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글
[지원한빈] 순도 99%
여권 다 이리 줘. 차분하게 손을 내미는 진환이 형에게 티켓이 달린 여권을 건네주었다. 동혁이, 준회, 윤형이 형도 각자 한 명씩 진환이 형에게 여권을 내밀었고, 나는 이어폰을 두 귀에 꽂아넣고는 딴청을 피우는 지원이 형의 손에서 여권을 빼앗아 그것도 넘겨주었다. 지원이 형은 그제서야 왼쪽 이어폰을 빼고서 눈짓으로 내게 물었다. 왜? 나는 진환이 형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형이 달래잖아. 지원이 형은 쩍쩍 입맛을 다시며, 아까 벤 안에서 미처 다 먹지 못하고 남겼던 비타민을 마저 입 안에 털어넣었다.
묘하게 으슬으슬한 공항 공기 때문에 초록색 가디건을 꼭꼭 여미고서, 모자를 고쳐 썼다. 지원이 형은 오른쪽 이어폰 마저 완전히 빼고는 목에 걸었다. 공항이 유난히 북적였다. 커다란 놀이공원에서 엄마 손을 놓칠 새라 불안불안한 아이처럼 어딘가 불편하게 걸리적거려서, 나는 일부러 윤형이 형과 동혁이 사이에 바투 섰다. 이제 짐 검사를 하러 들어가긴 해야하는데, 출국 시간까지는 그래도 여유가 꽤 있었다. 나도 음악이나 듣고 있을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고 이어폰을 꽂았다. 아무 음악이나 재생하고는, 양쪽 귀에 이어폰을 꾹 눌러놓고서 휘파람을 불며 몸을 빙글빙글 돌리는 지원이 형의 옆에 붙었다.
지원이 형이 옆에서 팔꿈치로 나를 쿡쿡 찌르며 입을 무어라 조물거렸다. 나는 이어폰 한 쪽을 빼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응? 지원이 형은 한 번 피식, 웃고서는 말을 되풀이했다. 음악 뭐 듣고 있냐고. 나도 그냥 마구잡이로 재생시킨 노래라서, 딱히 누가 부른 어떤 노래다―하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양쪽 귀에서 이어폰을 두쪽 다 빼서는 지원이 형에게 내밀었다. 들어봐. 지원이 형은 이어폰 대신, 이어폰을 슬쩍 잡은 내 손을 콱 움켜쥐어서는 제 귀에다가 갖다대었다. 아까 계속 주머니에 손이라도 넣고 있었던 것인지, 형의 손바닥이 약간의 습기와 함께 뜨끈했다.
형은 고개를 슬그머니 숙여서는 내 손에 들린 이어폰을 귀에다가 꽂고서, 내가 듣고 있었던 음악을 들었다. 형은 입으로 한 번 흥얼거려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그러쥔 내 손등을 도로 내려버렸다. 뭐 이런 노래를 듣고 있냐. 형이 실실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리길래, 나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재생 목록을 확인해보았다. 이상한 뉴에이지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게, 나 이거 왜 듣고 있었지. 나는 머쓱하게 샐쭉대며 음악을 꺼버렸다. 생각 없이 들으니 아무 것이나 재생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공항이 꽤 어지러운 탓도 있었다. 사람이 참 많았다.
난 이거 듣고 있었어. 지원이 형은 고개를 내리깔고 웅얼거리더니, 주머니 속에서 도로 핸드폰을 꺼내 음악을 재생시켰다. 그리고는 내가 한 것과 똑같이 이어폰 양쪽을 빼어서, 내 귀에다가 꽂아주었다. 큼지막한 손가락 두개가 각각 내 귓볼과 귓바퀴에 슬쩍 닿았다. 형은 떠나는 그 설렘답게 상쾌한 음악을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평소 묵직한 것만 듣더니, 웬일로 경쾌한 팝을 듣고 있었다. 뜨끈한 손가락이 꼬물거리더니, 이내 형은 볼을 감싸쥐듯 손바닥을 펴고서 손가락 끝으로만 이어폰을 꼭 눌러주었다. 어때, 신나지? 형이 입모양으로 물었다. 나는 볼에 맞닿은 형의 손바닥에 온기가 도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주억거려주었다.
이따가 창가에 같이 앉자. 그렇게 말하는 형의 손이, 다시 이어폰을 빼서는 도로 가져갔다. 나는 동조해주었다. 창가 좋지. 구름도 보고…. 내 말에 지원이 형은 싱긋 웃으며, 제 이어폰을 흔들어보였다. 그리고, 음악도 같이 듣자, 가는 내내. 수줍은 사춘기 소년처럼 말하는 모양이 웃겨서,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설핏 미소지었다. 형의 손바닥이 닿았던 귀밑이 홧홧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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