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무슨 날이게.”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라 느지막하게 일어나 고양이 세수로 얼굴에 물만 묻히고 올라온 옥상에는 늘 그렇듯이 항상 옥상을 평정하고 있는 박지민이 있었고, 지민 다음으로 옥상을 애용하는 민윤기가 있었다. 담배 피러 왔냐? 끊으라니까. 나랑 똑같은 담배를 물고 하는 윤기의 말은 퍽도 어이가 없어서 무시로 넘어갔더니, 그 다음으로 보이는 건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는 빵실한 지민의 얼굴이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무슨 날인데?”
“우리 처음 만난 지 18년 된 날!”
“……왜 18년이야? 나 너랑 만난 지 1년도 안 됐는데.”
지민의 기분을 맞춰 주려고 노력해도, 인간의 존재로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 오늘이 왜 만난 지 18년이나 된 날일까 생각해 보아도 나오는 건 역시 없었다. 내가 빌딩에 거주하게 된 건 반 년을 넘은 정도였다. 그런데 18년이나 됐다고…? 나는 정말 당황한 걸 숨길 수가 없었다. 마루에 엎드려 색종이로 무언가를 접고 있어 보지 못하는 지민의 얼굴이 서운함으로 가득 찰까 봐 그것도 걱정이 됐다. 지민이 퉁퉁 부은 얼굴로 서운함을 둥둥 띄우면 난 정말 머리를 땅에 박고 하루 종일 사과하고 싶어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말 그대로 처음이잖아, 처음. 18년 전에 만났나 보지. 눈치가 없어요, 애 서운하게.”
“나 안 서운한데? 모를 수밖에 없지, 00이는. 그때 아기였으니까. 형도 알면서 왜 그래?”
나를 구박하던 윤기가 담배를 들고 차갑게 식어갔다. 연기가 바람에 따라 흩날렸다. 나는 입꼬리를 한쪽만 올려 비웃고는 윤기에게 손짓했다. 나 라이터 좀. 윤기가 눈을 돌려 가만히 먼 산이 아닌 먼 빌딩을 바라봤다. 라이터 빨리. 역시나 아직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지민아, 여우불로 불 한 번만.”
내 말에 지민이 별것 아니라는 듯 엄지와 검지를 부딪쳐 불을 피워낸다. 많이 말고, 적당히 펴. 나 담배 냄새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지? 내가 안 좋아하는 건 하면 안 돼, 알았지? 잔소리는 그냥 흘려듣기로 했다. 귀엽잖아. 귀여운 건 언제나 최고니까. 너희 둘 다 제정신 아니다, 진짜……. 저 형 뭐래? 몰라. 무시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던 윤기는 무시하기로 했다.
“근데 너 뭐 접어?”
“나? 장미꽃. 이거 네 거야. 18주년 기념 장미꽃. 나 이거 연습하려고 색종이 세 박스 샀다?”
“색종이 세 박스 살 돈으로 꽃집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사겠다, 그냥.”
“어차피 형네 꽃집 가서는 안 살 거거든요, 사장 아저씨. 형 출근 안 해요? 꽃집 문 안 열어? 일해, 가서!”
“구미호새끼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진짜 부질없다…….”
지민이 접은 장미꽃은 조금 삐뚤빼뚤, 서툴음이 가득 묻어 있었지만 그것대로 예뻤다. 서툴음이 액세서리인가 보다, 이 장미꽃은. 사실 종이 장미보다는 지민의 뿌듯한 얼굴이 더 예뻤지만.
“고마워, 지민아.”
“하이고. 쟤네 훈훈한 척하는 거 봐라. 못 봐 주겠다.”
“형 아직도 있었어? 가라, 쫌!”
“하이고. 나랑 백 몇 년을 봤는데도 조약돌 하나도 안 주던 애가. 어이가 없다.”
“민윤기 씨 출근 안 해요? 분위기 깨지 말고 가요.”
“세상 참 각박하다…….”
용이 산다 : 뭘 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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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내려오자마자 베란다 문을 열었다. 요 며칠 내내 날이 흐려서 낮에 하늘을 보기보단 밤에 하늘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계속 야경만 보던 참이었다. 오늘은 해가 예쁘게도 떠서 낮 풍경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문을 열고 김남준을 불렀다.
“오늘은 나 건너뛸래.”
“어?”
“오늘만 쉬자, 오늘만.”
뭐라고……? 다른 건 안 지켜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늘을 20분 동안 보기‘는 꼭 하던 애가 창문을 닫아 달라 부탁했다. 나는 잔뜩 당황한 채로 오늘 해가 어제의 달보다 예쁜 것 같다고 열렬히 주장했지만, 남준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옥상 가기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얼굴에서 우울한 기색이 띠는 게, 뭔가 좀 다른 때와 다르다 싶었다. 무슨 일 있어? 라고 물어보기에는, 일하는 시간 외에는 집에 하루 종일 같이 있다 보니까 남준에게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내가 제일 잘 알아 문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북두칠성을 찾았다며 그 기다랗고 큰 몸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아이마냥 방방 뛰곤 했는데… 이상하네, 정말.
어디 아픈가 싶어 남준을 잘 관찰하면, 기침도 없고, 성대가 약해 잘 쉬는 목도 오늘은 정상인데다, 몸이 유난히 뜨끈하지도 않고, 두통도 없는지 머리를 부여잡지도 않고, 오한도 없어 보이는 게, 민소매 차림으로 잘만 휘적휘적 걸어 다닌다.
우리 집 용용이가 왜 저럴까. 우울하지만 우울함을 티 내지 않으려는 듯 진한 갈색 곰을 오른쪽 품에, 밝은 갈색 곰을 왼쪽 품에 꼭 끌어안고 텔레비전을 보는 남준 옆에 살포시 다가가 앉았다.
“…나 꽃 선물 받았어.”
“어? 왜? 누구한테?”
깜짝아. 소파에 파묻혀 있던 남준이 튕겨지듯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꽃 선물 받았다는 게 그렇게 충격적이냐, 이 용 자식아…….
“구미호한테. 이거 봐, 만난 지 나랑 18주년 됐다고 접었대. 왜 18주년인진 잘 모르겠지만…… 이거 접는다고 색종이 세 박스 샀대. 예쁘지. 무엇보다… 겁나 귀여워.”
“…….”
분명 이거라면 반응할 줄 알았다. 남준은 지민을 귀여워하고, 지민을 귀여워하니 지민의 짧고 통통한 손도 귀여워하며, 손도 귀여워하니까 당연히 그 손으로 접은 종이 장미도 귀여워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남준은 귀여운 걸 좋아한다. 틀림없는데? 왜냐면 김석진의 다 닳은 핑크 신발부터 정호석이 토마토를 좋아해서 빨갛게 염색한 머리까지 귀여워하니까…….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장미꽃을 허공에 들고 멈췄다.
“김남준.”
“…….”
“남준아.”
“…….”
“용용아!”
“…어?”
역린(逆鱗)을 쿡 눌러 버릴까 하다가 아직은 그 정도까지는 아닌가 싶어 남준의 볼을 덥썩 잡는 선에서 그쳤다. 볼을 쥐고 고개를 내리지 못하게 하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는지 눈에 초점이 잡히기 시작한다. 원래도 생각이 많아서 종종 멍 때리는 시간을 주려고 노력은 하는데, 아무래도 좀… 걱정되잖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오늘은 ’나 우울한 것 좀 알아주세요‘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놔두냐구.
살이 없는 볼이 한 손에 알맞게 잡힌다. 김남준은 어떻게 얼굴마저 이렇게 작아? 어느 집 용이길래 그래?
“너.”
“응.”
“왜 우울해?”
“……티 났어?”
“조금.”
사실 조금 많이. 사실 엄청 많이.
그래도 남준 딴에는 티를 내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겠거니 해서 차마 티 났냐는 말에 힘찬 고갯짓을 할 수가 없어 나는 소심하게 두어 번 끄덕일 뿐이었다.
“……있잖아, SNS에서 봤는데.”
“응.”
남준이는 평소에도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공유하려는 데에 노력했다. 오랜만에 회사에 나가서 다른 PD들과 작업한 곡의 영감에 대해서, 혹은 자신의 음악을 좋아해 주는 대중이나, 팬이나, 평론가들이 자신에 대해 쓴 글에 대해서, 자신이 책에서 읽은 구절이나 내용에 대해서. 이번에는 SNS인가 보다 싶었다. 나는 남준의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볼을 잡아 원활한 발음을 방해하는 손을 냉큼 떼어냈다.
“어떤 길고양이가… 자기한테 밥을 주는 사람한테 선물로 꽃을 두고 갔대. 일주일에 얼굴 한 번 볼까 말까인데도 밥 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빨간 꽃을 두고 갔대.”
“엄청 사랑스러운 얘기네.”
“그치. 지민이도 너랑 만난 지 몇 주년 되었다구 종이꽃도 접어서 주고…….”
말을 하면 할수록 남준의 얼굴이 침울해져갔다. 나는 점점 가라앉으려는 남준을 최대한 들어올리려 목소리 톤을 높였다. 남준아, 그래서 하려는 얘기가 뭐야?
“너랑 나랑은 길고양이처럼 가끔 보는 것도 아니고, 난 지민이보다 널 훨씬 오래 봤고, 매일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잖아. 근데, 난 너한테 뭘 해 준 게 하나도 없어….”
평소 예쁘다고 생각했던 잘 뻗은 어깨가 추욱 내려갔다. 같이 산 지 꽤 되었음에도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게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럴 때는 어떤 위로를 해야 하는 거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 남준아. 나한테 선물해 주고 싶었어? 나 정말 괜찮은데.”
“…….”
첫 번째 위로 실패. 남준은 놀라우리만치 반응이 없었다.
“어…… 고양이랑 인간은 서로의 언어가 다르다 보니까 의사소통의 전달력이 떨어지지만, 우린 아니잖아. 고양이가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은 그냥 꽃이었을 뿐이야. 지민이도 말보다 행동이 편한 애잖아. 우리는 말로 감사를 표현하면 되지.”
“…….”
“고마워, 남준아. 그런 생각해 줘서. 이렇게.”
내 말에 남준이 고개를 들었다. 아까 전보다는 한결 나아진 표정이었다.
“굳이 뭘 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나도 너한테 해 준 게 없잖아.”
“정말 그거로도 괜찮아?”
“응. 정말.”
음……. 한참을 고민하던 남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러면 그런 거겠지.
따뜻한 온기가 있는 손이 내 볼을 불쑥 채갔다. 무언가 하고 보면 아까 내가 남준의 볼을 감싸고 있었듯이 남준의 손이 내 볼을 덮었다. 남준은 용임에도 체온이 따뜻하게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었다. 체온이 조금 낮은 윤기와는 달랐다. 궁금해서 언젠가 물어봤을 때에는, 속성이 달라서 그렇다고 했다. 윤기는 청룡이었고, 남준은 파이어 타입 드래곤이었으니 어찌 보면 둘은 존재에 대한 갈래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나는 더 좋았다. 남준의 다정함이 그 체온에서부터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서. 남준의 손길이 닿아올 때면 그 손이 꼭 다정한 파도인 것만 같아서.
숨결이 닿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거리가 꽤 있었던 것 같았는데,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 나니 코앞에 남준이 다가와 있었다. 아니. 내가 다가간 걸까.
“고마워.”
“…….”
“너 엄청… 소중하고 고마워.”
너 무슨 일 있어? 라고 입을 열고 싶었는데 코가 맞부딪혔다. 잠깐만. 이거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이대로 입술도…….
딩동.
“저기여, 아무도 없어요?”
쿵쿵쿵.
“형, 나야!”
“아…….”
한숨을 터져나왔다. 그게 입술도 부딪힐까 안절부절 못하던 내 안도의 숨인지, 남준의 뜻 모를 숨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000! 집에 없어? 나 오랜만에 왔는데 반겨 줘라!”
아. 저 불청객 진짜.
+) 용용이가 꽃을 만들었어요
"짠. 내가 만든 꽃. 신기하지. 예쁘지."
"어, 신기하고 예쁘긴 한데…… 그러다가 집 탈 것 같아."
"허, 나 그 정도로 조심성 없는 용 아니거든? 불은 내 전문이니까 괜찮을 거야."
"…지금 네 가사지 타고 있는데. 너 저거 완성해서 내일까지 보내야 하는 거 아냐?"
"시발."
남준이 없어. 가사 다시 쓰러 회사 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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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기 위에 '남준의 손길이 닿아올 때면 그 손이 꼭 다정한 파도인 것만 같아서.' 요 부분은 <Best Of Me> '다정한 파도고 싶었지만 네가 바다인 건 왜 몰랐을까' 여기서 따온 거예요! 그리고 과거 암시가 나왔죠. 지민의 18주년, 지민이보다 더 오래 알았다는 남준의 말, 또 새 에피소드로 나올 불청객. 업로드하는 거 자꾸 까먹어서 죄송해요. 요즘 그래서 고민이 많아요 ㅠㅁㅠ 다시 잘 부탁한다고 말씀드린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글잡담에서는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 하나 하고요. 사실 저만 까먹지 않고 잘하면 되는데여 그쵸? 저 책임감 1도 없는 것 같네요;ㅁ; 오늘 제가 사는 곳은 영하 12도까지 떨어진다고 하던데 맞나용. 제 생일인 12월 12일에 영하 12도라니 이건 너무 운명 아닐까요. 얼어 죽을 것 같지만 뭔가 기뻐ㅠㅁㅠ 좋은 밤 되세요. 제 생일이니까 더 좋은 밤. 구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