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그 남자의 사정 上
(옹성우 시점)
방탄소년단 - 잡아줘
[오후 4시에 대회의실에서 과장급 회의 있습니다.
회의 후에 회식도 예정되어 있으니 모든 팀의 과장급 분들은 반드시 참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사내 메신저로 쪽지가 날아왔다. 당장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럴 때 꼭 필참인 회의가 생긴다.
옆에서 일하고 있는 ○○를 보는데, 곧죽어도 폐 안 끼치겠다는 일념으로 애를 쓰는 게 느껴졌다.
4시부터 회의면 퇴근까지 계속되다가 회식 갈 예정인 모양인데,
그러면 일을 못할 나 대신에 내가 할 만큼을 ○○가 떠맡게 되는 거였다. 미안한 마음에 ○○를 잠깐 불렀다.
"저, ○사원, 미안한데...
나 과장급 회의가 잡혔어요. 어쩌지.."
"아... 괜찮습니다. 과장님! 다녀오세요!!"
"회의 끝나고 회식도 있대.. 필참이라는데...
하필 이럴 때 이런 일이 생기네요."
"어... 아, 아닙니다. 과장님. 괜찮아요.
저 오늘 제 분량은 거의 끝나가서, 과장님 부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웃는 얼굴이 제법 지쳐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을 제대로 못 잤을 테니 당연하다.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운 그 날부터 해서 집에 좀처럼 일찍 들어간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이유에는 내가 컸다. 아니, 나라기 보다는 내가 주는 '일'이 컸다.
미안하긴 한데, 그렇다고 일을 안 줄 수도 없는 일. 적당량이라고 해봐야 내가 맡을 걸 최대한 빼도 신입이 맡기에 가벼운 업무는 아니었다.
그래도 굳이 그날 해야 할 일들은 그날 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당장이라도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서 혼났다.
부담주기 싫으니까, 공적인 시간과 장소에 사적인 감정 끌어들이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잘 참았던 거다.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과장님.
제가 하는 데까지 해두고 내일 보고 드릴게요."
"...고마워요. 그래도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회식할 것 같으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요."
"네, 알겠습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두둑히 휴가라도 쓸 수 있게 해야겠다 싶었다. 휴가철이 되기 전에 프로젝트는 끝날 테니, 잘 끝내고 좀 쉴 수 있기를 바랐다.
가능하다면 같이 보내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미리 계획이 있다면 그럴 수도 없는 일.
또 부담주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내 자신을 다독이며 회의를 준비했다.
"바쁜 와중에 자리해주신 과장님들 감사합니다.
먼저, 오늘 첫번째 안건은 마케팅팀 신규 프로젝트와 향후 진행 방향입니다.
마케팅팀 옹성우 과장님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아무 일 없는데 회의가 잡히는 경우는 없다. 우리 팀의 신규 프로젝트가 이번 회의의 첫번째 안건인 만큼 PT도 신경써서 준비했다.
진행은 민현이가 맡았다. 몇 개월 전에 원래 진행하던 대리가 자리에 없어서 민현이에게 시켜봤는데, 또박또박 위트 있게 잘 해서 호평을 받았다.
그때 이후로 과장급 회의 진행은 계속 황민현이 하고 있다. 나는 민현이의 짧은 소개 후에 신규 프로젝트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이번 프로젝트의 컨셉은 '수용'과 '공존'입니다.
이 두 가지를 메인 테마로 잡고 모든 마케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주는 저 옹성우 과장이, 부는 저희 팀 신입인 ○○○사원이 맡았습니다."
○○○의 이름을 이야기하는데 강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영업2팀은 또 신기록 갱신할 것 같다고 하던데.
시장이 커지다 보니 해외 실적이 쏠쏠한 모양이다. 실적 쏠쏠한 건 아무리 마케팅팀이 잘했어도 결국 영업팀이 잘했다, 로 귀결되기 때문에 늘 서운했다.
하는 일 자체가 못하면 욕 먹고, 잘하면 겨우 욕 안 먹는 정도이다 보니 서운함에는 도가 텄지만, 늘 영업팀이 잘 풀리는 걸 보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지난주 1차 회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현재 다음주 중 2차 회의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2차 회의까지 준비 예정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차 회의, 그리고 회식. 그 날 이후로 사뭇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느끼는 사무실의 공기와, ○○를 둘러싼 분위기, 그리고 강다니엘의 시선도.
나 또한 이야기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나,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 흥미로운 부분도 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서 있는 쪽이 그래도 약간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은 거다.
"향후 3차 회의까지 예정되어 있으며, 3차 회의 후 결과물에 따라 실질적인 액션플랜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액션플랜은 추후 과장급 회의에서 공유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준비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질문 해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간의 질의응답이 오갔다. 질문이 나오리라고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라 그런지 답변하기는 쉬웠다.
강다니엘은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은 과장급 회의에서 그다지 눈에 띄는 존재는 아니었다.
두각을 나타내는 건 성과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회의들에서였다. 팀장을 포함하는 회의라거나, 부장을 포함하는 회의라거나.
작은 물에서는 큰 소리를 내기 싫다는 태도 같아서 나는 그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질문 있는데요."
손을 든 건 강다니엘이었다. 나는 미묘하게 내 표정이 구겨지고 있음을 눈치 챘다.
"3차 회의에서 액션플랜이 나오면 좀 늦는 것 같습니다.
결과물이 여름 안에 나와줘야 하니까 그 전에 플랜이 나와야 움직일 수 있어요."
"결과물은 초가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컨셉을 '수용'과 '공존'으로 설정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클라이언트사 제품 컬러가 파스텔톤 하늘색과 분홍색인데 초가을 겨냥하고 만든 제품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여름 안에는 광고가 발표될 수 있게 해주어야 저희 팀도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얼마 간의 줄다리기가 오갔다. 사실 일정 부분은 다니엘의 말이 맞았다. 여름을 겨냥하고 만든 제품이었기에 여름 안에 광고가 나와주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첫째는 프로젝트 시작이 한 발 늦었고, 둘째는 클라이언트 측의 휴가 일정과 같은 것들이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공적인 자리에서 할 만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얼마간 설명을 하다 차후에 개인적으로 설명을 드리겠다며 끝을 맺었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 있었던 건 아닌데 이럴 때면 마음 한 켠이 답답해진다.
분명 같은 장소에서 몇 년 전에는 서로 도움이 되는 피드백이 오가곤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그리고 왜 녀석과 나는 이제 관계를 호전시킬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된 건지.
그렇게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된 건 내가 먼저인지, 녀석이 먼저인 건지. 이런 생각에 휩싸여 마음이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네, 그럼 이어서 두번째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영업1팀 김재환 과장님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회의는 이어졌다. 나는 이따금씩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성급하게 피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얽힌 시선이 편할 리는 없었다.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어렴풋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생각하고 있는 것도, 고민하고 있는 것도, 망설이고 있는 것까지 결국 하나, 한 사람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오늘 만큼은 그 이야기를 수면 위로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이지만.
-
내 예상대로 회식장소는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황민현에게 회식장소를 좀 다양화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저는 회식에 안 가니 필요 없는데 옹과장님 부탁이니까 특별히 다음에는 신경을 쓰겠단다.
웃겨서 등을 한 대 때리니, 저는 사무실에 있을 테니 무슨 일 있으면 부르십쇼. 안 부르시면 좋고요. 하면서 고개를 숙인다.
나는 웃는 얼굴로 사무실에서 나왔다.
앉은 자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서별로 자리를 배정하다 보니 강다니엘과 마주보는 자리가 된 것이다.
회의 시간 동안 이따금 눈 마주치는 것도 불편했는데, 마주보고 밥을 먹는 것 또한 편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싫다고 하지는 못하니까 일단 앉았다.
김재환이 공연히 우리 사이에 낀 상황이 되었으니 좀 당황스러울 법했다. 입사가 우리 중에 제일 늦으니 잔심부름은 다 김재환의 몫이었다.
덕분에 나와 강다니엘이은 또 신경전 2막을 시작한 차였다.
"......"
"...김과장도 있는데 표정 좀 풀지."
"내가 너랑 마주보고 앉아서 술잔 기울일 사이는 아니지 않냐."
".....그래서 네가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
다니엘은 혀를 내어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강다니엘과 신경전을 계속하는 것은 결국 감정적인 소모만 생길 뿐이다.
사이에 껴서 조용히 고기만 굽고 있는 김과장이 좀 신경쓰이긴 했는데, 그렇다고 누굴 위해주고 챙겨줄 기분은 아니라 조용히 소주잔만 기울였다.
"아, 옹과장님. 같이 드시죠."
"응. 김과장 술 좀 세지... 그래. 잔 줘봐."
"여깄습니다. 예."
먹어도 무언가 얹힐 듯한 그 분위기에서 얼마나 마신지를 모르겠다. 어떤 특별한 대화 없이 각자 자기 잔에 담긴 술은 자기가 비우고 자기가 채웠다.
그렇게 마시다 보니 얼마나 마셨는지를 잘 모르겠다. 소주가 쓴 걸 보니 오늘 많이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아서 먹다 말다 했다.
강다니엘이야 워낙 혼자서도 잘 마시니 마시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 제 집이야 제가 알아서 잘 찾아가겠지, 했다.
"김과장 잔 비었네."
"예예, 감사합니다."
"김과장은 술 누구랑 마셔?"
"저야 뭐... 아, 저도 황대리랑 친해요.
축구하다가 친해졌어요."
"너 축구도 해?"
"네."
남자들끼리 친해지는 건 별 거 없다. 황민현이나 김재환처럼 축구 좋아하는 놈들은 축구 하다 보면 밥도 먹고, 술도 먹고. 그렇게 인맥 쌓아가는 거다.
나야 축구는 예전에 많이 했지만, 다리 한 번 다치고 나서는 웬만해서 잘 뛰지 않으려고 한다.
체육대회 정도야 괜찮지만... 일부러 뛸 기회를 만들어서 뛰지는 않는다.
그러게. 생각해보니 그때 다리도 결국 강다니엘 때문이었네. 얼마 되지 않은 일인데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져 쓴웃음이 지어졌다.
승진 PT 이후, 그러니까 부모님 장례식 때문에 부산을 방문한 다니엘이 서울에 올라온 이후,
쉽게 말하면 넋빠진 녀석이 사무실 근처에서 사고가 날 뻔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녀석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닿아 있었기에 나름 몸을 던져 녀석을 구한다고 까불었으나,
녀석은 코웃음도 안 치고 고맙단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졌고 나는 그 자리에서 뼈가 부러져 한 달을 입원했다.
그 후에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일들이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죄책감에 시달려 녀석을 구해준다거나, 챙겨줬던. 그런 일들.
내 일방적인 미안함과 녀석의 한결같은 무시가 만들어낸 역사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더니 테이블이 비어서, 밖으로 나간 모양이라 생각했다.
휴대폰을 확인했더니 열시쯤 됐다. ○○는 퇴근했을까 하는 마음에 연락해볼까 하다 접고 말았다.
사무실에 있으면 일 열심히 하고 있을 거고, 집에 갔으면 한 시라도 쉴 시간이 부족해서 애달파하고 있을 테니. 굳이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았다.
나도 바람 좀 쐐러 나가 볼까. 밤바람은 조금 선선할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이 터질 줄 몰랐다.
-
(여주 시점)
"○사원!! 잠깐 나랑 같이 나가줘요.
옹과장님이랑 강과장님이랑 싸움 났대요!!!"
열시가 지나도록 사무실에는 몇몇 사람이 남아 있었다. 그 중 단골은 나와 황민현 대리였다.
오늘도 남으시냐며 쓴 인사를 주고 받는데, 과장급 회의 진행을 황민현 대리가 맡았다고 하니 문득 옹과장님과 강과장님 생각이 스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후 네시 정도부터 시작한 옹과장님의 업무는 지금에서야 끝을 보이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마무리만 하면 집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 찰나에 황대리가 나를 부른 것이다.
"싸움이요? 무슨 싸움이요?"
"일단 같이 나가줘요, 나랑.
멀지 않으니까 잠깐만 다녀와요.
아, 아니다. 혹시 모르니까 가방이랑 다 챙겨요. 그대로 집에 가게 될 수도 있겠어요.
나도 챙기고 나갈게요. 엘리베이터 좀 잡아줘요."
늘 차분한 황대리님이 이렇게 당황해서 서두르는 모습은 처음 봤다.
아니 근데 싸움이라니. 대체 무슨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싫어해도 대놓고 싸우는 법은 없었는데.
술이 들어가니 손이 올라갔나. 그런데 손이 올라간 정도면 나중에 징계 먹는 거 아니야? 별 생각이 다 들었다.
"......"
"........."
황대리님과 현장에 갔을 땐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이 종료되어 있었다.
대강 파악한 건 이랬다. 영업마케팅부서 과장님들이 잠시 바람 쐐러 나왔는데, 회의 때부터 신경전을 이어오시던 옹과장님과 강과장님의 언쟁이 시작되었고,
옹과장님을 무시하고 다시 들어가려던 강과장님을 돌려 세운 옹과장님이 먼저 주먹을 날렸다는 것.
종일 참는 것처럼 보인 강과장님도 질세라 주먹을 휘둘렀고, 다행히도 그 장면은 김과장님만 보았는데,
말려도 혼자 힘으로는 전혀 말려지지 않고, 그렇다고 안 말릴 수도 없어서 일단 황대리에게 연락을 했다는 거다.
한숨이 났다. 옹과장님은 그렇다 쳐도 강과장과는 지금 며칠만에 보는 건지.
내가 시간을 갖자는 이야기를 꺼낸 뒤로 얼굴을 못 봤으니 아무튼 그랬다.
시간을 갖자는 이야기 자체는 갑작스러웠으나, 당시에는 내가 지칠만큼 지쳐있던 것도 맞았다.
첫째는 몸도 마음도 너무 피곤했고, 둘째는 감정적으로 너무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웠다.
그 상황에서 강과장과 말이 길어지면 싸우고, 더 싸우고, 더 마음이 상할 게 뻔해 비겁하게 상황을 종료시켜 버린 문장이 '시간을 갖자'는 거였다.
상황이 종료된 후에 과장님의 마음을 절반도 헤아리지 못한 나에 대한 자괴감이 들긴 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상태였고,
일단 2차 회의가 끝난 다음에 강과장에게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던 찰나였다. 그게 내 계획대로 될지가 문제였지만.
"......."
".........."
급한대로 황대리가 옹과장님과 집 가는 방향이 같아서 옹과장님을 데리고 갔고, 내 몫은 강과장님이었다.
두 과장님 다 거나하게 취한 상태라 일반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과장님이 차를 안 가져오신 것 같아서 택시를 불렀다. 김과장님은 우리가 택시를 타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집으로 향하셨다.
싸움통에 그래도 본 사람이 김과장님밖에 없다는 게 조금이나마 다행이었고, 위안이 되었다.
최소한 그 분이 윗분들에게 일러서 징계위원회가 소집될 일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차에 탄 나와 강과장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많이 취한 강과장이라, 혹시 잠들었나 했는데 바스락바스락 움직이는 걸 보니 그건 아닌 듯하다.
나는 택시기사님이 라디오라도 틀어주시기를 바랐지만, 추호도 그런 생각은 없으신 것 같아서 일찍이 포기했다.
"왜 그랬어요."
"..맘에 안 드니까."
유감스럽게도 먼저 말을 붙인 건 나였다. 3초도 안 되어 대답한 건 강과장이었고.
마치 내가 어떤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듯 바로 들려오는 답에 눈이 둥그레져 강과장을 쳐다봤다.
강과장은 내가 아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넋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멍했다.
"...뭐가요... 누가요."
"옹성우랑 너. 둘 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때려요."
"옹성우가 먼저 때렸는데."
"......."
사람만 안 때렸지 잘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
시간을 갖자는 건 흔들려서라기보다는 당시 너무 힘들어서였는데,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 또 내가 강과장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야기한 걸, 내일 기억 못하더라도 해야 할까. 하는 게 맞을까.
"너... 왜 그렇게 차가웠어. 나한테."
"....."
"너 아침 챙겨주려고 일찍 일어나서 뭐 잔뜩 사가지고 갔는데.
다 버렸어. 줄 사람이 가버려서."
".....미안해요."
"..뒷모습 보이지마.
화난 것도 화난 건데, 누가 가슴을 파내는 것처럼 아팠어.
...너무 아팠어."
"....."
이런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됐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를 너무 아프게 만든 것 같아 되려 내 마음도 아파졌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다. 어른인 그에 비하면 난 아직 한참 어린 게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와 이렇게 깊어져본 적이 없으니 모든 게 서투른 거다.
비단 이런 상황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서투른 모습이 계속 보여질 거다. 그의 눈에는 더더욱 그럴 거다.
"근데 또 보고싶으니까,
거기서 연락은 못하겠고...
답답한 게 쌓이니까 옹성우한테 주먹 날아간 거야."
"........"
"나 잘못했다고 하지마.
잘못한 건 아는데, 너한테 들으면 너무 슬퍼."
잡은 그의 손이 따뜻했다. 그가 온몸을 내게 기대 와 무거울 법도 한데, 지금은 무거운 것보단 이렇게 있다는 게 더 중요했다.
처음 들어보는 그의 감정들. 정제되지 않고 곧바로 나오는 그의 생각들.
내가 듣고 싶고, 알고 싶었던 건 그의 이런 말들이었던 것 같다. 가슴이 쿵쿵 정신없이 울려댄다.
"싸우지 말자..
나 너무 힘들다.
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라는 물 먹은 말을 끝으로 그는 잠이 들었다.
나는 택시가 그의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소리를 죽여 울었다.
미안함을 넘어설 만큼의 미안함이었다. 따라온 죄책감은 내 세상이 무너지리만치 대단했다.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쓸어내곤 내 입을 갖다 댔다.
아마도 그는 기억하지 못할, 내가 처음 그에게 한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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