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핀잔
HBappy Birthday Hope
호석은 아침부터 시끄러운 부엌 상황을 모르는 척 하느라 나름의 고충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제 생일이라고 서프라이즈로 준비하고 있을 텐데, 눈치없이 나가서 도와줄까? 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희망이는 제 엄마가 아빠 자는 중인지 조용히 확인하고 오라니까, 안방 문을 벌컥 열고 와서는 호석의 위로 올라타 물었다. 아빠 아직 자? 호석은 그 물음에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부엌에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응. 아빠 아직 자. 그러자 원하는 대답을 들은 희망이가 꺄륵 웃으며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엄마! 아빠 아직 잔대! 그래? 희망아. 아빠 주무시는 방 문 닫아주고 와야지. 웅. 닫고 오께.
호석은 안방 문이 닫힌 후에야 작게 소리내어 웃을 수 있었다.
*
정오가 넘자 기다림에 지친 호석은 문고리를 잡고 한참을 서성였다. 부엌의 소리로는 분명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아서, 지금 나가는게 옳은가에 대해 심도 깊게 고민 중이었다. 호석은 문고리를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결국 걸음을 틀어, 침대 헤드 위의 창문을 열었다. 채광이 잘 들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을 따라 큰 창문을 설치했던 게,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호석은 후드티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창문을 넘었다.
"아빠. 왜 거기로 나와?"
"... 뭐해?"
호석은 창문을 넘어 마당에 두 발을 안착하자마자, 제 눈 앞의 나란히 놓아진 네 개의 발을 발견했다. 희망이와 여주는 마당 한 켠에 놓아진 작은 텃밭에서 방울토마토 몇 개를 따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호석은 이 상황을 무어라 변명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여주는 호석이 창문으로 나온 걸 목격한 순간, 서프라이즈 파티는 망했구나. 생각하며 시무룩해졌다. 희망이는 제 아빠가 창문으로 나온 게 그저 웃긴지 키득키득 웃으며, 제 아빠의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빠 왜 창문으로 나와! 바보야? 문으로 나와야지. 호석은 희망이를 안아들었다. 정확하게는 희망이 뒤에 숨은 거였지만.
결국 쪼르르 함께 현관문으로 들어간 세 식구는 나란히 부엌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오랜 시간 음식과 씨름한 여주의 노력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제 부인이 음식에 소질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호석은 몇 배로 감동을 받아, 먹어보라는 여주의 말에도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희망이는 제 아빠가 먹지 않아 저 역시 먹을 수 없는 상황에 볼을 부풀리며, 빨리 먹자는 투정을 부렸다. 호석은 눈 앞에 보이는 잡채를 한가득 집어 입에 넣었다. 여주는 신경 쓰지 않는 척 하며, 호석을 바라보았다. 호석은 잡채를 두 번째 씹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이 엄청나게 짠 면요리를 지금 뱉는 게 현명할 지 아니면 제가 다 먹어 여주가 이 맛을 보지 못하게 해야할 지. 호석은 결국 후자를 택하며 입에 있는 면을 삼키지도 않은 채로, 잡채 그릇을 통채로 들고 마시는 것처럼. 그렇게 호로록, 다 먹어버렸다. 희망이는 이미 제 눈 앞의 계란 후라이에 영혼을 빼앗겨 제 아빠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여주는 급하게 먹는 호석을 나무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가지고 왔다.
누가 뺏어 먹어? 천천히 먹어! 봐. 너무 많이 먹어서 말도 못해. 잡채 이제 더 없는데! 희망이는 뭐 먹으라고! 호석은 잡채가 더 없다는 말에 감사하며 방긋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여주는 아닌 척 기분이 좋아져, 제가 한 갈비를 호석 쪽으로 밀어주었다. 호석은 맛보다는 정성이 가득한 생일상에 만족하며 접시를 받아 들었다. 희망이는 요리를 하며 제 엄마의 음식을 미리 먹은 기억을 더듬어 용케 맛있는 음식 혹은 케이크에만 손을 뻗었다. 여주는 오랜만에 제대로 요리를 한 탓에 긴장을 해서 몸이 좋지 않다며, 제대로 음식을 먹지 않았다. 봄으로 넘어가는 평화로운 어느 날이었다.
*
호석은 설거지를 마치고는 여주와 희망이가 낮잠에 든 것을 확인했다. 잠이 부족했을 것이었다. 호석은 대충 비니를 눌러 쓰고는 후드티를 챙겨 입었다. 물론 차키도 잊지 않고 챙겼다. 호석은 다행이도 - 요리의 맛을 생각한다면 -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여주를 위해 마트에 갈 생각이었다. 저녁상은 평소와 같이 제가 차리기 위해서. 호석이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고 이제 막 집 골목을 벗어날 무렵, 뒷자석의 작은 움직임이 백미러에 걸렸다.
"아빠. 혼자 놀러가지?"
희망이었다. 분명 호석이 나올 때만 해도 여주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아이는 제 아빠가 모자를 쓰는 모습에 바르작 일어나, 차에 탑승했다. 희망이에게 모자는 유치원 모자와 같은 거라 모자를 쓰면 친구들이 많은 곳에 갈 때 꼭 쓰는 것으로 정의 되어 있었다. 희망이는 제 아빠가 생일을 맞아 친구들과 놀러가는 줄 알고, 저도 데려가라는 때를 썼다. 호석은 희망이의 추리에 차를 멈춰 세우고는 한참 웃다가, 희망이를 조수석에 앉혀 안전벨트까지 채워주었다. 친구 대신 음식들 사러 가자. 음식이 엄마가 해준 거 아직 많은데? ... 엄마가 해줬으니까 아빠도 해줘야지. 돌려주는 거야. 고맙습니다, 하고. 솔찌키 아빠 음식 맛이가 없었지? 아빠는 너무 맛있었는데? 희망이는 맛 없었어? 엄마한테 다 일러야지. ...! 안니, 아니. 맛이가 있었는데 아빠 생일이니까 아빠 준거지. 양보해써. 내가.
그 런 양보는 됐어. 아들. 이라는 뒷말은 삼켜진 채, 마트로 향하는 부자였다.
*
여주가 좋아하는 불고기를 주메뉴로 찬거리를 산 호석은 희망이의 간식을 사기 위해, 과자 코너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탓에 높은 곳의 과자를 고르지 못하는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는 까치발을 들며 끙끙거리는 상황이었고 그 모습을 그냥 넘어갈 리 없는 호석은 빠르게 대신 과자를 집어주었다. 여자는 아이의 엄마가 아닌 아이의 언니쯤으로 보였다. 여자는 과자를 건네받으며 얼굴을 붉혔다. 고맙습니다... 작은 목소리가 늘어졌다. 희망이는 제가 가리키는 과자를 집어주지 않은 아빠에 뿔이 나서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여자와 호석은 낯선 타지에서 한국인을 만난 것에 반가움을 느끼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인이시네요. 그러게요. 감사해요. 동생이 좀처럼 떨어지려고 안 해서, 과자를 못 집었거든요.
희망이는 제 아빠와 함께 있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우다다 달려가서는 제 아빠의 바지를 잡고 늘어졌다. 우리 아빠는 정호석입니다! 이 사람은 희망이 아빠입니다! 순간 마트가 희망이의 목소리로 가득찬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착각이 들었다. 호석은 허리를 굽혀 희망이를 안아 들며 마트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타일렀지만, 무엇에 뿔이 났는지 희망이는 작은 입을 달싹이며 호석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디 갔어?] - 사랑님
[희망이도 없네?] - 사랑님
[마트 왔어. 이제 가려고.]
[알았어!] - 사랑님
*
내내 희망이의 눈치를 보며 이곳에 온 호석은 차에서 마트 봉투를 들고 내렸다.
"희망아. 아빠 이거 너무 무겁다. 희망이가 같이 들어주면 너무 좋겠는데..."
"흥."
"희망아. 아빠 좀 도와줄 수 있어?"
업써. 호석과 닮은 세모입이 대답 뒤에 따라붙었다. 업써. 희망이는 아빠 도와줄 수 업써. 호석은 그 대답을 안일하게 넘겨서는 안 됐다. 희망이는 그 뒤로도 제 아빠, 호석을 도와주지 않았다.
*
엄마! 제 엄마의 품에 곧장 안긴 희망이는 제 뒤를 따라 들어오는 호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가 다른 사람이랑 놀았어!
"응?"
"희망이가 과자 살라고 이거, 안아 해달라고 손 줬는데... 이거 안 해주고 다른 사람 도와줬어!"
"아빠가 좋은 일 하셨네. 다른 사람들 도와주는 건 좋은 거야. 희망아."
제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잠시 몸을 달싹인 희망이가 억울하다는 듯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막 다른 누나랑 놀았는데? 여주는 '다른 누나'라는 대목에서 호석을 노려보았다. 호석은 당황함에 봉투를 내려놓지도 못한 채로 변명을 했다. 아니, 어떤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어서... 그 높이 있는 거 내가 대신,
"비니 왜 썼어?"
"머리 안 감아ㅅ,"
"내가 너 비니 쓰면 너무 잘생겨서 싫다고 했잖아."
"... 아니, 그렇다고 그냥 가기에는 내가 머리를 안 감아서,"
"왜 총각처럼 멋내고 다녀?"
마자! 왜 총각처럼 못내고 해? 희망이는 제 엄마의 말을 따라했다. 본능적으로 안 거지. 지금은 엄마 편에 서야 한다는 걸. 호석은 세모입을 삐죽이며 질투에 눈이 먼 제 여인과 제 아이를 바라보았다.
*
여주는 제 남편이 멋을 내고 나간 그 시간이 제가 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나도 마트 같이 갈 걸! 다정이 병인 제 남편이 저도 모르는 사이 얼마나 다정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정해서 사랑하는데 다정해서 미운 남편이었다. 호석은.
희망이는 마트 봉투에서 과자를 꺼내 먹으며 집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평소와 다른 집안 분위기에 신발장에서 야무지게 제 신발을 챙겨신었다. 희망이 레이첼 이모네서 놀고 오께! 호석의 집에서 일 분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희망은 제 유치원 친구인 레이첼네 집에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놀러 갔는데, 오늘은 지금이 가야할 때리고 느꼈다. 그래서 작은 손으로 현관문까지 꼭 닫았다.
희망이가 집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희망이가 잘 도착했으니 걱정 말라는 내용이었다. 여주는 잘 부탁한다는 말로 답을 하고는 제 앞을 서성이며 눈치를 살피는 호석을 바라봤다. 호석은 제가 잘못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여주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여주는 제가 잘못해서 화난 게 아니라 제가 좋아서 화난 걸 알았기 때문이다. 호석은 희망이 잘 도착했대? 라는 물음으로 슬쩍 여주에게 말을 붙였다. 여주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괜히 손에 들린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나 좀 봐주라."
"... 왜. 뭐."
"보고 싶으니까. 나 좀 봐줘. 예뻐해줘. 나 생일이잖아."
"... 나 사실 아까 내가 만든 음식 조금 먹어 봤거든? 희망이랑 너 나가고 배고파서, 내가 조금 먹어봤는데."
호석은 속으로 탄식했다. 여주의 시무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맛이 없었어. 그거 왜 다 먹었어? 속 버리게.
"아니야. 맛있었어. 나 잡채 다 먹었잖아!"
"억지로 먹은 거잖아."
"아니야. 진짜로 맛있었어."
"... 진짜?"
단순한 여인은 보송한 볼을 씰룩이며 물었다. 진짜? 호석은 지금이 기회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여주를 제 품에 안았다. 순식간에 호석의 다리 위에 앉아 가슴팍에 기대게 된 여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호석은 제 품에 알맞게 안긴 여주를 토닥여주며, 마트에서 제 품에 안겼던 희망이를 떠올렸다. 이리 작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제게 의지하는 것을 느낄 때면, 호석은 지난 날의 어떤 아픔도 기억나지 않았다. 여주는 제 남편의 품에 안겨 모났던 마음을 재워나갔다. 그래. 정호석 이미 내거잖아. 호석은 결혼까지 하고서도 질투가 넘치는 제 부인이 과장을 조금 보태 좋아 죽을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사랑이 이렇게까지 덕지덕지 묻어있을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호석은 제 부인의 동그란 귀를 제 입술로 간질이다가, 제 품에서 멀어지는 여주로 인해 행동을 멈췄다. 왜. 하지마. 왜 할래. 안 돼, 간지러워. 치사하다, 나 생일인데. 모자 마음에 안 들어. 모자 벗으면 다시 안겨주나?
희망이가 들으면 제 엄마아빠가 이렇게나 유치했나 - 하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 대화였다. 호석은 비니 끝을 만지작거리며 거래 아닌 거래를 제안했다. 모자 벗으면 다시 안겨주나? 여주는 호석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행했다. 그리고는 주방 가위를 들고 왔다. 미용실에 가지 않은 지 시간이 꽤 지난 호석은 조금씩 눈을 찌르는 머리칼이 불편해서, 근래들어 더욱 모자를 애용했다. 호석은 여주가 가위를 들고 오는 순간, 불안한 마음에 손을 저었다. 여주야, 그건 아니야.
"가만히 있어야 돼. 움직이면 나 손가락 다친다?"
여주는 제 남편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호석의 약점은 여주와 희망이 뿐이었다. 여주는 조금 전 호석에게 안겨있던 자세로 다시 돌아와서는 호석의 모자를 벗겨냈다. 결 좋은 머리칼이 아래로 늘어졌다. 여주는 호석의 머리를 제 손으로 대충 빗고는 어름장을 두었다. 움직이면 나 손가락 다친다? 사실 다쳐도 여주에게 저를 맡긴 호석이 다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로 제 고통에 무감한 호석은 본인의 아픔에는 무던하기 끝이 없었다. 그래서 여주는 저를 들먹이며 조심조심 가위질을 시작했다. 이미 제 부인을 말리기에 늦은 걸 깨달은 호석은 가만히 이 상황을 받아드렸다. 제 부인이 하고 싶다는데, 머리카락 쯤이야.
*
아, 여주야. ... 귀여워. 여보, 이거는 진짜 조금 아닌 거 같아. 왜! 귀여운데? 내가 귀여울 나이는 지났잖아, 여보. 아니야, 한참 귀여울 나이야.
호석은 무엇 하나 순탄치 않은 제 생일이 행복해서, 믿기지 않았다. 맛 없는 음식을 전부 비우고도 제 잘못이 아닌 일로 애먼 투정을 받아주어야 했다.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그냥 내주었다. 남이 들으면 고개를 갸웃할 행복의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석에게 행복은 제 여인과 제 아이의 형태가 전부였다.
두 사람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스팽글 팔찌는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 오래 전 미숙했지만 서툰 마음을 나눈 아이들의 약속이 여전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였고 탈출구였던 시절이 영원이라는 이름의 시절로 이어졌다.
다정을 닮은 남자와 사랑을 닮은 여자는 어느 동화 속 왕자님과 공주님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
"압빠, 머리가 그게 모야."
"이상해?"
"못생겨져써."
"정희망. 너 아빠랑 똑같이 생겼거든. 아빠가 못생겼으면 너도 못난이야."
"(충격) (울망) 희망이 못나니 아니야!"
"맞아. 못난이."
"... 엄마아아아아!"
"여보!"
[앞머리 빨리 자라는 법]
[남자 머리 빨리 기르는 법]
[머리 빨리 자라는 샴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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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돌고 돌아서 온 겨울입니다. 기다려주셔서 고맙고 또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자주 보아요. 이제. 제가 더 잘한다는 말 말고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 다시 한 번 감사해요.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다정한 핀잔의 다정이 되어준 호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