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택운 죽일 놈. 나쁜 새끼. 멍청이 해삼 말미잘 같은 놈! 거친 욕설들을 속에서 쉴 새 없이 읊조리다, 입술을 꾹 다물고서 어깨를 들썩이더니 결국에는 울음을 와앙-. 터뜨려 버린다. 사람 한 명 없는 한적한 시내 버스 안에서, 학연은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뽑아내었다. 그런 학연을 바라보는 운전 기사의 눈빛은 진한 동정심으로 물들어져 있다. 쯧쯧, 요즘 젊은이들은 문제라니까. 고개를 살짝 절레절레 저어보이는 그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연은 오히려 더욱 큰 소리를 내며 엉엉 울어댈 뿐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지금도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하도 울어대서 깔깔해진 목청을 가다듬고, 짱돌을 열심히 굴려보았다. 그래.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오랜만의 데이트를 위하여 새로 산 향수를 뿌려대고, 자신의 연인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서 길을 나섰었다. 응, 그랬었지. 회사 일 때문에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모습에, 반가워, 택운아! 오래 기다렸어? 해사함을 머금고 밝게 질문을 던지면, 되돌아오는 것은 다정한 택운의 눈빛이 아닌 차가운 이별통보. 이거 봐. 전개가 뭐 이래. 이렇게 갑작스러운 법이 어디있어! 행복했던 꿈은 와장창, 야구 방망이로 한 대 쳐버린 것처럼 힘없이 깨어져버린다. 정택운, 정말 나쁜 놈이야, 너는. 부르르, 경련을 하며 일그러지던 학연의 입술이 열린다. 그리고는, 흐어엉-! 다시금 죽죽 눈물을 뽑아낸다.
사내 연애라는 거창한 단어로서 시작된 학연과 택운의 관계. A팀의 팀장으로 있는 택운과, B팀의 대리 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학연. 회사를 빨빨 돌아다니다 택운을 발견하여 첫 눈에 반한 이후로, 학연은 참 끈덕지게도 택운에게 대시를 걸어댔다. 그런 학연을 신경 쓰는 듯 마는 듯, 무심한 듯 아닌 듯 샌님처럼 굴던 택운은 마침내 끈질긴 학연의 구애를 받아 주었다. 그 이후로 잘만 사귀고 있었고. 그런데 왜 어째서..? 특유의 부드러운 미성은 학연을 향한 사랑의 표현 대신, 가슴에 비수를 꽂는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되어 날아왔다.
정차한 버스에서 터덜터덜 기어나온 학연은, 반쯤 넋이 나간 채 허공을 응시했다. 아따, 오늘따라 별 한 번 오질라게 예쁘구만.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고서 버스 정류장의 벤치에 털썩, 앉았다. 아무도 없는 밤거리에 괜스레 더 쓸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오른손을 들고서 빨갛게 부어오른 콧잔등을 훔쳐낸다. 춥다. 추워.
“엔조이였다는 거야, 뭐야.”
울음에 젖은 목소리가 볼썽 사나웠다. 그래도, 나는 엄청 좋아했단 말이야. 이 바닥에서 제법 인기도 많은 편인데, 정택운 네가 뭔데 나를 이렇게 축구공마냥 뻥뻥 차대냔 말이다. 자그마한 주먹을 꽉 틀어쥐고서 죄 없는 벤치를 퍽퍽 쳤다.
“으-. 아파!”
이게 뭐냐고, 진짜. 회사에서 그 얼굴 또 어떻게 봐. 나는 절대 못볼 것 같단 말이야. 푸르죽죽하게 식은 학연의 입술이 앙 다물린다. 자존심이 상했다. 저에게 좀 더 배려를 해줄 수도 있었을텐데. 근 이 주만에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모질게 굴 필요는 없었다. 준비할 시간은 주지 그랬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역시나, 이별 방식 조차도 지독히 택운다웠다.
“나, 너 말고도 만날 남자 많다.”
들리지 않을 중얼거림을 입 밖으로 꺼내어 본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감정이 속에서 썩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나쁜 놈. 평생 결혼 못할 새끼.
―카라멜 프라푸치노, 마실래요?
……어?
“히익-!”
놀라움으로 물든 학연의 동공이 빠르게 크기를 키워갔다. 뒤로 넘어가려는 상체를 애써 바로잡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검회색 코트를 말끔히 차려입고서, 앞머리를 멋들어지게 넘긴 남자가 정류장 표지판에 비스듬히 기대어 학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저를 올려다보는 학연의 모습에 싱긋,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짤짤. 제 오른손에 들린 커피를 흔들어댄다. 뭐야, 이 남자? 입술을 어버버거리는 학연을 보며 픽, 소리를 내어 웃는다. 더욱 황당했던 것은, 그 모습이 끝내주게 잘 생겼다는 것. 제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을 정도로 엄청나게 멋있었다는 거다.
“쓴 커피 좋아해요?”
“아, 아뇨….”
“그럼, 프라푸치노 좋아하겠네. 나도 쓴 건 딱 질색이거든요.”
단 걸 마시면, 좋지 않았던 기분이 단숨에 업된다고나 할까. 말을 끝맺고서, 손에 들고 있던 ‘카라멜 프라푸치노’를 건네온다. 그것을 얼떨결에 받아든 학연의 표정이 이상야릇했다. 이거 설마, 장기매매 그런 거 아니야? 나 이거 마시면 보쌈 당하는 거야? 의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학연의 모습에, 의문의 남자가 능글거리는 미소를 흘리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아니에요.
“찬 커피지만, 내 손에 오랫동안 안겨 있었으니 그리 차갑지는 않을 거에요.”
싱긋, 웃더니 턱끝으로 프라푸치노를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프라푸치노 하단의 얼음이 온기에 모조리 녹아 있었다. 싱거워 보이는데…….
“애인이랑, 헤어졌어요?”
“…… 그 쪽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이렇게 귀여운 사람을 누가 차나.”
학연의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초면인 사람, 그것도 남성에게 스스럼없이 귀엽다는 발언을 내뱉은 남자는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고서 느긋하게 학연을 바라보다, 표지판에 기대어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커다랗고 까만 눈이, 꼭 강아지같네. 커다란 손바닥을 학연의 머리위에 얹는다. 빠른 속도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 학연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럼, 또 봐요.”
“…….”
“꼭.”
그렇게, 등을 돌려 저 멀리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코트 자락, 그 위로 듬직하고 넓은 등이 보였다. 택운 못지 않게 포근해 보였다. 나, 넓은 등 되게 좋아하는데. 학연의 속이 끓었다. 불을 지른 것 마냥 요란스럽게도 타올랐다. 또 봐요, 꼭. 또 봐요, 꼭……. 학연의 귓가에 웅웅대며 메아리치는 나지막한 음성은, 지독히도 매력적이었다.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따스한 온기가 오롯이 담겨있는, 달콤한 카라멜 프라푸치노가 학연의 손바닥에 감겨있었다. 아주, 달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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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도 몸이 무거운 출근길은 처음이었다. 버스 안에서 휘청이는 몸을 가까스로 세우고, 멍하니 풀린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밤샘 회식 다음날도 이렇게 축 처지지는 않았었는데, 이게 다 정택운 때문이야. 이른 새벽, 화장실에서 제 얼굴을 확인했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퉁퉁부은 얼굴에, 눈가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까지. 거지가 따로 없는 희한한 외양에 절로 헛웃음이 나오더란다. 한참을 울어제끼다, 동이 틀 때쯤에야 그치고 어기적 옷을 갈아입는 제 모습이 너무도 가련했다. 나 왜 살아.
또 한 번 덜컹! 버스가 움직이는 사이에도, 학연의 혼은 돌아올 기색이 없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착한 오전의 회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주했다. 부지런히 서류를 옮기고, 상사의 부름을 받아 이리저리 발로 뛰는 사람들. 그 중심에서 멍하니, 퉁퉁 부어버린 눈으로 닫힌 A팀 사무실의 문을 바라보고 있던 학연은 더욱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항상 저보다 일찍 출근했던 택운은, 학연이 회사에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사무실 문 앞에 기대어 서 있곤 했다. 그리고 학연을 발견하는 즉시 천천히 걸어와, 손에 들린 모닝커피를 말없이 건네었고. 그런데, 이제 깨졌으니까 당연히 그럴 일 없다 이거지? 어? 또다시 눈물이 치밀어 오를 것 같아 거칠게 눈가를 비볐다. 아무렇지 않은 척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는데, 고개 숙인 학연의 머리가 무언가에 둔탁하게 부딪힌다. 낮은 신음을 지르고서 다시금 눈을 뜬 학연의 시야에, 고급스러운 진갈색의 윙팁이 잡혔다.
“아, 죄송합니…….”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또 볼 거라고 했죠?”
“…….”
“오늘도, 카라멜 프라푸치노.”
손에 익숙한 커피컵을 들고서 저를 향해 밝게 웃어보이는 남자. 그리고, 그의 가슴팍에서 덜렁대고 있는 번쩍거리는 새 네임택. 팀장 이재환. 익숙한 저 커피컵 만큼이나 익숙한 이름. 설마, 새로 우리 팀에 발령 받았다는, 그……? 멍하니 뜨여있던 학연의 눈꺼풀에 힘이 들어갔다. 티, 팀장…. 학연이 말을 채 끝맺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환했던 시야가 까맣게 차단되어버린다. 순식간에 재환의 품에 가두어져 버린 학연이 놀라 몸을 움직이려 하자, 더욱 단단히 몸을 밀착시켜 온다. 귓가에 자근히 밟히는, 그 목소리. 가만히 있어요. 밀착되어진 몸을 타고 전해져오는 은은한 카라멜향. 그러면 거짓말처럼 버둥거리던 팔이 잠잠해진다. 목소리에 마법이라도 걸었나. 정신이 혼미해지는 사이, 오른쪽 뺨에 따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볼이 차가워요.”
“아…….”
재환이 소리내어 웃으며, 손의 열기로 데워진 프라푸치노를 학연의 뺨에 문질러댔다. 저번에 한 번 회사를 찾아왔을 때, 학연씨를 봤거든요. 그래서 얼굴을 알았던 거구요. 참, 이렇게 귀여운데 말이야. 나른한 목소리로 학연의 귓가에 읊조리던 재환의 깊은 눈이 정면 어딘가를 빤히 응시했다.
“누가, 이런 사람을 차나 몰라.”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재환의 시선과, 저 멀리서 문을 열다 말고 이들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복잡히 얽혔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초면의 남자, 그 품에 안겨 있는 학연을 발견하는 순간, 살짝 벌어져 있던 택운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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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잡 글 맞추기 글입니다. @.@
원래 모카 프라푸치노였는데요, 설정이 바뀌어서 카라멜 프라푸치노로 바뀌게 되었어요!
줄여서 스카프, 예쁘죠? ㅇㄴㅇ)/
또 켄엔택을 쓰게 되었네요.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