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봄 上
봄을 맞아 꺼낸 얇은 점퍼였다. 혹시라도 버스를 놓칠까 싶어, 서둘러 집을 나서며 점퍼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정류장까지 걸음을 재촉했다.
평소처럼 정해진 시간에 탄 버스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손과 함께 빛 바랜 작은 꽃잎 하나가 바닥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작년 이쯤의 벚꽃잎인 것 같았다. 딱 이때 꺼내만 잠시 꺼내 입는 옷이니까. 다른 계절의 흔적일 리 없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변색된 꽃잎을 바라보다가 혹시나 누가 밟아 바스라지기라도 할까, 서둘러 몸을 굽혀 꽃잎을 주웠다.
*
"좋아해요!"
"갑자기?"
남준 선배는 졸업을 하기도 전에 유명 대기업에 스카웃 되어, 인턴으로 근무를 했다. 때문에 막학기에도 학교에서 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선배가 졸업 전에는 꼭 고백해야지 했던 다짐이 좀처럼 실행되지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하다가 선배는 졸업을 했고, 나의 고백은 그렇게 겨울에서 봄이 찾아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넘어가버렸다. 그런데 졸업을 한 선배가 제 동기들과 함께 동아리 여행 마지막 날에 찾아왔다. 그때 대성리는 이제 막 봄이 만연하게 피어나려는 때였다. 느닷없는 졸업 기수의 방문에 우리들은 잠시 당황했다가, 선배들이 사온 술과 먹거리에 들떠서 온 마음을 다해 환영했다. 내 지고지순한 짝사랑의 계절을 아는 동기들은 선배를 발견하고는 신이 주신 마지막 기회라며 나를 부추겼고, 나는 그 부추김에 봄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새싹처럼 마구 흔들렸다. 그래서 애먼 술잔만 들이켰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 아이들은 나를 말리기는 커녕, 함께 술잔을 기울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짝사랑의 주인공은 내 술잔을 제 큰 손으로 턱하니 막으며 물었다. 내 기억으로는 여주 술 잘 못 하는데, 아닌가. 언제 내 옆자리까지 온 건지, 나는 제법 알딸딸하게 오른 취기가 한 번에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술김에 사고라도 쳐볼까 했는데, 그마저도 못하게 만드네. 이 선배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 위로 선배의 손과 맞닿아 있는 내 손을 슬며시 빼냈다. 덕분에 내 술잔은 자연스럽게 선배에게로 넘어갔다. 선배는 그제서야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머리를 부스스하게 헝클였다. 여전히 순하네. 여주는. 나는 선배의 말에 하마터면 입술을 한껏 내밀고는 투정 부릴 뻔했다. 저는 남준 선배한테 순한 후배하기 싫은데요. 저 하나도 안 순한데요. 하고
고백은 정말 느닷없이 했다. 나는 나한테 순하다고 한 선배가 싫어서 도망치듯, 바깥으로 나와서 무릎을 굽히고는 땅만 팠다. 정말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서 땅을 팠다. 원래는 땅 위에 선배의 이름을 하나하나 써보다가, 혹시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땅을 파기 시작했다. 선배 이름이 땅에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들킬까봐. 원래 짝사랑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나는 푹푹 땅만 파다가 봄바람에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꽃잎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내 시선이 멈춘 곳에는 벚꽃잎이 몇 개 달린 나뭇가지를 든 채로 서 있는 남준 선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 시야에 선배가 가득 차자 마자, 내가 마구 파둔 땅 위로 철퍼덕 넘어졌다. 선배는 그런 나를 일으켜주려고 손을 뻗었지만, 저를 빤히 바라만 보는 나 때문에 결국 자기도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았다. 저러면 옷 더러워지는데!
"선배, 옷 더러워져요!"
"털면 되는데, 뭐."
"그래도..."
"이렇게 흙바닥에 앉아보는 것도 엄청 오랜만이다."
"... 그러게요."
"덕분이네. 고맙다."
"뭘요..."
우리는 놀이터에 주저 앉은 유치원생들처럼 손에 잡히는 보슬보슬한 흙들로 장난을 치기 바빴다. 사실 나는 선배를 훔쳐보느라 바빴다. 선배는 제가 들고온 벚꽃 나뭇가지를 제가 뭉쳐둔 흙더미에 꽂았다가 빼기를 반복하며, 의미없는 손장난을 했다.
"어디서 났어요?"
"이거?"
네. 선배는 나뭇가지를 흔들며 답했다. 저쪽 바닥에 떨어져 있더라고. 그래서 주워왔지. 나는 내 쪽으로 나뭇가지를 건네는 선배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가지를 넘겨받았다. 그 찰나에 스친 살갗에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그래서 정말, 딱. 미칠 것만 같았다. 내가 땅을 파고 있을 때, 내 위에서 꽃잎을 떨어트리기 위해서. 이 가지를 조심스레 흔들고 있을 선배를 생각하자, 더욱이 그랬다. 말도 안 되는 상황과 시간에 놓인 나였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짓, 한 번. 정말 눈 딱 감고 해보자 싶었다.
"좋아해요!"
흙장난을 치던 선배의 손이 멈췄다. 거짓말처럼 꽃향기를 잔뜩 묻히고 불어오던 바람도 멈췄다. 나는 내가 시간을 멈추는 주문이라도 외운 건 아닐까. 방금 내가 한 말이 사실이 맞을까. 내가 미친 게 아닐까. 좀처럼 정의되지 않는 생각들로 뒤섞인 머릿속을 마구 흔들었다.
"갑자기?"
선배는 갑작스러운 내 고백에 특별한 대답 대신, 갑자기? 하고 되물었다. 나는 잔뜩 붉어졌을 얼굴을 푹 숙이고 있다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끝장을 보자!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에 들려있던 나뭇가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꽃잎으로 해서... 저랑 사귈지 말지, 정해주시면 안 돼요?
"그런 게 어딨어. 일단 이야기를 ㅎ,"
이야기하면 나 찰 거, 다 아는데.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그냥, 후회도 안 남게. 이 나뭇가지에 운명이고 뭐고 다 맡겨볼게요. 나는 선배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로, 파리하게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꽃잎을 하나씩 떼어냈다. 사귄다, 안 사귄다, 사귄다, 안 사귄다, 사귄다.
.
.
.
.
*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날, 그 용기는 어디서 나온 걸까. 봄기운이 나한테 마술이라도 부린 걸까. 선배랑 내가 그때 만났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계속 만나고 있을까. 그날 나뭇가지는 내게 최악의 결말을 남겨주었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사귄다. 이렇게 결론이 나오던데. 역시 픽션은 픽션이었다. 나는 그날 결과가 나오자마자 숙소로 돌아가서 짐을 챙겨, 택시를 잡아타고 집까지 와버렸다. 택시비가 왕창 나왔지만, 택시비 따위는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창피해서. 침대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친구들은 사라진 나를 찾지 않았다. 어렴풋이 짐작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버스 손잡이를 잡은 반대편 손 위에 꽃잎을 올려두고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 년 전, 선배가 흔든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이 잎 하나를. 너만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어도. 순간 버스가 크게 흔들렸다. 나는 손바닥 위의 잎에 정신을 빼앗겨, 몸이 크게 휘청였다. 넘어지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 몸이 떨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단단한 품에 닿았다. 나를 지탱해준 몸은 버스가 다시 안정을 되찾자, 나를 놓고는 내가 떨어트린 꽃잎을 다시 주워주었다. 여러모로 민폐였다. 나는 버스 손잡이를 힘주어 잡고는 내게 잎을 건네주는 이를 향해 손을 뻗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내게 꽃잎을 돌려주기는 커녕, 다시 주먹을 쥐어 잎을 감췄다. 장난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그 어느 날의 봄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눈에 가득찼다. 그날 이후로 처음보는 선배의 모습이었다. 정장을 갖춰 입은 선배는 내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자, 나를 마구 홀린 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차가 눈치 있게, 잘 망가졌네. 나는 또 한 번 믿기지 않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선배인가? 신기루 같은 거 아닌가?
"저 쪽에 앉아 있다가, 너 같길래 이쪽으로 와서 섰는데. 하나도 모르더라."
"언제, 언제부터 계셨어요?"
"주머니에서 뭐 하나 꺼내서 ,계속 볼 때부터."
... 완전 처음부터네.
"그 옷 되게 좋아하나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그 옷이었는데. 너."
"... 그냥 봄에 입기 좋은 옷이라서요."
"번호까지 바꾼 건, 좀 너무했지?"
"..."
그날 이후로 번호도 바꾸고 친구들이 남준 선배 이름만 꺼내도, 자리를 벗어나면서. 내가 그날로부터 벗어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만나지냐. 선배는 제 말에 고개를 떨구는 나를 별다른 말 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제 손에 들린 꽃잎을 직접 내 손 위에 올려주었다.
"꽃잎 하나 더 있으니까, 엔딩 바뀌어야 되는 거 아니야?"
"... 네?"
"안 사귄다. 여기서 끝났잖아."
"..."
"이거 더해지면, 바뀌는데."
"... 선배?"
"사귄다. 되는 거 아닌가."
봄은 봄이었다.
*
안녕하세요. 겨울입니다. 굉장히 오랜만이죠...? (사죄) 자세한 공지는 조금 뒤에 올릴게요! 공지로만 찾아오기에는 너무 죄송해서, 봄에 쓰고 싶었던 소재로 하나 써서 왔어요 ㅠ_ㅠ 봄이 바로 여름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니까요. 공지로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