 어두운 표정을 해 봤다. 재밌네, 요거.
"여주야, 발은 괜찮아? 나 이거 다 먹으면 또 업어줄까?"
"너 그거 우리 집 다 도착할 때까지 먹을 거잖아"
"어떻게 알았대~ 똑똑한데? 이제 내 수 다 읽힌건가"
재롱 피우는 것 봐. 내 새끼 오늘 하루종일 잠 못 잘라, 이제 장난 그만해야겠다. 나 안 삐쳤으니까 표정 풀어 했더니 진짜? 하며 몇 번을 물어온다.
너 예쁜 짓 해서 봐 주는거라고 하자 금세 풀려 역시 순간의 결정이 평생을 바꾼다고, 용서도 해 주고 밥도 얻어 먹고 얼마나 좋냐고 평소의 옹으로
돌아와 재잘재잘. 한참을 얘기하다 오랜만에 꾸몄으니 집까지 도도하게 걸어자는 내 말에 제가 더 신나서 허리를 딱 펴야 한다며 걸어가는데 누구
애인인진 몰라도 엄청 잘났네. 세상 사람들이 충분히 부러워 하겠어.
"저기요, 너무 멋있으셔서 그런데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아, 안 되는데. 제가 여자친구가 있어서요. 딱 한 장만 찍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 셀카 찍어도 돼요?"
"그건 진짜 여자친구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잠시만요. 여주야, 나 누가 셀카 한 장만 찍어달라는데 괜찮아?"
"누구? 여자야? 여자는 안 돼. 너 오늘 좀 잘 생겨서 더 안 돼. 걔가 너한테 끼부리면 어떡해"
"죄송해요. 여자친구가 안 된다고 하네요. 여주야, 나 잘했지. 안 된다고 했어"
"응, 일루 와. 잘했으니까 뽀뽀 해 줄게. 그리고 나랑 사진 찍어"
지나가던 사람이 우릴 봤으면 얼마나 웃겼을까. 둘이서 역할 놀이를 하지 않나 어두컴컴한 길거리에서 모델과 사진작가로 빙의해서 사진을 찍지 않나.
그렇게 둘이 생긴 건 참 멀쩡하게 해서 바보짓 많이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그 다음 날까지 실신해서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난 건 안 비밀.
고기 먹자고 불렀더니 어제 그 잘생긴 남자는 어디 가고 티셔츠에 청바지 입고 나온 낼모레 서른, 준아저씨 옹이 나온 건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