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너를 본 순간 - 사랑하는 은동아 OST / Sad scene - 적도의 남자 OST
경성 비밀결사대 17
written by 스페스
천고가 높은 레스토랑 안은 꽤나 시끌벅적했다. 유럽풍의 고급스러운 실내 안으로 조선말과 일본어가 어지러이 뒤섞였다. 예약석은 식당 안쪽 창가에 위치했다.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그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심장께가 간질거렸다. 거듭 마주치는 시선에 남자는 헛웃음을 짓다가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여전히 웃고 있는 눈매는 숨길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민윤기씨.”
테이블 곁에 선 직원의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여직원은 윤기를 향해 아는 체를 하고는 짧게 안부를 물었다. 이윽고 옆구리에 낀 메뉴판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직원이 곁눈질로 나를 훑어보았다. 미묘한 시선에 괜스레 위축되었다. 경성역 2층, 레스토랑 그릴에 발을 들인 이후 줄곧 그랬다. 앉아있는 사람들의 옷차림, 태도, 공간이 내뿜는 고압감은 상당했다.
“뭐 먹을래?”
낮은 목소리가 상념을 끊어냈다. 그가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나 또한 손에 쥔 메뉴로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흰 종이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단어 투성이었다. 데미그라스. 콘소메. 로스트비프. 위스키 줄렙…….
머리가 띵했다.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종이를 높게 들어 올려 달아오른 얼굴을 가려보았지만 당황스러움은 감춰지지 않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떤 음식인지 모르는데 차마 아는 체를 할 수는 없었다. 남자는 익숙하게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곧이어 주문서를 쥔 여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쭈뼛거리는 순간, 그가 선수를 쳤다.
“오늘은 내가 추천한 거 먹겠다면서. 나랑 같은 걸로요.”
그가 다시금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머지않아 직원은 꽤 큰 은색 대접을 들고 나타났다. 식기 안으로 물이 찰랑거렸다. 안 그래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대접을 집어 들자,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손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윤기씨 어디 아파요? 감기?”
“어? 아니.”
그 이후로도 그는 몇 번이나 기침을 뱉었다. 내게 머물던 남자의 눈길이 곁에 선 직원에게로 향했다. 조소를 띤 여자가 알 수 없는 눈초리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안가요?"
그가 여직원을 향해 말했다. 꽤 날이 선 음성이었다. 그러자 여직원이 당황한 낯으로 턱짓을 했다. 물이든 식기와 얇은 수건을 가리키는 듯했다. 빨리 마시라는 건가.
다시금 물을 마시려는 순간, 그가 먼저 대접으로 손을 뻗어 물을 들이켰다. 곁에 선 직원의 눈이 커졌다.
“오늘은 좀 덜 시원하네요.”
그는 직원에게 쏘아붙이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곁에선 여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금세 자리에서 사라졌다.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왜 저렇게 놀랐을까요? 자꾸 옆에서 서성이는 것도 좀 이상하고.”
“부러워서.”
“뭐가요?”
“우리”
창가로 시선을 돌린 남자는 턱을 괸 채로 피식피식 웃었다. 그의 얼굴 위로 석양이 내려앉았다. 붉게 물든 그의 모습이 마치 그림 같았다. 그가 미소를 숨기지 못하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처음 만난 날 생각난다.”
“미츠코시 천변 카페에서 맞선 본 거요?”
“어, 쌈닭이 나한테 허혼서 준 날.”
"아! 맞다. 허혼서."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태우지 말 걸”하고 말끝을 흐리는 통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첫 만남을 곱씹고 있던 사이 차례로 음식이 나왔다. 그가 고기를 썰어 내 앞에 놓인 접시와 맞바꾸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호구조사를 하고, 관심사를 캐묻고, 고해성사 하듯 살아온 지난날을 터놓았다. 시간은 빠르게도 흘렀다. 어느덧 해가 지고 하늘은 어둑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이제 막 불을 켠 색색의 네온사인으로 반짝거렸다.
정찬 코스의 마지막인 커피까지 마시고 나서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늦은 시간인데도 여전히 레스토랑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나보다 앞서 공간을 빠져나가던 그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왜요?”
“아, 내가 뭘 놓고 왔더라.”
갑작스레 뒤를 돈 그의 표정이 어쩐지 이상했다.
“가방 지금 손에 쥐고 있는데...”
“아니.”
“놓고 온 거 없는 것 같아요.”
그가 내 어깨를 붙잡고 등을 떠밀었다. 어깨에 닿은 손이 어색해 뒤를 돌아보자 그가 자꾸만 시야를 가리려는 듯 몸을 좌우로 움직였다. 그 모양새가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윤기씨 지금 좀 수상해요.”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깨에 놓인 팔을 풀었다. 뒤를 돌아 그를 앞질러 걷다가 말문이 막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리에 착석한 두 남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은색 대접에 양손을 담근 채 손을 씻던 두 사람이, 내 시선을 느낀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옆에 놓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냈다.
“윤기씨.”
“그니까 그게…….”
남자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갑작스레 방금 전 상황이 눈앞에 스쳤다. 기묘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던 직원과 헛기침을 뱉던 이 남자. 그리고 결국 나를 앞질러 물을 들이켜던 그의 모습. 다리에 힘이 쭉 풀리는 것 같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팔을 붙잡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는 껄렁한 말투로 항변하는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게 내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 직원이 계속 쌈닭을 쳐다보니까, 대놓고 말하자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식당을 빠져나와 인파 사이에 섞여 들고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레스토랑 앞은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주 선 그의 발끝에 시선이 고였다.
“윤기씨.”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울리지 않게 초조해하는 남자의 표정에 살풋 웃음이 났다.
“나 지금 기분이 이상해요.”
"내가 말을 안 하려던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와락 그를 껴안았다. 당황했는지 움찔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행동에 스스로 놀라 잽싸게 그를 밀어냈다.
"그러니까... 고맙다고요."
그가 당황한 듯 헛웃음을 짓고는 이마를 긁적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능글맞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유연애 되게 좋은 거네."
* * *
가죽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던 남준은 흘끗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1등석 손님만 드나들 수 있는 대합실에는 몇 종류의 신문과 잡지가 구비되어 있었다. 조선어로 쓰인 신문은 매일신보를 제외하고는 죄다 삼류 지라시뿐이었다. 잡지의 대부분을 할애한 기사는 당대 유명한 모던보이의 추문을 폭로했다. 남준은 저질 기사에 미간을 구겼다. 잡지를 던져놓고 대합실을 빠져나온 그는 곧장 1층으로 향했다. 때맞춰 기차가 증기를 뿜으며 다가왔다. 여섯시 삼십분, 경성역에 도착하는 부산 발 여객이었다. 이윽고 귀빈 칸에서 내린 장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준은 손에 쥔 사진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부경감이 건네준 사진 속 인물과 동일했다.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간 남준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들었다. 빳빳한 종이 위에는 이름 석자와 직함이 단출하게 적혔다. 남자가 명함을 받아들고는 누군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준은 그의 짐 가방을 받아들고는 그를 경성역 안에 있는 카페 도루췌(Dolce)로 안내했다.
직원이 커피 두 잔을 놓고 사라지자 제복 차림의 남자가 천천히 커피를 음미했다. 남준이 일본인 장교와 만난 것은 부경감의 부탁 때문이었다. 인터뷰를 핑계로 삼십 분만 그를 붙잡고 있어달라는 부경감의 다급한 요청이었다. 연이어 터진 사건이 미궁에 빠지자, 본국에서 비밀리에 장교 하나를 파견했다고 전했다. 총독부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준은 한발 앞서 상황을 간파했다. 남준이 경성역에서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 총독부에서는 사건에 대해 말이라도 맞추려는 걸 테다.
커피를 홀짝이던 남자는 먼저 남준의 유학시절에 대해 물었다. 남준은 긴장을 숨기고 자연스레 대꾸하려 애썼다.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분위기가 풀어지자 그는 곧 경성의 상황이 어떤지 캐물었다. 질문은 꽤나 날카로웠다. 어떻게 해야 조선인들이 일제의 통치에 순응할는지, 조선인의 입장에서 답해보라는 물음은 남준의 폐부를 찔렀다. 꽤 기민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남준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내 일본인 장교에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본국에서는 현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 계획인가요?”
“이미 주동자와 그 무리를 찾았다고 들었네만.”
인터뷰 내용을 기록하던 남준의 손이 느려졌다.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번 솟아난 의문은 쉽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분명 사건은 오리무중 이랬는데……. 아마도 부경감이 불안감에 급하게 둘러댄 말일 테다. 그러나 가볍게 넘기려 해도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찝찝함이 남았다. 때마침 총독부 관료하나가 카페에 들어섰다. 부경감의 심복으로 남준과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장교를 에스코트하며 카페를 빠져나갔다. 남준은 홀로 자리에 앉아 방금 전 대화를 곱씹었다.
* * *
지민은 말없이 태형의 뒤를 따랐다. 태형에게 몇 번이고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태형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숱하게 연습을 했건만 소년은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잔뜩 긴장을 집어먹었다. 안 그래도 큰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사방으로 흔들렸다. 지민은 객석 맨 뒤에 서서 그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습관처럼 손톱을 물었다. 무대의 조명은 오롯이 태형을 비추었다. 모두가 숨죽인 순간이었다. 태형은 깊게 숨을 내쉬고 침을 꼴깍 삼켰다. 이윽고 준비한 대사를 내뱉었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심사위원을 비롯 객석의 시선이 죄다 태형에게로 꽂혔다. 간신히 두어 문장을 내뱉었지만 얼마 못 가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텅 비어 버렸다. 태형은 임기응변으로 몇 마디를 더 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이미 무대에서 낙방을 예감했다. 결과는 보나 마나였다. 대회가 끝나자마자 붙은 대자보에, 역시나 태형의 이름은 없었다.
지민은 어깨를 축 늘인 채 힘없이 걷는 태형의 등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잖아. 태형아.”
걷는 내내 눈치를 보다가 간신히 뱉은 말이었다.
“나 어떻게 대사를 까먹지. 미쳤나 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음 선발 대회 때는 꼭 합격할 거야.”
“.........”
태형의 시무룩한 표정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지민은 빠르게 걸어가 태형의 앞을 막아섰다.
“오늘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너 기분 풀릴 때까지.”
한참이나 바닥을 보고 있던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오늘은 집에 갈래.”
“그래... 알겠어. 대신 절대 자책하기 없기다.”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태형이 뒤를 돌았다. 지민의 시야 가득 축 처진 소년의 뒷모습이 담겼다. 이윽고 지민 또한 전차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박지민!”
태형이 빠른 걸음으로 지민에게 다가왔다. 지민의 눈이 커졌다.
"생각해봤는데 나 이제 갑자기 하고 싶은 거 생겼어.”
“뭔데?”
“집 가자. 너네 집 가보고 싶어.”
“우리 집?”
당황한 지민이 태형에게 재차 물었다.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이 머뭇거렸다.
“나 혼자 살아서 별거 없는데…….”
“친구 사이에 뭐 어때.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준다며.”
태형의 등쌀에 못 이겨, 지민은 태형과 나란히 인력거에 탑승했다. 무대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다리가 다 풀려버렸다며 너스레를 떠는 태형에게 차마 전차를 타자고 할 수는 없었다. 인력거가 속도를 붙이자 점차 흥이 오른 태형은 두 팔을 치켜들었다. 낙방의 기억은 금세 잊은 듯했다. 태형의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날렸다. 지민은 그 모습을 보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 쉴 때는 언제고 이렇게 신이 난 모습이라니.
인력거는 황금정을 지나 종로를 향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지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머릿속으로는 초조하게 제 단칸방 안을 그려나갔다. 연식이 오래된 소총은 장롱 안 누비이불 사이에 숨겨두었고, 일본 고위 인사들의 얼굴을 모아둔 신문 더미는 책상 서랍 안쪽에 있을 테다. 태형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의심을 살만한 어떤 것도 눈에 띄어선 안 되었다. 하나둘 곱씹던 지민의 심장이 갑작스레 빠르게 뛰었다. 태형의 사진. 제물포 항으로 향하던 날, 석진이 제게 건넨 태형의 사진이 떠오른 탓이다. 책상 위에 뒀었나. 아니, 형의 사진 옆에 나란히 놓아두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민은 초조한 듯 입술을 물었다.
늘어선 자동차를 피해 잠시 주행을 멈춘 인력거꾼은 목에 두른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태형은 대로변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지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인력거 앞으로 일본군 무리가 걸어갔다. 지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 긴장감에 손끝이 떨려오는 바람에 등 뒤로 제 손을 숨기는 지민이었다. 그때였다.
“어?”
태형이 놀란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앞을 지나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멈췄다. 일본군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로 연행되는 중이었다. 소년의 얼굴이 앳되었다. 지민은 그 불편한 장면에 미간을 구겼다. 분노와 불안이 뒤섞인 감정이 지민을 잠식했다.
“나 저 사람 봤는데?”
태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누구?”
대답을 하면서도 지민의 눈길은 여전히 끌려가는 소년을 따랐다. 태형이 답했다.
“저기 저 교복 입고 끌려가는 사람. 오늘 낮에 봤어. 신문사 앞에서 편집장님이랑 얘기하는 거.”
From. 스페스 |
안녕하세요 스페스입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기다려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정성스레 달아주시는 응원의 댓글들 늘 잘 보고 있어요. 빈말 아니고, 정말로 읽을 때마다 힘이 돼요. 아! 암호닉은 계속 받아요! 제가 너무 오랜만에 온 탓에 예전 암호닉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분들도 많이 계셔서 한 번 공지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그때까지는 가장 최신화에 댓글로 신청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다음화에서 뵙겠습니다. |