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의 최초의 기억부터 자신은 혼자였다. 같은 여우들은 날 때부터 꼬리 아홉을 가졌다고 지민을 질투하고 멀리했다. 모습을 둔갑해 마을에 나가 사려니 마침 조선에서는 구미호가 간을 빼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던 터라, 자신의 존재를 털어놓고 벗으로 삼을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애정 한 번 받아 본 것 없는 것이, 외로움은 어떻게 알았는지 어이가 없어 기가 막혔다. 지민은 숲속의 이파리와 함께 나뒹굴었다. 자연의 비릿한 날 것의 냄새를 몸 가득 묻히고선 계속 뒹굴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데에 백 년이 지났다. 하늘이 맑고 예쁘단 생각을 하는 데에 또 백 년, 개미들이 자신의 몸을 다리 삼아 지나가는 것을 느끼는 데에 다시 백 년. 지민은 몇 백 년이 지나 자신이 흙인지, 잎인지, 숲인지 알아차릴 수 없을 때에 눈을 느릿하게 떴다. 인기척이 났다고 반응하는 몸이 우스웠다. 눈앞이 가물가물했지만 보이는 인영은 분명 사람이었다. 사람입니까, 라고 묻고 싶었지만 바싹 말라 버린 입술은 딱 붙어 도저히 떼어지지가 않았다.
“나와 같이 갈래?”
“…….”
“같이 가자. 숲은 너무 고요하잖니. 잠잠하면 쓸쓸하고, 조용하면 외롭단다.”
흐으. 자신에게 향한 것이 멸시가 아닌 손이었다는 걸 안 순간, 지민은 눈물을 쏟았다. 눈물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아직 눈물은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용이 산다 : 우리 집에 왜 왔니
ⓒ 2018. 니케 All rights reserved.
가족회의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이렇게 다시 모이다니. 불청객이 왔다는 소식에 다들 하나둘씩 우리 집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석진은 유니콘답게 영리한 머리로 현관문에 설치한 도어락이 우습게 제 집 드나들 듯 문을 열었고, 그런 석진을 선두로 줄을 이어 오기 시작했다. 아직도 김남준만이 어벙하게 입을 벌리고 가만히 굳어 있을 뿐이었다.
“이야, 오랜만이네, 이 친구. 잘 지냈어? 몇 십 년 만 아닌가?”
“한 60년쯤 됐을걸요? 지짜 오랜만이죠, 형.”
네모나게 웃어서 한껏 벌려진 입 때문인지, 원래 발음이 저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을 차분히 잘하다가도 꼭 글자의 받침이 하나씩 없어지는 말투였다.
“너 지난번에 00 씨 얼굴 보고 갔다며.”
“어, 네. 형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모르는 게 어디 있어. 아무리 그 날 용건을 빨리 해결했어도, 김남준 얼굴도 안 보고 가면 어떡하냐.”
“아니, 그냥. 집 나가면 용고생이니까…….”
집 나가면 개고생이 아니라 용고생이래. 근데 겁나 맞는 말이라 반박도 못하겠어.
“윤기, 너 왜 인사 안 하냐?”
“인사할 사이인가, 쟤랑. 별로 안, 안… 친해.”
“헐, 형! 저 아직두 형이랑 맞춘 우정의 목걸이 있는데 그러기 있어요?”
“…….”
“윤기 형 잡는 보스가 왔네. 민윤기 전용 보스야, 아주.”
평소 같았으면 꺄르륵 흥이 나서 흐물거리는 말투로 할 말 다했을 민윤기가 가마니처럼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호석의 ‘민윤기 전용 보스’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여전히 미동도 없는 윤기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이 빌딩에서 사는 동안 저 청룡의 저런 모습은 정녕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진짜 나 감동했어. 불청객치고는 어마어마한 존재였잖아, 쟤!
“근데,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있네? 호석이 형 뒤에 있는 애가 인어야? 스무 살짜리? 새끼 인어?”
“……안녕하세요.”
전정국이 석진의 어깨 뒤에 숨어 있다가 얼굴만 슬금슬금 내비치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만 하곤 다시 어깨 뒤로 쏙 들어갔다. 낯을 많이 가리는 터였다. 내가 이 빌딩에 살기 전에 마주쳐서 인사할 때마다 움찔거리며 인사하는 것부터 아, 쟤는 정말 어마무시하게 낯을 가리는구나! 싶었다. 어김없이 낯을 가려 주시니, 뭔가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었네 하는 안도감과 조금 동지감이 들기도 했다. 왜냐면, 나도 저런 친근감이 갑자기 훅 들이닥치면 너무 어색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야, 너 갑자기 여기 웬일이야!”
“아, 깜짝이야.”
남준은 뒷북을 쳤다. 멘탈이 이제야 돌아왔는지 난리법석을 피워대는 꼴이 산만했다.
“너 이 짐 가방은 다 뭐야? 너 설마 집 나왔냐? 어?”
“아, 형은 가만히 있다 갑자기 왜 그래!”
“동굴 밖으론 나오고 싶지도 않다던 애가 요즘 들어 자꾸 나오니까 그렇지!”
“그땐 사춘기였잖아! 그리고 그게 얼마나 오래 전인 줄 알어?!”
“속시끄러워어!!!!!!”
합.
“다 똑바로 말해. 쟤 누구야.”
구미호가 뿔이 났다. 여우가 뿔이 나면 뿔난 여우. 혼자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가 지민의 째림 공격을 받아야 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화난 구미호만큼 무서운 건 영물 다섯, 인간 하나의 세상에는 없어서, 최종 보스는 지민이었다. 태형이 없는 세상에서는. 원래는 말이다.
“나? 난 김태형인데!”
음. 새로 온 자는 민윤기 전용 보스뿐만이 아니었다 보다. 최종 보스, 김태형.
지민이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단순한 투정일 것이라 예상했다. 지민의 성격이 원래 좀 그렇잖아? 애 같고, 변덕 심하고, 서툴고. 아기가 친구를 보았을 때 쥐고 있던 장난감을 쉬이 빌려 주는 게 아니라 품에 꼭 안는 것처럼, 나는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야. 너 나랑 동갑이라며? 친구할래?”
“…….”
“아, 친구하자. 나 친구가 없단 말이야. 나는 몇 백 년 동안 동굴 속에서 살았다고! 거기 박쥐가 좀 있긴 한데…… 걔들은 날 무서워해, 잡아먹을까 봐. 살이 하나도 없어서 맛도 없는데. 그니까 나랑 친구하자, 어?”
“말 걸지 마.”
“너도 친구 없잖아!”
그간 태형의 들러붙음에도 꼼짝도 않던 지민이 ‘친구 없다’는 소리에 몸을 움칠, 떨었다.
“…나 친구 있거든!”
“누군데.”
“얘!”
지민이 자신감 있게 검지로 나를 콕 집었다. …응? 나? 나는 의문을 가지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싶었지만 나를 친구로 집은 지민의 얼굴이 확고해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봤다. 지민의 굳은 얼굴과 대조되게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태형을.
“너 쟤랑 친구야?”
“…….”
“쟤 나랑도 친구인데?”
“……뭐?”
대화를 가만 듣던 호석이 벌떡 일어나 박수를 짝 쳤다. 태형이 너 집 나왔다고 했지? 그럼 지낼 곳 없겠네? 밖으로 나가서 얘기할까? 네가 지내고 싶은 데 골라 봐. 말투는 평소보다 더 나긋나긋하고 친절했지만 태형을 이끄는 손길은 형사가 용의자를 연행하는 그것과 다름없었다. 호석의 행동은 원래 건물주인 석진이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어 눈동자를 스르륵 굴려 눈치를 봤다. 석진은 어, 어, 잠깐만! 하면서 끌려가는 태형을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석진이 눈치 준 것 같지, 아마?
“지민아, 형이 미안해. 태형이한테 잘 말해 볼게, 응?”
남준이 안절부절 못했다. 가뜩이나 평소 지민에게 약했던 남준이었다. 무얼 잘못했는지 나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이들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본 이상 눈치 없게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까부터 줄곧 궁금했다. 뭘? 왜? 지민에게 잘못한 게 뭔데? 지민이 뭐 때문에 화가 난 건데?
“……싫어.”
“어?”
“싫어, 진짜. 다 싫어.”
지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석진은 그 모습을 보다가 지민에게 다가가 손 그 언저리를 잡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지민아.
“형 봐봐. 형 눈 봐.”
“쟤 우리 집에 왜 왔어? 나 진짜 싫어!”
분위기가 점점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남준은 내 어깨를 살짝 잡았다. 나는 그 큰 손에서 안정감을 찾아야 했다.
“우리 집이잖아. 가족이라며. 우리 가족이잖아! 근데 쟤 왜 껴? 쟤 여기 살면, 가족회의도 같이 할 거고, 옥상도 같이 쓸 거고, 심심할 때 000 찾아가면 쟤 있을지도 모르고. 나 그거 싫어!”
“지민아, 잠깐만 형 말 들어 봐.”
“형, 나 형이랑 같이 가면 안 외로울 거라고 했잖아. 나 외로운 거 싫어. 나 또 외롭게 둘 거야? 나한테 거짓말 한 거야? 왜? 왜 그랬어?”
분명 아까는 석진이 지민을 붙잡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지민이 석진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나를 잡은 남준의 손에 알게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내가 싫다고 하면 안 하는 거잖아. 진짜 싫어. 다 나빠. 전부, 다 나빠……. 지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민은 지금 울고 있는 걸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새해는 어떻게 보내셨어요? |
제가 원래 1월 1일날 짠하고 왔어야 하는데 쓰차가 날라왔더라구요. 그래서 짠하고 오는 대신 분위기 전환 짠 했습니다. 지난편 분위기하곤 조금 다르죠. 우리 구미호 과거도 나왔네요. 구미호 과거로 인해 애들이 가족이란 것에 집착하는 이유도 대충 알게 됐어요. 반상회를 가족회의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오늘 생각해야 할 건 저렇게 처음 보는 태형이한테 예민하게 굴면서 기껏 해야 몇 개월 전에 본 00이한테는 예민하게 굴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왤까요 ?ㅁ? 늦었지만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2017년 저와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년도 저와 함께 해 주세요. 마지막 인사가 언제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