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거
w.로스트
(Y O N - Plastic)
“시상식이요?”
세트장 밖에 늘어져 있는 여러 촬영 장비들을 훑어보던 여주가 통화 중이던 지민을 향해 조금은 놀란 투로 되물었다. 여주의 영화 촬영은 별다른 차질 없이 무탈히 진행되고 있었고, 지민이 작사 작곡으로 참여한 그 여자, 제이의 앨범 또한 발매와 동시에 각종 음원 차트를 올킬 시키며 예상대로의 승승장구를 이어가고 있었다.
ㅡ 난 분명 싫다고 했는데, 누나가 이번엔 하도 닦달을 해대서.
“..아, 누나 분이 이사님이시죠, 참.”
그러던 중 덜컥 들려온 소식이 바로, 지민이 한 유명 음악 시상식의 작곡가 부문에 수상 후보로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지민은 이미 다분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는 유명 작곡가였으나 상을 받을 때마다 받은 상만 조용히 전해 받을 뿐, 카메라 앞에 얼굴을 내비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번번이 얼굴 없는 작곡가로 불리기 일쑤였다. 지민이 방송 출연은 물론이요 여지껏 그 짧은 인터뷰 촬영조차 거부해왔던 이유는 단순했다. 그런 데엔 애초에 흥미도 없었을뿐더러, 쓸데없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리저리 살이 붙어 가십 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보기 싫었던 탓이었다.
ㅡ 그 인간이 살면서 유일하게 나한테 잘한 짓이 뭔 줄 알아요?
내 옆에 여주 씨 데려다 놓은 거. 딱 그거 하나야.
때문에 지민은 벌써부터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지나의 험담을 여주에게 줄줄이 늘어놓았다. 여주는 그런 지민의 툴툴거림을 들으며 귀엽다는 듯 웃었고, 그러한 지민의 투정이 점차 잦아 들어갈 즈음, 슬슬 위로나 해줄까 싶어 막 한 마디를 덧붙이려던 참이었다.
“작가님!”
통화를 하던 여주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곧장 등을 돌린 여주가 저 멀리서부터 다급히 달려오는 한 남자를 게슴츠레 바라보았다. ...태형 씨?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진짜.”
마치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대형견 한 마리처럼 갈색의 머리를 팔랑이며 여주에게 다가온 사람은, 다름아닌 여주의 영화 속 남자 주인공 태형이었다. 태형은 회사로부터 여주의 시나리오를 전해 받은 뒤 한참이나 여주의 시나리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했는데, 때문에 미팅 날에도 부담스러울 만큼 여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게요, 진짜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 촬영이 시작된 이후론 자주 얼굴을 볼 일이 없어 몇 번의 연락만 주고받은 것이 전부였던 두 사람이었다. 여주가 오랜만에 보는 태형을 보며 맑게 웃어 보였고, 태형은 그런 여주의 앞에 얼음이 조금 녹아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를 짤짤 거리며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얼음 다 녹았잖아요. 오늘 작가님 오신다고 해서 이렇게 커피까지 사 들고 기다렸는데. 태형이 입술을 비쭉이며 여주를 밉지 않게 노려보았다.
ㅡ ...누구에요, 옆에?
그렇게 한참을 태형의 애정 섞인 인사를 받아주던 여주는 순간 휴내폰 너머로 들려오는 지민의 목소리에 그제야 지금 자신이 지민과 통화 중이었다는 사실을 문득 직시했다. 여주가 아차, 싶은 표정과 함께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다시 제 귓가로 가까이 가져다 대며 태형을 향해 짧은 손짓으로 양해를 구해 보였다.
“아, 미안해요. 내가 지금 잠깐 누굴 좀 만나서 통화는 나중에 해야겠다.”
ㅡ ...자기야.
“이따 집에서 다시 얘기해요. 응?”
전화는 그렇게 끊기는 듯했으나 그런 여주를 순순히 놓아줄 지민이 아니었다. 전화가 끊어짐과 동시에 곧장 다시 걸려오는 지민의 전화를 보며 여주가 애써 태형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친구? 태형이 그런 여주의 휴대폰을 힐끔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여주가 제 귓볼을 매만지며 짧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작가님 남자친구랑 동거해요?”
“...예?”
그러자 마침내 들려온 태형의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훅 들어온 태형의 물음에 여주가 당혹스런 표정을 겉으로 여실히 드러내 보이며 도록도록 눈을 굴렸다.
“아니, 방금 작가님이 전화 끊기 전에 그랬잖아요. 집에서 얘기하자고.”
그렇게 한참을 대답 없이 긴 뜸을 들이는 여주를 보며 태형이 멀뚱한 표정으로 또 한 번 말을 이었다. 여주가 변명 거리를 고르기 위해 애먼 입술만 연속해 달싹였으나 결국 태형의 입을 타이밍 좋게 틀어막은 건, 세트장 건물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뺀 채 목소리를 높인 남준이었다.
“두 사람 이제 슬슬 들어오지?”
곧 촬영이 다시 시작될 모양인 건지 주변 스텝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촬영 장비들을 옮겨가며 발을 빨리하고 있었다. 아, 지금 가요. 그런 스텝들 사이에서 남준을 향해 능청스레 손을 흔들어 보인 여주가 운 좋게 빠져나갈 타이밍을 잡았다는 듯, 재빨리 세트장 건물 쪽으로 발을 돌렸다. 태형이 한껏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털레털레 그런 여주의 뒤를 따랐다. 여주가 그제야 작게 숨을 돌리며 조용히 자신의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 전에 말했던 김태형인가 뭔가 하는 애 맞죠. ]
[ 전화 계속 안 받을 거예요? ]
[ 답장해. 안 그럼 나 지금 작업이고 뭐고 다 엎어버리고 여주 씨한테 갈 거야. ]
역시나 연달아 날아와 있는, 지민의 질투 섞인 문자메시지였다.
-
“그래서, 시상식엔 뭐 입고 가기로 했어요?”
“...또 말 돌리지.”
비좁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얼굴을 마주 보고 누운 두 사람 사이로 서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차분히 뒤섞이고 있었다.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이 지민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던 모양인 건지, 지민은 여전히 불퉁한 표정으로 자꾸만 말을 돌리려는 여주의 입술만 아프지 않게 깨물어댈 뿐이었다. 여주가 그런 지민의 허리를 더 바짝 끌어안으며 말없이 용서를 구했다. 지민이 그런 여주의 행동에 애써 제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자꾸만 눈치 없이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아냈다.
“이런다고 내가,”
“잘못 했어요, 자기야.”
“...풀리지. 응.”
그래 봤자 이렇게 금방 흐트러져버리고 마는 지민이었지만.
“그럼 옷은 이렇게 입고 가는 거예요?”
지민의 휴대폰 앨범 속, 지민의 회사에서 보내온 두 벌의 수트 이미지를 넘겨보던 여주가 조금은 들뜬 얼굴로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여주를 품에 안은 채 티브이 채널만 연속해 돌려보던 지민이 그런 여주의 눈가에 대답 대신 짧막이 입을 맞추며 낮게 웃어보였다. 얼마 남지 않은 시상식이었지만 지민은 별다른 긴장도, 기대도 없어 보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지민의 무심한 표정만을 힐끔거리며 바라보던 여주가 문득 짧은 진동이 울리는 지민의 휴대폰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 (사진) ]
[ (사진) ]
지민의 휴대폰으로 갑작스레 날아온 의문의 문자 세 통이 여주의 눈동자 속에 고스란히 떠올랐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 그리고,
[ 지민 씨. 나 드레스 좀 골라줄래? ] ㅡ 010-XXXX-XXXX
언뜻 보였던 ‘드레스.’라는 단어.
순간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안으로 말아 문 여주의 눈동자가 주체 없이 요동치며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민의 휴대폰을 손에 움켜쥔 채 한참을 액정 앞에 엉거주춤 멈춰있던 여주의 엄지 손가락이 이내 뭔가에 홀린 듯 조용히, 상단바에 떠오른 메시지를 클릭했다. ...저, 지민 씨. 그렇게 열린 메시지 함에는 역시나, 눈에 띄게 화려한 색상의 시상식 드레스 사진 두 장이 짧은 메시지와 함께 연달아 첨부되어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 한 여주가 나지막이 지민을 불렀다.
“혹시, 그 제이 씨도 시상식에 가는 거예요?”
확신을 가질만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여주의 촉은 이미 정확히 어느 한 사람을 오롯이 가리키고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여주가 지민의 휴대폰 홀드 키를 눌러 화면을 끄며 지민의 품속으로 고개를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민이 그런 여주를 자연스레 끌어안곤 여주의 귀밑에 입술을 묻었다. 여주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지민의 허리춤을 조심스레 그러쥐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
“그건 갑자기 왜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가수들이라면 대부분 참가하는 시상식이었으니 여주 또한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전 지민에게 보낸 제이의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여주는, 제이가 여지껏 지민에게 꾸준한 연락을 취해 왔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물론 일에 관한 메시지를 제외하곤 한 통의 답장도 보내지 않은 듯 보이는 지민이었다. 그럼에도 괜스레 신경이 쓰이는 건 여주로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그냥 인터넷에 기사가 떴길래요.”
여주가 대충 있지도 않은 핑계를 대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와 동시에 마땅히 볼만한 프로가 없었던 모양인 건지, 리모컨을 쥔 손을 뻗어 티브이 전원을 꺼버리는 지민이었다. 이런저런 티브이 속 말소리가 사라지니 고요한 정적만이 거실 내부를 잔잔히 감돌았다. 지민이 여주의 어깨와 허리를 감싼 손에 바짝 힘을 줘 몸을 돌리며,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여주를 불쑥 제 위로 앉혀놓았다.
“..뭐, 걔가 시상식에 오든 말든 그쪽은 내 알 바 아니고.”
“......”
“예쁘네.”
“이렇게 밑에서 보는 것도.”
지민의 허리춤에 상체만 꼿꼿이 세운 채로 앉게 된 여주가 놀란 얼굴로 지민의 어깨를 다급히 움켜쥐었다. 지민의 장난기 섞인 나른한 목소리가 여주의 두 귀를 붉게 물들여 놓았고, 그런 여주의 골반을 붙잡고 있던 지민이 제 한 손을 위로 뻗어 여주의 새하얀 목선을 매만졌다.
“내가 시상식 때문에 긴장이 돼서 그러는데.”
“......”
“자기가 긴장 좀 풀어주면 안될까.”
그리곤 이내 여주를 따라 자신의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며 여주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는 지민이었다. 방금 전 제이의 문자에 마음이 불편해지려던 것도 잠시, 여주가 살풋 고개를 숙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거짓말.”
참으로 속보이는 지민의 거짓말이 아닐 수 없었다. 여주가 제 앞으로 다가온 지민의 목에 손을 두르며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런 여주를 따라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지민이 여주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한 손을 조심스레 밑으로 내려 자신의 허벅지 옆에 놓여있던 여주의 얄팍한 발목을 슬며시 움켜쥐었다. 지민이 지긋이 여주와 눈을 맞췄다.
“응. 맞아, 거짓말.”
지민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지민에게 잡힌 여주의 발목이 빠르게 허공 위로 튀어 올랐다. 여주의 상체가 부드럽게 뒤로 넘어가며 소파 위로 파묻혔고, 곧장 진득하게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의 숨소리가 고요하던 거실을 가득히 채워나갔다. 지민은 미처 알지 못했다. 이처럼 무질서하게 튀어나오는 저의 애정 표현이, 지금은 여주의 불안감마저 무감하게 만들어줄 마취제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
사랑하는 독자님들.. 잘 지내셨나요? (눈치
일단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ㅠㅠ
제가 지금 한국에 있질 않다보니 예상보다 너무 늦게 돌아와 버렸네요
원래는 7월에 위동을 완결 낼 생각이었는데 결국 8월에 완결을 내게 생겼구요.. 정말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ㅠㅠ
게다가 제가 지금 익숙한 환경에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글이 생각한대로 잘 안 나오더라구요 내용도 그렇고ㅠㅠㅠ
그래서 결국 오늘도 이런 부족한 글로 찾아와버렸습니다.. 저를 매우 치세요...
대신 앞으론 이렇게 늦는 일 없어 더 밀도 있는 글로 완결까지 잘 마무리 지어서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다시 한번 이렇게 기다려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한국이 지금 많이 덥다고들 하던데 다들 부디 더위 조심하세요 8ㅅ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