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의 비애
written by. 브몽
"태형아. 오늘 집에 손님 온다"
"....손님? 누군데"
"형 여자친구."
"...형, 여자친구 생겼어? 왜 말 안 했냐"
"그래서 지금 이야기하잖아."
"연상 아니면 연하?"
"연하. 세 살 차이니까 너랑 동갑이네"
오랜만에 보는 그 애는 또 얼마나 예쁠까.
혼자 누워 헤벌레 미소를 짓고 있는 태형의 모습에 석진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형 여자친구가 온다는데 그러고 있을거야? 석진의 잔소리에 못 이기는 척 일어난 태형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하는 거 봐라"
"뭐. 이번에는 진심인가봐? 나한테도 소개 시켜주려는 걸 보니"
"그럴 수도 있고."
"얼마나 사겼는데?"
"....거의 1년?"
아무리 석진이 제 형이라도 못된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스물여섯이란 나이에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석진, 즉 제 형은 누가 보아도 멋있고 잘났다. 문제는 여자 관계가 그리 평범하지는 않다는 것. 한 사람에게 정착을 하지 못 한다. 그래서 매번 얼마 안 가 그의 여자친구들은 상처를 입고 매몰차게 헤어지곤 했다. 여자친구에게 잘 하라는 태형의 타박에도 석진의 버릇이란 건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나쁜 놈. 아마 저에게 여동생이 있었고 내 여동생의 남자친구가 저런 놈이었다면 가차없이 안 돼를 외쳤을거다. 문득, 형의 여자친구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1년이면 석진의 기준으로써는 꽤 오래 간 경우였다. 오오, 석진을 향해 윙크를 찡긋 거린 태형에 석진이 피실 웃음을 흘렸다.
간지나게 수트 입고 있을까? 태형의 말에 석진이 미친거냐며 손사레를 쳤다. 무난하게 후드나 입고 있어. 석진의 말에 태형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트는.... 여주 만날 때나 입지 뭐. 대충 회색 후드로 갈아 입고 머리를 정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형의 모든 관심은 핸드폰이었다. 여주한테 뭐라고 보내지? 아니 그냥 전화나 할까? 아니면.... 곧 복학할건데 같은 학교니까 그 때 짜잔, 하고 나타날까? 온갖 고민에 사로잡혔다. 석진이 포크를 들어 자신이 만든 샐러드를 태형의 입에 갖다대었다.
"맛있는지 먹어 봐"
".... ...."
"어떠냐?"
"괜찮네."
이 형은 무슨 요리도 잘 해. 괜히 콧방퀴를 뀐 태형이 결국 핸드폰을 엎어두고 발을 동동 구르다 테이블 위에 왼뺨을 붙였다. 으어, 언제 오는데에. 그러자 태형의 말이 끝나는 찰나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태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친, 여친 왔다 김석진! 태형의 목소리에 석진이 웃음을 터트린다.
"왜 김태형 네가 더 난리냐?"
"몰라. 존나 궁금해 진짜"
"여기 있어. 애 데리고 올게"
"오냐."
"먹지 말고 기다려라, 엉?"
"....귀신 같기는"
아, 배고픈데. 들고 있던 포크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여자친구를 마중 나간 석진이 자리를 배우고 볼멘소리를 내며 포크로 샐러드를 쿡쿡 찌르는 태형. 안 되겠다싶어 올리브를 하나 푹 찍어 입에 쏙 넣은 태형이 우물우물 올리브를 씹었다. 오, 존나 맛있는데? 아무도 안 보는데 홀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는 태형과 동시에 현관이 소란스러워졌다. 석진과 여자의 목소리에 태형이 입술을 살짝 닦아내고는 의자에서 일어나고 이내 석진이 들어온다. 여자친구는? 이라는 눈빛을 쏴대는 태형에 석진이 살며시 미소를 그리고는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 ...."
그리고 태형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린다. 저와 눈을 마주치지 못 하며 수줍어하는 여자는, 다름이 아닌 여주였기에. 여주가 낯가림이 좀 심해. 매번 저가 하던 말을 이번엔 석진이 내뱉는다. 전보다 한뼘은 더 길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고개를 든 여주와 태형의 두 눈이 마주쳤다. 태형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잠시 굳었던 여주가 이내 입을 벌리며 태형아! 하고 저의 이름을 불렀다. 여주의 반응에 파스타를 접시에 담아내던 석진이 뒤를 돌아 그 둘을 바라본다. 뭐야, 아는 사이야? 석진의 말에 여주가 해맑게 웃으며 석진을 향해 말했다.
"우리, 친구인데! 고등학교랑 대학교도 같아요!"
"...어, 정말? 근데 왜 태형이가 한 번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지?"
"아, 정말요?"
"응."
"김태형, 실망이야 너! 제대는 언제 한 거야!"
"....야."
"응?"
"....너가 왜 여기에 있어"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말하던 태형에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태형에게 쪼르르 달려와 그의 팔을 잡고는 온갖 반가운티를 내던 여주도 당황스러운 두 눈을 깜빡였다. 석진의 시선도 태형에게 따라붙는다. 믿어지지 않는 이 상황에 태형은 한참이 말이 없다 입술을 혀로 내둘렀다. 형에게 티를 내지 말자. 그리고 바로 여주를 향해 억지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 누가보아도 이상할 정도로. 그걸 모르는 여주가 문제였지만.
"....우리 형 여자친구가 너였어?"
"나도 몰랐어. 내가 남자친구 생겼다고 말해주려 해도 네가 면회도 어디로 가야하는지 안 알려줬잖아!"
"태형이가 그랬어?"
"네! 무슨 아무 소식도 없고. 제대 했으면 연락이라도 해야하는거 아니에요? 너무해 진짜"
"...아, 미안"
"여기 와서 앉아. 여주, 저녁 안 먹어서 배고프지."
"네!"
우렁차게도 대답하는 여주가 쪼르르 식탁 앞에 앉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는 태형은 당혹감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그런 태형을 한참 쳐다보던 석진이 곧장 여주에게로 시선을 옮기고는 웃었다. 많이 배고팠어? 다정한 말을 내뱉는 석진에 여주가 따라 웃는다. 누가봐도 행복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여주의 옆에 앉아 파스타를 휘적이는 태형은 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주가 팔을 툭툭 건들며 무엇을 물어도 대충 얼버무릴 정도였으니까. 저녁식사가 끝이 나고 부엌에서 석진의 옆에 콕 붙어있는 여주를 빤히 바라보던 태형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와, 이게 무슨일이야.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터진 태형이 고개를 내젓는다. 이건 좀 아니다, 정말. 몇 년간의 제 짝사랑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다름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김석진이지? 석진을 향해 입술을 내미는 여주의 모습에 태형이 얼굴이 보기싫게 일그러진다. 원래 애교는 많았지만,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원래 연애랑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여주는. 여주가 저렇게 남자에게 편한 모습을 보이는 건 석진에게 큰 마음을 주고 있다는것이었다.
여주가 고등학생 때, 남자친구에게 크게 데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는 태형은 무조건적으로 그녀의 앞에서 남자에 대해는 조심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여주는 태형이 아니면 남자를 멀리했다. 그것에 내가 자만했던 것일까. 그리고 석진은.... 제가 생각해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분명 여주에게 어떤 상처를 줄 지 모르는 사람인걸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와, 미쳤네"
태형의 실소가 터졌다. 자꾸만 신경쓰이는 다른 모습의 태형에 여주가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석진은 요지부동 아무런 대꾸가 없다. 김태형, 욕하는데요? 그녀의 말에도 석진은 그저 웃을뿐이었다.
"김태형, 뭐 화 났나본데...."
"그러게"
"제가 좀 달래볼까요?"
"아니야, 됐어. 저러다 말 거야."
"....그래도, 오늘 표정도 안 좋은게,"
"됐다니까."
장난스레 ##여주의 코를 손가락으로 쥔 석진이 슬쩍 태형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심각한 얼굴과 속내는 모르는 척 하고 싶어도 다 티가 났다. 석진이 저의 손에 겹쳐진 여주의 손을 꽉 쥐었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주를 생각하면 형이 생각이 났고 형을 생각하면 여주가 생각이 났다. 여주를 생각하면 형이 원망스러웠지만 형의 잘못은 없었다. 고개를 틀어 침대 위 잠든 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왜 하필 김여주인거야. 초조함에 뜯어진 입술에서 피맛이 난다. 그러다 나는 또 김여주를 걱정했다. 상처도 잘 받는 애인데, 혹시나 형이 또 너를 버리면 어떡하지. 잡다한 생각들이 머리속을 가득 지배했다. 형은 눈 깜빡 안하고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이었으면 몰라도 김여주는 안되었다. 내가 백날 천날 이렇게 생각하면 뭐하냐. 달라지는 게 하나없는데. 한숨이 터지면 천장은 아득한 어둠 뿐이었다.
그냥.... 그냥 고백할걸. 조금만 더 내 마음을 빨리 표현할걸. 다 가져버린 형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그 아이에게 상처를 줄까 내가 더 두려웠다.
"김태형"
".... ...."
"태형아."
내 인기척에 잠에서 깬 형이 나를 불렀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왜"
"너 여주 좋아해?"
".... ..아니"
"나 네 형이야."
"..... 어. 알면서 왜 물어봐?"
그래. 모를리가 없다. 내가 그리 티를 팍팍 냈으니. 안 낼려고 했어도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김여주도 내 눈치를 한참 살피다 집으로 돌아갔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연락 달라는 김여주를 보낼 때, 내가 아닌 형이 그 애를 데려다주려 같이 집을 나설 때 그 비참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물음을 던지는 형의 의도가 궁금했다. 정말, 알면서 왜 물어보냐고. 침묵이 길어졌다.
"여주한테 상처 있다는 거 알아."
"..... ...."
"다 들었어."
"그래."
"내가 그 애한테 상처 주는 일 없을거야"
"....형"
"그리고 네 마음, 빨리 정리했으면 좋겠다"
".... ...."
"아무리 너라도, 사랑하는 사람 뺏기기는 싫더라."
아무런 대꾸도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말들은 나에겐 헛된 자극이 되어버렸거든.
나도, 나도 형한테 여주를 뺏기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