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다니엘, 너는 이런 걸 다 어디서 배워왔어?"
다니엘이 반찬을 만드는 족족 옆에서 손으로 집어 먹고 있는 ㅇㅇ의 물음에 그는 나름의 고민에 빠져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지. 배우려고 해서 배운 건 아닌데. 다니엘은 제 주인에게 일일이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제 버릇이기도 했고 구태여 그녀를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은 저만의 배려였다. 그가 인간으로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날들은 혹독한 나날들이었다. 옆에 있던 성운과 둘이서 서로 의지할 곳도 없이 밖에서 노숙을 했던 적도 있었고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 쓰는 게 다인지라 꼭두새벽에 나가서 돈을 벌면 그 돈을 모두 인간들에게 뺏길 때도 있었다. 성운은 그럴 때마다 말을 했었다. 인간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약아야 해, 그리고 남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고. 성운과 자신의 외관만 보고 다가오는 못난 사람들도 있었다. 자칫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언제 어디로 팔려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을까
'이러다가는 진짜 우리 둘이 길바닥에서 죽겠다.'
성운이 짐짓 다짐이라도 한 듯이 말을 꺼냈던 그 날은 이상한 여자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던 날이었다. 다른 사람처럼 사탕에 구슬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와서 자신의 말벗이나 해달라고 했던 조금은 많이 야위었던 여자. 가끔 살다가 힘들면 우리집에 쉬었다 가고 그래도 돼. 그녀는 처음 보는 다니엘과 성운의 존재를 다 알고 있다고 했다. 반은 동물이고 반은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건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아마 그 때 배고프면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는 것도, 자신이 자고 일어난 곳은 항상 깨끗하고 청결하게 관리해야 된다는 것도 모두 배울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불편하기는 커녕 꼭 제 어머니의 품 같다고 했던 성운의 말이 이해가 갔다. 그러기도 그러는 것이, 그녀에게도 반려동물이자 벗인 아이가 있었다고 했다. 우리처럼 인간과 동물의 모습이 반쯤 섞여 있었다는 남자 아이가.
'우진이는, 얘가 숫기도 없어서 처음 몇 주는 나랑 말도 안 했다니까?'
그녀의 나이는 ㅇㅇ와 별 반 다르지 않았다. 이제 막 서른을 넘어갔던 그녀는 가끔씩 제가 집으로 가는 날이면 '우진'이라는 아이에 대해서 말을 해줬다. 그래도 나 아프면 밤새 옆에 있어주는 것도 우진이 밖에 없었는데. 근데 요리는 아무리 가르쳐 줘도 정말 못했어. 걔가 만들어주는 죽은 정말 맛이 없었거든. 다니엘은 직접 만난 사이도 아닌 우진이 그렇게나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하루는 온통 우진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다. 우진은 강아지였다고 했고 가끔씩 강아지의 모습일 때면 같이 밖에 나가곤 했는데 체력 하나는 사람인 자신보다 더 좋아서 붙잡지만 않으면 지구 한 바퀴를 다 돌고도 남았을 거라고도 했다. 이쯤되면 듣는 게 지겨울만도 했는데. 우진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나 많이 하면서 정작 그를 마주하게 해준 건 사진이 전부였다. 사람으로서 됨됨이에 대한 가르침을 배우는 대신 마치 보수로 그에 대한 일상 얘기를 듣는 것이 꼭 의무감처럼 느껴져 거진 졸면서 듣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도 같았다.
'그래서 우리 우진은 그렇게 멀리 가버렸나봐.'
'붙잡고 싶었는데 마지막에 웃는 모습을 보고는 그러지도 못했어.'
하지만 차마 다니엘과 성운은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왜 그 우진이라는 아이를 사진으로만 보여줬는지, 왜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전부 과거형이었는지 이제는 다 알 것 같았으니까. 강아지는 사람보다 수명이 훨씬 짧았다. 언제나 옆에 있어주기를 원했는데 남아있는 삶도 언제 얻었는지도 모르는 병으로 인해 고통받으면서 간 것이 그녀는 못내 속상한 듯이 울었었다. 어쩌면 내가 그 아이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 지쳐했으면 어떡하지. 나는 아직도 우리 우진이가 보고 싶은데 그마저도 그 아이에게 부담이 될까봐 말을 꺼내지 못하겠어. 그녀는 우진을 보내고 나서 지금, 처음으로 우는 것이라고 했다. 혼자서는 차마 감당이 안될 것 같았는데 너희라도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라는 말도 덧붙여서.
"ㅇㅇ야, 내가 한 음식 맛있어?"
"응, 당연하지! 난 네가 한 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그래, 이만하면 됐지. 다니엘이 ㅇㅇ에게 제 과거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혹여나 자신과 ㅇㅇ 사이도 우진과 그녀처럼 너무 빠른 시일에 떨어지게 되지는 않을까. 쉽게 입에 담으면 그 말이 현실로 저에게 돌아올까, 그리고 괜한 이야기로 저의 그녀가 먼저 슬픔에 잠기지 않을까. 다니엘은 끝이 있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끝이 슬프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같이 한 세월이 길면 길수록 그에 대한 추억이 배로 돌아와 이따금씩 남겨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쉬이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그녀가 제가 해준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거면 되었다. 행복했다. 세상에 얻지 못할 행복들을 한움큼 쥔 듯했다. 영원히 헤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저는 그 사람 없이는 못 사는데. 그러면 어떡해요? 다니엘의 진지한 물음에 그녀는 그런 대답을 해주었지.
'함께 있는 그 때의 그 순간에 온전한 사랑을 줘.'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헤어지는 연습을 해야 해. 영원한 게 희소한 것처럼 그 사람에게 후회없이 사랑을 주렴. 그러면 된거야. 명쾌한 해답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때 다니엘은 왜 울었을까. 아직도 그 날의 자신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다니엘은 문득 옆에 있는 ㅇㅇ의 손을 가만히 잡아왔다. 내가 앞으로 더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그러니까 꼭 나 잊으면 안돼, ㅇㅇ야. 옆에서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ㅇㅇ가 설거지를 하려고 몸을 숙이자 그녀의 몸은 그대로 다니엘에게 꼼짝없이 갇혀있었다. 뭐야, 너 되게 뜬금없이 고백하는 거 알아? 떨림 가득한 목소리가 다니엘의 가슴팍에서 울려댔다.
"그래서 싫어?"
아니, 누가 싫대? 싫다고 하면 어쩌나 괜스레 제가 뱉어놓고서도 노심초사했던 다니엘은 곧장 대답을 하는 ㅇㅇ를 꽉 껴안았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다니엘이 동물일 때에도 느낌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다만 이다지도 직접적으로 깨닫게 되는 건 조금은 힘들었다. 차라리 모르면 모르는대로 그것도 좋았을 것 같았는데. ㅇㅇ의 머리 위로 고개를 가만히 얹던 다니엘은 조용한 이 공간이, 우리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서 하고 싶지는 않은 생각이 자꾸만 나는 것마냥.
"ㅇㅇ야,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뭐야, 왜 또 그래. 갑자기."
"그야, 나는 네가 행복한 게 가장 중요한 걸."
근데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널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나긋한 목소리로 다니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거지를 하기 위해 틀어둔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뜨려고 그가 살짝 뒤로 물러나자 저를 안는 몸짓이 느껴졌다. 너 자꾸 어른스러운 척 하지마. 그래봤자 나랑 얼마 차이도 안 나면서. 고무장갑을 벗을 겨를도 없었는지 그가 입은 니트 위로 축축한 물기가 전해져 왔다. 그러지 말란 말이야. 웅얼거리듯 배회하는 ㅇㅇ의 목소리가 짙게 잠겼다.
"알았어, 나도 안 그럴테니까 ㅇㅇ도 행복해야 해. 그게 제일 중요한 거랬어."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 온건지. 하여간에 날이 가면 갈수록 애늙은이가 다 된다니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다니엘의 단단한 품이 꽤나 포근해서 한동안 껴안은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로 있기를 몇 분이 지났을려나 그녀는 그 날 문득 이 집에서 다니엘이 없어지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었다. 얼마 못가서 생각만으로도 코 끝이 찡해지는 기분에 덩달아 그를 더 가득히 안았지만. 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다니엘. 열어둔 창문 틈새로 추운 바람이 들어왔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금방 티가 났다. 어느 순간 제 삶으로 일부분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한 그는 이젠 그녀의 전부였다. 이제 곧 눈이 오려나봐. 다니엘의 목소리가 가슴께를 간지럽혔다.
"야, 황민현. 당장 내려와."
지금 나, 너네 회사 앞이니까. 이런 일로 민현의 회사까지 가고 싶지도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그의 얼굴도, 목소리도 모조리 다 꼴보기 싫었다.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꺼낼 때는 그리도 순한 얼굴을 하고선 꼭 나만 바라볼 것처럼 또 그래놓고선. 결국 끝은 봐, 또 이런 꼴이잖아. 왜 갑자기 찾아왔어? 나 아직 회의 안 끝났는데.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민현의 답에 ㅇㅇ는 가만히 제 관자놀이를 짚어왔다. 당장 나와. 지금 너랑 이렇게 말 섞는 것도 되게 별로거든. 싸늘한 제 말투가 못내 신경이 쓰이기는 쓰였는지 금세 오겠다는 대답을 이제야 해왔다. 남의 속은 다 뒤집어 놓고 저만 회의를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핸들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는 꼭 우는 듯한 목소리를 해왔다. 민현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정말 보게 되면 한껏 욕이라도 날려주고 싶은게 가득이었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민현은 제가 힘들 때 있어준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저 쉽게 지우고 잊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헤어지는 때에도 속이 뭉그러지는 것 같이 힘들었는데 오늘도 그는 저의 속을 다시금 아프게 만들었다. 하여간 진짜 황민현 아니랄까봐. 사람한테 유종의 미, 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와 자신 사이도 마지막은 깨끗하게 끝내기를 원했다. 차마 그러기엔 그녀, 자신이 밤새 울고 불고 하기는 했어도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까지 이럴 필요는 없지 않나. 갑자기 몰려오는 피곤함에 ㅇㅇ가 눈을 감자 그 때의 기억이 자꾸만 밀려들어왔다.
'오빠, 나랑 말 좀 해. 응?'
'미안. 내가 바빠서 나중에 전화할게.'
민현에게 서른이라는 숫자가 다가옴과 동시에 그는 쉬도 때도 없이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가끔가다 시간이 되어서 짧게라도 만날 때면 얼굴에 가득 보이는 졸음과 피로 때문에 미처 그게 거짓말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만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믿었던 제 믿음은 철저히 무너져 가는 중이었다. 따지고 보면 민현같은 부류의 남자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여느 때나 다정한 말투로 힘들 때마다 위로를 해주었고 기대고 싶은 순간이면 언제 알았는지 금세 어깨를 내주던 사람이었으니까. 처음 회사에 들어가서 온갖 화살이란 화살은 다 자신에게 향해 있는 게 참 고되었는데. 그래도 그가 있어서 이만큼 살아오지 않았나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자주 하곤 했었더랬지.
'나 진짜 이건 양보 못해. 우리 기념일이잖아. 내 생일도 아니고 우리 기념일인데.'
'미안, 진짜 미안해.'
'내가 얼마나 양보해줘야 해?'
맨날 오빠 바쁘대서 고작 해봐야 몇 분 보는 그 잠깐도 회사 근처가 전부야. ㅇㅇ의 목소리가 상기된 것처럼 옅게 떨려왔다. 연락을 해도 잘 받지 않잖아. 하루에 나한테 전화 한 번, 문자 한 번, 남겨준 적 있어? 내가 오빠, 너랑 만나면서 요즘 제일 듣는 말이 전화가 안된다는 응답기야. 알기는 알아? 그 날은 유독 제가 서러운 날이었다. 전날에 고열이 났고 몇 번을 걸쳐 속을 게워냈는지 기억도 안 났다. 몸살이 한 번 났다, 하면 지독하게도 나는 모양인지 그나마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전화했던 민현은 그 때도 연락이 되질 않았다. 굳이 와서 간호를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밥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는데. 얼굴이라도 좀 보면 지금 아픈게 금방 나을 것 같아서 그런거였는데. 결국 울지 않으려고 했던 그녀는 울먹 거리느라 제대로 이어지지도 않는 말을 간신히 붙이며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ㅇㅇ야, 미안. 나 지금 올라가 봐야 될 것 같아.'
하, 진짜. 어이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분명 황민현은 친절했다. 다정다감했고 따뜻했다. 세상에 어느 것보다 ㅇㅇ, 자신이 제일 소중하다 해주었던 사람이었다. 근데 그건 예전의 민현이지, 지금의 민현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아직 낫지 않은 감기를 달고서라도 말을 해보겠다 온 제 여자친구보다 일이 더 급했던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변하는 건 없다더니,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약속해 놓고선. 아마 그 때부터 먼저 저는 알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의 끝이 점점 가까워 진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 무시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마음이 상할대로 상한 건 그녀였음에도 또다시 연락을 기다리고 다시 만나러 가는 것도 그녀 몫이었다. 꼭 우리 사이에 있는 끈을 잡고 있는 것이 자신 하나여서, 그마저도 자신이 놓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마냥.
'오빠, 나 지금 오빠 회사 앞인데 잠깐 나올 수 있어?'
-나 지금 출장 중이야.
'…출장? 나한테 간다는 말 없었잖아.'
아, 이러려고 그런게 아니었는데. 꼭 누가 보면 싸우러 온 것처럼 괜한 화를 내었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신경질적으로 올라간 목소리를 열심히 가다듬으며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꺼내려고 준비했었다. 간만에 얻은 여름 휴가를 같이 할 수는 없는 걸 잘 알았던지라 바쁜 그가 혹시나 밥은 챙겨먹고 다닐까 싶어 밤새 도시락을 쌌었다. 음식 만드는 건 정말 적성에 맞지도 않는 짓이라고 치부할 때는 언제고 또 좋아하는 사람이 먹을 걸 생각하면 그렇게 설레고 좋아서 만들고 실패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던 도시락. 그걸 주기도 전에 민현이 출장을 가버린 터라 결국 이건 저 혼자 먹어야 되는 것이 아쉽고 서운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이까짓거 별 것도 아닌데 뭘.
-ㅇㅇ야, 나 힘들어.'
너까지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힘들고 지쳐. 근데 너는 자꾸 왜 그래. 이게 그와 했던 마지막 통화였다. 그동안 셀 수도 없이 했던 추억들이 얼마나 많고 많았는데 끝끝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건 마지막 그의 말 한마디였다. 구태여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별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나 많이 서운해. 너랑 같이 먹을려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도시락을 만들었는데 너는 나한테 말도 없이 출장 갔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 나는 또 참아야 되는 거야, 그런거야? 속에서 계속해서 치고 올라오는 말들을 꾸역꾸역 삼켜내었다. 말을 해봤자 그에겐 또다른 고통과 짐일 뿐이니, 해봤자 민현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제가 짜증났다. 그리고 추잡하게도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들이 눅진하게 식은땀이랑 섞이는 것이 싫었다.
'…….'
누구는 자기 때문에 맘 놓고 쉽게 사는 줄 아나. 그의 삶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ㅇㅇ는 짧은 말을 꺼내며 통화를 끊었다. 기다리는 사람도 힘들어, 지칠대로 지친다고. 짧은 말과 함께 끝난 짧은 연락이었다. 그리고 이게 끝이었다. 결코 짧지 않았던 자신의 연애가 흐지부지 막을 내리는 것도, 헤어지자는 뚜렷한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 끝이 선명하게 다 보여서 이후엔 어떠한 연애도 하지 않을거라 다짐했던 것도. 끝이 이렇게나 지저분 한 걸 보면 이건 자신과 민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특징 중 하나인가 보다.
"ㅇㅇ야."
톡톡,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감았던 눈을 뜨고선 ㅇㅇ가 민현의 얼굴을 마주하자 괜스레 헛웃음이 나왔더랬다. 그러고 보면 첫 만남에 그를 잡은 것도 자신이었고 그에게 고백을 한 것도 자신이었다. 매번 그를 만나러 온 것도, 헤어지는 그 날조차 그를 보기 위해 기다렸던 것도 그녀였다. 지금의 민현에게 무어라 한 소리를 하려고 온 것이 결국엔 또 ㅇㅇ, 저인 것처럼. 그녀가 뱉은 웃음 사이로 옅은 숨이 섞여 들어갔다. 한숨이었다.
*
"너는 나한테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뭐?"
"나 회사에서 너랑 사귄다 만다, 너와 관련된 모든 소문은 다 나고 있어."
그거 네가 직접 말했다며. 맞아?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그냥 차 안에서 얘기하면 될 일을 가져다가 민현은 굳이 따뜻한 걸 먹어야 한다며 근처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를 왔고 그마저도 바로 일어나기 위해 의자에 앉는 둥, 마는 둥 하는 ㅇㅇ가 있었다. 말해, 네가 우리 과장한테 그런 말 했어? 아니길 바랬다. 그저 숱한 소문 중 하나여서 과장이 언제나처럼 남일에 참견하기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한 말 맞아. 긍정의 대답을 하는 민현의 말에 그나마 단 한 톨의 신뢰마저 깨지는 기분이 이런 건지 색다르게 그녀는 깨닫고 있는 중이었겠지.
"근데, 나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미안해."
괜한 심술 때문에 너 힘들게 해서, 미안. ㅇㅇ는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무관심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척 하는 것 뿐이었지, 실상은 쌓이고 또 쌓인 울분을 혼자 우는 것으로 푸는, 알고 보면 되게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가 한 때는 좋아했던 사람조차 자신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뱉어버린 말들은 주워 담을 수도, 그렇다고 예전처럼 혼자 울 수도 없었다. 이제는 제가 운다고 하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구는 다니엘이 있었는데 그 아이에게 괜한 짐까지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나 사실 네가 다시 돌아가자고 했을 때 조금은, 아니 많이 떨렸어."
왜 하필이면 지금 다니엘의 말이 생각났을까. ㅇㅇ야,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라며 퍽이나 어른스러운 말을 꺼냈던 그 애가 생각이 났다. 꼭 곁에 있지도 않은데 옆에 그 아이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쩌면 평소라면 제 얘기를 하는 것조차 용기가 없어 하지 못했던 ㅇㅇ가 민현에게 그동안 응어리진 말들을 꺼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황민현, 너는 되게 좋은 사람이였어. 그 때 너만한 사람을 찾을 수도 없을만큼 좋아했던 것도 맞고 흔들렸던 것도 맞아. 맞는데,
"그 때 그렇게 바쁘다고 그랬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지 마. 너답지 않아."
"나다운 게 뭔데?"
"뭐?"
"나 바쁜 거, 그 때 너 만나지 못한 거, 나라고 그러고 싶었는 줄 알아?"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이야. 한순간의 제 감정이 어찌되었든 ㅇㅇ를 힘들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넘어가면 됐을 일이었다. 지금 당장 딜레이 시켜둔 회의부터 시작해서 제가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거늘 민현의 말은 짧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나온 큰 소리도 그러했고 이 상태로 회사를 들어가고 싶지 않은 민현의 생각도 그러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데. 너랑 그 때 그렇게 통화 끊고 나서 나도 밤새 잠 못잤어. 마음 같아선 보고 싶은데 해야 할 것들은 가득이야. 하루에 잠을 몇 시간 자는지도 모르겠어. 같잖은 사람들 비위 맞춰주면서 이 자리까지 오는 게 나라고 쉬운 줄 알아? 내가 그 때 무슨 생각으로 버텼는데. 길게 이어진 말을 숨도 쉬지 않고 내뱉은 민현은 왠지 모르게 떨리고 있는 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지는 않을까,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지는 않을까."
"야, 너는 지금…"
"너랑 결혼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들로 버텼어. 너랑 함께 할려고 나도 많이 힘들었다고, ㅇㅇ야. ㅇㅇ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을까 제 손을 굳세게 잡는 민현의 손이 느껴졌다. 뭐가 그리도 불안했는지 여름도 아닌 겨울에 그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민현은 이럴 사람이 아니다. 곧 죽어도 그는 아쉬운 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애도 아쉬운 쪽은 언제나 자신일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민현이 이미 지나버린 과거까지 짚어가며 자신을 잡는 건 ㅇㅇ가 하려고 했던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또 약해지면 안된다는 걸 잘 알면서 저는 미련한건지, 바보인건지. 화내도 되고 욕해도 돼. 근데, 나한테 그러지 마.
"끝내자는 말만 하지마, 버리지 마. ㅇㅇ야."
사람은 자고로 믿었던 것과 다를 때 흔들린다. 아쉬운 것이 없을거라 했던 그가, 절대 울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가 고개를 한참이나 숙이다가 저를 본 눈시울을 붉히는 것을 보자 단호하게 미루어 두었던 제 다짐들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오전의 아침은 언제나 바쁘다고 했던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서 제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불안하게 여기게 될 줄 누군들 알고 있었을까. 제법 오랜 시간 민현을 알고 지냈다고 자부했었던 ㅇㅇ도 지금의 그를 보면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그의 눈가로 먼저 손이 가고 있었는데. 도대체가 여기서 울 사람이 누군데 이래. 투박한 말을 하면서도 ㅇㅇ의 손이 민현에게로 다가가고 있었을까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에서 제법 세게 진동 소리가 울려댔다.
"…여보세요?"
-ㅇㅇ야.
인간 세상에서 살아남는 게 어려운 것은 비단 몇 초 뒤에 있을 자신의 앞길조차 알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온전치 못한 것에 대한 불안함은 아주 가끔씩 미천한 사람의 머리로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선택의 기로에 놓아두기도 한다고. ㅇㅇ는 예전에 읽었던 책 구절이 꼭 지금의 제 상황과 같았다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응? 자신의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그녀가 이다지도 불안할 줄이야. 민현은 괜히 잡고 있는 ㅇㅇ의 손에 더 힘을 주고 있었다. 무슨 전화인지,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 알고 싶지 않아도 감으로 짐작이 가는 듯했다. 자신을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하는 ㅇㅇ는 그가 처음 본 것이기도 했고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 사람은 다니엘, 그 놈밖에 없을테니.
-ㅇㅇ야, 나 이상해. 몸이 너무 아파.
나 먼저 가봐야 될 것 같아. 미안해. 두 개의 어절이 전부였다. ㅇㅇ가 민현이 잡고 있는 손에서 제 손을 급하게 빼버린 채 카페 밖으로 뛰어간 것은. 찰나의 전화 한 통으로 지금의 ㅇㅇ의 머릿속은 온통 다니엘로 뒤덮이고 있었더랬다. 그 언젠가 동물원에서 격리당하고 있던 다니엘이 심각한 고열로 아파했을 때,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었던 그 때의 그녀처럼.
What Does The Fox Say?
Episode 12, fin
암호닉 남겨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
[레피], [참새랑], [감], [본싱어], [댕구르르], [폭스], [강캉캉], [강낭], [뷔밀병기], [222], [오호라], [루지], [버들], [오월], [달다리], [17], [마요], [밍찌], [사용불가], [킹갓], [메이], [후렌치후라이], [방귀대왕뿡뿡이], [어이엄슴], [페브리즈], [민트향], [₩침수₩], [뿜뿜이], [옹뀨], [동동], [미녀], [모찌], [37], [폴리], [마이옹], [알파고놉], [강심장], [달빛소리], [lia], [내독자], [정수기], [강낭콩], [이화], [폴리], [요정], [옹스더], [퓨어], [몽몽이], [엿기], [@불가사리], [센터], [거울기], [롱롱], [뀰], [아이사1210], [담소], [달린], [즈쿠로], [포도], [주인], [호랑], [소듕한피치], [찻잔], [너의 봄], [박참새짹], [치그], [달린], [호두찌], [타오름달], [해야], [페이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