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사랑의 불청객 - 작별
주말이다. 어느덧 박지훈의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회사를 다니다 보니 예전보다는 챙겨주지 못한 느낌이 커서 미안한 마음이 좀 있었다.
학생이었을 때는 가족들과 함께 며칠 날을 잡고 멀리 놀러 가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휴가도 과장님과 함께 가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집에는 난 신입이라 이번 해에는 휴가가 없다고 둘러댔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박지훈의 입장에서는 굳이 내게 말은 안 했어도 서운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미국 가기 전에 가고 싶은 데 없어?"
"뭐... 별로."
"하루이틀 정도는 괜찮은데. 생각해본 거 없어?"
"응. 덥고.. 귀찮고. 가기 전에 엄마랑 이모나 보고 가지, 뭐."
"......."
진짜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내가 피곤할 것 같아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고 싶은 곳은 없다고 말하는 지훈이다.
그러면서 엄마와 이모는 보고 가야겠다고 하는 게 예전보다는 철이 든 건가 싶어 내심 마음이 좀 울렁거렸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도 은근 여기저기 신경쓰고 있는 곳이 많은 놈이다.
그건 그냥 가기 직전에 잠깐 봐도 되는 거잖아. 뭐 물놀이 하고 싶다거나... 그런 거 없냐구. 하고 물었더니 내가 무슨 앤 줄 아냐, 누나는. 하고 싶으면 벌써 갔지. 귀찮아. 하고 답한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워터파크보다는 배진영과 함께하는 칙칙한 PC방이 좋을 나이이긴 해서 더 이상 묻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
"형님이 같이 갔음 좋겠는데."
형님..? 무슨 형님..... 아. 과장님?! '형님'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져서, 박지훈이 말하는 '형님'이 어떤 '형님'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그게 과장님임을 깨달았다.
오빠? 하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강과장님을 데리고 엄마 집에 간다라.... 언젠가 한 번은 해야겠다고 생각해왔지만, 지금일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고민하는 내 눈빛을 느낀 박지훈은 인사시킨다고 했잖아. 나보고 이야기 잘해달라고 그랬잖아. 하고 덧붙였다.
물론 그랬긴 했지만... 그리고 지훈이랑 같이 가면서 과장님을 데리고 가는 것도 여러모로 앞뒤가 맞는 일인 것 같기도 하지만....
망설이게 된 이유는 선뜻 과장님께 이야기를 꺼내기가 좀,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번 물어볼게. 시간 되면 같이 가자고."
"알았어. 그럼 내가 우리 간다고 이모한테 전화한다. 누나 남자친구랑도 간다고."
"아... 야. 그건 아직,"
"내가 봤을 땐 백프로야. 완전 좋아하실 걸, 형님도?"
"......."
확신에 차서 말하는 박지훈을 말릴 수는 없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과장님의 번호를 찾았다.
오후에 만나기로 했지만,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일단 묻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울리는 신호음이 이렇게 긴장될 수가 없었다.
-
"와아! 차도 좋네요 형님!!!"
"노래 틀어줄까?"
"네! 제 폰 연결해주세요 형님!!"
"그래. 줘봐."
내 머리 위에는 먹구름이 꼈다. 아무리 내 제안이 좋았다고 해도 오래간만의 데이트가 3분만에 본가 방문으로 바뀔 일....? 주말에 데이트하려고 평일에 얼마나 기다렸는데.
본가 가려고 하는데, 지훈이가 과장님도 같이 가자고 해서요. 혹시 괜찮으시면.... 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늘 가면 되겠다! 하는 답이 닿아왔다.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박지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대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간만에 영화도 보고, 좀 데이트다운 데이트 좀 할랬더니 다 망했다.
뭔가 둘만의 시간을 뺏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박지훈의 신나는 얼굴을 보니 할 말은 없어졌다.
저 좋은 곳에서 노는 것보다 누나 남자친구를 부모님께 인사시켜 주는 게 더 낫다는 녀석이어서 괜히 내가 더 철이 덜 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멕 미 필 소 하이! 미치게써! 날 멈출 수 업써!!"
쿵쿵, 강한 비트가 차를 울렸다. 박지훈은 온몸으로 신난 기분을 표현하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흘끗 과장님을 바라봤다. 과장님은 살며시 손을 잡아왔다.
잡은 손이 딱 맞게 물려진 게 보기 좋았다. 괜히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머리 위에 꼈던 먹구름이 걷힌 모양이다.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 나를 바라보는 과장님과 눈을 맞췄다.
운전해야 하는데. 뒷자리에 앉은 박지훈에게는 안 들릴만치 작은 소리로 속삭이니, 과장님은 예뻐서 안 볼 수가 없어. 하며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
괜히 곰실거려서 으으, 하면서 눈을 꾹 감으니, 잡았던 손을 풀어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문질러준다. 사랑이 가득 담긴 손길에 더 곰실거려졌다.
본가가 막 멀지는 않아도 그래도 차로 두 시간은 달려야 갈만한 거리였다. 차는 고속도로로 들어왔고, 주말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좀 더 막혔다.
지훈아, 집에 아빠 계신데? 하고 물었더니, 모르겠는데. 함 물어볼게. 하는 지훈이다.
아빠라는 말이 나오자 조금 긴장하는 모습의 과장님이다. 아빠가 딸바보라 그렇지 그렇게 무서운 분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실은 그게 제일 무서운 거라며 웃는 과장님.
맞는 말이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온통 푸르고 파란 날씨와 옆에는 과장님, 뒤에는 지훈이. 귀에는 신나는 음악이.
둘만의 데이트는 날아갔지만 이렇게 보내는 주말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엄마- 우리 왔어-"
일찍부터 아파트 현관 앞에 내려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모를 향해 박지훈이 인사를 건넸다.
엄마와 이모, 그러니까 지훈이네 엄마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데 사실상 같이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오늘도 나와 박지훈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빠르게 우리 집으로 넘어온 이모일 거다. 우리 엄마보다 눈을 더 반짝이며 우리를 기다린 티가 역력했다.
왔다고 인사하자마자 슬리퍼를 신은 발로 달려와 두 팔을 벌려 나와 지훈이를 안는 이모다. 그에 비해 우리 엄마는 느릿느릿. 어련히 오겠지, 하며 과일을 깎고 있을 거다.
"어머, ○○가 남자친구-?"
"예. 안녕하세요."
과장님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모는 어머- 훤칠하니 잘생겼다- ○○가 이모에요. 지훈이 엄마요. 하고 웃었다.
과장님은 예. 처음 뵙겠습니다. 강다니엘이라고 합니다. 하며 웃었다. 이모는 그래요, 다니엘씨. 더운데 얼른 들어와요- 하고 앞장섰다.
난 이모의 저 표정을 안다... 잘생긴 사람 보면 나오는 표정. 박지훈이 스무살이 다 되어가는데도 이모의 소녀감성은 참 없어지지를 않는다.
나는 혼잣속으로 웃음을 감추며 과장님의 뒤를 좇았다. 과장님은 뒷쪽으로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약간의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손길.
그치만 왠지 엄마와 아빠도 과장님을 싫어하지 않을 거라는 미묘한 자신감이 들었다. 이모의 저 설레는 표정이 한 몫 단단히 했다.
"어서 와, 우리 딸-"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도착한 우리. 문을 열자마자 고양이를 품에 안은 아빠가 우리를 반겼다. 과장님은 아빠를 향해 거의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아빠는 웃으며 맞아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부엌에서 과일을 깎고 있었고, 아빠는 거실에서 고양이를 안고 TV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 앞에서 한참 인사를 나누어도 엄마는 보이지를 않는다. 아빠를 향해 엄마는? 하고 물었더니 부엌에서 예술작품 만드는 중이란다. 나는 신발을 벗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엄마아- 하고 부르며 가까이 다가가는데, 과일 깎는 데 한껏 집중한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똑, 하고 접시에 복숭아를 놓음과 동시에 칼을 내려놓고 내게 인사했다.
"왔어-?"
"응 엄마- 복숭아야?"
"응. 복숭아는 예쁘게 자르기 너무 힘들어."
"하하, 진짜 또 예술작품 만드셨네, 어무이."
"그나저나 너 남자친구는?"
"저기. 아빠랑."
"얼굴 좀 보자. 궁금하네."
쏴아, 흐르는 물에 손을 씻은 엄마가 수납장 손잡이에 달린 수건에 물기를 닦아내고 내 손목을 끌었다. 나는 크큭, 하고 웃으며 엄마를 따라갔다.
아, 안녕하십니까, 어머니. 하고 아직 자리에 앉지도 못한 과장님이 엄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거실로 나간 엄마의 얼굴에 3초만에 화색이 도는 걸 난 봤다.
안녕하세요, ○○가 엄마에요. 하면서 엄마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왜 엄마가 수줍어하는 부분...? 이모도 그렇고 말이야. 이 사람들 안 되겠구만.
아빠는 안고 있던 청이를 쓰다듬으며 다들 앉지. 하셨다. 엄마는 그럼 나 복숭아 좀 가져올게. 하고 다시 부엌으로 갔다. 나도 같이 가려고 하니 너는 여기 있으라며 말리는 손길이 따라왔다.
"........."
"............"
보고 있던 TV를 끄니 거실에는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엄마가 복숭아를 가져오기까지 흐른 정적은 차마 깨기가 어려워 나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게 되었다.
엄마도, 아빠도, 이모도 이런 적은 다 처음이라 낯설기 마련이었고, 박지훈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핵내숭 모드에 돌입한 상황.
과장님은 귀가 축 처진 강아지처럼 가만히 바닥만 보고 앉아있었다. 계속 손을 꼼지락대는 걸 보니 적잖이 긴장한 모양이다.
"복숭아 예쁘게 깎느라구 힘들었어- 어서들 들어요."
엄마가 오자마자 포크 여섯 개가 분주히 나눠졌다. 오물오물 복숭아를 먹는 최소한의 소리만이 거실을 채웠다. 아빠 품에 있던 청이는 어느새 과장님의 무릎에 제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엄마. 청이 좀 봐."
"어머... 얘가, 얘가. 낯 안 가리는 것 좀 봐."
저도 여자라고 잘생긴 남자가 좋은 건지. 어릴 때 청이의 1순위는 박지훈이었는데, 이제는 집에 거의 오지 않게 되어버렸으니 그를 대신해서 아빠의 품에 있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 이렇게 집에 낯선 남자가 오는 건 또 처음이니 저도 신기해서인지 대뜸 가서 얼굴을 부비적대고 있는 거다. 그게 웃겨서 엄마와 나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다 과장님과 눈을 마주쳤다. 과장님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덧 손은 차분히 청이를 쓰다듬는 중.
청이는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겨, 양반다리로 앉은 과장님의 다리 위에 제 자리를 잡았다. 참나... 누가 보면 만난지 한 3년 된 줄. 주인보다 주인 남자친구를 더 좋아하다니. 키워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 정말.
"○○야, 너 남자친구 소개 좀 해봐."
이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슬쩍 박지훈의 눈치를 살피니, 눈짓으로 얼른, 빨리. 를 말하고 있다. 나는 하하... 어... 네... 하면서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열려고 하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게 되었다. 그 틈에 과장님이 내 말을 받아주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다니엘이라고 합니다.
○○가와 만난지는 반년 조금 안 되었습니다. 이번에 지훈이 미국 가기 전에 한 번 같이 찾아뵙자고 해서 같이 오게 됐습니다."
차분하고 든든하게 말하는 목소리하며, 서글서글한 눈웃음까지. 참 내 꺼지만 이렇게 완벽할 수 있나 싶어 흐뭇해지는 표정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엄마와 이모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합격인 것 같고.... 아빠는 왠지 질문 리스트를 한 스무 개는 가지고 있는 것 같은 표정. 질문 폭격이 날아올 것 같아서 또 좀 긴장이 됐다.
"으음.. ○○랑은 어떻게 만났어요?"
"아, 제가 ○○가 옆 팀 과장입니다."
하하, 하면서 쑥스러운듯 눈썹 사이를 긁적이는 과장님이다. 엄마와 아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를 마주봤고, 박지훈과 이모 또한 그러고 있었다.
이럴 거면 미리 좀 밑밥을 깔아둘 걸 그랬나.... 부모님과 떨어져 있는데 연애한다고 쓸 데 없는 걱정을 할까봐 너무 입을 닫고 있었나 보다.
전혀 금시초문인 이야기들이 우수수 떨어지니 엄마와 아빠도, 이모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다.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제가 첫눈에 반해가지고.. ○○한테 이것저것 챙겨주다 보니..."
"........."
"저한테 ○○가 많이 과분합니다."
또 서글서글한 웃음이 따라온다. 엄마와 아빠는 이제는 입까지 헤 벌리고 나와 과장님을 쳐다보고 있다. 왜 그런 표정이신 겁니까, 선생님들...
어느새 엄마와 아빠는 깎아놓은 복숭아를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구석진 곳에 앉아있는 박지훈만 열심히 복숭아를 먹고 있다.
나도 뭐, 굳이 덧붙일 말은 없어서 조용히 복숭아를 집어먹었다. 과장님은 제게 집중된 시선이 멋쩍은듯 다리에 자리한 청이를 쓰다듬었다.
"그러면... 저, 나이가...."
"○○랑 차이가 좀 납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부담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아, 아니요. ○○가도 아직 많이 어리고요. 저야 뭐... 괜찮지만, 최대한 ○○가 배려하고 싶습니다."
나이차가 좀 있는 건 맞는 말이었지만 그게 부정적으로 작용한 적은 크게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장님이 나한테 부담스러울 만치 결혼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최근 들어서는 내가 점점 더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때가 많아진 게 사실이고, 과장님이 이야기를 먼저 꺼낸 적은 오히려 별로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교환을 했다. 박지훈은 아직 제가 낄 때가 아니라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또 한 번 복숭아를 가져다 입에 물었다.
"아이,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말을 해요, 언니랑 형부는-
오늘은 재밌게 놀다가 가면 되지. 그렇지?"
"........"
무거웠던 분위기에서 이모가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하면서 박지훈과 눈을 맞추는 이모. 이 때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는 박지훈이다.
나는 맞아요, 오늘은 그냥 인사드리려고 온 건데- 하며 맞장구를 쳤다. 엄마는 그치그치. 미안해요. 그냥 갑자기 좀 진지해져서... 하고 멋쩍게 웃었다.
아빠도 그래, 우리가 좀 그랬네. 하면서 웃었다. 과장님은 아, 아닙니다. 하면서 손사레를 쳤다. 잔뜩 휘어지는 눈꼬리가 예뻤다.
"그, 제가 누나 집에 있으면서 형님이랑 좀 친해졌는데,
형님 진짜 짱이에요. 성격도 그렇구, 뭐 보시다시피, 잘생겼구..."
이어지는 박지훈의 말. 과장님은 부끄러운듯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일도 진짜 잘하시구.. 누나도 잘 챙겨주고... 내가 다 부러울 정도였는데. 하면서 줄줄이 칭찬일색.
엄마와 아빠는 가만히 박지훈의 말을 들었다. 이모는 오래간만에 말을 하는 박지훈을 눈 앞에서 보니 그저 감격스러운 것 같았고... 청이는 과장님의 다리 위에서 꾸벅꾸벅 존다.
만난지 삼십분도 채 안 되었는데 이미 한 가족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좀 묘했다. 오히려 낯을 많이 가릴 것 같았던 과장님이 싹싹하게 이야기를 잘하셔서 놀랐다.
내 머릿속에 박힌 과장님의 첫인상이 오히려 굉장히 드문 이미지였다는 걸 새삼 또 깨달았다. 알면 알수록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 나한테만 그렇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서도....
"뭐, 여튼 보시다시피 둘이 엄청 잘 어울려요. 가만 보니깐 누나도 형님한테 의지를 많이 하는 것 같고...
보는 제가 뿌듯하고, 그렇더라고요."
한참 이어지던 박지훈의 칭찬은, 드디어 끝인가? 하면 거기에서 또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알았어. 너 과장님 덕후인 거 아니까 그만해 바보야....
여자친구인 나보다 사촌동생인 박지훈의 말이 뭔가 더 신빙성 있어 보이기는 했다. 나는 두세 번 복숭아를 더 집어먹다보니 배가 불러져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모는 포크를 내려놓는 나를 보더니, 너네 점심은 먹고 왔어? 하고 물었다. 데이트하려고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만나게 되어 끼니를 못 챙겨 먹었던 터라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그럼 밥 좀 차려야겠다며 일어났고, 나는 우리 셋이 먹고 들어오면 된다고 엄마를 말리려 했는데 나보다 과장님이 좀 더 빨랐다.
"아, 어머님. 괜찮습니다.
저희가 너무 갑자기 와서 밥 차리기 번거로우실 텐데,
혹시 식사 안 하셨으면 저희 다 같이 나가서 식사하고 들어오면 좋을 것 같아요."
과장님의 말이 맞긴 했다. 집에 온다는 것도 하루이틀 전에라도 말했으면 모를까, 두시간 전에 말했던 터라 급히 밥을 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엄마한테도 우리한테도 모두 부담스러운 일이라 나도 엄마를 말리는 게 맞는 것 같다 생각했다. 게다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이모는 이미 밥을 먹은 눈치였다.
어차피 잠깐 인사하고 얼굴 보러 온 거니 밥은 나가서 먹어도 되었던 거다.
"우리는 이미 밥을 먹어가지구, 세 명 먹을 거 차리는 건 안 번거로워요-"
"아, 엄마. 괜찮아요, 진짜. 오늘은 우리 셋이 나가서 먹구, 다음에는 집에서 밥 같이 먹으면 되지-"
무의식이 무섭긴 무섭다. 어느덧 다음까지 기약하고 있는 나. 박지훈은 한 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아.... 나도 모르게 또 이런 말을 해버렸다는 걸 깨닫고 혼자 민망해 했다. 결혼에 대한 배려는 과장님이 내게 해야 할 게 아니라 내가 과장님한테 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결국 나와 박지훈, 과장님 셋이서 나 살던 동네도 구경할 겸 나가서 밥을 먹기로 했다. 청이를 데리고 집 구경도 하고, 내 방을 둘러보기도 하며 놀다가 배가 고파져서 집에서 나왔다.
지훈이와 과장님은 차를 빼러 간다고 먼저 부모님과 이모에게 인사를 하고 나갔고, 반찬 챙겨준다는 엄마의 핑계 때문에 얼떨결에 나만 집에 남았다.
"○○가 너는, 어떻게 엄마한테 한 마디를 안 했어?"
과장님과 지훈이가 나가자마자 엄마와 아빠의 얼굴에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만 하다고 이해는 갔다. 남자친구의 '남'자도 꺼낸 적 없으니 내가 잘못한 건 맞았다.
걱정할까봐 그랬지.... 하고 우물쭈물 하니 엄마와 아빠는 그래도 그렇지.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한 마디 말도 안 하다가 대뜸 얼굴부터 보여주기 있냐고 그랬다.
잘못한 건 나였기 때문에 굳이 할 말은 없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좀 기가 죽은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더니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괜찮네, 그래도."
"....잠깐 봤는데 어떻게 알아?"
"원래 이 나이 되면 다 보여."
"...진짜?"
"그럼. 엄마 인생 헛살지 않았어. 아빠도 뭐라고 한 마디 해요."
침울한 표정으로 청이를 안고 있던 아빠는 뭐.... 별로.... 하면서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과장님을 보는 표정은 안 좋지 않았는데. 기분이 상한 건가 해서 아빠를 빤히 쳐다보니 고개를 젓는다.
아빠가 생각보다 너 일찍 보내게 될까봐 우울해졌나 보다. 아니 뭐, 죽을 때까지 딸 데리고 살 일 있어요? 갈 수 있을 때 가야지.
엄마가 돌직구를 던졌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엄마, 나 진짜 결혼은 아직... 이라고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엄마에 의해 말문이 막혔다.
"안 할 건 뭐야. 늦게 하느니 일찍 하는 게 나아.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고. 이놈이 좀 괜찮다 싶으면 그냥 잡아. 그게 맞아."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입을 다물었고, 이모는 이모도 찬성! 하면서 낭랑하게 웃었다. 이미 차 빼고도 남았겠다, 하는 아빠의 볼멘소리.
나 가야겠다, 엄마. 했더니 냉장고에서 진짜 반찬통을 꺼내어 내게 주는 엄마다. 그 짧은 시간에 뭐 이렇게 바리바리 쌌대... 했더니 밥 좀 챙겨먹어. 살은 왜 그렇게 빠졌어. 하는 엄마다.
오래간만에 만나도 엄마는 엄마라는 생각에 뭔가 마음이 찡해서 자주 올게, 했더니 자주는 오지 말란다. 올 시간에 과장님이랑 데이트나 더 하라면서.
나는 입을 삐죽이며 집을 나섰다. 그래도 다들 과장님을 좋게 봐주긴 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엄마, 아빠와 이모에게 점수 잘 딴 것 같다고 과장님에게 말해줘야지. 많이 긴장했을 텐데 고생했다고 안아줘야겠다.
엄마, 아빠와 이모는 우리를 배웅해주겠다며 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반찬통이 가득 담긴 양손이 든든했다.
-
"안 챙긴 거 없어? 다 챙겼어?"
"그렇다니까."
"누나 미국까지 EMS 보낼 돈 없다, 박지후이. 빼놓은 거 없이 꼼꼼히 챙겨-"
"진짜 다 챙겼다니까 그러네-"
잔소리를 안 하면 괜히 좀 우울해질 것 같아서 그랬다. 박지훈의 출국일이었다. 사촌동생이 미국에 간답시고 연차를 낼 수는 없으니, 얼굴을 보는 건 지금 아침이 마지막이었다.
어젯밤, 과장님과 나 그리고 박지훈까지 셋이서 마지막 만찬을 했다. 과장님은 박지훈에게 옷을 선물해줬다. 며칠 동안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연보라색 저지였다.
너무 좋다며 제법 더운 날씨에도 긴팔 저지를 꽉 잠궈올린 모습을 보면서 과장님은 잔뜩 웃었다. 나 또한 웃음이 났다. 귀엽긴.. 있을 땐 짐 같았는데 막상 간다고 하니 또 마음이 좀 그랬다.
있을 때 좀 더 챙겨줄 걸,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마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챙겨주지 못하게 될 거란 걸 알아서 그 마음은 접어두기로 했다.
박지훈은 누나 늦겠다. 빨리 가. 하며 내 등을 떠밀었고, 나는 잠깐 내려와서 과장님한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다.
"머리 눌렸는데..."
"아무도 너 머리 눌린 거 가지고 뭐라 안 해."
"내가 뭐라 한다, 내가."
"빨리 나오기나 해."
밍기적대는 박지훈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출근길에 나를 데리러 온 과장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라며 박지훈을 데리고 가는 거다.
박지훈을 발견한 과장님은 차 문을 열고 잠깐 내렸고, 박지훈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과장님께 인사를 했다.
"그 동안 감사했어요, 형님."
"하하. 응, 나도. 고마웠어."
"저희 누나 잘 부탁해요. 좀 틱틱대도 그거 진심 아니니까 좀 봐주시구...
먹는 거 예쁘다고 하면 많이 먹으니깐 작작 먹으라고 하구...."
꿀밤 한 대 먹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너무 아침이라 참았다. 과장님은 박지훈을 향해 시원하게 웃어 보였고, 박지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는 박지훈을 향해 누나 간다. 했고, 박지훈은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지내. 무뚝뚝한 인사임에도 제법 귀여운 게 동생은 어쩔 수 없는 동생인가 보다.
과장님은 차에 타서 시동을 거셨고, 나는 안전벨트를 맸다. 박지훈은 가만히 차가 빠져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우리를 바라봤다.
공항까지 못 나가는 게 내심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제 지훈이도 더 이상 애가 아니고. 나도 학생이 아니라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씁쓸한 마음을 하고 백미러에 비춰진 지훈이를 쳐다봤다. 뒤를 돌아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속상해?"
"...그런 건 아닌데... 공항까지 못 나가는 게 미안해서요."
"......"
과장님이 손을 뻗어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신다. 나는 조금 깊은 한숨을 쉬어냈다.
반년도 채 안 되어 다시 만나긴 하겠지만,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잘 가, 내 동생.
아주 안녕인 것도 아닌데 괜히 축 가라앉는 마음이 묘했다.
실은, 아주 안녕을 할 사람은 박지훈이 아니라 따로 있다는 걸 그때만 해도 몰랐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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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편 암호닉 (1차~마지막 암호닉 신청자에 한함. 33편 업로드 전 댓글 달아주신 분들에 한함.) [국국] [빠뺘뽀뾰쀼] [호두] [징징이] [우주] [박우진라면] [도앵도] [피치씌] [다정] [녜리] [309] [코타] [수 지] [너부리] [쌈장] [바밤바] [에비츄] [방구뿡] [박참새] [체크남방] [리베르떼] [퍼지네이빌] [갓의건] [짚고긴한커피] [미뇽미뇽@@] [몽글] [#0613] [루쇼] [이불] [휘린] [강천사] [댕댕민현] [짠따라] [리본] [춘쟝] [열혈사원] [강단] [쿠쿠] [강달리엣] [새우깡] [레몬사탕이지] [현] [웖] [강심장] [12] [0709] [갱댄이] [옹성우] [엘제이] [녜리12] [이히] [깡구] [백설탕] [녤옐♡] [키친타올] [강옹량] [마이관린] [늘봄] [뀨쓰] [어어] [녤과장] [레인보우샤벳] [수저] [퐁퐁이] [형광 개구리] [수박바라밤] [피치수플레] [옹기종기] [재환콩] [녤꽃] [녤부] [피아] [리베0511] [덧깨비] [댕댕과장] [다비밥] [불꽃] [강낭콩] [녤루] [지블] [핸] [아마수빈] [요니] [분홍색솜사탕] [황사] [입학하자] [블라썸] [비모] [연두해요] [뚜띠따띠] [일개사원] [녤롱] [♤기쁠희♤] [꼬꼬망] [뿌랑] [뚠뚠] [1232] [일이일공] [로지] [요거팅팅] [크뽀] [뉄뉄] [넌내희망] [비눗방울] [녜리2] [이번생실화냐] [일오] [다댕이] [묭묭] [구원자] [태침] [12100809] [마카롱] [계란찜] [꾹꾹스] [다녤잉] [쫑쫑] [동그리] [빛] [녤볼루션] [사모녤드] [츄얼] [꽃녤] [강단이의 꼬맹이] [윙지훈] [사용불가] [@불가사리] [칸타타] [121027] [동태] [알바생] [몽쟈] [녜르] [응] [파요] [11023] [0226] [수수나무] [아이셔] [녤림캐쳐] [슝왈이] [포카리] [녤리리아] [졔졍] [구낸내] [mj] [■계란말이■] [파리링] [금붕어] [과장님나이스샷] [030901] [우럭] [뇽뇽] [옹침] [쀼쀼] [지니] [빨간머리] [1122] [포카] [댕 댕 이 강다니엘] [카르스트] [극성갑독자] [새우] [딸기맛초코파이] [메론바] [다녤쿠] [누나] [☆별☆] [솜사탕] [자몽맛구름] [로운] [포로리] [DMR] [몽구] [짹짹이] [유우] [송송아] [댕댕] [다녤이랑워니랑] [영단즈] [망개몽이] [666666] [땁답] [숨] [솜구름] [황제] [기화] [현기증] [황금알] 오래간만입니다. Y사원입니다! 다들 잘 지내고 계셨나요-? 거의 2주? 만에 뵙는 거지요...? 많이많이 보고싶었습니다! 저도 글 쓰고 싶어서 호온났어요 아주ㅜㅜ 엉엉 2주 동안 진짜 많은 일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워너원의 노래를 드디어 브금으로 넣을 수가 있게 되었네요! 행복합니다 >.< 지난 번 제 공지 글에 세심하게 걱정해주시고, 챙겨주시고 해주신 우리 사랑스러운 독자님들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사도 잘하고, 또 정리도 잘 하고 집들이도(지금 벌써 몇 번째... 사실 오늘도....) 했고요! 이제 제법 사람 사는 집 같아졌답니다. 아직 인터넷이 안 깔려서 카페에서 글 쓰고 있는 건 안 비밀입니다... 얼른 인터넷 설치하고 싶습니다... 흑흑 오늘 드디어 지훈이의 미국 출국을 핑계로 여주의 부모님을 찾아뵀네요!! 좋은 반응... 이대로 꽃길 걸어라 너희!!! 다음편은 찌통 예고해드립니다.. 다들 마음의 준비를....☆★ 이사하고 그러느라고 연재계획이 틀어져버린 터라, 완결 나기 전까지(끝까지 몇 편인지는 안알랴줌...) 이번과 같은 공백이 생길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제가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발이 완전 묶이는 업무가 있어가지구요ㅠㅠ 참참, 그간 새로운 독자님들이 많이 생겼는데 많이 해주셨던 질문이 있어서요! 그리고 그동안 말씀 드리고 싶었던 설정에 대해서도 오늘 사담에서는 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많이 해주셨던 질문: 제게 회사원이냐고 물으셨던 분들! 저는 회사원입니다. 글 속 여주처럼 신입사원인데.... 곧 6개월차니 이제 신입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없게 시간이 지나버렸네요ㅋㅋㅋㅋ 망했다 >.< 말씀 드리고 싶었던 설정: 많이들 헷갈리시는 대리, 과장, 팀장 호칭과 과장 설정에 대해서... 일단 일반적인 회사의 경우 사원(회사마다 호칭 다름)-대리-과장-팀장-(차장)-부장 순서인데 차장은 회사마다 다르더라고요. 그리고 저희 회사가 차장이 없어서 제가 차장 개념을 잘 몰라요ㅠㅠ 아시는 독자님은 제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통상 신입3-4년 -> 대리로 진급, 대리 3-4년 -> 과장으로 진급, 과장 4-5년 -> 팀장으로 진급인데 회사마다 다르니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팀장은 최소한 직장생활 15년차 이상으로 잡아야 하는데 그러면 나이가 너무 많고.... 제 머릿속에 해원기획(광고기획사)는 다른 기업보다는 수평적인 느낌이 강해서(그렇다 해도 위계질서는 있지만), 과장 정도면 10년차까지는 아니더라도 달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과장으로 설정했어요. 대리가 제일 현실적이긴 했는데 실상 대리는 어떤 권한이나 직책이 있다고 보기 힘들어서... 여주보다 직위가 높은 쪽으로 생각하려다 보니 여러가지로 과장이 적합하더라고요. 제가 말씀드린 부분은 일반화한 거라 회사마다 다를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댓글이나 독방에서 강과장이 언급될 때, 가끔 강팀장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아마 헷갈려서 그러지 않으실까 하고 제가 그렇게 설정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해봤습니다. 이야기하다보니 사담이 길어졌네요!ㅎㅎ 사실 독자님들 너무 오래간만에 봐서 반가운 마음에... 헤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가급적 빨리 다음편 들고 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즐거운 토요일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