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난 완벽하지 않아요.
나한텐 당신의 결점이 보이지 않는 걸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여자가 뛰어나가자 뒤따라오던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곧 보게 되겠죠. 당신도 언젠가 내 결점을 볼테고 나는 당신을 지겨워 할 거예요. 한창 절정을 치고 들어가는 영화의 화면 속에서 여자는 현실을 알았다. 기억을 지우고 싶을 정도로 서로 간에 아파했으면서 다시 또 끌리는 만남은 다른 의미로 보면 사치이자 감정의 소모였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을 꺼내오는 남자의 얼굴에 여자는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괜찮아요.
짧게 꺼내는 그의 말은 단순했다. 여자가 그의 말에 웃고 있음에도 곧 울 것만 같은 얼굴을 해왔다. 많은 수식어나 부가적 설명이 들어가지 않았어도 괜찮다는 말 한마디에 끝날 일이었다. 기억을 잊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권태와 헤어짐은 반대로 기억을 지우기 싫을 만큼의 예쁜 추억이 있기 때문일 테니까.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와 그녀가 마주닿는 시선의 끝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바다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났다. 크레딧이 천천히 올라가면서 반복되는 노래들 속에서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옹성우가 보였다.
"그렇게 슬픈 이야기 같지는 않은데."
괜찮아요? 건네준 휴지는 쓰지도 않은 채 옷 소매로 눈물을 닦고 있는 선배는 뭐가 그리도 슬픈지 길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을 울음을 내뱉었다. 예전에 봤던 영화라고 했으면서 또다시 봐도 이렇게 울 수도 있구나. 과제를 끝내고 본 영화치고는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손을 뻗어 선배의 눈가를 어루만지자 멍하니 날 보고 있는 눈이 환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오롯이 빛이 났다. 미처 풀지 못한 손부터 뚫어져라 마주하는 시선은 차마 어떻게 해야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온 신경이 오른손으로 옮겨가는 느낌은 생겼했다. 이대로 손을 풀어야 하나,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되는 건가. 뻘쭘히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옹성우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좋아서 운 거야."
"네?"
"영화도 좋고, 너도 좋아서."
가끔씩 나이에 맞지 않게 아이처럼 구는 구석이 있는 그였다.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도 안되는 떼를 부릴 때부터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서스럼없이 뱉는 것까지 도무지 사람이 가늠이 안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따금씩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앞서 가는 선배를 보면 한없이 남자로만 느껴져서 나는 마치 영화 속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당황스러울 때가 있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다. 저런 사랑이 있을 수도 없었고 되풀이 되듯 마주하는 인연이 과연 있을지도 의문이였다. 설사 내가 다니엘이 아닌 성우 선배를 만나서 사귀는 사이가 된다면 정말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이 나는 그 순간까지 좋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단어가 정말 있다면, 정말이지 권태로 끝난 인연이 다시 이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좋을텐데.
"가자, 뭐 먹을래?"
나는 영화관을 벗어날 때까지, 옹성우의 손을 놓지 못했다.
Okay,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다시금 웃었을 때, 그 때 왜 선배가 울었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만 같았으니까.
[강다니엘/옹성우]
LOVE CRCLE
W. LIGHTER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들어간 음식점은 시끌벅적했다.
비가 그쳤음에도 한동안 나는 우산을 접지 못했다. 괜히 우는 걸 티내고 싶지는 않아서 숨을 참듯이 눈에 온 힘을 주며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볼 선배가 뻔히 앞에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내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ㅇㅇ야, 고개 들어봐. 응? 누군가 해주는 위로는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내 세상에서 강다니엘을 제외하고 날 위로해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던 게 맞는 표현이겠지만. 그럼에도 부러 다정하게 물어오는 옹성우는 익숙치 않은 나를 갖고 노는 것마냥 자꾸만 일정한 톤으로 내 이름을 되뇌어왔다.
'뭐가 그렇게 슬퍼서 그래.'
내 발끝에 다가오는 옹성우의 신발이 보였다. 물기가 마르지 않은 운동화가 내 앞으로 다가오기가 무섭게 손에 들려있던 우산은 이미 고이 접혀 있었고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들어올리는 선배의 손이 느껴졌다. 되게 손이 따뜻하구나. 말로는 사귄다고 했지만 이렇게나 직접적으로 선배의 체온을 느껴본 적은 오랜만인지라 순간 난 꽤나 이상할 정도로 울다가 또 웃었다. 눈동자 가득히 비추는 엉망인 내 얼굴에도 간신히 웃는 내가 좋은지 옹성우는 금세 버릇처럼 눈을 찡그렸다. 울다 웃으면 큰일나는데. 영양가 없는 말들 뿐임에도 그저 얼굴 하나 마주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괜한 웃음이 나왔다. 눈끝이 휘어지면서 맺혀있던 눈물을 한 손으로 매만지는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때가 되었든 정말 신기하리만치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았고 오히려 울고 있는 당사자보다 더 어쩔 줄 모르는, 부러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온전하게 느껴지는 사람.
"우리 다음에 밥 먹을 때는 다른 곳으로 가자."
"왜요?"
"그냥, 너 여기서 계속 울기만 했잖아."
어느새 당연하게도 선배의 외투는 내 몫이 되어있었다. 옹성우가 곱게 접어준 남방의 소매가 새삼 크게 다가와서 괜시리 끄트머리만 매만지고 있자 적당히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음식도 그렇게 맛있진 않거든. 아직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맛이 없을거라, 단정하는 선배가 퍽이나 웃겨 때아닌 웃음이 입가를 맴돌았다. 사실 나를 보면 어떻게든 밥을 먹이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여전히 마르지 못한 울음이 자꾸만 새어나왔을 때 옹성우가 데리고 온 곳은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일본식 음식점이었다. 규모가 크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곳은 냄새만으로 괜히 식욕을 당기게 만들었는데 이런 곳이 별로라는 그의 의미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음식을 시키는 그 순간에도 나는 뜻하지 않게 머릿속을 맴도는 다니엘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옹성우가 놔준 수저 위로 청승맞게도 눈물을 떨어져 내렸고 그걸 알아채질 못할 정도로 선배는 둔하지 않았으니.
"난 여기 좋은데, 음식도 맛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선배가 여기 좋아하는 곳이라면서요. 언제까지고 그에게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어제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야 했고 과거보다는 지금 제가 있는 시간 속에서 있는 게 맞았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별안간 옹성우의 귓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 대단한 말도 아닌, 선배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다는 말이 뭐길래 그는 내 말 하나에도 이다지도 알기 쉬운 얼굴을 해올까.
"선배,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정말 하나만 묻게?"
난 몇 백 개씩 물어봐도 상관없는데. 내 말을 끝으로 순간적으로 훅, 하고 다가오는 옹성우의 얼굴은 무척이나 가까웠다. 조금만 더 가까웠다가는 이대로 콧잔등이 마주볼 수도 있을 듯한 거리에서 장난기 가득한 그의 말투가 간지러웠다.
"언제부터였어요?"
"응?"
"아니, 날 얼마나 좋아해요?"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냐고 날 놀려도 상관 없었다. 근거도 없이 나온 내 물음은 그렇게나 큰 의미를 두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으니까. 단지, 눈치가 좋은 편도 아닌 내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만큼 날 보는 그 눈길이 못내 낯간지리워서, 아무리 스스로가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해도 좋은 점보단 나쁜 점이 더 많은 것 같은 날 좋아한다는 게 한편으로 신기해서 물어봤을 뿐이다. 잠깐의 정적 속에서 괜스레 목이 타는 듯한 기분에 맥주 잔에 든 거품만 마시고 있자 옹성우 특유의 느긋한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아메리카노 싫어해."
"네?"
"근데, 너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니까 아메리카노도 꽤 좋더라."
그만큼 너 좋아해. 나에 대한 그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던 목적은 결단코 없었다. 하지만 비단 편식하던 아이가 나, 이것도 먹을 줄 안다고 자랑하듯 진지한 표정을 지어오는 모양새가 사랑스러웠다. 거진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내게 '남자친구'라 칭할만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 외에는 나와 선배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길거리를 걷고, 내 집까지 바래다주다 하루의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는 것. 사귀기 전이나 이후를 비교하고 볼 때 남들은 우리 사이가 궁극적으로 달라질만한 것들이 없다고들 했다.
"나 되게 부족한 거 많아요. 소심하고 좀 많이 모자르거든요."
"괜찮은데."
나도 딱히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서. 네가 소심한만큼 나도 의외로 못난 구석도 많으니까 괜찮아. 무슨 제 못난 점을 갖다가 대결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문득 못난 구석도 많다는 옹성우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하자 이제는 하다 못해 내 어깨 위로 제 얼굴을 묻던 선배는 한층 더 빨개진 귀를 하고는 그랬다.
"티 안낼려고 했는데 나 아까부터 되게 질투나거든."
"아니, 저 선배."
"나말고 다른 사람 때문에 울고 그러는 거 싫어."
쇄골 부근 위로 울리듯 웅얼대며 말하는 그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영 익숙치 못한 모양이었다.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것까지 바로 코 앞에 숨결이 닿은 것마냥 조금씩 내게 제 몸을 기대오던 선배로 인해 이젠 내가 그를 안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안겨 있는 건지 구별도 가질 않았다. 한 번도 이렇다 할 제 속내를 보이지 않던 사람이 투박하게도 꺼내는 말 한마디도 좋았다. 우리 사이가 궁극적으로 달라질만한 것들이 없다는 그들의 말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게, 점차 한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내 몸을 제 품에 그득히 안는 옹성우가 예뻐 보이면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 고민을 하는 내가 있었으니까.
"나 있다가 선배네 집 가도 돼요?"
"…어?"
"기다려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봤던 영화가 또다시 재상영은 안 할 것 같아서요."
내가 말하기가 무섭게 놀란 얼굴로 되물어오는 선배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아주 찰나에 뭐라도 씌인 것처럼 의식도 하기 전, 행동이 먼저 나간 나도 내가 낯설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앉은 자리가 구석진 곳이기에 망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걸 보면 내 딴엔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선배가 같이 보자고 했던 거니까 약속 무르면 안돼요.
"영화까지 같이 보면 진짜 보내주기 싫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
낮게 웃던 선배는 갑작스레 다가왔다. 자연스레 가까워진 거리에서 나는 괜스레 주먹만 쥐고 있었다. 단번에 닿을 줄 알았던 입술이 종이 한 장 사이가 들어갈 정도의 틈만 남겨두었을 때즘에 그는 시덥잖은 말을 꺼내왔다. 음식이 늦게 나와서 다행이다, 그치?
그리고 다시금 맞물린 숨결은 오랜 시간 떼어질 줄 몰랐더랬다.
Episode 13, FIN
라이터입니다! |
* 안녕하세요, 라이터입니당 다들 또 한주를 잘 보내고 있지요~? 저번화에 암호닉 남겨주신 분들과 댓글 남겨주신 분들 너무 감사합니닿 예전 성우와 여주가 같이 봤던 영화는 작가인 제가 가장 아끼는 영화 중 하나인 이터널 선샤인였어요!! 볼 때마다 감흥이 새로워서 우리 독자님들도 한 번쯤 보아도 괜찮을 것 같은 영화였는데 5화에 있던 내용이 13화인 지금 이렇게 나오니까 새삼 설레네요*^^ 그리구 이제 완결을 앞 둔 만큼 번외편을 생각하고 있는데 우선 성우 외전이랑 다니엘 외전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정확하게 정해진 건 두 개이고 에피소드 하나를 더 추가를 할 지 말 지 고민 중인데 틈틈히 적다보면 예상으론 세 개의 에피소드가 추가로 들어갈 것 같아서 하나 정도는 이 곳에 남기고 나머지는 소장으로만 넣어두려고 합니다! 이미 팬콘도 못 가는 마당에 여유 나는대로 글이나 쓰면 되니까요...ㅎ 일요일부터 또 시험에 공모전으로 골머리를 앓아하는지라 우선적으로 글 먼저 던져두고 간답니다(총총) +)시험이 끝나는대로 견주에 대한 공지가 올라갈 예정인데 러브서클이 완결을 코 앞에 둔지라 러브서클 먼저 마무리를 짓고 견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우리 다음화에서 만납시다. 빠이, 아럽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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