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배우인 어머니와 아버지를 따라서 5살, TV를 통해 처음 보게 된 의사선생님이 멋있다면서 의사를 하고싶다는 그의 의견은 철저히 짓밟힌 채, 가문의 뜻을 내세우고는 너 역시 배우의 길을 가야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그는 7살이라는 나이에 연기학원에 들어갔다. 부모님이 유명한 배우라는 것을 알고있는 주변에서의 시선은 어린 루한에겐 부담으로 다가왔다. 조그마한 실수도 그냥 지나치는 일 없이, 다른 학생보다 더 많은 꾸중을 들으며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 했다. 루한, 루한… 자신을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면, 무조건 미소를 지어야 했다. 슬퍼도 웃어야 했고 화가 나도 감정을 숨기며 웃어야만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될 사람은 감정을 숨길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부모님이 나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교육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 채로 나는 자라왔다. 레드카펫을 밟으며 포토라인에 서서 포즈를 잡으며 웃는 배우들의 그 우아한 모습을 루한은 아주 혐오스럽게 여겼다. 혹독한 훈련을 거친 끝에 드디어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낸 루한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엔 충분했다. 독특한 외모와 아직 10살도 넘지 않은 어린아이라고 하기엔 뛰어난 연기력에 사람들은 루한에게 박수를 보내며 저마다 칭찬하기 바빴다.
부모님은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흡족해하며, 루한의 손을 꼬옥 잡아주고는 말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자.’
루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웃기만 했다. 화내면 안 돼. 말대꾸 해서도 안 돼. 그저 웃으며 그들의 말에 따라야만 해.
그렇게 하루하루를 가식과 고통의 나날로 보내온 루한은 이번엔 드라마가 아닌 영화에 캐스팅 되었다. 이번엔 아역이 두 명이란다. 나말고 또 누가 있는 걸까?
갑자기 불안함이 밀려왔다. 내가 주목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항상 주목을 받는 사람은 나였는데. 몸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온 몸이 빨개질 정도로
불안해졌고, 긴장 되었다. 이번에 새로 데뷔한 신인 아역배우라는데 얼마나 대단한 아이길래 대한민국 감독 TOP 3 안에 든다는 박 감독의 영화에
단번에 캐스팅이 된거지?
그리고 촬영 첫 날, 루한의 눈 앞에 보인 것은 작고 조용하고 하얀 아이였다.
"자 루한. 가서 인사해야지? 엄마가 항상 얘기했듯이, 인사를 먼저 건네는 것은 기본 예의란다."
루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 아이가 아니꼽긴 했지만, 일단 엄마 말이라면 다 따라야 했던 루한은 천천히 그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자기보다 작은 몸집에 굉장히 조용해보이는 그 아이는 루한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표정 없이 덤덤했던 그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며 루한에게로 달려왔다.
"안녕? 너도 이 작품 출연하지? 이름이 뭐야?"
".. 루한."
"나는 시우민이야. 아니아니, 민석이라고 불러줘. 진짜 이름은 김민석이고 가짜 이름은 시우민이야. 민석이가 더 친근하지?"
아아, 진정한 비극의 시작은 지금부터라는 것을 어째서 깨닫지 못하였을까. 그것을 알았더라면, 처음 본 순간부터 그 때 그를 내쳤을텐데.
《동성애자배우x유명배우》
부제 ; 패왕별희(覇王別姬)
대한민국에서 이 사람을 모르면 간첩이다. ‘국민배우’라는 수식어가 항상 곁을 따라다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스물 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도 그 연기력을 인정받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가 있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사람들을 대한다고 해서 별명이 ‘미소천사’인 배우가 있었다.
그의 연기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치명적이게 아름다웠다.
"인기는 여전하시네요, 루한씨."
"별 말씀을요. 커피 좋아하시죠?"
루한은 오랜만에 집으로 찾아온 손님,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영화기획사의 관계자 크리스를 맞이해주었다.
고급스러운 외모와 옷차림과는 달리 인스턴트 커피만을 추구하는 그를 위해 그동안 꺼내지 않았던 인스턴트 커피스틱을 꺼내 꽤 값비싸보이는 찻잔에 커피를 한가득 타서
크리스에게 건넸다. 크리스는 살짝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커피를 음미하는 듯 천천히 들이켰다.
"그런데 .. 크리스씨는 이 시간에 남의 집에 그저 커피 한 잔 마실 목적만 가지고 불쑥 찾아올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닐텐데요."
"아, 저를 너무 잘 아시네요. 네, 용건 있어서 찾아온거 맞아요 루한씨. 귀신 같이도 알아채셨네요."
"당연하죠. 크리스씨를 몇 년이나 봐왔는데요. 어릴 때부터 쭉 봐왔던 사람이니까."
크리스는 말없이 커피를 들이켰다. 두 사람 사이엔 정적만이 흘렀고, 마침내 크리스는 자신의 용건을 얘기 할 마음이 들었는지
꽤나 묵직해보이는 서류가방에서 여러 장의 종이들을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한 장씩 놓기 시작했다. 루한은 꽤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고
몇 장 정도가 테이블에 더 놓여서야 크리스는 자신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루한은 맨 위에 올려진 종이 한 장을 집어들어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게 뭐죠?"
"루한씨도 아실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 최고의 감독 박찬욱씨."
"네, 알다마다요. 그런데 박찬욱씨는 왜요?"
"박 감독님이 새로운 작품에 시도하고자 하시는데, 그 작품에 루한씨를 주인공으로 넣고싶다네요."
루한은 살짝 표정을 구기는 듯 하다가 바로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더이상 얘기를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종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단호한 말투로 자신은 그 영화를 찍을 생각이 없다고 크리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크리스는 예상 했던 반응이 나왔다는 듯이 흠, 하고 팔짱을 끼고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예상 못했던 반응은 아니지만, 박 감독님 영화 캐스팅 제의를 거부했다는 것은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텐데요."
".. 크리스씨 ."
자신을 나지막히 부르는 목소리에 그저 바닥에 시선을 꽂은 채로 조용히 얘기를 이어나가던 크리스는 고개를 들어 루한을 바라보았다.
루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종이를 만지작거리는 손동작이 부드러웠다.
"제가 배우 생활을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지, 크리스씨는 알고 있잖아요."
"..."
"원치 않았던 꿈이었어요. 절망적이었죠."
그리고는 말을 멈추더니 커피를 한모금 들이킨다. 집 안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 루한은 조용히 손에 종이를 다시 집어들고는 한 장 한 장 읽어나갔다.
크리스는 그런 루한을 아무런 말 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보았다.
"이 계약서를 그동안 수도 없이 봐왔어요.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혐오스럽기 짝이 없어요."
"... 루한씨."
"그리고, 찢고 싶었어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멀리 도망치는 상상도 했죠."
연기를 하면서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크리스의 표정도 점점 굳어갔고, 루한은 여전히 자조적인 미소를 띈 채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어린 루한의 모습부터 지금의 루한까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봐왔던 크리스는 루한의 노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 노력이 자기 자신을 위한 노력이 아닌 그의 부모님의 만족을 위한 노력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새장 안에 갇힌 새처럼 표현의 자유를 얻지 못한 채로 기쁨의 감정 없이 살아왔던 루한이 딱 한 번 진실된 웃음을 보였던게 언제인가.
아마도 촬영씬 중에 의사놀이를 하는 씬이 있었는데 그 때의 루한은 정말 해맑았다. 진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그런 그는 지금, 진정한 의미의 미소를 모른 채로 가식 속에 파묻혀진 사람처럼 지내고 있다.
"정말 싫어요. 이 생활이."
"루한씨, 제가 루한씨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크리스씨가 정말로 절 불쌍하게 여겼다면 이런 종이들 따위를 들고 제발로 우리 집에 찾아오진 않았겠죠. 크리스씨 직업이 뭐에요? 영화사 관계자잖아요?
좀 유명하다 싶은 배우들, 감독이 마음에 들어하는 배우들 꼬시고."
"그래요. 그게 제 직업이에요. 그래서 루한씨 설득하러 일부러 바쁜 시간 쪼개서 온건데, 성의 무시할거에요?"
그 성의를 인스턴트커피 한 잔으로 갚을 순 없는거겠죠?
실없는 농담을 하던 루한은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웃음은 어색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아름다워 보이겠지만,
속사정을 아는 크리스의 눈엔 그저 어색하게만 비춰지는 그의 미소였다.
크리스는 이렇게 하다간 루한이 절대 넘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비장의 카드를 꺼내기로 했다.
그는 다시 바닥에 있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루한은 또 뭐냐는 듯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크리스가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이 영화 출연진을 보고도, 루한씨는 그런 말이 나올까?"
한 장 한 장 보여주는 사진, 사진을 보여줄 때마다 여유로웠던 루한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갔다. 오세훈, 박찬열까지는 표정변화 없이 바라보던 루한이
유독 한 장의 사진에만 예민하게 반응 했다. 그 사진 속엔 시우민이 있었다.
시우민, 김민석.
루한은 시우민을 굉장히 싫어했다. 아니 미워했다. 항상 그를 이겨야만 했고, 어디서든 지기 싫어했다.
연기로는 그보다 위에 있어야만 했고 어딜 가든지 이단 김민석 칭찬만 나오면 무조건 표정부터 굳히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과의 시선이 맞닿으면
바로 표정을 풀고 웃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어릴 때부터 그 놈의 라이벌이라는 관계는 뭔지, 같은 나이에 데뷔 해서 서로 다른 드라마에 출연 했다.
그 때까진 시우민의 존재를 몰랐던 루한은 어린 나이에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인기 많은 존재라는 생각에 깊게 빠져있었다.
항상 자기 자신을 왕자님처럼 받드는 이 세상 사람들을 온통 자신의 신하처럼 여겼다. 단, 부모님만 빼고. 부모님은 여왕과 왕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에게 걸림돌이 된 존재는, 시우민이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원래 뼛속부터가 밝은 아이인지 항상 활발한 그 아이는 루한 못지않게 주목을 받았다.
같은 영화를 찍으면서 루한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처음엔 시우민이 맘에 들었다. 저 아이 역시 날 받들 사람 중에 한 명이겠구나. 라고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날 절망감에 빠지게 만든 사람이었다. 나중에 가서는 그런 생각에 생각이 흐트러져 연기도 잘할 수 없었는데, 그에 비해 시우민은 끝까지 완벽한 연기를 선보였다.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이 아닌 시우민에게 쏠리는 것을 보고 분노를 느꼈다. 어느 날은 시우민이 자신에게 다가와,
"여기서 뭐해? 왜그렇게 표정이 안좋은 거야 루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았는데 루한은 매정하게도 그런 시우민을 한 번 슥 노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가버렸다.
시우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런 루한을 바라보기만 하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싫은가? 왜 저러지? 시우민은 아닐 거라면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계속 말을 걸었지만 루한은 계속 쌀쌀맞은 태도로 자신을 대했다. 그러다가도 어른이 오면 바로 표정을 싹 바꿔서 다시 미소를 짓는데,
시우민은 그런 루한이 낯설었다.
그리고 촬영 마지막 날, 그 날까지도 루한은 시우민을 싫어했다. 하지만 시우민은 루한을 좋아해주고 이해해줬다.
그 날 민석은 시우민이 해야 할 일을 하려고 연기를 하고, 어른들께 칭찬을 받은 것밖엔 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루한은,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끔찍하니까. 오늘을 끝으로 이런 지독한 일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
"루한 ..? 왜그래? 내가 무슨 잘못한거야? 내가 잘못했어, 응?"
"말 못알아들어? 꺼지라고 시우민. 꺼지란말야!!"
그러면서 시우민을 강하게 밀치고는 촬영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시우민은 루한에게 큰 상처를 받았지만, 절대 미워하진 않았다. 시우민은 루한을 좋아하니깐.
그 땐 그저 친구로만 좋아했으니깐. 시우민에겐 친구란 우정과 사랑으로 감싸줘야 할 존재라고 부모님께 배워왔고, 루한 역시 시우민에겐 소중한 친구라고 시우민 자신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시우민과 루한은 다시는 같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루한과 시우민을 비교하기 바빴다.
누구 연기가 더 낫네, 누가 더 좋네.
그런 말이 들려올 때마다 루한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꽤나 크게 받았고 그것은 시우민을 완전히 혐오하게 되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 회상이 끝나고, 다시 시우민의 사진을 빤히 보고있자니 역겨워서 토가 밀려나올 지경이었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내 인생의 라이벌을 같은 영화에서 만날 수도 있다니.
"루한씨, 알잖아요? 요즘 시우민씨 공백기 깨고 슬슬 다시 나오고 있는거?"
"..."
"영원한 라이벌의 화려한 성공을, 두 눈 뜨고 지켜보고만 있을 건가요?"
항상 자신이 최고여야만 했다. 그동안 시우민이 TV나 스크린을 통해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박 감독이 노리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시우민까지 포함 되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내가 최고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은 똑같았다.
이미 다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들이킨 루한은 커피잔을 조금은 강하게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이 크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크리스씨."
"네?"
"영화 내용이 어떻게 되죠?"
크리스는 이제서야 말이 통한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띄며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루한은 손에 쥐고 있던 다른 종이를 내려놓고 크리스가 건네준 종이를 받아들었다.
종이 속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려가던 루한의 표정이 조금씩 썩어들어갔다. 그럴줄 알았어. 크리스는 그의 표정을 캐치한 듯, 재빨리 종이를 뺏어들었다.
"충격적인가요?"
"…이게 뭐에요? 대체 무슨 내용이에요?"
"루한씨, 패왕별희라는 영화 알아요? 들어봤으려나?"
루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내용은 대충은 알고 있었다. 본 적은 없지만, 아무튼 경극을 주제로 한 영화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종이에 쓰인 말로는
박 감독은 패왕별희라는 영화 소재를 한국으로 끌고와 새로이 리메이크를 하겠다는데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경극이라는 소재가 빠진 장르.
샬로와 데이는 어릴 적부터 쭉 훈련을 해오며 우정을 쌓아왔다. 몇 년간 같은 연극에서 공연을 하게 되는데 한 사람은 여자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러다가 샬로는 사창가의 창녀 주샨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데이는 그런 둘을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대충 그런 내용이라고 하는데 ..
그런데 박 감독은 루한이 남자 역할. 즉 샬로가 되길 원했고, 시우민은 남장여자 데이 역할이 되기를 원했다.
아무래도 예쁘장한 시우민에겐 남장여자 역할이 잘 어울린다나 뭐라나.
"박감독님은 대체 왜 이런 영화를 시도해보려고 하시는 거죠?"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이잖아요. 그게 박감독님 매력이고, 영화의 재미를 가미하는 요소가 되니깐."
"아, 이 사람 정신세계 독특한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정도일줄은."
그래서, 할거에요 말거에요 루한씨? 거의 다 넘어온 분위기였다. 시우민을 죽도록 혐오하는 자신이, 시우민과 그런 연기를 해야 한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시우민이 자기보다 잘 되는 꼴은 죽어도 보기싫었다. 그 정도로 시우민이 싫었기에 루한은 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민석씨 콧대, 루한씨가 단단히 짓밟고 싶지 않아요?"
"… 그러면 촬영은 언제부터죠 ?"
시우민이 잘 되는 꼴은, 죽어도 보지못하니깐.
"민석아, 민석아?"
"아. 응? 미안, 멍 때리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멍을 때리는 거야?"
재미있다는 듯이 차가운 얼음이 들어있는 잔을 민석의 볼에 갖다대며 개구진 웃음을 짓는 경수였다.
그런 경수를 보며 민석도 살짝 웃으며 경수의 손에 든 얼음잔을 받아들었고 단숨에 그 얼음들을 입안에 넣어 와득와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씹어먹었다.
경수는 일반인이지만 민석의 곁을 오랫동안 지켜준 든든한 친구였기에, 민석의 집에 자주 드나들 수 있었다. 민석은 자신의 위치와 걸맞게 넓은 집에 혼자 살고 있었고
그 집 앞은 항상 극성팬들이 득실거렸다. 경수가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극성팬들은 그런 경수를 보며 저마다 소곤거리기 바빴다. 저 남자 존나 잘생겼다고.
민석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들어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야."
"응?"
"나 이 영화 찍는거 잘하는 거 맞아?"
"당연하지. 누구 영화인데, 우리나라 최고로 인정받는 감독이잖아. 찍으면 대박날 걸?"
아니, 그건 알고 있었다. 민석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몇 년 전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민석은 루한을 다시 만날 날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 했건만.
모든 영화 출연을 거부하고 있다는 루한의 소식을 접한 민석은 박 감독이 주인공으로 민석과 루한을 캐스팅 하려 한다는 말에 안심했다.
루한은 어차피 영화를 찍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 뻔했다. 상대 역은 자신이었는데, 루한은 자신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루한은 영화를 찍지 않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계약서에 거침없이 싸인을 하고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루한은, 영화 출연을 선언했다.
그동안 모든 영화계의 러브콜에도 아랑곳 않고 집 안에서만 지냈던 루한을 모두가 주목 했다. 분명 루한은 이 영화의 내용도 알 것이고
상대역이 민석 자신이라는 것도 알 것이다. 그런데도 루한은 이 영화의 출연을 결심했다. 민석으로썬 여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루한, 말이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
"루한이 왜? 그 일이라면 벌써 몇 년 전 일이야. 걔도 까먹고 지내겠다."
"아니. 그 사람은 날 진심으로 싫어하는 듯 보였어. 그 눈빛을 아직도 난 잊지 못해."
정말로 자신을 경멸하는 듯 했던 그의 눈빛은, 큰 상처가 되었고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워낙 소심한 성격인 민석인지라 그런 것 하나에도 상처를 받는데
어린 나이에 꺼지라는 말을 듣고 자신을 벌레보듯 했던 루한의 표정은 여전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촬영장엔 같은 또래의 아이라고는 루한밖에 없어서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처음에는 나와 얘기도 잘나눠줬고 잘웃어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말 화사한 꽃과도 같았다.
그래, 코스모스. 비유하자면 코스모스같은 아이였다.
"지금이라도 계약 파기할까?"
"이미 계약서에 도장에 싸인까지 했는데도?"
"나, 솔직히 너무 두려워. 또 그만큼의 상처를 두 배로 받을까봐."
경수는 그런 민석이 안타까웠다. 그 녀석이 뭐길래, 민석이에게 그정도로 큰 상처를 줬을까.
작지만 강해보였던 민석의 어깨가 오늘만큼은 축 처져있는 듯 했다. 루한은 그럴 사람이 아닐 것 같았다. TV로 봐왔던 루한은, 항상 웃고 있었고 모두에게 친절한 남자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왜때문에 민석에게만 그러는 것인지 경수 자신도 답답할 노릇이었다. 자신의 소울메이트나 다름 없는 민석의 불안한 모습에
화까지 날 지경이다.
"민석아. 그런데 넌 그런 말도 곧잘 웃어넘기는 사람이잖아?"
"응… 그렇지.."
"그런데 왜 유독 루한의 말에 그렇게 큰 상처를 받는 거야? 너랑 내가 저번에 싸웠을 때도, 넌 내가 아무리 심한 말을 해도 상처 받은 표정을 짓지도.
그렇다고 해서 슬픈 표정을 짓지도 않았어. 혹시 어린 나이에 그런 심한 말을 들어서 그런 걸까?"
"그건…. 그래. 그런 것 같다."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민석을 보며, 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릴 때의 충격은 커서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는구나.
그런 민석의 어깨를 감싸고 토닥거려줬다. ‘괜찮을거야. 다시 만나면, 그 땐 그냥 연기만 같이 하는 파트너지 촬영이 끝나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잖아?’
라며 민석을 위로하는 경수였다. 민석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경수의 손길을 느끼며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런게 아니야, 경수야. 너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야. 민석은 목에서 튀어나올랑말랑 하는 말을 겨우 집어삼키며 그저 그의 위로를 듣기만 했다.
"그러면 촬영은 언제부터래?"
"아마 촬영시작까진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인터뷰도 있고 스케줄이 많이 잡혀서."
인터뷰는 일주일 뒤였다. 캐스팅 된 배우들과 감독을 모아서 카메라 앞에서 그 자리에서 질문하고 받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인터뷰 자리엔, 당연히 루한도 섞여있을 것이다.
민석은 그런 루한을 보고 아는척 하고 싶어할 것이다. 루한, 안녕? 오랜만이야! 라고 오랜만에 만난 친한 친구처럼 친근한 인사를 건네고 싶을 것이다.
가볍게 포옹을 하며 그동안 잘지냈냐고 안부를 묻고 싶을 것이다. 너 정말 잘생겼구나? 라고 가벼운 말들을 주고받으며 미소 짓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석은 그 꿈을 깰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루한은, 민석을 싫어하니까. 아니 혐오하니까.
아름다웠던 데이, 비겁했던 샬로.
「오늘 인터뷰 날이지? 화이팅! 잘하고와」
「고마워 잘하고올게~」
가볍게 친구와 대화를 주고받은 민석은 한숨을 쉬며 매니저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역시나 극성팬들이 민석의 얼굴을 보기위해 고개를 쭉 내밀며 서있었고
민석이 나오자 비명에 가까운 함성을 지르며 저마다 민석의 몸을 만지려고 애를 썼다. 민석은 매니저의 보호를 받으며 그저 팬들을 보며 웃어주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랐다. 제발 극성팬들이 좀 갔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은 채, 그저 웃기만 할 뿐 이었다. 아이돌도 아니고 내가 무슨.
"왜 웃어주는 거야?"
"뭐가?"
"저런 극성팬 애들은 단단히 혼을 내줘야 한다고. 웃기만 하면 어떻게 해? 애들이 더 날뛰잖아."
"저 사람들도 내 팬인데, 싫어도 어떡해. 나 좋다는 사람들인데."
그정도로, 민석은 착해빠진 바보였다.
인터뷰 장소로 향하는 길이 민석에겐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루한을 만나면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무시해야할지.
민석은 루한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했다. 적어도 인사 정도는 받아주지 않을까. 나에게 웃어주진 않을까.
행복한 기대에 부풀어 민석은 잠시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
잠에 든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차는 벌써 인터뷰장 입구까지 도달했고 매니저는 도착했다며 민석을 흔들어 깨웠다.
잠깐의 꿀잠을 즐긴 민석은 눈을 비비며 창밖을 바라보았고 벌써부터 많은 팬들이 배우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 웅성거리며 민석이 탄 밴을 가리키며
밴 앞으로 몰려왔다. 민석은 잠시 표정이 굳는 듯 싶다가 그 표정을 무섭게 싹 바꿔 금세 웃는 표정이 되더니 차 문을 열고 조심스레 하차했다.
"헐, 민석오빠 존나 잘생겼어. 오빠 여기 좀 봐주시면 안돼요?"
"오빠!! 오빠 진짜 좋아해요!!"
민석은 그런 팬들을 보며 그저 웃기만 할 뿐, 별 다른 말 없이 인터뷰장으로 들어섰다. 밴 몇 대가 주르륵 서있는 것을 보면 벌써 배우 몇 명은 도착해있단 얘기인데.
과연 그 사람 중에 루한이 있을지 두근거리는 마음과 함께 인터뷰장에 입장했다.
인터뷰장엔 많은 기자들이 수첩과 카메라를 들며 객석에 앉아있었고 민석이 입장하자마자 그 눈길은 모두 민석에게로 쏠렸다.
카메라 셔터 눌리는 소리만이 인터뷰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무대 위엔, 요즘 한창 뜨고있다는 아이돌그룹 EXO 멤버 찬열이 서있었다.
"김, 민석씨?"
"아. 안녕하세요 찬열씨. 평소에 노래 많이 듣고 있어요."
사실 노래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멜로디랑 제목만 대충 아는 민석은 예의상 웃으며 찬열에게 말을 던졌는데, 찬열은 감격에 찬 표정을 지으며
‘ㅁ, 민석씨가 내 노래를 알고계셔!’라며 방방 뛰었다. 사실 노래 안들어봤는데 .. 미안해진 민석은 이따가 꼭 노래를 들어보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박찬열 이 사람은
왜이리 키가 크고 잘생긴 것일까. 괜히 위축되서 대충 자리를 잡고 앉으니까 냉큼 그 옆에 자리하는 찬열이었다.
"평소에 민석씨 나오는 영화 진짜 자주 봤는데. 가까이서 볼 줄이야 .."
"감사합니다. 영광이에요."
성격이 참 쾌활하다. 곁에 친구를 많이 뒀을 것 같은 그의 성격에 민석도 어느새 함박웃음을 지으며 찬열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대 밑에서
약간 딱딱한 표정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길래 살짝 쫄아서 찬열에게 곁눈질을 하며 저 사람 누구냐고 물어보니깐, 자기 매니저라는데.
오늘따라 긴장해서 표정이 저런 것 같다고. 가수보다 매니저가 더 긴장한다면서 낄낄 웃어대는데, 저건 긴장의 표정이라기 보단 약간 화난 것 같은데.
"아 그런데 민석씨. 그거 아세요?"
"네?"
"오늘 루한씨는 인터뷰 하러 안 온대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쳐다보니깐, 사정이 생겨서 못온다는데. 그 사정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런 자리에까지 불참한다는 것인지.
한 편으로는 다행이었지만, 또다른 마음은 왜인지 모르게 섭섭한 마음이 조금씩 밀려왔다. 오랜만에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상처를 받아 놓고도 막상 루한을 보고싶어하는 민석 자신의 마음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며 그저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 날의 기억을 다시 되새긴다.
"그러면 .. 네 이름은 뭐야?"
"…루한, 루한이야."
"루한? 와, 이름 진짜 멋있다. 왕자님 같아!"
"그래? .. 너도 멋있어. 시우민."
"시우민 말고 민석이라고 불러도 된대도!"
"나는 시우민이 더 좋아. 시우민, 시우민. 슈밍."
루한은 항상 나를 시우민이라고 불렀다. 촬영 마지막 날까지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그 순간까지도.
루한은 나를 민석이라고 부르지 않고 시우민이라고 불러주었다. 슈밍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던 햇살같았던 그 아이를, 민석은 잊지 못하겠다고.
아무리 자신을 싫어한다고 한들, 자신을 항상 시우민이라고 불러주었던 그 착했던 아이를 민석은 잊지 못하고 있다고.
샬로는 데이를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않았었다.
세훈/됴요미/콩콩이/해바라기/씌밍쓰/햄슈터/박력분/까탈레나/ 2반/씨스루/징징이/딸기우유/달달/듀냐듀냐/틴트/홈런볼/꺄룩/엄지공주 멜로디/잠온다/깜뚱/차녈짱/블리/용마/아모닉/교정기/오여미/늬늬늬/ 시나몬/뿌요오센오센/치킨/하늘하늘해/핫초코/허니치킨세트/복숭아향/ 탕수육/앓이/산딸기/버스/늴리리야/권지용/예헷/루절부절/맛동산/체리/ 하하늬/슈밍만두/심키/엘라스틴/원주민/김간장/널사랑하디오/장미소년/파랑에 입력하세요.Remember nickname♡ (암호닉 신청 大환영)
등장인물 크리스, 도경수 추가 됐습니다!
다음 편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 되겠네요 지금까진 과정이었고요 하하하
진지하게 이야기를 쓰려니까 힘들군요 앞으로 패왕별희는 이틀에 한 번씩 올라올거에요!
분량도 조금씩 늘리면서 이야기도 생각해가면서 써야하니까요 ..
오늘은 구독료 없는 날이니까 구독료 팍팍 올렸습니다. 뭐 내일부터 다시 구독료는 20P로 내릴 겁니다! ^^b
그럼 수요일에 뵈요.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