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자취생활에 이웃 '나재민'을 심어드립니다.
1.
첫만남은 그냥 그랬던 것 같음. 그냥 난 이사를 왔고 주말에 시끄럽게 한 게 죄송해서 가진거라곤 오렌지 뿐인 것을 나눔하러 간 거였으니까.
초인종 누를까 하다가 괜히 좀 오바인 거 같아서 그냥 문 똑똑 했는데 아무도 안 나오는 거임. 두 번 정도 더 두드려봤는데도 아무도 안 나와서 없나보다 했음.
나중에 들어오는 소리 들리면 와야겠다 생각하자마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림.
"누구세요?"
얼굴 마주하는 순간에 새 세상을 본 것 같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 앞 집에 이사 온 사람인데요. 주말에 너무 시끄럽게 한 것 같아서 죄송해가지고... 이거 드리려고."
"아, 저 오렌지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오렌지보다 당신 미소가 더 상큼하다는 건 모르고 웃길래 그냥 오렌지 넘겨주고 '나 이제 들어갑니다' 하는 목례를 슬쩍 하고 뒤돌았음. 근데
"혹시..."
"네?"
"딸기 좋아하세요?"
들어가려는 사람 붙잡고 갑자기 물어보길래 당황해서 고개 끄덕였더니 기다리라고 하고선 딸기 들고 나옴. 솔직히 귀여웠다. 인정.
딸기 담긴 접시 들고 이건 언제 돌려줘야 되나 고민하면서 감사하다고 하니까 진짜 활짝 웃으면서
"서로 접시 돌려줘야 되니까 또 보겠네요."
그렇게 웃으면 접시 돌려주기 싫은데 사람 참... 여러모로 위험한 사람이었음.
2.
내가 진짜 똥촉인 사람이라 날씨를 잘 못 맞춤.
비올 거 같아서 어깨 무겁게 우산 들고 나가면 날이 금방 쨍쨍해지고 아 오늘은 비 오는 거 오바다 싶어서 안 들고 나가면 꼭 비가 옴.
그 날도 집 오는 버스 타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무슨 하늘에 구멍난 것처럼 비가 오는 거임. 오늘 비온다는 일기예보 있었는지 내리는 사람들은 거의 다 우산 있더라고요...? 그래서 까먹을 거 알지만 또 결심함. 일기예보 확인을 생활화 하자.
아니 근데 맨날 안 맞잖아...(주륵)
아무튼 그래서 진짜 쫄딱 젖어서 집에 온 적이 있음. 와중에 가방은 살리겠다고 껴안고 뛰어서 별로 안 젖어서 다행이라고 안도함. ㅋㅋㅋㅋㅋ 도어락 비밀번호 치는데 뒤에서 이제 와요? 하는 목소리가 들림. 솔직히 돌아보기 싫었음. 내 꼴이 말이 아니잖소...
"비 맞았어요?"
"오늘 우산을 깜빡해서..."
내 얘기 듣더니 감기 걸리기 전에 얼른 들어가서 씻으라는 말만 하고 들어가버림. 생각해보니까 내가 그런 꼴 보이기 싫어하는 거 알아서 눈치껏 빠진 것 같음.
중요한 건 그 다음날부터 내가 나가는 소리 들리면
"오후에 비 올 수도 있대요, 우산 챙겨요."
"오늘 흐리긴 한데 비는 안 올 거예요."
"지금 밖에 비 조금씩 와요."
맞춤 일기예보 해줌. 심지어 정확해. 원래 이웃사촌이라는게 이런 건가요?
3.
앞집사람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게 있음.
불금이라고 그닥 원하지도 않았던 동기들 술자리 끌려갔다가 집에 늦게 들어온 적이 있었음.
내가 사는 빌라가 좀 넓은 골목 제일 안 쪽에 있는데 엄살이 아니라 모든 골목이 그렇듯 어두워지면 개무서움 진짜로.
그 날도 완전 오감 바짝 살리고 걸어가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거임. 그냥 같은 빌라 사는 사람이겠지 했는데 그거 ㄹㅇ 쫓아오는거였음.
그렇게 생각 안 하고 싶은데 내가 멈추면 발소리도 멈추고 내가 좀 빨리 걸으면 같이 빨리 걷고 그랬단 말임.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너무 공포스러워서 기절할 뻔함. 내가 왜이렇게 늦게 왔을까 자책 오지고...
집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약간 뛰듯이 걸었는데 뒤에 오는 새끼도 존나 뛰는 거임;; 진짜 울고 싶어서 속으로 막 빌고 있었는데 빌라 우편함 앞에 앞집 사람이 서있었음.
안 보였으면 몰랐을텐데 센서등 켜져고 얼굴 보자마자 무슨 구원자 같아서
"자기야!"
무리수를 둔 것임... 지금 생각해도 존나 쪽팔려서 죽고 싶음.
내가 부르자마자 나랑 딱 눈 마주쳤는데 내 표정을 읽은 건지 뒤에 따라오던 사람을 본 건지 맨날 보여주던 웃는 얼굴 하더니 나한테 와서 내 어깨 감싸는 거임. 좀 당황.
"왜이렇게 늦었어. 걱정했잖아."
눈빛에 안 녹고 잘 버틴 나 진짜 칭찬하고 그 날 이후로 절대 늦은 시간에 안 다님.
수치스러운 건 뭐냐면 감사인사 오조오억번 하고 헤어진 다음 날 아침에 분리수거 하러 나갔다가 딱 마주쳤는데 태연하게
"자기야 잘 잤어?"
이러길래 쓰레기 들고 존나 튀었음. 미쳤나봐 진짜.
4.
자기야 일 있고 나서 좀 급격히 친해짐.
우리 빌라가 토요일 아침 9시가 분리수거 하는 시간인데 그 때마다 같이 나가는 분리수거 메이트 됨. (?)
그 날도 평소처럼 둘이 나가서 시덥잖은 얘기 하면서 분리수거 하는데 아랫집 사시는 아주머님이 나한테 반갑게 인사를 해주시는 거임. 핵아싸라 그런 거 존나 당황타는데 아닌 척 밝게 인사함. ㅋㅋㅋㅋㅋㅋ
"그럼 둘이 같은 층 사는 거야?"
"예 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둘이 잘지내요. 왜,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있잖아. 요 앞에 공원 꽃도 많이 폈는데 둘이 구경도 좀 갔다 오고"
생각해주셔서 하신 말씀이겠지만 ㄹㅇ 당황스러웠다고요... 어머님 무슨 우정조작단인 줄 알았어요...
앞집남자는 이런 거 익숙한지 네, 네 대답도 잘 하면서 어머님 말 듣고 있었음. 정말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나이임.
어머님이 오지랖 부려서 미안하다고 호호 웃으시면서 먼저 들어가시고 남은 저는 무슨 어색함의 아이콘이 되었답니다. 할많하않.
"아들이 우리 또래라서 반가우셨나봐요."
"아... 그렇구나..."
"그래서 생각은 좀 해봤어요?"
"뭐를요?"
진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게 얼굴에서 티가 났는지 또 고개 숙여 웃던 남자가 내 손에 있던 페트병 대신 버려주면서 대답하는데 그걸 왜 모르냐는 말투였음.
"공원에 꽃 보러 가는 거요."
공원에 벚꽃이 예쁘더라고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
-선생님들 아이디어 뱅크 인정합니다.
-버릴 소재가 하나도 없어서 이렇게 간간히 끼워쓰는 방식으로 꼭 다 써보기로 결심했어요.
-그럼 1일 1연재로는 부족할 것 같은 느낌...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