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고
(강다니엘 시점)
출국 전에 민현과 나, 그리고 본인 셋이서 한 번 만나면 어떻겠냐는 성우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자리가 만들어졌다.
언젠가 한 번은 만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터라, 마음을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어색할 것 같은 데에 대한 걱정이 조금 있었을 뿐이다.
곧잘 술잔을 기울이던 포장마차나 치킨집이 아닌 조금 정돈되고, 분위기 있는 곳으로 예약을 해둔 건 내 몫이었다.
민현이 술을 즐길 리는 만무했고, 성우형도 비싼 돈 주고 좋은 술 마시는 데 거한 취미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대리, 여기!"
마무리할 게 남아 조금 늦어질 것 같다며 성우형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가장 먼저 도착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나는, 곧이어 도착한 민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민현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걸친 채 내가 자리한 테이블로 걸어왔다. 결혼 준비 때문인가, 살이 올라있던 볼이 바람을 좀 뺀 것처럼 슬쩍 패였다.
살 빠진 것 같다? 내 말에 아, 말도 마세요. 하며 고개를 젓는 황민현. 좋은 것만도 안 좋은 것만도 아닌 것 같은 표정이 어쩐지 좀 애매하다.
"왜 사람들이 결혼 준비하다가 파혼하는지 알겠다니까요. 힘들어요, 힘들어."
"준비할 게 아직도 있어? 곧 식 올리잖아."
"마음의 준비가 제일 중요하죠. 하루에도 몇 번씩 정대리 기분 오락가락하는 거 힘들어 죽겠어요."
"모르고 결혼한 거 아닌데도?"
"살림 합치니까 더 심해지더라고요. 내가 잔소리 들을 구석이 그렇게 많은 사람인가 돌아보게 돼요."
"피곤하겠네.. 그래도 같이 사니까 좋지 않아?"
"좋은 것도 있긴 해요. 적응하면 좀 나아지려나 싶고..."
민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벌컥 들이켰다. 정대리 생각만 하면 속에 천불이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을 마시는데, 결혼한다며 행복해하던 얼굴과는 영 딴판이었다.
다들 그러니까 나도 그러려나... 결혼은 나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의 일일 뿐인데 어느덧 공식이 된 것마냥 자연스레 생각이 그쪽으로 연결된다.
앞서가는 건 내 성향이 아닌데. ○○를 만나고 나서는 어쩐지 늘 앞서가버리는 것 같다.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는 거다. 이런 나도 내가 어색하고.
민현은 옹과장님은 많이 늦는대요? 하고 물어왔다. 나는 마무리할 게 좀 남았다나봐. 먼저 시키고 있어도 될 것 같아. 하며 메뉴판을 내밀었다.
메뉴판을 받아 든 민현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메뉴를 읽고 있다. 술도 안 마시면서. 그런 와중에 내가 자연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걸 보니 그다지 마음이 무겁지는 않은 모양이다.
"안주가 별로 중요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여기 양주 마시는 데 아니에요?"
"응. 보통은?"
"그럼 부어라 마셔라 하지는 않을 테니까... 피자 어때요? 이거. 고르곤졸라 피자."
"어차피 성우형도 나도 안주는 별로 안 중요하니까. 황대리 저녁 고른다고 생각하고 시켜."
"이거요. 이걸로 할게요."
황대리의 저녁 메뉴는 고르곤졸라 피자. 말이야 안주지, 안주가 그렇게 중요한 고려사항은 아니기에 선택권은 다 황대리에게 주었다.
직원을 불러 고르곤졸라 피자를 주문한 민현이다. 술은요? 하고 물어오는 민현에게 이미 시켰어. 성우형 오면 줄 거야. 했더니 빠르시네... 하며 웃는다.
직원에게 메뉴판을 반납한 뒤 다시금 물을 들이키는 민현이다. 테이블 위에 컵을 올려놓고는 과장님 얼굴 좋아보이시네요. 하고 나에게 눈을 맞춘다.
"그래 보여?"
"네. 눈에 띄게 밝아지셨어요."
"...그런가."
"해원 다니는 동안 이렇게 밝은 모습은 처음이라 좀 어색하긴 한데, 그래도 좋아보여요."
"......"
○○가와 나 사이를 모를 리 없는 민현이다. 숨기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숨길 수도 없게 되었다. 실은 애초에 숨길 타이밍도 기회도 다 놓쳐버렸다.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걸 찾는 게 쉬울 터. 모르는 게 훨씬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잉, 하는 소리에 휴대폰을 보니 ○○다. 지금 퇴근한다고, 조심히 집에 들어갈 테니 걱정 말라는 이야기다. 데려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답장을 하는 나.
답장에 집중하느라 표정을 신경쓰지 못하는 동안 민현의 눈이 내 얼굴에 닿아 있었던 모양이다. 민현이 슬쩍 웃는다.
"확실히, 웃음이 많아졌다니까요."
"....그래?"
"네. 과장님이 이렇게 밝은 분이었나 싶기도 한 게. #○사원이 강과장님한테 좋은 사람인가 보네요."
그 말이 왠지 민현과 성우형에게는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 후로 어떤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대략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를 보고 있을지 아는 터라 더더욱 그랬다.
그런 생각에는 오히려 바로잡으려고 애쓰고, 고쳐주려고 애써봤자 부작용만 더 클뿐이다. 백 마디 말이 아닌 한 번의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건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다.
민현은 사이다 시켜도 돼요? 하고 물었다. 나는 응, 그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현이 직원을 불러 사이다를 주문하는 동안 잠자코 기다렸다.
직원이 사이다를 추가한 주문서를 가져옴과 거의 동시에 문을 열고 성우형이 나타났다.
"과장님, 여기요!"
민현이 성우형을 향해 손을 들어 흔들었다. 성우형은 입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로 우리가 있는 테이블로 왔다. 미안, 늦어서. 끝이 안 나는 게 있었어. 하며 멋쩍게 웃는다.
술을 가져다 줘도 되냐는 의미로 직원의 눈빛이 닿아온다. 나는 직원을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술이 가득 담겨 있을 냉장고 쪽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성우형은 셋이서 보는 건 진짜 오래간만이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나. 하며 고개를 저었다. 민현은 2년이 족히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다시 말 터서."
"......"
"사실 가운데서 저 좀, 힘들었거든요."
눈꼬리를 휘어 웃는 민현이다. 민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단호하기까지 한 성격인데도 불구하고, 해원 안에서 남녀노소에게 사랑받고 인기 있는 이유는 이런 게 아닐까.
사석에서는 그렇게 서글서글하고 싹싹할 수 없다는 것. 나야 윗사람이라 쳐도 아랫사람한테까지 잘한다 하니 적을 만들래야 만들 수가 없는 거다.
제 아무리 성격 좋은 사람이라도 회사 내에서 업무가 겹치고, 겹치는 업무 때문에 감정이 상해버리면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수순인데 민현은 그걸 곧잘 거스른다.
이 또한 민현이 가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싶다. 나로써는 부러운 마음이고.
"강과장님은 강과장님대로 사정 있고, 힘들었다는 거 아는데,
그렇다고 제가 옹과장님 상황도 알면서 억지로 화해시키고 어쩌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두 분이 화해하고 다시 말 텄으면 좋겠는데,
거기서 주먹다짐까지 해버리니 제 눈앞이 얼마나 캄캄했는지."
".....그랬어?"
"그럼요..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승진하면 같은 과장이니까 그땐 좀 어떻게 해볼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했다고요."
민현의 입에서 묵혀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얼마를 참아낸 건지 모르겠지만, 그 참아낸 기간 만큼 거센 입담이 흐르고 있었다.
나와 성우형은 조금 민망해졌다. 결국 둘 때문에 제3의 피해자가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제3의 피해자라면 ○○가도 만만치 않지만,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건 민현이니 일단 민현을 달래는 게 맞았다.
"옹과장님이야 도쿄로 가시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
"그리고 안 좋게 가시는 거 아니니까. 최소한 저는 그렇게 믿으려고요."
없는 말을 지어내서 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민현이다. 본인이 말한 '최소한'이라는 것은 오로지 자기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일 거다.
그러니까 그말인 즉, 다른 사람들은 안 좋게 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 좋다'는 이유는....
"너무 솔직한 거 아니야?"
진심을 다한 안 좋은 말투로 말하기에는 함부로 분위기를 망치기도, 겨우 좋아진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싫어서 그럴 수 없었다.
웃음을 띠며 물은 내 말에 맞장구를 친 건 오히려 성우형이었다. 그래, 인마. 너 너무 솔직해, 황민현. 했더니 아, 죄송해요. 하면서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민현.
나는 아냐,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했더니 황민현 별명이 황팩트잖아. 근데 문제는 너무 돌직구로 팩트만 말한다는 데에 있지. 하는 성우형이다.
"죄송해요. 안 그러려고 하는데도... 길지는 않지만 평생을 이렇게 살아와서.."
"그래도 용케 팀장님이랑 부장님한테 안 그래서 다행이지."
"그러면 안 되니까..."
"우리한테는 되고?"
팀장님이랑 부장님한테 안 그래서 다행이라는 말은 내가, 우리한테는 되냐는 말은 성우형이 했다.
보통 후배들 갈구는 레퍼토리다, 이게. 당황하는 민현이 웃겨서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랬더니 성우형도 같이 웃는다.
살짝 긴장한 민현만 여기에서 긴장을 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기색이다. 연차는 늘어났어도 순진한 심성은 그대로인 건가 싶다.
"봐봐, 황민현이 이렇게 순진해."
"아, 과장님...."
"갈군다고 또 그래도 쫄아서는... 진짜 웃겨."
"아니... 너무 진지하게 말씀하시니까..."
그래도 내가 있어서 그런지, 아무리 사석이라도 성우형 앞에서 예의를 차리는 민현이다. 성우형과 형동생 하는 사이라고 해도 나와도 그런 건 아니니까 예의를 차리려는 거다.
태도도 능력도 괜찮은 녀석이다. 결혼이 늦어지면 오히려 늦어지는 게 이상하게 생각되었을 만치 훌륭하니까. 나는 가만히 민현을 바라봤다.
양주는 테이블에 올려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금방 삼 분의 일이 사라졌다. 두 분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하는 민현의 물음이 있었으나 나와 성우형은 웃기만 했다.
민현은 진짜 신기해요. 술을 어떻게 이렇게 마셔요.. 하며 말끝을 흐렸고, 나와 성우형은 그 말 뒤로 다시 한 잔을 더 부딪혔다.
"아, 그래도 아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강과장님은 결혼하실 거예요?"
민현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성우형을 쳐다보게 되었다. 성우형의 표정 절반은 왜 나를 쳐다보냐는 것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래서 결혼을 할 거냐는 것이었다.
성우형의 표정을 완벽하게 읽은 나는 잔에 띄운 얼음을 동동 굴리며 말문을 열었다.
"...응. 할 생각이야."
"오, 생각보다 답이 엄청 빠르네요. 공식적인 거예요?"
공식적이냐는 말의 뜻은 ○○의 생각도 그러하냐는 것일 터. 아직 ○○의 의사는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쉽게 답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하며 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차차 이야기를 하긴 해야겠는데... 나도 요즘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놀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민현은 그렇구나... 딱히 뭐, 싫다고 할 것 같지는 않은데. 하며 사이다가 담긴 컵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흘긋 성우형의 표정을 살폈다.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입장이다. 형은 오히려 초연한듯 했다.
"서두르고 싶은 마음은 있어. 조만간 이야기해볼까 싶기도 하고."
"......"
성우형과 눈이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성우형이었다. 나는 형의 표정을 살피려는 의도였지만 형이 날 바라본 건 왜였을까. 이유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잔에 담긴 얼음을 굴리던 성우형이 입에 잔을 가져다 댔다.
한 모금, 두 모금, 목울대를 타고 술이 넘어가는 게 보였다.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은 성우형이 입가에 웃음을 띄운채 말을 건넸다.
"난 분명히 말했다. 나 부르지 말라고."
하하. 짧은 웃음이 이어졌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한 마디였다. 이 주제를 꺼낸 민현이 조금은 원망스러워지려 했으나 그렇다고 피해갈 수 있는 주제도 아니었다.
나와 민현도 형을 따라 소리내어 웃었다. 그 소리 또한 가볍지만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더 마시려 하니 잔이 비어 있었다. 얼음 몇 개를 잔에 옮겨 담고 술을 따랐다.
결혼이라.... 아직 조금 이른 감이 있긴 해도, 결혼 하나만을 위해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빨리 서두르는 게 맞았다.
정식 프로포즈는 아니더라도, 조만간 한 번 입에 올려보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확신이 든 이상, 쉽게 물러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우형이 눈에 밟히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신경만 쓰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중요한 건 나와 ○○가, 둘의 관계였다. 그게 맞았다.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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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시점)
황대리의 결혼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과장님의 출장 소식이 들렸다. 라스베가스란다. 시차가 무려 16시간.
하.... 하면서 한숨부터 나왔다. 미쳤다... 뭐 이렇게 멀어. 눈 앞이 캄캄해졌다.
과장님은 연락 자주 할게. 그래봐야 일주일이니까 금방 갈 거야. 너무 우울해하지 말고. 하면서 나를 위로해주려 했으나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우울해. 우울하다고. 우울할 수밖에 없다고...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이었지만 입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도쿄고 제주도고 다 참고 기다려주었던 과장님이기 때문이다. 새삼, 그가 나보다 어른이란 걸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가 나보다 어른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그가 꺼낸 결혼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서 고민이 많아졌다.
뭐가 맞는 건지, 뭐가 틀린 건지도 나는 잘 모르겠는데. 같이 살고 싶다는 그의 마음 하나만은 나도 절실히 공감하고 있는 게 맞아서, 답을 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더욱이 내가 자고 있을 때 그가 일을 하고 있고, 그가 일을 할 때 내가 자고 있으니, 한 마디로 우리 둘 사이에 시공간적인 공백이 너무 커져버리니 여러가지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다.
"적적해...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그가 없는 주말은 텅 비어 있었다. 사실 주말에 좀 못 만난다고 해도, 박지훈이 집에 있었으니까 크게 적적하고 외로운 걸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박지훈도 없는 데다 과장님까지 감감 무소식이니 주말이 이렇게 심심하고 재미 없을 수가 없는 거다.
그리고 주말만 그런 게 아니라 더 문제였다. 혼자 하는 출퇴근길도 얼마나 쓸쓸하고 외롭던지.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딱 그랬다.
이미 내 인생에서 너무 큰 몫을 차지해버린 그다. 없었던 일상이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나니까, 말 다했다.
멍하니 TV를 보다가, 이렇게 가만히 더 있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신호음이 두어 번 울리자마자 잽싸게 전화를 받아주시는 엄마.
여보세요, 했더니 응, 왠 일이야.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심심해서..."
"남자친구는?"
"출장 갔어..."
"남자친구가 출장 가야 엄마한테 전화해?"
"....에이, 그럴 리가... 아니야, 그런 거. 그냥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거짓말하지 마. 다 티나."
"...그런가..."
하핫, 하며 멋쩍은 웃음소리를 냈다. 엄마는 심심하겠다, 야. 그래도 주말인데 친구들이라도 좀 만나지. 했다.
그게, 엄마... 기운이 없어. 하며 정말 기운 빠진 목소리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세상에, 너가? 친구들을 만나는데 기운이 없어? 정말? 하며 못 믿겠다는 눈치다.
"그러게... 모르겠어. 나도 내가 이상한데...
그냥, 그 사람 없으니까 딱히 기운이 없어."
"상사병이야 뭐야.. 닭살이다, 얘."
"상사병인가? 아, 모르겠어..."
"그렇-게 좋아?"
그렇-게 좋냐는 엄마의 물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흘러나온 답은 예스였으나 곧바로 대답하기가 뭐해서 그저 얼버무리고 말았다.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나에게 엄마는 좋은가보네. 했다. 다른 사람 다 속여도 엄마는 못 속인다.
나는 진짜 엄마는 못 속이겠네.. 하며 말을 흐렸다. 엄마는 야, 당연하지. 엄마가 네 엄마로만 몇 년을 살았는데, 지금. 너 하나 못 읽으면 허송세월 보낸 거 아니니? 했다.
조목조목 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으면 결혼하지, 왜?"
엄마는 별 고민 없이 건넨 말이겠지만 그게 내 마음에는 비수가 되어 꽂혔다. 결혼이라.. 이렇게 또 결혼이라는 두 글자 앞에 서게 된다.
왠지 그 앞에 설 때마다 발가벗은 것 같은 기분이다. 부끄럽고, 수줍고, 민망하고, 쑥쓰럽고... 그런 기분이 얽히고 섥혀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렇다할 답을 하지 못하는 내게 엄마의 말이 다시금 와서 닿았다.
"너 그거 알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란 거. 어차피 인간은 본인이 선택하지 못한 데에 대한 후회가 남거든."
"응. 알지."
"그런데 이게 결혼이란 게,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고들 하잖아?"
"응. 그치. 어른들이 그러지."
"엄마도 주변에 결혼 안 한 친구들 있거든? 근데 살면서 크게 깨달은 게 하나 있어."
"뭔데?"
"결혼 만큼은 하는 게 덜 후회야.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나아."
".....그래?"
"물론, 누구랑 하냐는 게 중요하지. 그건 영영 물음표지만, 그리고 내가 뭐 잠깐 봐서 사람을 어떻게 아냐마는,"
"응."
"인상은 괜찮드만. 성격도 싹싹하니..."
"......"
"나는 괜찮다는 뜻이야. 그리고 나 괜찮으면 아빠도 괜찮은 거 알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으응... 알겠어. 목소리는 내야 할 것 같아서 어쨌든 소리를 내니, 엄마는 왜 다 죽어가는 목소리야? 하고 물었다.
그냥, 좀...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 최근에 결혼한 선배들도 보고 하니까... 했더니 엄마는 그래 뭐. 선택은 네 몫이지. 했다.
엄마는 반찬 떨어진 거 없냐,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추석 때 집에 올 거냐 등등 몇 가지 질문을 물어보다가 아빠와 산책 나간다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싫다 어쩐다 다투기도 잘 다투면서 그래도 곧잘 같이 다니는 걸 보니, 나이 들고 저렇게 지내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 이렇게 적적하고 외롭지도 않겠지...
"...어?"
내 생각을 읽힌 것 같아 깜짝 놀랐다. 과장님한테 전화가 온 거다. 저녁 약속이 늦게까지 있다더니, 일찍 끝나서 전화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닿아오는 네 글자에 심장이 훅 찌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무언가 울컥하고 목울대를 타고 넘어오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여보세요, 하고 말을 뱉었지만 울컥한 것 때문에 듣기 싫은 목소리가 났다. 과장님은 어디 아파? 목소리가 안 좋아. 하며 곧바로 반응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정말로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런 만큼 너무나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또 다시 울컥했다.
아, 왜 이러지... 마음이 이상하다. 아니요, 괜찮아요. 하고 말했는데 말한 나조차 하나도 괜찮은 목소리가 아니라서 놀랐다.
"몸 안 좋아? 목소리가 잠겼어... 아직 낮인데..."
"아니에요.. 말을 너무 안 하고 있다가 갑자기 해서 그런가 봐요.
늦게 끝난다더니, 좀 일찍 마무리된 거예요?"
"응. 그쪽 지배인이 오늘 딸이 생일이래. 일찍 들어가봐야 된대서 나는 좋았어."
"고생했어요. 술 많이 마셨어요?"
"아니. 딸 생일이라면서 술은 거의 주지도 받지도 않더라고."
"다행이네..."
다행이라는 내 말 뒤로,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나 걱정할까봐 숨기는 거 아니지? 하는 과장님의 말이 이어졌다.
아니에요. 진짜 괜찮은데... 하며 숨겨보려 했지만, 실상 마음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숨겨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 간의 정적 후에 조금은 뜬금 없을 수 있는 말을 꺼냈다.
"....보고싶어요."
".....응?"
"보고싶어요. 평일이고 주말이고 너무 심심해요. 쓸쓸하구."
"......"
"며칠 안 보니까 너무 힘들어... 출장 싫다, 진짜."
"......"
"영업2팀은 왜 미주까지 담당인 건데... 1팀처럼 아시아 이런 데 하지... 가까운 데로..."
궁시렁궁시렁, 나는 볼멘소리를 냈다. 과장님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귀여워, 왜. 툴툴대고... 애기야?
애기냐는 말에 이 순간 만큼은 애기를 해야겠다 싶어 네. 애기에요. 했다. 과장님은 내 말을 듣더니 더 웃었다.
"데리고 살아야겠다, 진짜."
"네?"
"애기니까. 데리고 살아야지.
난 어른이잖아."
"......."
"조금만 기다려, 우리 애기.
오빠 금방 갈게."
당황한 것도 잠시,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세상 가장 달콤한 말이 들려오니 눈 녹듯 몸이 흐물흐물 풀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고전적인 문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생각했다.
나 어쩌면,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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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편 암호닉(0~5차 암호닉 신청자들에 한함. 036편 등록 전에 댓글 달아주신 분들에 한함.) [국국] [빨간머리] [#0613] [녤부] [쌈장] [옹성우] [망개몽이] [피치수플레] [유우] [강달리엣] [코타] [구원자] [녤과장] [11023] [필통] [수박바라밤] [121027] [크뽀] [꼬꼬망] [쿠쿠] [666666] [강단] [현] [이히] [백설탕] [갓의건] [수저] [수 지] [키친타올] [엘제이] [강단2] [다녤잉] [DMR] [사용불가] [뿌랑] [요거팅팅] [0226] [분홍색솜사탕] [12100809] [새우깡] [에비츄] [지블] [연두] [녤꽃] [강천사] [퍼지네이빌] [달달한복숭아] [슝왈이] [황제] [졔졍] [어어] [피아] [리본] [재환콩] [우럭] [요니] [칸타타] [카르스트] [츄얼] [형광개구리] [옹기종기] [0709] [리베르떼] [비눗방울] [블라썸] [샤넬] [뀨쓰] [일이일공] [피치씌] [상큼쓰] [입학하자] [데헷] [라온하제] [녜리] [녜리2] [강심장] [불꽃] [남융] [체크남방] [꾹꾹스] [쫑쫑] [다니스] [녤둥] [마카롱] [극성갑독자] [윙지훈] [도앵도] [강옹량] [마다녤] [파요] [마요] [짚고긴한커피] [몽글] [우주] [녜리12] [꽃녤] [녤리리아] [뚜띠따띠] [과장님나이스샷] [수수나무] [딸기시럽] [@불가사리] [송송아] [핸] [지니] [휘린] [동태] [사모녤드] [아마수빈] [녜르] [녤루] [응] [일개사원] [포카리] [춘쟝] [리베0511] [웖] [mj] [강단이의 꼬맹이] [유나] [쀼쀼] [애벌레] [다댕이] [몽쟈] [파리링] [메론바] [몽구] [기화] [마이관린] 안녕하세요, Y사원입니다! 많은 분들이 마음 써주신 덕분에 해외 출장 잘 마쳤습니다. 3월 입사 후 두 번째로 다녀온 해외 출장이었는데요, 저는 업무 자체가 국내보다는 해외와 접점이 많은 터라 글에도 그런 부분이 좀 반영되는 것 같습니당..ㅎㅎ 지금은 휴가여서, 남들보다 좀 더 일찍 추석 연휴를 시작했습니다. 여행 와있어요~ 글 쓰고, 걷고, 책 읽고... 빠듯했던 일상을 뒤로하고 여유 부리고 있습니다. 연휴 동안 좀 자주 찾아뵙고, 연재 열심히 해보도록 할게요! 여러분들도 자주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편에는 드디어 답댓을 좀 달아드릴 수 있었는데, 미처 못 달아드린 분들 죄송해요ㅠㅠ 아참, 그리고 제가 예전에 단편을 써드리겠다고 약속했던 분이 계셨는데요. 암호닉 중에 '옹'이 들어가는 건 확실했는데... 어떤 분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요. 주인공 성우로 해서, 남녀가 썸타는데 약간 성우가 밀당하고 여주가 애타는 내용? 으로 써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조만간 그 단편 쓸 예정인데 어떤 분이 말씀하셨는지를 모르겠네요..ㅠㅠ 혹시 나야나! 싶은 분은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요번 편은 미처 흘려보내지 못한 옹, 녤, 민현의 감정적인 잔여물(?)과 다니엘, 여주에게 생기기 시작한 확신... 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고, (비록 아주 가까운 지인들이지만)공개의 수순을 밟아가는 과정에 대해서요. 이번에도 많은 독자분들이 공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재밌게 읽어주시고, 많은 사랑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정하는 독자님들! 일교차가 커요.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잘 챙기세요. 저는 다음편에 먼저 가있을게요~ 굳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